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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뜻이…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마 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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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이…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마 6:10)
 
 
하나님의 나라는 그분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만큼 자라갑니다. 오늘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짐에 관하여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성경은 제비뽑는 일도 하나님의 작정하심으로 말미암고(잠 16:33),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서는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합니다(마 10:29).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한 일도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막 14:21). 이런 뜻을 하나님의 ‘작정적 의지’(decretive will)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어떤 사소한 일이나 사악한 일도 우연일 수 없고 하나님의 작정적인 의지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주기도문이 하나님의 작정적인 뜻이 이루어지도록 간구하는데 초점이 있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욥기는 하나님의 작정하신 뜻에 대해서는 인간이 그 의미를 다 헤아릴 수가 없음을 가르쳐줍니다. 욥은 자신에게 불행을 허용하신 하나님의 작정적인 뜻을 간절히 알고 싶어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뜻을 계시해주시는 대신 욥에게 ‘…을 아느냐?’와 ‘…을 할 수 있느냐?’를 반복해서 물으셨습니다. 

질문이 반복되면서 욥은 자신의 철저한 무지와 무능을 깨닫게 됩니다. 그제야 하나님께서 행하신 모든 일에 담긴 뜻을 기필코 알아내려는 어리석음을 회개합니다. 욥은 끝내 하나님의 작정하신 뜻을 모르지만, 능력과 지혜로 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욥기가 끝납니다.

지금도 이 세상과 성도들의 삶에 닥친 일들 중에는 도무지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많습니다. ‘하나님 왜 …입니까?’하고 기도해도 분명한 대답을 얻을 수 없는 것들이 많지요.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뜻은 인간에게 많은 부분이 감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는 달리 명백히 계시하신 뜻을 ‘교훈(명령)적 의지’(preceptive will)라 합니다. 예를 들면, 아담이 선악과를 먹는 것은 하나님의 작정적인 의지였고 선악과를 먹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교훈적인 의지였습니다(창 2:17).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한다는 말은 교훈적 의지를 의미합니다.

아담의 범죄 이후 모든 인간은 하나님께서 교훈하신 뜻 대신 자기 뜻대로 살려는 경향을 타고납니다. 노아의 가정 외에는 모두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게 살았고, 바벨탑에서는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의 뜻에 대항하는 삶을 살았습니다(창 6, 11장).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선택하시고 그를 통해 이스라엘 민족을 이루셨지만 그들 중에서도 ‘남은 자’라고 불리는 소수의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뜻대로 행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뜻이 언제나 소수의 선택된 자들에 의해서 부분적으로 순종되었음을 보여줍니다. 교회사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런 현상은 변함이 없습니다.

한동안 세상이 교회를 즐겁게 찾았던 까닭은 교회 속에서도 너무나 친숙한 세상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제 세상이 교회를 비판하는 까닭은 교회가 세상보다 더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상식으로도 용납되지 않는 일들이 교회에서는 버젓이 허용되고 있기 때문이지요. 세상을 변화시키려고 문턱을 낮추었던 교회는 세상에 의해 변질되었습니다. 세상은 더 이상 몰지각한 소수의 교인과 소수의 목사를 비판하지 않습니다. 대다수가 부패했다고 평가합니다. 소수 때문에 다수가 욕을 먹는다는 변명은 자기성찰이 부족한 자만심에 불과한 현실이 되었지요.

이런 현실 속에서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기도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뜻대로 살도록 도전하는 일보다, 교회가 먼저 하나님의 뜻대로 살도록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는 일일 것입니다(고전 9:27). 전도와 선교가 중요하지만 지금은 교회의 내적 정화에 보다 힘써야할 때라고 생각됩니다. 세상이 교회를 볼 때에 참으로 하나님께서 통치하고 계시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두려운 마음으로 발견할 수 있도록 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성도는 땅에 잠식되어가고 있는 교회로부터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부패한 교회 현실을 지적하고 비판하는 일은 더 이상 어렵지 않습니다. 부패한 교회 속에 ‘남은 자’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 가도록 신실하게 기도하는 일이 어렵지요. 자신의 삶에서부터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도록 살아가는 일이 어렵습니다. 그 어려운 일을 누가 시작해야 할까요. “뜻이 …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는 사람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하겠지요. 진실한 마음으로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애절하게 갈망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삶에서부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모습이 되도록 애쓰는 것이 마땅하겠지요.

첫째로 애쓸 부분은 능력이 되는 한 하나님의 뜻을 옳게 분변하도록 장성해 가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감추신 작정적인 뜻까지 낱낱이 헤아리리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런 일에 대한 과도한 호기심은 마땅치 않습니다. 욥기는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작정적인 뜻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교훈적인 뜻임을 가르쳐줍니다. 또한 당면한 사소한 문제에서보다 성경에 명백히 나타난 하나님의 큰 뜻부터 알아가야 합니다. 이런 수고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하여 미혹하는 자들의 각종 꼬임에서 벗어나게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숙해 가는 일에 밑거름이 됩니다(딤후 3:16-17).

