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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 안에서 화평하자 (엡 2: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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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안에서 화평하자 (엡 2:11~19)


우리의 일생에 교회와 가정은 정말 중요하며, 의미가 있고, 생명과도 같이 소중합니다.   그래서 교회와 가정을 중요시하는 말 중에 “가정과 같은 교회, 교회와 같은 가정”라고 합니다.  사실 가정을 말하려고 하면 진정한 가정인 가정, 교회를 말하려고 하면, 진정한 교회인 교회라고 하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왜 가정과 교회를 비교하면서 “가정과 같은 교회, 교회와 같은 가정”이라고 말하느냐 질문할 수 있습니다.  가정과 교회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해주신 가장 중요한 모임이며, 가정은 교회를, 교회는 가정을 서로 보완하여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다는 말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말이요, 구원받는 성도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가족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태백시에 있는 “예수원”이라는 공동체를 일으키신 르우벤 아처 토레이(Reuben Archer Torrey Ⅲ) 성공회 신부가 있습니다.  그는 장로교 선교사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영국성공회 신부가 되었고, 1957년 한국전쟁으로 인하여 문을 닫게 된 미가엘 신학원, 지금의 성공회대학교의 재건을 위해 내한하였습니다.  그는 신학교를 다시 정비하면서, 태백시 황지에 예수원 공동체를 설립하였고, 영성운동을 하다가 2002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한국교회를 보면서, 교회(敎會)라는 말을 할 때에 한문자로 가르칠 교(敎), 모을 회(會)라고 표기한 것을 잘못이라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교회는 무엇을 가르치고, 어떤 사상을 주입하는 곳이 아니라, 가족과 같은 모임이 되어야 하고, 성도의 교제 ‘코이노니아’가 있어야 한다는 했습니다.  그래서 교라는 말은 가르칠 교(敎)가 아니라, 사귈 교(交)를 써서 교회(交會)라고 해야, 교회의 본래적인 의미를 준다고 했습니다.  아주 좋은 지적이기는 합니다.  교회는 성도의 교제가 있고, 천국공동체입니다.    교회는 만남이요, 사귐이요, 교제요, 관계임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가르칠 교, 모을 회를 썼으니 말이 없었지, 만일에 사귈 교를 썼다고 하면 교회는 먹고 노는 곳인 줄 알았을 것이고, 교인들 자기들끼리만 모여 노는 곳이라고 사회적인 비난도 많았을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사용하는 말 중에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하나님의 권속”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권속(眷屬)이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성경은 정말 쉽게 번역했으면 좋겠습니다. 권속이라는 말은 ‘한 집안 식구’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식구라고 하면 되지, 어렵게 권속이라고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성경 원문에 따르면 ‘오이케이오스’라고 하여 그 말은 “한 가족”이라는 말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이 말이 세 번 나오는데, 한번은 ‘가족’이라고 했고, 또 하나는 ‘가정’이라고 했고, 오늘 본문에서는 ‘권속’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한 가족이라는 말입니다.  가족이라고 했으면 같은 단어이니 그 다음에도 가족이라고 했으면 얼마나 좋습니까?  새번역에서는 하나님의 가족이라고 알기 쉽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를 이루는 성도들은 한 가족이라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교회는 한 가족입니다.  교회가 결코 건물이나, 어떤 조직이나 기관이 아니라, 영적인 하나의 공동체요, 가족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제자훈련 중에 사역반에서 나온 이야기가 있습니다.  새신자가 교회에 들어오면 오래된 교회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게 됩니다.  오래된 성도들의 그 두터운 교제 속으로 들어가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등록하고 한 10년 정도 지나고 보니, 이제야 그런대로 어울릴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남여선교회에 들어가고, 찬양대에 들어가 보니, 오래된 사람들끼리 가까이 앉거나 또 몰려나갑니다.  그들은 형, 동생하면서 친하게 지내는데, 그 사이를 어떻게 뚫고 들어가서 친구처럼, 형제처럼 지낼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누구와 누구는 형, 동생이고, 또 누구는 김집사요, 이집사”라고 합니다.   찬양대에서도 오랜 된 대원들은 아주 친밀하게 지냅니다.  찬양하려는 곡은 두어 번 불러보면 지휘자가 원하는 화음을 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새로 들어온 대원은 음악적으로 화음을 이루기보다는 인간관계에 있어 화음을 내기가 어렵다고 말합니다.  

