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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세례 요한의 죽음 (막 6: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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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 요한의 죽음  (막 6:14~20)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것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늘 염려합니다. 어떤 학교를 가야 할까 어떤 직업을 택할까 또한 어떤 배우자를 만날까 계속해서 걱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시름 놓았다 싶으면 이제는 자녀 교육을 어떻게 시킬까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단 한 순간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잘 사는 것에 대해서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것은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잘 사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바로 어떻게 죽느냐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잘 사는 것보다 잘 죽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 말씀은 세례 요한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는 질병이나 사고로 죽은 것이 아닙니다. 그는 헤롯 왕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는 참으로 억울하게 죽었을 뿐 아니라 매우 비참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세례 요한이 활동하던 때의 왕은 헤롯이었습니다. 그는 동생 빌립의 아내였던 헤로디아와 결혼하기 위해서 본처와 이혼했습니다. 

헤로디아 역시 자신의 남편과 이혼하고 헤롯과 재혼했습니다. 상당히 복잡한 집안입니다. 사실 옛 왕실은 어디나 이런 일들이 드물지 않았습니다. 하여간 헤롯의 재혼을 놓고서 말들이 많았지만 왕족에 얽힌 일이기 때문에 누구도 대놓고 비판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세례 요한이 헤롯의 잘못을 공개적으로 책망했습니다.
그러자 헤롯은 그를 감옥에 가뒀습니다. 여기까지는 대충 어디서나 있을 만한 일입니다. 그런데 상황이 한 여자 때문에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헤로디아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오히려 한을 품었습니다. 본문 19절 말씀에 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헤로디아가 요한을 원수로 여겨 죽이고자 하였으되..."
헤로디아는 세례 요한을 처치할 기회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헤롯 왕의 생일 잔치 자리에서 헤로디아의 딸이 춤을 추어 모인 사람들을 기쁘게 해 주었습니다.
헤롯이 그녀에게 소원을 묻자 자기 어머니 헤로디아의 청을 그대로 전했습니다. 세례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서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헤롯은 그 말을 듣고 심히 근심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내뱉은 말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헤롯은 경비병을 시켜서 세례 요한의 목을 베어 오게 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영웅이 참으로 어처구니없이 죽고 말았습니다. 어찌 보면 이런 것이 인간의 역사인지 모르겠습니다. 극히 사소한 일이 엄청난 화를 불러왔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 기자는 왜 세례 요한의 죽음을 이렇게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습니까?
그 까닭은 그의 죽음이 예수님의 죽음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죽음은 무죄한 이의 고난이라는 주제와 연결됩니다.

'의인이 왜 이 세상에서 고난을 당해야 하는가?'하는 질문은 성경이 일관되게 묻고 있는 질문입니다. 가인에게 살해당한 아벨이 대표적인 경우일 것입니다. 선지자 엘리야도 아합과 이세벨에게 심한 고난을 당했습니다. 욥기의 주제도 역시 의로운 자의 고난입니다. 

