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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꼴찌에게 희망을! (요 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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꼴찌에게 희망을! (요 5:1~9)


어떤 사람이 브라질의 커피농장에 견학을 갔답니다. 농장의 이모저모를 둘러보는데, 그 중에 인상적인 장면이 있었습니다. 커피나무 묘목을 만드는데, 작은 모래주머니에 씨앗을 두 개씩 심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왜 하나씩 심지 않고 두 개씩 심는지 궁금해서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관리인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두 개를 심어야 서로 경쟁하며 자랍니다. 몇 달 후에 둘 중에 잘 자란 것 하나만 종묘로 쓰고 다른 하나는 버린답니다.” 결국 무슨 말인가요? 우리가 마시는 커피 한 잔조차 경쟁의 소산물이란 사실입니다. 

이처럼 자연의 세계에도 인간 사회에도 경쟁은 늘 존재합니다. 특히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 사회는 소위 ‘무한 경쟁’이라 불리는 경쟁 사회입니다. 공부도 취직도 사업도 모든 게 경쟁입니다. 그런 치열한 경쟁 가운데 발전하는 겁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보면 경쟁의 뒤편으로 밀리는 사람들의 경우 너무 괴롭습니다. 세상은 온통 1등에게만 박수를 칩니다. 그래서 자신이 처한 어려움 자체도 힘든 것이지만,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내몰리는 소외감 때문에 더 힘들어집니다. 이런 소외감에 내몰리다 보면 영영 경쟁 사회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소외 계층에게 재기의 기회를 주고자 국가 차원에서 복지정책을 펴고 재활 프로그램도 가동하는 겁니다. 

그러나 국가나 사회 차원에서 아무리 관심과 노력을 기울인다 해도 결국 자기 스스로 소외감을 극복하고 승리해야 합니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살벌한 경쟁 사회에서 불행한 인생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성경 본문은 그런 점에서 우리 인생에 큰 힘과 교훈을 제공해 줍니다.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중병에 걸렸습니다. 고쳐보려고 무진 애를 썼습니다. 그런데 고치기는커녕 병세가 악화되고 세월은 흘러 이미 38년이나 됐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전혀 가능성이 없습니다. 그러던 중 만병통치의 전설이 내려오는 연못에 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겨우 겨우 찾아가 보았습니다. 비슷한 병자들이 잔뜩 모여 있습니다. 그 전설의 진위도 문제지만, 사실이라 해도 선착순 1명만 고침 받는다는 겁니다. 38년 된 병자는 또다시 좌절합니다. 더 이상 희망이 없었습니다. 정말 연못의 물이 효험이 있는지 모르지만,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도저히 1등을 할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에게 희망을 주신 분이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분은 희망을 주실 뿐 아니라 실제로 38년 된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병자는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지만, 그래서 소외감 가운데 무너져가던 인생이었지만, 예수님 때문에 멋지게 재기한 것입니다. 

요즘 어려운 시기를 보내면서 많은 사람들이 힘들어 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스스로 소외감을 느끼면서 더욱 뒤처지고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예수님을 바라보는 신앙이 더욱 절실합니다. 아무쪼록 오늘 말씀을 통해 각자의 어려움 가운데서 당당히 일어나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1] 38년된 병자 : 꼴찌 인생

38년 된 병자의 모습이 어떠한지 본문을 살펴보면 한 마디로 ‘꼴찌 인생’입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소외된 인생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사람에게 예수님이 찾아가신 겁니다. 1절 보면 그때의 배경이 소개됩니다.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여기서 유대인의 명절은 명시되지 않아서 정확한 것은 모릅니다만, 아마 부림절(에스더 시대에 유대인이 구원받은 것을 기념하는 절기) 혹은 유월절(출애굽 해방 기념 절기)이 아니었을까 짐작됩니다. 어느 쪽이든 중요한 것은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몰려들었다는 사실입니다. 인산인해를 이루고 사방이 시끌벅적하면서 온통 축제 분위기였을 겁니다. 그 때 예수님도 유대인의 풍습에 따라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의 축제 분위기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장면이 펼쳐집니다. 2절.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당시 고대 예루살렘은 성곽으로 둘러싸여 있고 출입문이 여러 개 있었습니다. 그 중에 양문(羊門 Sheep Gate)이라 불리는 성문이 있었습니다. 그 이름에서 보는 대로, 성전 제사를 위해 양들을 데리고 올 때 바로 이 문을 통과했습니다. 그리고 그 문 곁에 연못이 있었는데, 그 이름이 ‘베데스다’ 즉 ‘자비의 집’(House of Mercy)이란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름과 전혀 다른 광경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행각(지붕이 잇는 정자) 다섯 개가 있는데, 병자들이 모여 있습니다. 3절~4절. “3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4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각종 난치병 불치병 환자들이 모여 있었는데, 그 이유는 연못에 얽힌 전설 때문이었습니다. 민간 신앙 내지는 근거 없는 미신입니다. 천사가 가끔 내려오고 그때 물이 솟아오르는데, 그 때 누구든지 뛰어 들어가면 병을 고침 받는다는 겁니다. 아마 온천수가 이따금 분출되는 게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간헐천’(間歇泉 Intermittent Spring)이죠. 이게 만병통치라는 겁니다. 

