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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난으로 말미암아 (히 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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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으로 말미암아 

본 문: 히브리서 2:10

포유동물인 살쾡이가 다람쥐를 잡는 방법을 아십니까? 다람쥐가 얼마나 재빠른지는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습니다. 살쾡이를 발견한 다람쥐는 쏜살같이 나무위로 기어 올라갑니다. 살쾡이는 다람쥐를 따라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무위에 따라 올라가지 않고도 다람쥐를 잡습니다. 그 원리는 참으로 놀랍습니다. 일단 다람쥐는 나무위에 올라가면서 살쾡이가 자기를 따라오는지 안 따라오는지 뒤돌아봅니다. 살쾡이는 눈을 크게 부릅뜨고 있다가 다람쥐가 돌아보는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다람쥐를 쏘아 봅니다. 

살쾡이와 눈이 마주친 다람쥐는 순간부터 겁에 질려서 꼼짝도 못하고 다른 곳으로 도망가지도 못한 채 살쾡이의 눈만 쳐다보며 몸이 얼음장처럼 굳어버린다고 합니다. 공포심이 다람쥐의 온몸을 얼어붙게 만드는 것입니다. 몸이 굳어 벼린 다람쥐는 나무에서 툭 떨어지고 맙니다. 다람쥐는 그렇게 하여 살쾡이 밥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도 우리를 삼키려는 살쾡이와 같은 세력이 있습니다. 그것은 염려와 근심과 좌절을 가져오는 고난입니다. 고난을 바라보면 누구나 다 두려워 떨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므로 공포심을 물리치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1930년대 미국 경제공황 때, 그 경제공황을 타개한 루즈벨트 대통령은 라디오 방송을 통해 국민들에게 날마다 적극적인 생각을 가지고 용기를 잃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는“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아무것도 없고 오직 두려움, 그 자체뿐입니다.”라고 연설했습니다. 

고난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고난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다보면 성공과 행복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과 시련도 있기 마련입니다. 하나님을 잘 섬긴다 하여 고난이 면제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의 박해라는 또 다른 고난을 겪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은 이 피할 수 없는 고난에 대하여 어떻게 이해하며 어떤 자세로 대처해야 하겠습니까?

一. 고난은 사람을 온전하게 합니다. 

고난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도 원하지 않는 고난이지만 불청객과 같은 고난은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그 까닭은 고난이 주는 긍정적 역할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고난의 과정이 있는 것입니다. 

1.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으로 온전케 되셨습니다. 

본문 10절에 말씀하시기를“구원의 주를 고난을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들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통해 온전케 되셨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 인품의 어떤 부족한 부분이 있어서 그것이 고난으로 온전케 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인간의 구원을 완성하셨다는 것입니다. 즉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사명을 완수하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죄로 인한 고난이 아니라 죄인인 우리들을 구원하기 위한 고난이었습니다. 

이사야 53장 5절~6절 말씀에서 밝히시기를“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들의 죄를 대신하신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통해 우리는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만일 십자가의 고난이 없었다면 예수님은 우리들의 구세주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5장 8절~10절에 기록하시기를“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하셨습니다. 

2. 모든 사람들도 고난을 통해 온전케 됩니다. 

땅속에서 막 캐어낸 광석은 별 가치가 없습니다. 뜨거운 용광로를 거치면서 불순물이 다 제거된 후 비로소 가치 있는 순금이 됩니다. 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다운 사람이 되려면 고난을 겪어야 합니다. 인격이나 지식이나 기술, 예술 등 인간의 모든 것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반드시 고난의 과정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편 119편 71절과 67절에 말씀하시기를“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미국의 존슨 전 대통령은 사람을 채용할 때 분명한 기준이 있었다고 합니다. 너무 빨리 출세한 사람이나 실패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채용하기를 꺼렸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너무 쉽게 출세한 사람은 독선적이기 쉽고, 실패의 경험이 없는 사람은 남의 아픔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고난은 인품의 부족한 부분을 보강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신약성경 야고보서 1장 2절~4절에 말씀하시기를“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하셨습니다. 