세례 요한은 바로 이런 전통에 서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특히 예수님은 하나님을 모독하고 민중을 선동했다는 죄목으로 십자가 처형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의로운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모독하신 것이 아니라 바르게 선포하신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민중을 선동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고난에 동참하셨을 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당시 가장 저주스러운 사형 도구인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지금 마가복음 기자는 그 당시 위대한 예언자, 의로운 사람 세례 요한의 죽음을 통해서 예수님의 죽음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의로운 사람이 그렇게 고난을 받고 죽는다고 말입니다. 물론 모든 의로운 사람이 그렇게 죽는다거나 고난을 받는 사람은 누구나 의인이라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상식적으로 볼 때 의로운 사람은 존경을 받아야 마땅한데 세상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좀 더 엄밀하게 본다면 불의한 세상은 의로운 사람을 싫어할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로움은 세상이 거부한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세례 요한의 의로움이 역사가 흐른 후 인정받았듯이, 십자가 처형을 당하신 예수님이 부활의 생명을 통해서 인간 구원의 중심이 되셨듯이, 하나님의 의로움은 인간의 불의를 뛰어넘습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바로 그런 사실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세례 요한의 죽음이 인간의 눈으로 볼 때에는 실패한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사명을 온전히 이룬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은 그가 이 땅에 온 목적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1장 2절, 3절 말씀입니다.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이 바로 그를 가리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길 자체가 아니라 그 길을 준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빛 자체가 아니라 빛을 증언한 사람이었습니다. 인간의 행복은 삶의 목적 성취 여부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히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는 불행한 삶을 살다가 죽은 것처럼 보입니다. 예루살렘이 아닌 변두리 광야에서 살았고 젊은 나이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삶의 목적을 다 성취했기 때문에 그 누구보다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를 봐도 잘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일찍이 주님은 아나니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도행전 9장 15절 말씀입니다.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훗날 그는 자기를 잡아 죽이려는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을 향해서 올라가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도행전 20장 23절, 24절 말씀입니다.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어떻게 그런 고백을 할 수 있었습니까? 삶의 목적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프리카 어느 병원에 한 흑인 아주머니가 입원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창밖을 보니 어떤 백인 노인이 밭에서 열심히 밀을 밟고 있었습니다. 자세히 보니 원장인 슈바이처 박사였습니다. 의사요 목사요 음악가요 철학자인 그가 아침부터 자기들이 할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물었습니다.
"왜 이렇게 궂은 일을 하십니까?"
그가 대답했습니다.

"내게 맡겨진 일이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고 또 해야 할 일이니까요."
옆에 있는 사람이 또 물었습니다.
"선생님은 왜 아프리카에 오셨습니까?"
그러자 그가 대답했습니다.
"말로는 누구도 감동시킬 수 없기 때문에 행동으로 그리스도를 나타내려는 것이지요."
오늘 우리의 삶의 목적은 과연 무엇입니까? 주님으로부터 받은 우리의 사명은 과연 무엇이냐는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이나 삶의 목적에 대해서 별로 관심을 쏟지 않습니다.
먹고 살기 바빠서 그런 것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기 때문이라는 핑계를 대면서...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사람들은 끝없이 하늘로 뻗쳐 있는 욕망의 사다리를 오르고 싶어 할 뿐입니다. 그러나 그 사다리의 꼭대기에는 오르기 쉽지 않을 뿐 아니라 설령 올랐다 할지라도 더 올라가려고 몸부림을 치게 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좀 달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현재의 삶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성취되든지 않든지 너무 연연하지 말아야 합니다. 절대적인 성공이나 성취는 오직 하나님께 속한 것이지 사람들이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현재 우리의 삶이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성취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실 미래의 참 생명의 세계에 희망을 두는 태도가 올바른 신앙의 자세가 아니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기는 일까지 성공과 실패라는 세속적인 기준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삶의 모든 부분이 세상에서 인정받는 성공 중심주의에 사로잡혀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기준으로 볼 때 세례 요한은 실패한 인생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도 역시 완전한 실패로 간주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갖고 있는 성공과 실패의 기준은 그렇게 정확한 것이 아닙니다. 

때문에 실패했다고 해서 결코 좌절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성공했다고 해서 지나치게 자랑할 것도 없습니다. 궁극적인 성공과 실패는 장차 하나님 앞에서 판가름날 것이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으로 사는 사람은 현재 당하는 고난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현재의 부와 명예에 집착하지도 않습니다. 누군가 말했습니다.
"세상을 두려워하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때문에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옳고 그름을 잘 분별할 수 있게 해 주시고 분별한 바에 따라서 용기 있게 응답하며 살 수 있게 해 주옵소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과연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죽어야 하겠습니까? 세례 요한의 죽음과 예수님의 죽음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의로운 사람은 고난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간혹 의로운 사람이 현재의 역사에서 인정받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그것은 일반적인 경우가 아닙니다. 왜냐 하면 세상은 하나님의 의를 별로 반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는 세상이 거부한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먼저 구원받은 우리의 삶의 목적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구원의 주님은 우리에게 귀한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명을 감당함에 있어서 필연적으로 고난이 따른다는 사실도 알아야 합니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두려워할 까닭이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달게 지고 주님의 뒤를 끝까지 뒤따름으로써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충성스러운 주님의 제자들이 다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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