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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두 행렬 (눅 7: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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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행렬 (눅 7:11~17)
  

“다 감사드리세 온 맘을 주께 바쳐, 그 섭리 놀라와 온 세상 기뻐하네.”라는 찬송가 66장은 마틴 링카르트 목사가 작사한 찬송가입니다. 

링카르트 목사는 1648년까지 이어진 ‘20년 전쟁’을 겪은 독일 목사입니다. 
전쟁과 전염병 콜레라 때문에 그 목사님이 목회하는 지역에서만 8천명이나 죽었습니다. 
교우들도 쓰러졌습니다. 
그의 외아들도 쓰러졌습니다.
고난은 깊어져만 갑니다. 

링카르트 목사는 주민들을 격려하며 전쟁의 폐허와 전염병과 싸웠습니다. 
날마다 땀을 흘리며 함께 일하는 동안에 생각지도 않았던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비극 가운데서도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불화하던 사람들이 눈물로 악수를 하고, 방종하던 청년들이 부지런해지고, 냉랭하던 부부들이 다시 결합되고, 낡고 우중충한 예배당을 헐고 새로 짓자는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 때 지은 시가 바로 찬송가 66장입니다. 
링카르트 목사는, 가시속의 장미꽃이 더 아름답고, 칠흑 같은 어둠 속의 별들이 더 황홀하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렇지요? 
고난이 심하면 심할수록 하나님의 은혜는 더 구체적으로, 더 강렬하게 체험됨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다 감사드리세 온 맘을 주께 바쳐 그 섭리 놀라와 온 세상 기뻐하네. 예부터 주신 복 한없는 그 사랑 선물로 주시네. 이제와 영원히!”

본문의 사건은 ‘나인성’이라는 곳에서 일어났습니다. 
‘나인’이란 ‘사랑스럽다, 즐겁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주 좋은 이름입니다. 
이 나인성은 가버나움으로부터 서남쪽으로 약 40Km 떨어져 있는 ‘모레산’ 기슭에 있는 작은 마을입니다. 

이곳에서는 아름다운 이스르엘 평원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데, 아마 그 이유 때문에 ‘사랑스럽다’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 같습니다. 
이 ‘사랑스러운 마을’에 두 행렬이 지나갑니다. 
한 행렬은 주검을 메고 나오는 죽음의 행렬입니다. 

12절 “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그 어미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한국의 장례식 행렬을 보면 꽃상여를 메고 갑니다. 

그러나 중동지역은 대부분 관 그대로, 그것도 관 두껑을 닫지 않고 몇 사람이 어깨로 메고 갑니다. 
이집트에서도 가끔씩 장례 행렬을 보면 관 그대로 메고 가고, 그 뒤로 검은 옷을 입은 여자들이 울면서 따라갑니다. 
아마 오늘 본문에 나오는 장례행렬도 그와 비슷했을 것입니다.

그 죽은 사람은 과부의 외아들이었습니다. 
‘한 사람이 죽었다’라는 그 죽음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슬픈 일입니다. 
그런데 ‘과부의 외아들이 죽었다’는 것은 인생살이의 모든 비극을 한데 뭉쳐놓은 것 같은 느낌을 받게 합니다. 
남편 없이 아들 하나만을 의지해 살아가는 과부에게 있어서 그 외아들은 삶의 희망이요, 꿈이요, 기쁨입니다. 

그 아들의 죽음으로 어머니는 살아갈 이유를, 살아갈 희망을 송두리째 잃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 외아들의 죽음에는 아들의 죽음과 어머니의 절망이 겹쳐진 비극 그 자체입니다. 
그래서 그 행렬은 슬픔의 행렬이었습니다. 
절망의 행렬이었습니다. 
한숨과 눈물의 행렬이었습니다.

또 다른 행렬이 나인성에 들어옵니다.
11절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 새 제자와 허다한 무리가 동행하더니”
예수님의 행렬은 생명의 행렬이었습니다. 
본문 바로 전에 예수님은 가비나움에서 병들어 죽어가는 백부장의 종을 고친 생명의 사건이 나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행렬은 사기가 충천하여 활기가 넘치는 힘찬 행렬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제자들과 무리들의 얼굴 표정과 분위기를 상상해봅니다. 
기쁨과 즐거움으로 얼굴은 상기되었고, 왁자지껄 가버나움에서 일어났던 놀라운 사건을 앞다퉈가면서 간증했을 것입니다. 

“너 봤지? 나도 봤어!”
“세상에 그런 일이 다 일어나다니…. 놀라운 일이야!”
“죽어가는 사람을 살렸는데 무슨 일인들 못하실까….”
아마 이런 이야기들이 오고갔을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이 기적사건을 중심으로 몇 가지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당신은 어느 행렬에 서 있는가?’