미국에 Ellsworth Kalas라는 뛰어난 설교자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설교를 시작하여, 신학생 시절에는 노련한 설교자들을 능가할 정도의 탁월한 설교로써 명성을 떨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저녁 그가 신학교 인근에 있는 한 교회에서 설교를 했을 때에도 청중들은 그의 탁월한 언변과 회중을 압도하는 음성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예배가 끝난 후 친교실에서 어느 나이 많은 평신도 지도자가 그에게 와서 설교를 칭찬하면서 한 마디 덧붙였습니다.“Kalas 전도사님, 전도사님은 정말 하나님으로부터 설교의 은사를 받으셔서 설교를 정말 뛰어나게 잘 하십니다. 설교 본문의 해석과 적용도 일반 설교자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너무나 창의적으로 잘 하십니다. 

그러나 나는 전도사님이 신학교를 졸업한 후 목사님이 되신다 해도 우리 교회 목사님으로는 원치 않을 것입니다.” 깜짝 놀란 Kalas전도사는 그 평신도 지도자에게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좀 구체적으로 설명해 줄 수 없겠느냐고 요청을 했습니다. 그러자 그 평신도 지도자는 자신의 의견을 조용히 피력했습니다. “전도사님에게는 상처가 없기 때문입니다. 전도사님은 진정 어떠한 아픔을 크게 경험해 보시지 않았기에 아픔을 당하는 사람에 대한 긍휼히 여기는 마음,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전도사님은 이론은 가지고 계시지만, 그 이론을 지원할 만한 아픔의 경험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전도사님이 앞으로 삶에서 오는 여러 상처들을 가지게 될 때, 전도사님은 진정으로 좋은 설교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고난은 사람을 성숙하게 합니다. 고난은 사람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므로 시편 119편 71절에 말씀하시기를“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二. 고난을 어떠한 자세로 대해야 할까요?

풍랑이 이는 바다에 돛을 달고 항해하는 배들은 풍랑을 대처하는 방법에 따라 목적지까지 빨리 항해할 수도 있고, 침몰할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들도 고난을 어떻게 대하는가에 따라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기적을 체험하는 기회가 되기도 하고, 실패의 덫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일본의 경영의 귀재라 불리는 마스시다 고로스께는 임종 전에 자신이 살아온 삶에 대해 말하기를“나는 세 가지의 행운을 누린 자이다. 첫째, 조실부모한 것이고, 둘째, 건강이 약한 것이고, 셋째, 초등학교를 중퇴한 것이 그것이다. 열한 살 때 부모를 잃었으니 일찍 철이 들었고, 건강이 약함으로 건강관리를 잘해서 95세를 살 수 있었으며, 배운 것이 부족하기에 열심히 듣고 배운 결과 경영의 귀재라는 평을 듣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 사람의 성공적인 삶은 좋은 배경이나 좋은 환경이 아니었습니다. 고난을 이긴 지혜요, 용기였습니다. 우리는 고난을 대하는 자세에 대해 예수님의 삶을 통해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고난을 어떻게 대하셨습니까?

1. 예수님은 고난의 때에도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장 큰 고난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의 길을 피할 수도 있었지만 피하지 아니하시고 스스로 그 길을 가셨습니다. 예수님을 잡으려온 무리들을 향해 제자 베드로가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쳐 땅에 떨어뜨렸습니다. 이때에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더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마태복음 26:52~54)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시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고자 대제사장이 보낸 무리들과 로마 군병들에게 붙잡혀 밤새 심문을 받으시고, 다음날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속죄의 사명을 받고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고난이 있다하여 하나님을 멀리하지 않았습니다. 고난과 상관없이 순종하셨습니다. 고난의 길을 순종하신 예수님의 삶에 대하여 히브리서 5장 8절~9절에 기록하시기를“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하셨습니다. 

