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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전으로 들어가라 (눅 22:4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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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으로 들어가라 (눅 22:47~53)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사건은 예수님의 생애에 가장 특별한 사건입니다. 십자가가 없었다면 예수님의 생애는 무의미해졌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있었기에 우리의 죄가 씻겨졌고,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읽은 말씀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기 전에 있었던 한 가지 작은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잡히시는 과정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잡으러 온 사람 중 한 사람의 귀를 칼로 자른 일입니다. 

본문 50절을 보면 <그 중의 한 사람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오른쪽 귀를 떨어뜨린지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는 그들의 이름이 드러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18장 10절을 보면 이름이 정확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에 시몬 베드로가 칼을 가졌는데 그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 칼을 휘두른 제자는 <베드로>이고, 귀가 잘린 사람은 <말고>였습니다. 

베드로가 말고의 귀를 벤 사건은 사복음서,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모두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복음서에 모두 기록된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그 정도로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예수님의 생애 중에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기에 사복음서 모두에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외에는 선별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컨대 예수님의 탄생처럼 중요한 사건도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만 기록되었을 뿐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많은 이적들 중에서도 사복음서에 모두 기록된 것은 단 하나,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사건, 즉 오병이어의 이적뿐입니다. 이렇게 볼 때 베드로가 말고의 귀를 벤 사건이 사복음서에 다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매우 특이합니다. 

그렇다면 왜 성경은 베드로가 말고의 귀를 벤 사건을 이처럼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것일까요? 이 일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말고에 대하여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말고>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본문에는 그의 신분에 대하여 <대제사장의 종>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그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단순한 종은 아니었습니다. 우선 예수님을 잡으러 온 사람들은 모두 무장을 했습니다. 52절 끝을 보시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왔느냐>고 묻고 있는데, 이들이 중무장을 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말고도 검을 들었을 것입니다.

언뜻 생각하면 대제사장의 종이 왜 검을 들었는가 하는 생각을 하실 것입니다. 당시 대제사장 수하에는 성전의 경비를 위해 성전경비대가 조직되어 있었고, 그들은 무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말고도 성전경비대원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 성전경비대원은 하찮은 종들로 구성된 집단이 아닙니다. 당시에 제사장의 조직은 모두 8계급으로 되어 있었고, 그 최고의 자리는 대제사장이었습니다. 그리고 대제사장은 반드시 성전경비대장을 거쳐야만 했습니다. 그러므로 성공하려면 경비대원이 되어야 하고, 그 후에 경비대장을 거쳐야 고위층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물건처럼 팔리는 종들은 경비대원이 될 수 없었습니다. 당시 경비대원이 되는 사람들은 제사장 가문에 속한 젊은 제사장들이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말고는 제사장 신분으로 장차 대제사장을 꿈꾸는 야심만만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자, 그런데 베드로의 칼에 의해 말고가 귀를 잃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귀 하나를 잃은 게 아니라, 정말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귀가 잘리는 순간, 말고는 그렇게 꿈꾸던 제사장으로서 성공하는 것이 완전히 좌절된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귀가 없는 그는 더 이상 성전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레위기 21장 17절을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아론에게 말하여 이르라 누구든지 너의 자손 중 대대로 육체에 흠이 있는 자는 그 하나님의 음식을 드리려고 가까이 오지 못할 것이니라> 바로 이것입니다. 육체에 흠이 있는 사람, 그것이 선천적인 것이든 후천적인 것이든 몸에 흠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의 일을 맡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귀를 잃은 말고는 성전에서 제사장으로 살아가기는 영영 틀린 것입니다. 

여러분, <더 이상 성전에 들어갈 수 없다, 더 이상 제사장으로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그것은 단지 성전에 드나들 수 없는 것을 넘어서 <하나님과의 끈이 완전히 끊어진 것>을 말합니다. 이제 하나님의 은총을 얻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성전은 오늘날의 예배당과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그들은 성전이 에덴 동산을 대신하는 것으로 믿었습니다. 본래 에덴 동산은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의 동산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었고, 그 결과 에덴에서 쫓겨났습니다. 이 대목은 모든 인류에게 너무도 가슴아픈 장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에덴을 잃어버린 불쌍한 인류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에덴을 대신하도록 주신 것이 성전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성전을 통해 에덴을 회복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성전은 모든 면에서 에덴과 같아야 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성전을 에덴 동산처럼 만들 수 있을까요? 에덴에는 세 가지가 없었는데, 성전에도 이 세 가지가 없어야 했습니다.