교회도 사람들이 모이다보니, 잘 아는 사람끼리, 같은 지방 사람들끼리, 같은 대학을 나온 동문이라고, 우리는 주일학교 때부터 형성된 인맥이라고 강조하다보니, 교회 안에도 보이지 않는 벽이 있고, 담이 형성되고, 골이 패이게 마련입니다.  

우리 사회는 엄청난 장벽과 높은 담장과 깊이 파인 골이 인간관계를 악화시키고 있습니다.  많이 소유한 자와 적게 소유한 자, 보수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과 진보적인 생각을 가진 자, 산맥을 두고 동쪽에서 배꼽이 떨어진 자, 서쪽에서 배꼽이 떨어진 자, 막힌 담이 문제입니다.  

우리 사회가 소통이 되지 않고, 막혀버렸다면 곧 죽음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소통이란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우리 몸이 어느 한 곳에서 막혀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막힌 것을 뚫지 않으면 썩게 마련이고, 그 썩는다는 말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수도가 막혔습니까?  생수를 받을 수 없게 됩니다.  하수구가 막혔습니까?  생활 오수를 어떻게 버릴 것입니까?  변기가 막혔습니까?  정말 난감한 일입니다.  막힌 담을 허물어야 합니다. 

오늘은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우리의 화평이신 주님에 대하여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 엡2:14에 보면 “중간에 막힌 담”이라고 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여러 구조물들이 있었습니다.  성전에는 여러 개의 뜰이 있었습니다.  제일 밖으로 이방인의 뜰이 있었습니다.  이방인들은 거기까지만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높은 담장이 있는데, 거기에는 히브리어와 헬라어로 경고문이 있었습니다.  “이방인들은 더 이상 들어가면 즉시 죽임을 당한다.”라는 무서운 경고문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장벽은 정말 무서운 장벽이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유대인들이 들어가는 뜰인데, 여인들이 들어갈 수 있는 뜰, 남자들이 들어가는 뜰, 그리고 제사장들이 들어가는 뜰, 그 다음은 본 성전으로 하루에 단 한번 당직 제사장이 들어갈 수 있는 성소, 그리고 대제사장이 일 년에 단 한번 들어갈 수 있는 지성소가 있었습니다.  모든 것들은 장벽과 휘장으로 가로막혀 있었습니다.   중간에 막힌 담을 허물어버리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1. 우리의 화평이신 주님은 우리로 하나님과의 평화를 이루어주셨습니다. 

16절입니다.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라고 하셨습니다.  

처음 사람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 조화를 이루고, 화평을 이루며 살았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 사이에는 아무런 담이나 장벽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은 에덴동산 구석구석에 미치고 있었고, 우리 사람은 풍족하게 살았고, 벌거벗고 살아도 부끄러움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사탄의 꼬임에 빠져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과일을 따먹고 범죄 하므로, 죽음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중간에 담이 쳐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영물이요, 천사인 그룹들을 세우시고, 빙빙 도는 불칼을 두셔서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을 지키게 하셨습니다.  아담의 범죄로 인해 우리 인간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욥22:21에서는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하는 말이 있습니다.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하나님과 화해하고 화목하는 것으로부터 진정한 평화가 시작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되고, 깨어져 있다면, 결코 평안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평화는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하나님과 우리 인간 사이에는 장벽이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사59:1-2에서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인간의 범죄함으로 그 죄악은 하나님과 우리 인간 사이를 갈라놓았습니다.  

사53:6에서 하나님은 고난 받는 종을 보내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이 당신의 독생성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우리의 모든 죄악을 담당하게 하시므로 성취하셨습니다. 