고난의 날 하나님을 원망하며 낙심하여 하나님을 멀리하는 것은 지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인정받을 기회를 놓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고난으로 사람을 시험하십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1장 12절에 말씀하시기를“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하셨습니다. 그 사람의 신앙이 옳은 신앙인지 아닌지를 확인하는 방법 중 하나가 고난입니다.

알곡과 쭉정이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알곡은 언제나 제자리를 지킵니다. 그러나 쭉정이는 바람 따라 날아갑니다. 흐르는 물결 따라 흘러 떠내려갑니다. 그래서 농부들은 알곡과 쭉정이를 가려내는 방법으로 바람을 이용합니다. 그리고 이른 봄 못자리를 만들면서 알곡과 쭉정이 볍씨를 가려낼 때 그 씨앗을 물속에 넣습니다. 그때 알곡은 물속에 가라앉지만 쭉정이는 둥둥 떠다닙니다. 생긴 모양은 알곡과 유사하지만 물위에 뜨는 것은 틀림없는 쭉정이입니다. 농부는 그 쭉정이를 미련 없이 버립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의 이치도 이와 같습니다. 고난의 바람이 불어오고 고난의 물결이 몰아칠 때 알곡 같은 성도는 믿음의 자리를 지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합니다. 그러나 쭉정이 같은 사람은 바람 따라 물결 따라 세상 어디론가 하나님을 등지고 사라집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생명 위협의 고난이 찾아 왔지만 사명의 자리를 지켜 순종하시며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고난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깊이 깨달은 구약의 위인 욥은 욥기 23장 10절에 말하기를“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고 했습니다. 욥이란 사람은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이 독실했습니다. 욥의 인간 됨됨이에 대하여 욥기 1장 1절에 기록하기를“우스 땅에 욥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욥은 이상적인 인간상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욥의 가족과 그가 지닌 재산에 대하여 욥기 1장 2절~3에 기록하기를“그 소생은 남자가 일곱이요 여자가 셋이며 그 소유물은 양이 칠천이요 약대가 삼천이요 소가 오백 겨리요 암 나귀가 오백이며 종도 많이 있었으니 이 사람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큰 자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다복했던 욥의 가정이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예기치 못한 엄청난 고난의 회오리가 몰아 쳤습니다. 자녀 모두가 한날에 죽었습니다. 그 많은 재산은 다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욥은 건강까지 극도로 나빠져 그의 얼굴을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이러한 극심한 고난의 날에 욥이 한 말이 욥기 1장 21절~22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라고 했습니다. 또 욥은 말하기를“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욥기 23장 10절)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고난의 시험을 잘 이긴 욥을 사랑하셔서 훗날 모든 것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회복키시되 갑절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우리들도 그리스도와 욥의 신앙을 본받아 고난의 때, 하나님을 의지하고, 순종하는 복된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2. 예수님은 고난의 때에 기도하셨습니다. 

히브리서 5장 7절에 고난을 대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고 했습니다. 

고난의 날에는 하나님을 원망하기 쉽습니다. 어려운 여건만 바라보며 낙심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문제 해결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도리어 내 삶에 해를 줄 뿐입니다. 어려운 문제가 몰아닥친 고난의 날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그리스도를 본받아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기도는 고난을 이기는 열쇠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성경 야고보서 5장 13절~18절에 말씀하시기를“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 오고 디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하셨습니다. 

미국 애리조나 주의 한 농장에 강렬한 허리케인이 불어 닥쳤습니다. 허리케인은 집과 농작물 그리고 가축들까지 모두 날려버렸습니다. 농부는 절망하여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그때 무너진 닭장 속에서 벼슬이 찢기고 온몸이 만신창이가 된 수탉 한 마리가 비틀거리며 걸어 나왔습니다. 수탉은 날개를 퍼덕이며 무너지지 않은 담장 높은 곳으로 올라 아침 햇살을 바라보며 목청껏 소리를 쳤습니다. “꼬끼오” 농부는 이 모습을 보고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래 다시 일어나자. 나도 하늘을 향해 울고 있는 저 수탉처럼 다시 일어나자.” 하고 용기를 냈습니다. 