교회사를 보면 성경 해석을 이상하게 해서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는 일이 허다합니다. 정통 교리는 그런 일들로부터 교회를 지키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따라서 교리를 무시하고 오직 성경만 본다는 말은 매우 신앙적인 것 같지만 대단히 오만하고 위험한 발상입니다.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을 위해 주제별로 전체 성경(tota scriptura)의 입장을 잘 정리한 것이 정통교리이기 때문입니다. 정통교리는 탁월한 한 두 사람의 작품이 아니라 오랜 역사 속에서 교회의 보호를 위해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이 작용하여 이루어진 일입니다. 그 모든 것을 무시한다면 독단과 아집에 빠지기 쉽습니다.

성경의 최종 권위를 인정할지라도 건전한 교리에 기초하지 않을 때 하나님의 뜻은 각자 주관적으로 해석되겠지요.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서 편법과 불법을 마다하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후천성 도덕 결핍증에 걸린 사람들은 아닙니다. 주관적으로 해석하면 대부분의 정치인들이 국민을 위해서 정치하면 대부분의 종교인들도 하나님의 뜻을 위해 헌신합니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해석하면 그 뒤에 명예욕과 성취욕이 감추어져 있음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류가 전혀 없는 완벽한 교리가 없다할 지라도 건전하다고 인정하는 교리에 비추어보고 충실하려는 노력은 성경을 보다 바르게 해석해서 하나님의 뜻을 옳게 분변하는 일에 큰 도움이 됩니다.

둘째로 애써야 할 일은 각자 자신의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께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사는 일입니다. 많은 숫자나 힘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방식은 신바람 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세상의 방식일 뿐 하나님의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힘을 내려놓으시고 섬기셨습니다. 

기적을 바라며 찾아오는 무리들을 피하셨고(막 1:38), 생명의 말씀대신 썩는 양식에 관심을 둔 수많은 추종자들의 잘못된 태도를 지적하셨습니다(요 6:26-27, 66). 기적이든 썩는 양식이든 모든 미끼를 동원해서라도 일단 사람을 모은 후에 하나님의 일을 해보겠다는 생각과 너무나 차이가 있지요.

교회사를 보면 참으로 순수한 열정을 가졌으나 사악한 일들에 이용당했던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동기의 순수성과 바른 목적만을 점검했기 때문에 속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자는 것보다 순수한 열정에 불을 붙이는 것도 없겠지요. 하지만 과정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지를 확인하지 않으면 순수한 열정도 변질됩니다. 목적 달성이라는 결과에 집착하면 초심을 잃게 되지요. 그러므로 성도는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고 현재의 삶의 과정에 무게 중심을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삶의 과정을 지속하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한다면 가증한 일일 것입니다.

삶의 과정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일은 화려하지도 않고 겉으로 잘 드러나지도 않습니다. 홀로 오랫동안 걸어도 알아주는 이가 적어 외롭습니다. 듣는 반응이 시원찮은데도 말씀을 바르게 선포하는 일을 지속한다는 것은 목사에게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일단은 청중의 요구에 맞춰주고 싶어집니다. 

하지만 이사야를 보십시오. 그가 하나님께 받은 사명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의 완고함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일이었습니다(사 6:9-10). 그는 좋은 반응을 전혀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했습니다. 누가 그런 일에 쓰임 받고 싶겠습니까마는 그에게는 신실하게 말씀을 계속 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각자의 은사와 재능에 따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각종 영역에 당신님의 백성들을 파송하여 세우셨습니다. 성도는 각자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 뜻이 자신을 통해 실현되어지도록 기도하며 순종해야 합니다. 주부도 가정의 총무로 파송을 받았습니다. 

주부가 가정에 두신 하나님의 뜻과 가정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일에 무관심하다면 그 가정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어떤 다른 방법이 있을까요? 없지요.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각자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때 하나님의 나라가 예배당에만이 아니라 각자가 처한 삶의 현장에도 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 유무에 따라 하나님께서 더 능력 있게 되시거나 능력이 감소되는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성도의 불순종과 타락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성취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분께서는 성도의 기도를 통해서 당신님의 뜻을 이루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의 뜻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그리고 성도의 순종과 함께 동시발생으로 작용하여 이루어지도록 섭리하십니다. 이는 그분의 뜻이 성취되는 영광스러운 일에 당신님의 자녀들도 참여하게 하시려는 아버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먼저 성도가 자신과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순종함으로써 임하게 됩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내 삶에서 먼저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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