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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감사는 더 좋은 이적을 만든다 (눅 17: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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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는 더 좋은 이적을 만든다 (눅 17:11~19)


유대인의 인생 독본인 탈무드를 보면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배우는 사람이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감사하는 사람이다.”라고 했다. 감사하며 사는 사람은, 감사하지 못한 사람보다, 훨씬 건강하고 행복하다. 감사하지 못하면, 마음과 육체는 병들기 쉽고, 불행하게 된다. 

신체는 감정에 민감하게 반응하기에, 감사하면 맥박이 고르게 되고, 위장의 활동을 도와, 소화력을 증진시켜, 기분까지 상쾌하게 만들기에, 건강하게 된다. 반면 불평은 혈액순환을 방해하여, 맥박을 급하게 만드는 동시에, 위장운동을 정지시켜, 음식의 소화를 거부해, 건강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 

그러므로 소유의 유무와, 환경의 조건에 상관없이, 감사하는 사람들은, 행복한 인생을 살게 된다. 감사는 반응을 일으킨다. 하나님은 감사하는 사람을 좋아하신다. 감사하는 사람은, 감사하는 만큼 더 행복해진다. 감사하는 사람은 그 만큼 행복하기에, 감사는 행복을 만들어 낸다. 

인도의 시성 타고르는 “감사의 분량이 곧 행복의 분량”이라고 했다. 그러나 감사는 결코 쉽지 않다. 우리는 죽을병에 걸렸다가, 주님의 은혜로 병이 나으면, 평생 감사하며 살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들도 있지만, 성경을 보면 그런 사람은, 10명중에 1사람 밖에 안 된다. 그만큼 감사하지 않는다. 

우리 경험을 통해서도, 감사가 쉽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부모님을 통해, 이 세상에 나왔다. 부모님은 자식들에게, 아낌없이 다 주었다. 자식들은 받기만 했기에, 부모님께 정말 감사해야 한다. 그런데도 자식들은 부모님에게 감사할 줄 모르고, 자기 뜻대로 안 된다고 부모님께 불평한다. 

교회에서도 목사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이, 제일 먼저 목사님을 배반하고 떠나는 경우가 많다. 괴테는 “가장 쓸모없는 인간은, 감사할 줄 모르는 인간이다.”라고 말했다. 이런 면에서 현대인 대다수는 불행하다. 감사를 모르거나, 아예 잊고 살기 때문이다. 

감사할 줄 모르는 사회는, 병든 사회이다. 남에게 은혜를 입었을 때, 감사하는 마음은,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다. 동물은 감사를 모른다. 인간을 닮은 원숭이에게 바나나를 주며, 꼭 빼앗아 가고, 감사를 모른다. 감사는 성숙한 사람의 표지이다. 

미숙한 사람과 성숙한 사람의 차이는, 보는 시각에 있다. 성숙한 사람은 하나님께 받은 것에 집중한다. 받은 것에 감사한다. 받은 것을 누릴 줄 안다. 그러나 미숙한 사람은, 받지 못한 것에 집중한다. 남이 가진 것에 집중한다. 그래서 원망하고 불평한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면, 나중에는 내 주위에 그런 사람이 더 많아져, 행복지수가 높아지게 된다. 그러므로 감사하며 살아, 행복한 삶을 사시기 바란다. 행복하기에 감사한 것이 아니라, 감사하기에 행복하다. 따라서 행복하기 원한다면, 감사하는 사람이 되기 바란다. 

1. 위기는 주님을 찾게 만든다. 

이적은 문제가 있을 때, 하나님의 도움으로, 문제가 해결됨으로 나타난다. 위기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찾게 만들기에, 위기는 은혜를 받는 수단이 된다. 

그 당시 나병환자들은, 사람들이 사는 곳에서는 살수가 없어, 가정과 사회에서 격리되었다. 옷을 찢고, 머리는 풀어헤치고, 손으로 윗입술을 가리고, 다른 사람이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부정하다’고 소리를 질러야 했다(레13:45-46). 나병환자들은 절망 중에, 예수님의 소문을 듣게 되었다. 

나병환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며, 모든 병든 자들을 고쳐 주신다는 소문이었다. 이들이 예수님을 만나면 살 수 있지만,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들어가면, 돌에 맞게 된다. 그래서 예수님은 버림받은 그들을 만나려고, 한 촌에 들어가셨다(12).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에게 먼저 임했다. 

그때 나환자들은 예수님을 향해, 큰 소리로 간구하였다. (13-14)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10명의 나병환자들은 소리를 높여서, 예수님께 불쌍히 여겨달라고 하였다. 그들의 절박한 상황은, 예수님만 바라보고, 간절히 부르짖었다. 애절하게 부르짖는 기도는, 주님의 마음을 감동시킨다. 같은 기도라도 애절하게 부르짖는 기도는 강렬한 기도다. 