잿더미 속에서 수탉이 울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이 주신 본성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도 고난이 오면 하나님께 울부짖도록 하는 본성을 주셨습니다. 어려울 때일수록 성도들은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위기에 처할 때마다 부르짖을 수 있는 본성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본성을 찾을 때 하나님은 분명히 회복을 주십니다. 주님을 향하여 부르짖으시길 바랍니다. 

시편 50편 15절에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기를“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부르짖으며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십니다. 

세계적인 부호였던 록펠러에게 위기가 닥쳐왔습니다. 그는 친구의 권유로 광산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사기를 당해 원금을 모두 날려버렸습니다. 광부들은 밀린 임금을 요구하며 폭도로 변했습니다. 빚 독촉에 시달린 록펠러는 너무 괴로워‘자살’을 떠올렸습니다. 기업을 처음 시작할 때부터 철저한 십일조 생활을 해온 록펠러는 황량한 폐광에 엎드려 기도했습니다.“하나님, 하나님의 말씀은 일 점 일획도 틀림이 없음을 믿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왔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보여 주십시오.”하고 통곡하며 간구했습니다. 그때 록펠러의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들려오는 위로의 음성이 있었습니다.“때가 되면 열매를 거두리라. 더 깊이 파라.”이 말씀을 믿고 록펠러는 폐광을 더 깊이 파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록펠러가 제 정신이 아니라고 수군거렸습니다. 

그때 갑자기 황금대신“검은 물”이 분수처럼 치솟았습니다. 그것은 석유였습니다. 자살 직전 록펠러는 유전을 발견해 일약 거부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곧 기도의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빌립보서 4장 6절~7절에 말씀하시기를“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하셨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그 누구도 예외 없이 고난을 겪게 됩니다. 걱정근심이 없는 곳은 공동묘지뿐입니다. 근심이 있습니까? 걱정이 있습니까? 그것은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고난을 어떻게 대처해 나가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성공과 실패, 행복과 불행이 결정됩니다. 고난을 대하는 태도에는 대게 세 가지 유형으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첫째, 체념형입니다. 이 유형은 역경을 만나면 쉬 포기하여 그대로 주저앉아 버립니다. 소극적이고 비생산적인 사람입니다. 

둘째, 도피형입니다. 위기만 벗어나고 보자는 유형입니다. 시련을 피하기만 하는 사람은 영광의 면류관이 없습니다. 
한국교회 순교자의 상징인 주기철 목사님은 1940년 여름 그의 마지막 설교에서 이렇게 다짐했습니다. 

주님을 위하여 오는 고난을 내가 피하였다가 
이다음 내 무슨 낯으로 주님을 뵈오리이까?

주님을 위하여 이제 당하는 수욕을 내가 피하였다가 
이다음에 너는 내 이름과 평안과 즐거움을 다 받아 누리고 
고난의 잔은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나는 무슨 말로 대답하랴.

주님을 위해 오는 십자가를 내가 이제 피하였다가 
이다음 주님이 너는 내가 준 유일한 유산인 고난의 십자가를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나는 무슨 말로 대답하랴

셋째, 돌파형입니다. 이러한 사람의 생각은 언제나 창조적이고 진취적입니다. 어떠한 경우라 할지라도 물러서지 않습니다. 포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며 절대 소망의 삶을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간구합니다. 이러한 사람에게는 반드시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역대하 16장 9절 말씀에“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라고 하셨습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어렵다하여 낙심하며 한숨 쉬며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은 신앙인의 자세가 아닙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만물의 창조자이시며 우리의 구세주이신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6장 33절에 말씀하시기를“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8장 20절에도 말씀하시기를“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하셨습니다. 

일점일획의 변함도 없으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어떠한 경우라 할지라도 주님의 말씀에 변함없이 순종하는 것은 성도의 지혜입니다. 
어떠한 경우라도 낙심하지 아니하고 간절히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응답하실 의무가 있고,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은 아버지 하나님께 요구할 자격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믿음 안에서 인내와 소망과 간구로 험한 세파 이기고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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