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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밀레도의 작별 (행 20:17~24) - 소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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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도의 작별 (행 20:17~24)


지난 주일에도 저는 김밥 이야기로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오늘도 김밥 이야기로 시작하고자 합니다. 김밥 나라에서 달리기 대회가 열렸습니다. 온갖 종류의 김밥들이 출전하여 저마다 최선을 다해 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공통점들은 대부분 직선으로 곧게 달리는 김밥들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옆구리가 터진 김밥들은 좌우로 갈지자를 그리며 삐딱하게 달리고 있었고, 앞부분이 무거운 김밥들은 머리를 숙이고 헐떡이며 달리고 있었고, 뒷부분이 무거운 김밥들은 머리를 하늘로 젖히고 위험천만하게 금방이라도 자빠질 듯 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직 한 종류의 김밥만이 빠르지는 않았지만 반듯하고 일관성있게 품위를 지키고 달리고 있었습니다. 무슨 김밥일까요? 예, <양반 김>입니다. 주님의 사역을 하는 이들을 보아도 이렇게 반듯하게 품위를 지키며 일관성 있게 평생을 달리는 사역자들은 많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외가 있다면 바울 사도입니다. 그는 도대체 어떤 심정으로 어디에 사역의 초점을 두고 사역을 감당했을까요? 우리가 목회 사역자이든 평신도 사역자이든 바울은 우리의 최선의 모범이 될 수 있는 모델 사역자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바울은 평생 그의 선교 여행을 통해서 교회들을 개척하고 설립했다는 의미에서 목회 사역자의 모델일수도 있지만, 또한 그는 텐트 메이킹이란 직업을 유지하며 선교를 했다는 의미에서 평신도 자비량 사역자의 롤(Role) 모델이기도 합니다. 

바울의 제3차 선교여행은 계속됩니다. 그는 에베소에서의 3년 사역으로 아시아 복음화의 기초를 놓은 후 다시 마게도냐를 거쳐 헬라 곧 그리스로 여행을 합니다. 그리고 그는 다시 마게도냐를 거쳐 돌아오는 여정을 선택하며 배를 타고 에베소 근처 밀레도에 도착합니다.(제3차 전도여행 지도) 

밀레도는 터키 지역 마이안테르강 하구의 라트미안(Latmian)만 남쪽 해변에 위치한 도시로 에베소에서 멀지 않습니다.(남으로 65km) 바울 사도는 시간을 절약하여 오순절 전에 예루살렘을 방문하고자 그가 에베소를 방문하는 대신 3년간 사역했던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밀레도로 초청하여 거기서 마지막 작별인사와 마지막 부탁을 하고자 한 것입니다. 

바울은 아마도 그들을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라는 예감으로 비장한 심정으로 그의 에베소 사역을 회고하며 그가 지난 3년간 몸담아 헌신한 에베소 사역의 본질이 무엇이었는가를 그들에게 고백합니다. 본문 17-18절을 보십시오.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18)오매 그들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바니”자, 그러면 바울 사도의 에베소 사역의 본질은 무엇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1. 소명의 사역입니다.

바울 사도의 회심이후의 일생-한마디로 말하면 소명을 이루기 위한 사역의 생애였다고 할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의 3년 에베소 사역의 본질도 그것입니다. 소명의 사역을 이루기 위한 3년 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방에서 걷은 연보를 예루살렘에 전달하고 또한 마지막 예루살렘 사역을 감당하고자 그 길을 가고자 결심하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본문 23-24절을 읽어 보십시오.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24)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자, 여기 바울 사도는 그가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이 무엇이라고 고백합니까? 내가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이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바울 사도는 동일한 그 복음을 에베소에서도 3년간 증언했다고 말합니다.

다시 본문 20-21절을 읽어 보십시오.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21)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 

그렇습니다. 복음은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 대한 회개 곧 하나님 앞에서 지은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내 인생을 돌이키는 것-그것이 죄 문제에 대한 유일한 처방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그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고 새 인생을 사는 유일한 해답이기 때문입니다. 이 은혜의 복음 없이 구원이 없고 이 은혜의 복음을 수용하지 않고 참으로 개인도 민족도 새로워 질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이것이 바로 자신의 인생의 위대한 소명이라고 믿은 것입니다. 