애절한 소원이 담긴 기도이기에, 주님은 부르짖는 기도에, 더욱 관심을 기울이신다. 따라서 위기가 찾아왔을 때, 그리스도인은 가장 먼저 하나님께 나아가,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하나님의 도움의 손길이 임하게 된다. 

다윗은 아들에게 쫓겨 다닐 때,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 고통을 느끼고, 하나님께 부르짖는 기도를 드릴 수 있었다. (시18:6)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그가 그의 성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의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의 귀에 들렸도다.” 

이처럼 고통은, 하나님께 부르짖도록 만들어 주는 축복이다. 한나에게 브닌나가 없었다면, 어떻게 사무엘을 낳을 수 있는가? 요셉을 미워하는 형제들이 없었다면, 어떻게 애굽의 총리가 되어, 열방을 살릴 수 있는가? 이처럼 인간의 고통이나 아픔을 느끼게 됨이, 무조건 나쁘지 않다. 

나병환자는 고통을 모른다. 나병환자의 가장 큰 고통은, 버림받은 고통이 아니고, 아픔을 모르는 고통이다. 나병환자를 고치는 권위자 폴 브랜드 박사는,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고통에 대해 “고통을 만드신 하나님께 감사하라. 나는 그가 그보다, 더 좋은 일을 하실 수 있음을 믿지 않는다”고 하였다. 

나병환자의 소원은, 고통을 느끼기를 원한다. 그들은 아픔을 느끼는 일이, 가장 귀한 일이다. 몸이 아픔을 느끼면, 위험할 때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손가락이 떨어져 나가고, 코가 떨어져도, 몸이 타들어가도, 고통을 모른다. 그러면 내가 당하는 고통에 대해, 감사해 본 적이 있나요? 

우리는 고통을 싫어하지만, 고통은 축복이다. 살아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조그만 죄만 지어도, 가슴이 뛰고, 양심의 아픔을 느낌은 축복이다. 문제를 느낄 수 있음을 축복이다. 어려움을 느끼고, 기도와 찬송하면, 막힌 곳이 열리게 되어 있다. 

빌립보 감옥에 갇힌 바울과 실라는, 한 밤에 감옥에서 기도하고 찬송했다. 그러자 옥문이 열리고, 사람들을 매는 것들이, 다 벗어지는 역사가 일어났다(행16:25-26). 난관을 뚫는 능력이 여기에 있다. 고난 가운데 기도하고 찬송하면, 막힌 곳이 열린다. 그 어떤 것도 기도와 찬송을 막을 수 없다. 

우리는 어느 곳에 갇히더라도, 기도는 할 수 있다. 기도가 불가능한 장소, 기도가 불가능한 상황은 존재하지 않는다. 막히면 기도하라. 그러면 열린다. 성도에게 막다른 골목은 없다. ‘막다른 골목’은, 바로 기도하라는 신호다. 막힌 곳에서 시련보다 더 큰, 하나님의 위로를 맛보아야 한다. 

감사는 역설이다. 깨닫고 나면 나병에 걸렸던 것이 축복이다. 소외된 사람으로 살아옴이 축복이다. 비참한 환경에서 성장함이 축복이다. 고침 받은 나병환자는 문둥병에 걸리지 않았더라면,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다니엘은 감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기도하면 죽게 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그런 상황 속에서도 감사했다(단6:10). 다니엘은 감사하기 전에, 기도했다. 기도할 때, 감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도하면 하나님의 섭리의 관점을 갖기에, 감사할 수 있다. 

고통 속에 살고 있나요? 외로움 속에 살고 있나요? 쉽게 낙심하지 말라. 절망하지 말라. 하나님을 바라보라.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라. 하나님께 문제를 가지고 나와 기도하라. 그러면 가장 적절한 시간에, 오히려 축복으로 변하는 이적이 된다. 

2. 주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순종하면, 이적이 나타난다. 

10명의 나병환자는 예수님께, 그저 불쌍히 여겨달라고 하였다. 그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제사장에게 가서, 너희 몸을 보이라.”며, 한 마디 말씀만 하셨다. 

유대사회에서 나병에 걸린 사람은, 완전히 병이 치유되었을 때만, 제사장에게 자신의 나음을 인증 받을 수 있었다(레14:1-9). 사람이 사는 지역에 나타나면, 돌에 맞아 죽는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안수하거나, 깨끗이 고침 받으라는 말씀도 하지 않고, 무작정 너희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라고 하셨다. 

이렇게 하심은, 그 말씀에 순종하는가 보시기 위함이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무조건 믿고 순종했다. 이들은 이적을 보고 믿지 않았다. 말씀을 의지해서 믿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제사장에게 가다가 보니, 그들을 괴롭히던 나병이 사라지고, 깨끗하게 고침 받게 되었다. 