롬3:26에서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우리 주님은 하나님과 우리 죄인 사이에 화목제물이 되셨습니다.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에 예루살렘의 성전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져 둘이 되었습니다.  휘장은 또 다른 의미에서 장벽이요, 담이었습니다.  지성소와 성소 사이에 있는 것으로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 차례, 백성의 대속죄일에만 들어가서 먼저 자기를 위하여 속죄제를 드리고, 다시 온 백성들의 죄악을 담당하여 속죄제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에, 그 성전 휘장이 위로부터 찢어져 둘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구약의 제사시대가 지나갔으며,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 직접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이 거룩한 제사장이 되어 하나님 앞에 직접 나아가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휘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의 예표였습니다.  

이 휘장은 가늘게 꼰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 실로 아주 튼튼하게 짰습니다. 그 두께가 손두께만큼 두꺼웠으며, 72개의 주름이 두었고, 매 주름에는 24가닥의 실로 짰으며, 그 길이는 60척, 너비는 30척으로 이것을 만드는데 300명의 제사장들이 동원되었다고 합니다.  주름이 많고, 또 튼튼하고, 두께도 있고 탄력이 있어, 사람들이 이것을 찢으려고 해도 찢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면서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실 때에 그 휘장이 찢어져 둘이 되었는데, 그 후에 다시 연결하여 하나로 만들어도 계속해서 찢어져 둘이 되었다고 합니다.  

히10:19-20에서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하나님에게 가게 하시는 길이 되셨습니다.   우리의 화평이신 주님은 하나님과의 평화를 이루어주셨습니다. 


2.  우리의 화평이신 주님은 사람들과의 평화를 이루어주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을 소나 돼지 같은 짐승으로 보았습니다.  우리도 유대인들이 볼 때에 똑같은 이방인이었습니다.  이방인이라고 하면 참으로 서글퍼집니다.  육체로는 이방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할례 받은 사람이라고 자랑하였고, 하나님의 택하신 민족이라고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무할례자라, 할례도 받지 못한 사람이라는 말은 지옥에 들어갈 자라는 말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밖에 있었고,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었고, 세상에서 소망이 없는 자였고, 하나님도 없는 자였으며,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유대인의 탈무드에는 하나님이 유대인이나 이방인을 같은 사람의 모양으로 지은 것은 유대 사람들이 장차 이방인들을 종으로 부려먹을 때에 혐오감을 주지 않게 만들었다는 것이요, 또한 이방 사람들을 많이 만드신 이유는 하나님이 지옥 불쏘시게 감으로 사용하라고 하셨다고 해석합니다.  정말 너무 심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유대인들의 옹졸하고 편협함에 불쌍한 마음이 듭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을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들이 하나의 이방인이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 분의 피로 하나님께 가까워졌습니다.  

14절입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막혔던 담을 당신의 육체로 허무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흘리신 피로 하나님과 가까워졌고, 다시 사람과 사람도 가까워졌습니다.   함께 예수 믿는다는 것으로 백인도 흑인도 우리 같은 누런 황인종도 주님 안에서 하나 될 수 있었습니다.  외국에 여행하다보면 우리 한국 사람은 먼저 키가 작지요, 얼굴은 누렇지요, 머리는 새까맣습니다.  백인들에게 비추어보면 참으로 볼품이 없습니다.  그들은 얼굴도 희지요, 키도 크지요, 덩치도 있지요, 그런데 우리는 왜 그렇게 왜소한지, 위축이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도 주일이 되어 교회에 가서 함께 예배드릴 때면, 백인과 흑인 그리고 다양한 세계 모든 사람들이 다 형제와 자매로 보입니다.  오랜 친구와 같은 느낌이 듭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가까워진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양반과 평민, 그리고 상놈, 천민 간의 높은 장벽이 있었습니다.  초대교회 시절에 선교사들이 와서 운동장에서 테니스를 하였습니다.  서양선교사들이 운동하는 것을 양반들이 나와서 구경합니다.  라켓으로 공을 치고, 받아 넘기는데 아주 땀을 흘리면서 운동하는 것을 보다 못해, “아니 그렇게 힘든 일인데, 종놈들에게 시키지 않고, 선교사님이 하시느라고 고생하십니까? ”라고 했다고 합니다.  양반들은 운동하면 큰 일이 납니다.  점잖게 앉아 ‘에헴’ 해야지, 운동장을 뛰어다닌다고 하는 것은 상상도 못할 노릇입니다.  그러니, 우리 사회가 어떻게 발전할 수 있었겠습니까?   