실제로 병을 고친 사람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당시 상황으로 추측컨대 물이 솟아오르는 것도 드문 일이고, 혹시 그런다고 해도 불치병 환자를 고치는 치유의 역사가 나타날지는 미지수입니다. 더욱 황당한 것은 단 한 명만 고침 받는다는 겁니다. 마치 로또 복권 맞기를 기대하는 것과 같습니다. 로또 복권 1등에 당첨될 확률이 815만분지 1이라고 하는데, 수학적으로 제로에 가까운 확률입니다. 전혀 불가능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도 다른 방도가 없었기에 막연한 기대감으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한 마디로 막장 인생이요 바닥 인생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병자들 가운데서도 가장 처진 사람이 있었습니다. 5절 보시죠.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38년 된 병자! 바닥 인생들이 모인 그 틈바구니에서도 밀려버린 인생이었습니다. 해보나마나 그는 항상 꼴찌입니다. 38년 동안 병을 앓고 누워있으니 옆에서 그를 도와줄 사람이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긴 병에 효자 없다고 가족도 친지도 다 떠나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마음 속에는 부정적인 생각으로 가득했을 겁니다. 체념과 자포자기, 원망과 한탄, 그리고 다른 사람을 향한 미움과 저주 등. 

그는 그런 극단적인 소외감과 고통 가운데 무너지는 인생, 아니 죽지 못해 사는 인생이었습니다.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그런데 단 한 분 예수님께서 그에게 관심을 가집니다. 세상이 거들떠보지 않고 알아주지 않는 꼴찌였지만 예수님은 그를 만나 주셨고 희망을 주십니다.


[2] 꼴찌 인생에게 찾아오신 예수님 : 꼴찌에게 희망을 

베데스다 연못은 이름만 그랬지, 사실은 그곳 역시 세상의 다른 곳처럼 무자비한 경쟁 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언제든 기댈 수 있고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자비의 주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진정한 ‘베데스다’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자비와 사랑은 세상의 그 어떤 사랑과도 다릅니다. 세상의 사랑은 다분히 조건적입니다. 1등에게 박수쳐주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은 달랐습니다. 마치 다섯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는 말처럼 모든 자식에게 골고루 나눠주는, 못난 자식에게는 더 애틋하게 베풀어주는 부모님의 사랑과 같은 무조건적인 사랑과 자비입니다. 본문을 살펴보면, 그 모습이 다음 몇 가지로 나타납니다. 

① 먼저 찾아오시는 사랑 :

38년 된 병자는 예수님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가 스스로 찾아나서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먼저 그를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먼저 찾아오시는 사랑입니다. 

롬5:6,8 “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연약할 때 사랑해 주신 그 사랑입니다. 이게 곧 십자가 사랑입니다. 

누가복음 15장을 보면 ‘잃은 양 비유’가 나옵니다. 눅15:4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100마리 양 중에 한 마리에 대해 정성을 쏟는 사랑입니다. 이처럼 주님이 택한 백성은 단 한 명도 버리지 않습니다. 절대 포기하지 않습니다. 

구약 이사야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에게서조차 버림 받았다는 소외감으로 불안했습니다. 그 때 주신 말씀이 사49:15~16입니다. 사49:15~16 “15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16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 숭배하고 악을 행함으로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잠시 징계할지라도 결코 잊지 않고 끝까지 사랑할 것임을 강조하셨습니다. 