10명 모두 치료받았다. 이적을 체험했다. 이처럼 주님의 말씀에 순종함이 이적을 만들었다. 그들의 믿음은 순종으로 나타났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은, 이적을 보고 믿는 믿음이 아니다. 말씀을 신뢰하는 믿음이다. 이적을 보지 않아도, 말씀만 의지해서 믿는 믿음을 기뻐하신다. 

(1) 말씀은 단순한 소리가 아니다. 살아서 약동하는 능력이다. 생명력 있는 능력이다.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사55:11). 형통하게 만드시는 주님의 능력이다. 

말씀에 순종함이 믿음이다. 구약에는 믿음이라는 단어가 거의 나오지 않는다. 그 대신 순종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타난다. 순종이 믿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순종하지 않는 믿음은, 올바른 믿음이 아니다. 

(2) 말씀은 치유하는 능력이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치유하신다. 병든 자를 위해 말씀을 보내주신다. 예수님은 이적을 일으키시기 전에, 먼저 말씀을 하신 이유는, 말씀이, 병을 고치는 능력이 되기 때문이다. 

(시107:20) “그가 그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고, 위험한 지경에서 건지시는도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믿음으로 순종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무한하신 능력을 자기 스스로 판단한다. 마치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자신들의 조그만 지식으로, 세상의 모든 것이라고, 단정 지어 버린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믿음은, 이적을 보고 믿는 믿음이 아니라. 말씀을 의지하는 믿음이다. 말씀을 붙드는 신앙은 보고 믿지 않고,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믿고 순종하라. 순종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이 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말씀 앞에 순종함으로, 믿음의 조상이 되는 축복을 받았다(창22:12).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종하여, 여리고 성을 하루에 한 바퀴씩 돌고, 마지막 날에는, 일곱 번을 돌고 소리칠 때, 여리고 성이 무너져 점령할 수 있었다(수6:). 

사르밧 과부는 엘리야 선지자의 말씀 앞에, 마지막 기름과 가루를 바쳐서 주의 종을 대접함으로, 이적을 체험하고, 하나님이 그의 가족을 지켜주는 축복을 받았다(왕상17:14). 나아만 장군은 나병에 걸렸으나, 엘리사의 말씀대로 요단강에 7번 몸을 담그자, 고침 받는 이적을 체험했다(왕하5:14). 

이렇게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은, 질병에서 고침을 받고(출15:26), 그 자식과 후손이 축복을 받고(신4:40), 모든 사람 위에 뛰어나게 된다(신28:1). 또한 만사형통하며(신29:9), 번성하게 되고(신30:16), 역경과 고난에서 이기게 된다(마7:24-25). 

하나님의 사랑이 넘쳐나며(요14:21), 성령으로 충만하여(행5:32),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다. 먹을 것이 넘쳐나는 이적이 넘쳐난다(요6장). 순종과 감사는 펌프로 물을 끌어올릴 때 펌프에 붙는, 마중물과 같다. 순종과 감사로, 이 놀라운 축복을 받기를 바란다. 

3. 감사는 더 나은 이적을 만든다. 

10명의 나병환자들은 치료받은 후에, 모두 감격하고 좋아했다. 그러나 그 중에 한 사람만, 예수님께 찾아와 감사했다. 그는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리어 경배했다. 

그는 유대인에게 무시당하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예수님은 그의 감사를 받으시고, 그에게 더 큰 은혜, 구원의 은총을 베풀어주셨다. 병을 고침을 받은 자들은, 그것으로 끝났지만, 감사한 사마리아 사람은, 구원의 은총을 받았다. 

환난 중에 있을 때, 큰 소리로 기도할 수 있다. 아니 큰 소리로 기도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환난 중에 구원받은 후에, 큰 소리로 하나님께 감사함은 결코 쉽지 않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힘들 때, 큰 소리로 기도할 수 있지만, 응답 받은 후 감사하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러므로 정말 감사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마음만 있으면 안 되고, 받았음을 인정하고 표현해야 한다. 이렇게 감사를 표현하는 능력을 배워야 한다. 이렇게 감사를 표현하는 능력이 영력이다. 표현하는 능력은, 인생을 행복하게 만들어 준다. 

청춘 남녀가 아무리 서로 사랑해도, 그 사랑을 표현하지 않으면, 결혼하지 못한다. 비록 거절을 당할지언정 표현해야 한다. 갑돌이는 갑순이를 사랑했지만, 표현하지 못해서, 그들의 사랑은 이룰 수가 없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감사를 표현하는 사람들이 되기 원하신다. 