양반 상놈이 무너진 것 정말 잘 한 일입니다.  우리나라에 오신 선교사님들 중에 새뮤얼 무어(Samuel F. Moore)목사님이 계십니다.  무어목사님은 1892년도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일반 평민들을 모아 교회를 세웠습니다.   무어는 1893년에 지금의 조선호텔과 롯데호텔 중간쯤에 있던 곤당골이란 동리에 교회를 열고 ‘곤당골교회’라고 이름을 지었는데, 이 교회는 장로교회로서는 새문안 교회 다음으로 설립된 교회가 되었습니다.  이 교회가 후에 인사동으로 옮기면서 승동교회라는 이름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 곤당골교회는 백정교회라고 소문이 났습니다.  백정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교회에서 안동교회를 개척하였는데, 이 안동교회는 양반들의 교회가 되었습니다.  곤당골교회에 양반들이 나오고 보니, 백정들과 함께 앉아 예배드려야 했습니다.  양반들 가운데는 공공연하게 이런 말을 합니다. “양반이 믿는 하나님과 백정이 믿는 하나님이 동일하다는 것은 곧 양반을 능멸하는 것이다. 더욱이 한 교회 지붕 밑에서 같은 자리에 앉아 천당을 생각하는 것 자체를 용납할 수 없다.”고 말했답니다.   그래서 안동교회를 개척하여 따로 예배드리게 되었습니다.  승동교회는 상민의 교회요, 안동교회는 양반교회가 되었습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새뮤얼 무어 목사님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분이 1895-1896년에 걸쳐 3차례나 고종황제에게 백정차별철폐를 진정하므로 받아들여, 백정도 호적할 수 있게 하였고,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우리 기독교회가 들어오므로 양반과 상놈의 신분제도가 철폐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많이 가진 자와 적게 가진 자, 많이 배운 자와 조금 적게 배운 자들이 서로  용납할 수 있고, 하나 될 수 있습니다.  정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어야 합니다.  자기의 것을 내려놓고, 자기의 것을 내 것이라고 고집하지 않고, 함께 나눌 수 있는 진정한 하나 됨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지향하는 초대교회의 모습인 것입니다. 


3.  우리의 화평이신 주님은 한 성령 안에서 자기 자신과의 평화를 이루셨습니다. 

17-18절에서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평안을 전하셨습니다.  우리 성경에 평안이라고 했으나, 새번역에서는 평화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한 성령을 보내어주셨습니다.  그리고 평안을 주셨습니다.   우리 자신을 긍정적으로 보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사람이요, 자녀요, 천국 백성이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자녀들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고, 사람들 곧 이웃과의 평화를 누리고, 이제는 우리들 자신과의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고, 수치심과 죄책감, 불안에 싸여 있었습니다.  우리들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쉽게 좌절하였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을 보내어주시고, 우리에게 참 평안 주신 주님 안에서 우리 자신을 긍정적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자신과의 조화를 이루어내게 되었습니다.  

사랑하시는 교우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의 화평이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평을 이루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하나님과 원수 된 것을 소멸하셨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십니까?   지금도 이웃과 담을 쌓고, 원수처럼 지내는 이들이 있습니까?  자기 자신을 부정적으로 보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 주님을 화목제물로 삼으시고, 우리를 구원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아버지가 되셨습니다.  

이제는 주 안에서 다 용서하시고, 찾아가 사랑의 악수를 청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우리가 구원받았기에 이 세상에는 사랑하며 살아갈 사람들만 있지, 혹 우리가 미워하거나 저주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사랑하시고, 좋게 보시고, 하나님의 크신 뜻을 이루어드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피로 하나 되었습니다. 우리의 화평이신 주님은 우리로 하나님과의 평화를 이루어주셨습니다. 우리의 화평이신 주님은 사람들과의 평화를 이루어주셨습니다. 우리의 화평이신 주님은 한 성령 안에서 자기 자신과의 평화를 이루셨습니다.  하나님과의 화평, 사람들 사이의 화평, 그리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용서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보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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