첫째,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기 전에 에덴에는 죄가 없었습니다. 에덴은 정결한 곳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성전도 정결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부정한 사람들은 성전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 레위기 11장 같은 데 보면 음식물도 정결한 음식이 있고, 부정한 음식이 있었습니다. 또 의복도 그렇고, 앉는 자리도 그러하였습니다. 피부병에 따라 부정하게 되기도 했습니다. 부정한 사람은 절대로 성전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둘째로, 에덴은 흠이 없는 완전한 곳이었습니다. 에덴의 사람과 동물 모두가 완전했습니다. 그러므로 성전에도 온전한 사람만 들어갈 수 있었고,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성전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짐승도 흠이 있는 것은 제물로 드릴 수 없었습니다. 

셋째로, 에덴에는 죽음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성전에도 죽음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시체와 접촉한 사람은 성전에 갈 수 없었습니다. 가족이 죽어서 장례를 한 사람, 시체를 가까이 한 사람과 접촉한 사람들은 부정해져서 성전에 갈 수 없었습니다. 

<성전은 에덴 동산과 같아야 한다!>, 이 생각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철저하게 지켜온 생각이었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지나오는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성전에 들어갈 수 없었을까요? 성전에 들어갈 수 없는 삶, 하나님과 단절된 채로, 은총을 입을 수 없는 사람으로 낙인찍힌 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얼마나 처참한 일입니까?

하나님은 모든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하나님은 축복의 근원이십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께 나갈 수 없다면, 그 생명과 복을 받을 수 없다면 어떻겠습니까? 생각해 보면 본래 우리도 다 그런 존재였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나간 채로 사단의 자녀로 살았던 것이 우리들입니다. 성전에 나갈 수 없다는 것, 하나님께 나갈 수 없다는 것, 이게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근원적 고통인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베드로가 말고의 귀를 베어 버렸을 때,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이게 오늘 말씀의 핵심입니다. 51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일러 이르시되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 할렐루야! 예수님은 말고의 귀를 낫게 하셨습니다. 잘려 땅에 떨어진 그의 귀를 다시 제자리에 붙여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엄청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일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불쌍한 말고, 귀가 떨어졌으니, 넌 영영 성전에 들어갈 수 없고, 제사장으로 살아갈 수 없게 되었구나. 넌 이제 성전 뜰에서 그 안을 들여다 볼 수만 있을 뿐, 가까이 갈 수 없게 되었구나. 그러나 이제 내가 너의 귀를 다시 붙여준다. 널 온전케 해 준다. 다시 성전에 들어가게 해 주마. 성전에 들어가라. 가서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라>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를 성전에 들여보내는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에덴 동산을 잃어버린 우리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에덴 동산의 상징과도 같은 성전에 들어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사역을 보십시오. 예수님의 전 사역은 불쌍한 사람들을 성전에 들어갈 수 있게 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습니다.

우선 성전에는 부정한 사람들, 정결하지 못한 사람들은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피를 흘려주시고, 그 피로 우리를 씻어 정결하게 만드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죄인이 아니라, 씻음 받은 의인이 되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언제든지 성전에 나아가 엎드려 찬양과 기도를 올리고, 은총을 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 성전에는 온전하지 못한 사람들은 들어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보세요. 예수님은 온갖 장애인들과 병자들을 치유하셨습니다. 요한복음 5장에 보면 베데스다 연못가에 누워 있던 38년 된 병자를 예수님께서 치유하신 일이 나옵니다. 그 사람은 아무리 성전을 사모해도 소용없었습니다. 베데스다가 성전으로부터 수 백 리 떨어져 있어서가 아닙니다. 바로 지척이었습니다. 화면의 지도를 보십시오. 네모난 곳이 성전입니다. 그리고 별표가 되어 있는 곳이 베데스다 연못이 있던 곳입니다. 두 곳은 거의 붙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질병 때문에 움직일 수 없었고, 제 힘으로 걸을 수도 없는 불완전한 사람은 성전에 나갈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를 치유하셨고, 그는 그토록 사모하던 성전으로 나아갔습니다. 그가 고침을 받은 후 성전에 들어갔다는 것을 요한복음 5장 14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전에 들여보내시는 것, 이것이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었습니다.