주검을 메고 가는 죽음의 행렬에도, 예수님을 모신 생명의 행렬에도 많은 사람이 뒤따랐습니다. 
그 무리들 중에, 우리 자신의 그림자는 어느 쪽에 드리워져 있습니까?
한때는 즐겁고 재미있는 길이었지만 지나고 나면 이내 슬프고 씁쓰레한 길이 있습니다. 
인생에는 성공 같은 실패의 대열이 있고, 실패 같은 성공의 대열이 있습니다.

신 4:4절에는 아주 재미있고 인상적인 구절이 있습니다.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붙어 떠나지 않은 너희는 오늘까지 다 생존하였느니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붙어 떠나지 않은 사람들! 
이 말씀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바알브올 사건을 회상하면서 강조한 인상적인 말씀입니다.(민 21-24장) 

이스라엘 백성 앞에 두 길이 있었습니다. 
한 길에는 육체의 욕망을 채우며 즐길 수 있는 모압의 여자들, 마음껏 먹고 마실 수 있는 술과 음식이 있었습니다. 
많은 이스라엘의 젊은이들이 이 즐겁고 재미있는 길을 따라갔습니다. 
또 다른 길에는 마실 물도 먹을 음식도 시원치 않았습니다. 
욕망을 채우는 것은 고사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부담감만 더해갑니다. 

그 길을 가는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달랐습니다. 
한때의 즐거움과 재미를 찾아갔던 사람들은 24,000명이나 죽음을 맛보았습니다. 
하나님께 붙어 떠나지 않은 사람은 오늘까지 다 생존했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두 길 중에서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기준은 무엇이었습니까? 
그 기준은 “하나님 여호와께 붙어 있느냐?”입니다.
오늘 우리말로 표현하면, “예수님께 붙어 있느냐?”입니다.

부산외대에 다니는 한 자매가 단기선교의 꿈을 가지고 메일을 보내왔습니다.
그 글에는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기도 부탁드립니다. 하나님의 한 분만이 내 삶의 전부가 되기를, 아버지의 음성에 민감하여 그분의 뜻을 아는 자 되기를, 내가 날마다 죽어지기를”

케냐에 파송된 김연경 선교사님도 어제 선교보고서를 보내왔습니다.
그의 글에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가장 잘 무릎을 꿇는 이가 가장 훌륭히 서는 자요, 
가장 연약하게 무릎을 꿇는 이가 가장 강하게 서는 자요,
가장 오래 무릎을 꿇는 이가 가장 오래 서는 자이다.” 할렐루야.
둘 다 하나님께 붙어있고자 하는 갈망의 표현입니다.

두 행렬은 비단 2천 년 전 나인성 근처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늘날 이 세상 모든 곳에도 있습니다.
아니, 이 세상 모든 사람은 다 생명의 행렬이나 죽음의 행렬 중 한 편에 속해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걷는 길은 실패 같으나 성공의 길이요, 죽음 같으나 생명의 길입니다.

2. ‘울지 마라’

이제 예수님의 행렬과 죽음의 행렬이 마주칩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행렬을 멈췄습니다. 
13절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여기서 ‘불쌍히 여기셨다.’는 희랍어는 ‘스프랑크니조마이’라는 말인데, ‘창자가 뒤틀린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말로는 뭐라고 표현할까요? 
‘가슴앓이를 하다.’라고 표현해야 할까요?
이런 표현을 통하여 우리는 예수님이 이 과부의 슬픔에 얼마나 깊이 동참하고 있는지 알게 됩니다. 
주님은 고달픈 삶을 살아온 한 여인이 자신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독자를 잃은 슬픔을 뼛속 깊이 통감하시고 계셨던 것입니다.

저는 설교를 준비하면서 이 본문을 몇 번이나 읽고 묵상했습니다. 
그런데 N. E. B의 번역을 읽으면서 가슴에 꽉 차오르는 감동을 받았습니다. 
‘울지 말라’는 말씀을 뭐라고 번역했는가 하면, “Weep no more!"라고 했습니다. 
“더 이상 울지 마시오!”

‘그렇지, 주님을 만나면 더 이상 울 필요가 없지.......’
성도 여러분! 주님을 만나면 더 이상 울 필요가 없답니다. 
Weep no more! 
이 말씀을 발견하고 거의 하루 종일 ‘Weep no more!’, 차를 타고 갈 때도 ‘Weep no more!’를 외치면 혼자 감격했습니다.