오스 기니스라는 기독교 사상가는 그의 명저 <소명>에서 소명의 역동성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소명의 특성과 목적은 가장 귀가 멀고 둔감한 자를 제외한 모든 이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그 마음과 영혼을 전율케 한다. 그리고 나의 소명은 내 삶의 나침반이 될 것이며 밤에 꾸는 꿈이 아니라 한 낮에 꾸는 소명을 가지고 살아갈 것이다.” 그는 같은 책에서 밤에 꾸는 꿈과 낮에 꾸는 꿈의 차이를 로렌스(Lawrence)라는 사람의 말을 빌려 이렇게 인용합니다. 

“모든 사람은 꿈을 꾸지만 똑같은 꿈을 꾸는 것은 아니다. 밤에 먼지 쌓인 마음의 한 구석에서 꿈을 꾸는 자는 아침에 일어나면 그것이 헛된 꿈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한 낮에 꿈꾸는 사람은 위험한 사람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두 눈을 크게 뜬채 그 꿈이 이루어지도록 실제로 행동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내가 바로 그렇게 행동했다” 

바울도 바로 그렇게 소명을 따라 낮에 꿈을 꾸는 사람이었고 그는 실제로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복음을 들고 그의 세상을 세 차례에 걸쳐 여행했고 이제고 그 꿈과 소명을 따라 위험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으로 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2. 희생의 사역입니다.

모든 위대한 꿈, 위대한 소명은 희생 없이 성취된 것이 없습니다. 바울 사도도 그의 소명을 성취하기 위해 희생의 값을 지불해야 했습니다. 본문 19절 시작에 그는 자신의 희생의 경험을 한마디로 <모든 겸손과 눈물>이라고 고백합니다. 복음의 소명을 위해 또는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 그는 끊임없이 자신을 낮추고 눈물을 흘려야 했던 것입니다. 희생 중에 희생은 자신의 자존심조차 포기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본래 종이라는 단어를 싫어했습니다. 그는 갈5:1에서 “그리스도께서-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가르친바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바울 사도가 고후4:5에서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된 것을 전파함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위해 복음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너희들의 종노릇을 할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실로 이 각오 없이 복음의 소명을 성취하기는 어렵습니다.

바울 사도 자신의 입술을 빌려 복음 때문에 그가 당한 희생의 경험을 들어 보실까요? 고후11:23이하의 고백입니다. “내가 수고를 더 많이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번 죽을뻔 하였으니 (24)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26)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형제중의 위험을 당하고(27)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번 자지 못하고 주리고 목마르고 여러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그런 바울이 이제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고난을 당할 것이라는 성령의 예언을 받고 있었습니다. 다시 본문 23절입니다. “오직 성령이 각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그러나 24절에 그는 복음을 위해서라면 어떤 자신의 희생이 기다린다 해도 기꺼이 예루살렘으로 가겠다는 것입니다. 그의 사역은 진실로 희생의 사역이었습니다.


3. 인내의 사역입니다.

우리가 고난과 희생을 당할 때 그것이 일회성의 고난이나 희생이라면 한번만 꾹 참으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정말 힘든 것은 끝날 것 같지 않은 고난에 직면하는 일입니다. 일찍 산 순교자였던 안이숙 여사가 옥증에서 먼저 순교하러 형장으로 나가는 분들에게 자신이 살아있는 것이 죄송하다고 하자 그들은 그녀에게 오히려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우린 죽으면 그만 영광에 들어가겠지만 자네는 살아서 고난을 받아야 하지 않겠나. 우린 걱정 말고 부디 자네 자신을 위해 기도를 쉬지 말게나.” 바울이 본문에서 회상하는 에베소 사역의 고백을 다시 기억해 보십시오. 

19절을 다시 읽어 보면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라고 고백하지 않습니까. 그는 실로 오래 참음으로 사역을 감당한 것입니다. 왜냐구요? 다만 하나 영혼들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전13장 4절에서 “사랑은 오래 참고”라고 말할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진실로 복음의 소명을 위해 희생하고 인내하는 사역을 끝까지 잘 감당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놀라운 열매를 이 땅에 남길수 있었던 것입니다. 