또 성전은 죽음과 관련된 사람은 갈 수 없다고 했는데, 예수님은 무덤 문을 깨뜨리고 죽은 지 사흘만에 부활하셔서 생명의 주님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생명의 능력으로 우리를 채우십니다. 누구든지 예수님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이제 우리 안에는 생명의 힘이 약동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 15절을 보면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죽음을 이기고 생명의 사람이 되어, 성전에 나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 은혜를 얻으시길 바랍니다. 성전에 들어갈 자격이 없던 사람이 성전에 들어갈 자격을 얻게 되는 은혜를 얻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 나갈 자격이 없던 사람이 하나님께 나갈 수 있게 되는 은혜를 누리시길 바랍니다. 이것을 위해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성전에 갈 수 없었던 불쌍한 사람들,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갈 수 없었던 사람들, 부정한 사람들, 온전치 못한 망가진 사람들, 그리고 죽음의 세력에 눌려 살던 사람들,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회복시켜 하나님의 보좌로 나갈 수 있게 하겠다. 다시 성전에 들어가게 해 주겠다. 너희 찬양과 기도와 예배를 부흥시켜 주겠다. 언제든지 성전에 들어가라, 하나님께로 나아가라. 가서 은혜를 입으라. 그리고 복되게 살라> 이것이 예수님께서 주시는 은혜인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이미 이 은혜를 얻으신 줄 압니다. 아직 그 은혜를 얻지 못한 분들에게는 그 은혜가 임하시길 축원합니다. 죄 씻음 받으시길 기원합니다. 고침 받으시길 기원합니다. 생명의 나라 천국을 품고 사시길 기원합니다. 

그 후에 우리가 할 일은 분명해졌습니다. 그것은 힘써 성전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전이 무엇입니까? 2천 년 전 예루살렘에 있었던 그 건물을 말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건물을 말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집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로 나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루 내내, 일주일 내내, 일년 내내 하나님께 나가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힘든 일이 있어도 하나님을 불러야 합니다. 기쁘고 즐거울 때 나아가 찬양해야 합니다. 늘 그 분 앞에 엎드려 섬기는 모습으로 살아야 합니다. 죄 씻음을 받은 사람, 온전케 된 사람, 믿음으로 죽음을 이기고 영원한 생명을 약속 받은 우리들은 하나님께로 나가 동행하는 삶에 힘써야 합니다.

사도행전 3장에 그 좋은 예가 있습니다. 거기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앉은뱅이 장애인이 베드로와 요한을 통해 고침을 받고 일어선 것이 기록되어 있지요. 그가 고침을 받은 후에 한 일이 무엇입니까? 다름 아닌 성전에 나아간 것입니다. 사도행전 3장 8절을 보면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그는 장애인이었으므로 그 동안 그렇게 사모하던 성전에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가 구걸하던 미문이 얼마나 성전과 가까운지 아십니까? 화면을 보십시오. 이게 예루살렘 성전의 모습입니다. 왼쪽 부분이 성전 건물이고, 네 구석에 노란 방 네 개가 있는 뜰이 여인들의 뜰입니다. 여인들은 거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화살표가 표시하는 대로 여인들의 뜰로 들어가는 입구가 바로 미문이었습니다. 여인들의 뜰은 사방 135규빗, 즉 대략 60여 미터 정도였습니다. 얼마나 가깝습니까? 60여 미터만 가면 성전인데, 그는 갈 수 없었습니다. 나이 사십 세가 될 때까지 바라보기만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장애가 벗어졌습니다. 그는 참을 수 없는 기쁨으로 성전으로 달려들어가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이처럼 성전에 들어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오늘날 너무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성전으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보좌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세상으로 달려갑니다. 예수님께 고침을 받은 열 사람의 나환자 이야기를 아시지요? 그들은 깨끗함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 예수님께로 나온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었고, 나머지 아홉 명은 다 자기 길로 갔습니다. 은혜를 입었으나 예수님께 등을 돌렸습니다. 이것은 은혜를 받은 사람의 자세가 아닙니다. 

히브리서 4장 14절 이하을 보면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주님은 우리가 성전에 나오길 기다리십니다. 하나님께로 나오길 기다리십니다. 심지어 당신을 잡으러 온 말고같은 사람도 성전에 들어갈 수 있도록 치유해주신 것을 본다면 우리가 성전에 들어가기를 주님이 얼마나 원하고 계신지를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우리 모두 성전에,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가는 삶을 살길 기원합니다. 

이런 은혜의 삶을 지속적으로 살아가시길 기원합니다. 더 큰 은혜를 받으시고, 은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더욱 더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살아가시길 기원합니다. 저 영원한 천국, 그 하나님의 집에 나가는 그 날까지 이 세상에서도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가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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