얼마나 감사하던지요!
아직 죽은 아들이 살아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더 이상 울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분명히 믿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상황을 바꾸셔서 우리의 눈물을 씻기든지, 또는 그 상황이 변할 수 없는 하나님의 뜻이라면 견딜 수 있고 받아드릴 수 있는 마음을 주셔서 우리의 눈물을 씻기십니다. 
주님은 그의 자녀들의 눈에 흐르는 눈물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은 저의 간증입니다.

우리 눈에서 나오는 눈물이 회개의 눈물이든지, 간구의 눈물이든지 주님은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성도 여러분, 자녀들을 키울 때 경험하셨잖아요?
아이들이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학교를 가면 부모는 하루 종일 마음이 짠하고, 일이 손에 잡히지 않잖아요?
주님의 마음이 바로 그 마음입니다.

그래서 이런 이적을 체험한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눅 7:16)고 찬양했습니다.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라는 말씀은, 의사가 환자를 진단할 때처럼 자세하게, 찬찬히 물어보고 관심을 가지는 것을 뜻합니다. 
“소화는 잘 되십니까? 변은 좋으십니까? 배의 어느 부분이 아프십니까? 언제부터 아프셨습니까? 먹고 있는 약은 없으십니까? 혀 좀 내밀어보세요.” 

두드려보기도 하고, 눌러 보기도 하고, 청진기를 대 보기도 하고, 눈꺼풀을 뒤집어 보기도 하고…. 
주님은 우리를 이렇게 돌보십니다. 
그래서 주님을 만난 사람들은 “이제, 눈물은 끝!”이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남편 없이 외아들만 의지하고 살아오던 과부, 그 아들마저 눈물 젖은 가슴 속에 묻고 절망에 싸인 채 장지로 향하던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 웃음과 기쁨의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복음성가-왜 슬퍼하느냐
왜 슬퍼하느냐 왜 걱정하느냐 무얼 두려워하느냐 아무 염려 말아라.
큰 어려움에도 큰 아픔 있어도 이젠 아무 걱정 하지마 내가 널 붙들어주리.
내가 너와 항상 함께 하리라 내가 너를 지키리라 
실망치 말고 나를 보아라 나는 너의 하나님이라.

3. ‘일어나라’

14절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세 번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일, 눅 8:40절 이하에 나와 있는 회당장 야이로의 12살 된 외동딸을 살리신 일 그리고 요 11:17절 이하에 나와 있는 마리아의 오라버니 나사로를 살리신 일입니다. 

이런 기적을 목격한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 “두려워했다”, “놀라고 놀랐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했습니다. 
두렵고 놀랄만한 일이지요! 
죽은 자를 살리는 일을 유사 이래 언제 어디서 보았겠습니까? 
오직 예수! 예수님을 통해서만 일어날 수 있는 기적이지요! 

여기에 본문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누가복음이 죽은 자를 살리신 사건을 이렇게 소개한 이유는, 예수님은 죄로 죽은 인류를 살리시는 구세주이심을 증언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인간에게 가장 근본적인 문제인 죽음까지도 다스리는 그리소도이십니다.

우리는 여기서 역설적인 진리 하나를 발견합니다. 
청년의 죽음은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을 드러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계기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참으로 역설적입니다. 
우리가 처한 곤경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지난 주 사업하시는 한 분과 대화를 나누는 중에 그 분이 뭐라고 말씀하시느냐 하면, “risk의 부담이 많으면 그 만큼 profit도 많습니다.” 
즉 위험부담이 많으면 그 만큼 수익도 많다는 말입니다. 
위험부담이 적으면 누구나 투자하니까 그만큼 수익도 시원치 않다는 말이지요. 
이것은 기본적인 경제 원리입니다.

청년의 죽음은 너무나 큰 risk입니다. 
그러나 결과론적이지만 청년의 죽음이란 risk는 에수님을 만남으로 그의 메시아 되심을 확연히 드러내고, 하나님께 더 큰 영광을 올려드리는 너무나 큰 profit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믿는 우리는 기대할 수 있습니다. 
고난이 심하면 심할수록 하나님의 은혜는 더 크게 임함을! 
고난이 심하면 심할수록 하나님의 은혜를 더 크게 체험할 수 있음을! 
고난이 심하면 심할수록 하나님의 은혜를 더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음을!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우리는 이 외아들을 살리는 기적 사건을 살펴보면서, 
㉠ 어느 행렬에 서 있는지 자문해 봤습니다. 
예수님 편에 서서 그 분의 말씀에 민감하고, 그 분의 뜻에 민감한 교우들이 되길 축원합니다.

㉡ ‘이제 더 이상 울지 말라.’ 
그렇습니다. 
주님을 만나면 더 이상 울지 않아도 됩니다.

㉢ “일어나라.” 고난이 심할수록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더 크게, 더 구체적으로 더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음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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