우리가 연극을 보면, 주인공이나 중요 인물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춥니다. 배후에 있는 인물에게는 스포트라이트를 비추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춰주십니다. 사람들의 마음은 분산됩니다. 관심이 한 군데로 쏠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릅니다. 마치 나 혼자 있는 것처럼 사랑해 주십니다. 

② 모든 것을 아시는 사랑 :

예수님은 우리에게 관심을 가고 있을 뿐 아니라 우리를 너무나 잘 아십니다. 38년 된 병자에게 찾아가신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셨나요? 6절 보세요.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 ” 예수님은 척 보면 아십니다. 모든 형편과 사정을 파악하십니다. 그리고 도와주십니다. 

마10:29~31 보면, 예수님이 친히 하신 말씀이 나옵니다. “29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30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31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히4:15을 보면, 예수님은 그냥 아시는 게 아니라 속속들이 체험적으로 아십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sympathize)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인간으로 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는 십자가에 못 박혀 대속의 제물이 되시기 위함이고, 또 하나는 인간과 동일한 경험을 하심으로 우리의 애환을 공감하시고 동정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체험적으로 아시고 동정하며 도와주시는 사랑입니다.

③ 희망을 주시는 사랑 :

예수님은 38년 된 병자에게 대뜸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6절. “ ...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이상하죠? 당연한 것 같은데 왜 물으시는지 ... ? 그러나 그 병자를 너무 잘 아시고 하신 질문입니다. 그는 희망을 버렸습니다. 자포자기 생태입니다. 소원조차 사라진 겁니다. 그냥 죽지 못해 그 자리에 있는 것이지 치유된다는 생각은 이미 지워 버린 지 오래입니다. 마음의 병이 더 큰 문제였습니다. 그의 대답을 들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7절.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자기에게는 도우미도 없고,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은 희망을 주십니다. “된다!” 그리고 믿음을 주십니다. “내가 해 줄 수 있다!” 그러고 나서 그에게 치유의 기적을 베푸신 겁니다. 

이와 비슷한 사건이 있죠. 마가복음 10장을 보면, 맹인 바디매오 치유 사건이 나옵니다. 

예수님을 향해 소리치는 맹인을 향해 예수님께서 질문하십니다. 막10:51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왜 그랬을까요? 이 사람은 자포자기 상태입니다. 예수님을 향해 소리쳤지만, 아직도 마음 한 구석에 부정적인 생각과 의심이 가득했습니다. “정말 그럴 수 있을까? 이제껏 못 고쳤는데 ... ” 그래서 예수님이 먼저 희망과 믿음을 주기 위해 질문하신 겁니다. 그러고 나서 고쳐주셨습니다. 

우리가 인생 살면서 마지막까지 지켜야 할 자산은 희망입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희망을 잃지 않으면 재기할 수 있습니다. 승리할 수 있습니다. 미국 대통령 오바마를 보십시오. 그의 존재 자체가 희망의 증거입니다. 흑인들이 대개 열등감에 자포자기 합니다. 그런데 오바마가 미국의 대통령이 되니까 희망이 생겼습니다. 미국 본토의 흑인들뿐 아니라, 아프리카 사람들도 오바마의 취임일에 국경일처럼 축제 분위기를 즐겼다고 합니다. 잘 아시는 대로, 그는 혼혈아(케냐 출신 아버지 유학생+백인 어머니)입니다. 청소년 시절 자기 얼굴이 검은 게 싫어서 피부를 희게 하려고 독한 용액을 발라 살이 타들어가기도 했습니다. 열등감과 소외감에 마약도 했습니다. 그러나 희망을 놓지 않았고 마침내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자서전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희망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큰 선물이다.” 

여러분, 희망을 놓으면 곤란합니다. 세상 사람들도 스스로 마음을 다지잖아요. “바닥 인생이냐? 그러면 이제 올라갈 일만 남아 있다!” 이렇게 말합니다. “꼴찌라고? 뒤로 돌아가! 하면 일등 된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노라 하는 우리가 희망을 놓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되죠. 세상에서 말하는 희망은 확실한 근거가 없는 ‘허구적 희망’인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래도 세상 사람들은 여전히 희망을 외치는데,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이 희망을 노래하지 않는다면 문제가 있는 겁니다. 예수님 안에서 갖는 희망은 헛된 희망이 아닙니다.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막연히 기대하고 있는 것과 전혀 다릅니다. ‘실체적 희망’입니다. 왜 그런가요? 그에게는 하나님의 권능이 있기 때문입니다. 