얼마전 <소명>이라는 크리스챤 다큐멘터리 영화가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가슴에 진한 감동을 남긴 것을 기억합니다. 영화의 주인공 강명관 선교사는 본래 외국어 고등학교 국어 선생님으로 남부럽지 않은 평범한 행복의 일상을 살아가던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하늘의 소명이 임하면서 그의 모든 것은 변합니다. 그는 소명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리고 아마존 정글로 떠납니다. 

정글에는 세계에서 가장 작은 부족 100여명이 사는 바나와 부족이 그와 그의 가족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사는 지역은 농사가 어려워 최악의 가난에 시달리고 있었고, 그들의 최대의 소원은 멧돼지 한번 실컷 먹어보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이런 그들을 섬기며 음식을 먹이고 교육을 하고 문자를 만들어 주고 성경을 번역하고 섬기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커뮤니케이션합니다. 그는 때로는 교사가 되고 때로는 의사가 되고 때로는 영양사가 되기도 하면서 말입니다. 때로는 독충과 독사에 물리면서 자신을 챙기기보다 죽어가는 원주민들을 보살피는 그의 곁에 다가가 자신의 자녀들조차 인터넷도 되고 시설도 좋은 쌍 파울로 선교사 학교에 그의 자녀 예슬이와 한솔이를 보내지 않고 1000km나 떨어진 쁘라켓꽈라 정글 학교에 보내는 이유를 묻자 대를 이어 정글족을 사랑하는 선교사로 그의 자녀들이 살아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라고 대답합니다.

영화를 만든 신 현원 감독에게 누군가가 촬영 중 가장 어려운 일이 무었이었..냐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는 촬영 중 너무 작아서 보이지도 않는 독충들의 공격을 받고 팔 다리가 벌집처럼 되었을 때라고 대답하면서 그런데 그때 그는 기도하며 이런 응답을 받았다고 합니다. “네가 이곳 아마존에 와서 강 선교사의 삶을 영화화하며 이런 정도의 고통도 경험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그의 사역을 필름에 담을수 있겠느냐? 넌 길어야 한 달의 고통이지만 강 선교사는 언제 끝날줄 모르는 고통과 싸우며 선교하고 있지 않느냐? 이 고통을 잘 인내하며 그것을 영상으로 표현하거라.” 

우리는 이 영화가 아직 끝나지 않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한 선교사의 사역을 다루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이 다큐멘터리 후반부를 통해 아마존 정글 사역 10년의 사역의 한 결실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 바나와 부족들이 “우리는 강 선교사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느낀다”고 고백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의 장로들이 밀레도의 부두에서 바울과 작별하며 목을 끌어안고 울던 이유도 그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바울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전해 듣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은혜가 무엇입니까?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에게 베풀어진 일방적 사랑이 아닙니까? 우리가 그 사랑으로 복음을 전해 듣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그 사랑의 빚진 자가 되었다면 이제 우리가 다시 이 사랑을 나누기 위해 당신과 나를 부르시는 소명에 응답할 때가 되지 않으셨나요?

물론 우리가 소명을 받았다고 다 아마존으로 가야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의 아마존은 도시의 학교일수도 있고 도시의 직장이요 사업장일수도 있습니다. 강 선교사의 소명은 아마존이었지만 신 현원 영화감독의 소명은 기독교 영화인으로 세속 영화의 정글속에서 하나님의 가치를 증거하는 필름 메이킹이었던 것입니다. <소명>의 저자 오스 기니스는 소명에는 일차적 소명과 이차적 소명이 있다고 말합니다. 일차적 소명이 우리가 구원받은 후 우리의 일과 시간, 재능으로 주님을 섬기기 시작하는 일이라면 이차적 소명은 어떤 특정한 장소에서 특정한 과업으로 주님을 섬기도록 부르시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요컨대 소명이란 오스 기니스의 정의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기에 우리의 존재 전체, 우리의 행위 전체, 우리의 소유 전체가 특별한 헌신과 역동성을 가지고 그분의 소환에 응답하여 그분을 섬기는 일에 우리의 일생이 투자되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제 그 소명을 고민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당신의 삶과 죽음을 걸고 응답해야 할 소명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 소명에 기꺼이 희생과 인내로 응답하시겠습니까? 바울처럼 고백하시겠습니까?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이동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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