표현의 능력을 아시나요? (롬10:9-10)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감사하지 못할 때, 하나님은 아쉬워하신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17)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감사를 좋아하신다. 감사하다고 표현하는 사람을 좋아하신다. 

감사는 예수님을 기쁘시게 한다. 예수님의 마음에 감동을 준다. 감사를 입으로 고백하면, 예수님은 더 큰 이적을 베풀어주신다. 온전한 구원을 이루어 주신다. 예수님은 죄 많은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에서 고통당하시고, 피 흘려 돌아가셨다. 

우리가 겪어야 할, 지옥의 고통을 대신 당하며, 우리를 구원하셨다. 그러나 현실은 감사보다, 나의 조그만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나님을 배반하는 경우도 많다. 우리는 어떤가? 감사하다고 주님께 말하고 있는가? 감사하면 진정한 구원의 축복이 이루어진다. 

예수님은 감사한 나병환자에게 “열 명이 다 깨끗하게 되었는데, 나머지 아홉 명은 어디 있느냐?” 라고 물으시고(17),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하셨다. 우리가 감사할 때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신다. 감사로 영광을 돌린 그에게, 주님은 2가지 큰 선물을 주셨다. 

(1) 주님께서 인정해 주셨다(18).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너는 정말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자로다 하시며, 주님께서 인정해 주셨다. 남에게 인정받을 때 사람은 행복하다. 

높은 사람에게 인정받을 때는 더 행복하다. 예수님에게 인정받음은 가장 큰 축복이다. (시50:23)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했다. 하나님은 감사의 제사를 통해, 영광을 받으시고, 그를 인정해 주신다. 

(2) 구원의 은혜를 주셨다(19).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육체가 고침 받음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혼이 구원받는 일이다. 사람은 누구나 죽지만, 영혼은 영원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감사를 드렸던 한 나병환자는, 주님께 인정받고, 구원의 은혜까지 받았다. 영혼이 구원에 비한다면, 나병이 고침 받음은 작은 은혜다. 가장 소중한 은혜는, 죄 사함을 받는 은혜다. 삽지가의 은혜다. 예수님께 와서 감사한 사마리아 사람은, 더 큰 축복과, 더 큰 이적을 경험하게 되었다. 

감사는 감사를 낳고, 더 큰 이적을 낳는다. 감사는 더 큰 복을 끌어오는 능력이므로, 감사하며 사는 성도가 되자. 감사의 문이 열리면 하늘 문이 열리고, 행복의 문도 반드시 열리게 되어 있다. 육체가 무감각해지는 나병보다, 은혜에 무감각해지는 영적 나병이 더 문제다. 

감사한 일이 있으면, 바로 감사를 표현하라. 감사할 일을 미루면 대개 감사하지 못하고, 다시 자기 욕망대로 살게 된다. 감사의 때를 놓치지 말고, 더 늦어 후회하기 전에 감사해야 한다. 루터는 “선한 사람은 있는 것을 생각하고 감사하고, 악인은 없는 것을 생각하고 불평한다.”고 했다. 

스펄전은 “촛불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 전등불을 주시고, 전등불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 달빛을 주시고, 달빛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 햇빛을 주시고, 햇빛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 햇빛도 필요 없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영광스러운 빛을 주신다.”고 했다. 

하나님께서 모든 천사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한 천사를 창조하여, 천사들을 다스리게 하셨다. 그 천사의 입장에서 보면, 얼마나 감사한가? 그렇지만 그 천사는 감사하지 못했다. 오히려 욕심을 부리고, 하나님의 자리를 탐냈다. 결국 그 천사는 사탄 마귀가 되어 버렸다. 

그렇기에 감사가 없는 마음은, 마귀를 닮은 마음이다. 원망이나 불평은, 사탄이 좋아하는 일이다. 마귀의 소원은, 성도의 마음속에 원망과 불평을 심는 일이다. 마귀는 하와에게 선악과를 하나님이 못 먹게 했다고 불평을 갖도록 만들자, 결국 선악과를 따먹고 벌을 받게 되었다. 

간첩이 어떤 사람을, 포섭대상자로 삼겠는가? 대한민국과 대통령을 좋아하는 사람일까? 대통령을 싫어하는 사람일까? 이단들이 살며시 들어와, 어떤 사람을 포섭대상자로 삼겠는가? 교회와 목사를 좋아하는 사람일까? 아니면 불만을 품은 사람일까?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향해, 감사하는 마음으로 충만했다면, 마귀의 유혹을 능히 이겼다. 마귀를 이길 힘은 감사뿐이다. 마귀는 예배도, 기도도, 찬송도, 다 할 수 있지만, 감사만은 못한다. 범사에 감사해서, 마귀를 물리치는 성도가 되시고, 더 큰 이적을 만드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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