④ 권능으로 역사하시는 사랑 :

예수님은 38년 된 병자에게 말씀하십니다. 8절. “...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 이 말씀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 외친 말씀입니다. 권능이 있습니다. 괜히 해 보는 헛된 소리가 아니라 권능으로 역사하는 말씀입니다. 그 말씀을 듣는 순간 그 병자의 귀가 번쩍 뜨였습니다. 그리고 믿음이 솟구쳤습니다. 그의 온 몸에 힘에 생김을 느꼈고, 마침내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자리를 들고 갔습니다. 9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예수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반응하면 영적인 스파크 일어납니다. 권능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믿음의 반응이란 마치 이런 겁니다. 자동차 좌석에 앉아 시동을 겁니다. 윙~ 하고 엔진이 돌아갑니다. 하지만 아직 움직이지 않죠. 기어를 넣어야 동력이 전달되어 자동차가 움직이는 겁니다. 믿음은 마치 기어를 넣는 것과 같습니다.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권능이 임하는 겁니다. 

예수님 밖에서는 우리 인생이 KO(Knockout)됩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예수님 안에 들어오면 우리 인생이 OK(All Right)가 됩니다. 그러므로 패배의식, 소외감 버리시기 바랍니다. 세상 사람들이 나를 몰라 줘도 주님은 나를 알아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에게조차 소외감 느끼면 끝장입니다. 

하나님은 내 모습이 아무리 형편없어도 나를 소외시키는 분이 아닙니다. 마치 나 혼자만 있는 것처럼 나를 사랑해 주십니다. 하나님에게는 꼴찌 인생이 없습니다. 내가 아무리 부족해도 나를 응원해 주시고 희망을 주십니다. 권능으로 역사해 주십니다. 이런 사실을 꼭 믿으시고, 과거에 혹시 꼴찌 인생이었다 하더라도 이제는 1등 인생 이 되시기 바랍니다. 

최근 읽은 책 한권을 소개해드리고 싶습니다. 박종월, 『1004번 안경 버스』, 코리아닷컴. 박종월 장로님은 본래 시골에서 겨우 초등학교만 졸업한 분이었습니다. 무작정 상경해서 서울역 주변을 배회하면서 별의 별 일들을 다하고 소위 바닥 인생을 살았던 분입니다. 자칭 싸움꾼, 노름꾼, 술꾼, 폐병쟁이, ... 한 마디로 막장 인생이었습니다. 소년원과 유치장 을 드나든 것도 36번이나 됐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서 인생 역전을 경험하게 됐습니다. 열심히 사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사업에 복을 주셨습니다. 

그러던 중 50세가 되던 해에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봉사할 마음으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부부가 나란히 고입 검정고시(중졸), 대입 검정고시(고졸)를 통과하고 수능 시험을 거쳐 전문대학 안경광학과에 입학합니다. 내친 김에 4년제 대학에 편입해서 졸업합니다. 그리고 2002년부터 안경봉사를 시작했습니다. 25인승 버스 개조해서 달리는 안경원을 만든 겁니다.(큰빛부부안경선교회) 7년 동안 전국을 누비며 1만 4천명에게 무료로 안경을 맞춰주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사업은 사업대로 번창합니다. 제가 이 책을 다 읽고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예수가 참 좋구나! 꼴찌 인생이 예수 만나 1등 인생이 됐구나!” 

미국 실리콘 밸리에서 성공 신화를 이룬 여성 기업가 김태연 회장(미국 TYK그룹)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괄시와 천대를 다 당한 분입니다. 23세에 미국으로 이민 간 후에도 온갖 고생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6개 기업을 거느린 회장이 됐습니다. 극한 상황에서도 그는 하나님을 굳게 의지하며 희망을 놓지 않았고, 결국은 승리했습니다.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He can do, She can do, Why not me?”입니다. 저 남자도 저 여자도 하는데, 내가 왜 못하냐? 이겁니다. 아마 그 뒤에 이런 말이 생략된 것이겠죠. “In Jesus Christ” 예수 안에서 할 수 있다! 이게 우리의 믿음입니다.

여러분! 분명히 세상에서는 꼴찌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서는 꼴찌가 없습니다. 다만 믿음이 없는 자만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사랑과 권능의 주님을 믿음으로 바라보는 한 희망이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얼마든지 1등 인생이 될 수 있습니다. 부디 어떤 형편에 있든지 예수님만 바라보시고 꼭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홍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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