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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달리다굼 (막 5:3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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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다굼 (막 5:35~43)


유대인의 이야기 가운데 ‘하늘을 나는 말’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왕의 노여움을 사서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일 년 여유를 주신다면 임금님이 가장 애지중지 하시는 말에게 하늘을 날도록 가르쳐 보이겠습니다. 일 년이 지나가도 하늘을 날지 못한다면 그때 가서 저를 죽여주십시오”라고 그 사람이 말하였습니다.

이 탄원이 받아들여져서 왕은 가장 사랑하는 말이 하늘을 날지 못한다면 그를 사형에 처하겠다고 하였습니다. 동료 죄수들이 “말이 어떻게 하늘을 난단 말인가?” 하고 그에게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일 년 이내에 국왕이 죽을지도 모른다. 혹은 내가 죽을지도 모른다. 더욱이 그 말이 죽을지도 모르지 않는가. 일 년 이내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미래의 일을 누가 알겠나? 일 년 뒤에는 말이 정말 날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거든.”

이 이야기는 인생의 숱한 가능성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절망의 상태에서도 체념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비록 지금은 말이 하늘을 날 수 없더라도, 마지막 한 수가 인간에겐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그 이름은 희망입니다.
교회 안에서는 희망을 소망이라는 말로 바꾸어 부르기도 합니다. 희망은 다른 말로는 꿈이라고도 부를 수 있습니다. 희망이 있는 사람 꿈이 있는 사람은 결코 절망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모든 것이 절망적이라고 하더라도 그에게는 아직 희망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회당장 중의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아래 엎드리어 간곡히 구하여 이르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합니다. 이에 그와 함께 가실 새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밉니다.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한 여자가 있어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예수의 소문을 듣고 예수를 찾아와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댑니다. 

그것은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순간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십니다. 제자들은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하였지만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보시니 여자가 자기에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쭙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 지어다” 말씀하십니다. 그러던 차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이르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라고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건 절망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야이로가 예수님을 찾아왔던 것은 그만큼 다급했기 때문입니다. 정말 딸이 거의 죽게 된 상황이 아니라면 결코 예수님을 찾아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게 회당장이 자존심입니다. 그랬기에 그는 많은 기회가 있었을 텐데도 지금까지 예수님을 찾아오지도 딸을 예수님께 데려오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12살이면 한참 피어나는 나이입니다. 

그런 딸이 시름시름 앓기를 시작하더니 이제는 의사도 고개를 흔듭니다. 더 이상 살 가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가족들이나 이웃들 가운데서 예수님을 찾아가 보라는 말을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를 만났던 사람들마다 어떤 병에 걸렸든지 다 나았다는 말도 들었을 것입니다. 거기다가 얼마 전 들려왔던 나인성 과부의 아들이 다시 살아난 이야기라든가 거라사 군대귀신 들린 자가 고침을 받은 이야기가 저로 하여금 용기를 내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더 이상 머뭇거릴 시간이 없습니다. 

그렇지 않는다면 딸아이는 다시는 회복치 못하고 죽을 것입니다. 그래 예수님을 찾아온 길입니다. 그런데 그 도중에 집에서 사람들이 찾아와서는 하는 말이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그렇지 않아도 저들로서는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습니다. 다급한 나모지 마지못해 예수님을 찾아가기는 했지만 그래도 마음 상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이제 딸도 죽었으니 더 이상 예수와 함께 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곧 절망입니다. 

그 집을 향해 열려지던 복음의 문이 닫히는 상황입니다. 막 마음을 열던 사람들이 다시 마음을 닫아버립니다. 조금 힘을 얻는가 싶던 사람이 다시 절망에 빠지고 맙니다. 그대로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잠시는 있었는데 그런 희망마저도 다 사라져버리는 그런 상황들이 이렇듯 우리 가운데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사람마다 그 원인은 다르겠지만 결과는 같습니다. 오죽하면 죽음을 생각하겠습니까? 자기를 향해서도 그렇고 다른 사람을 향해서도 “차라리 죽어라 죽어.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하는 것은 도무지 해쳐나갈 길조차 보이지 않는 깊은 수렁에 빠져 있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 앞에는 절망이란 없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소망이 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야말로 희망의 태양입니다. 그 안에 생명의 길이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구원의 길이 있습니다. 그 소망의 끈을 놓지 마십시오. 보십시오.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왜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십니까? 이는 우리 가운데 두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두려움과 염려는 소리 없이 우리 마음을 파고들어 우리 마음속에 절망과 좌절을 심어줍니다. 그리고 절망과 좌절이 우리 마음을 죽이고 마음이 죽으니 몸도 따라 죽더란 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곧 예수님께서 모든 두려움의 원인이 되는 것들을 해결해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그 능력이 주님께 있습니다. 주님은 죽은 자도 살리시는 분입니다. 아니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영원한 생명의 길로 이끄시게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이십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믿음을 주시고 능력을 주십니다. 이윽고는 절망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감사가 되게 이끄십니다. 

한때는 짙은 어두움밖에 없던 곳이 밝은 빛으로 가득한 곳으로 만드시며 슬픔과 애통으로 가득했던 곳이 기쁨과 평안으로 가득한 곳으로 만들어주시는 분이 바로 우리의 구주가 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분명 야이로는 절망이었습니다. 딸이 이제는 죽었다는 것입니다. 지금 주님이 야이로의 집으로 가시는 것은 야이로의 딸을 고치시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죽었으니 구원받아 살게 하여 달라던 그의 바람은 이루어질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예수님에게는 병든 자를 고치는 거나 죽은 자를 살리는 거나 다 똑같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못하실 일이 없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이 없어서 주님의 능력을 제한하는 자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주님은 다 하실 수 있는데 우리의 믿음이 없어서 그건 죽었다 깨어나도 안 된다고 합니다. 말 그대로 죽었다 깨어나면 다 되는 거지 안 될게 어디 있겠습니까? 의사가 고치지 못하는 병이라도 주님은 고치십니다. 죽은 자도 살리시는 주님이 고치지 못할 병이 어디 있습니까? 또한 주님이 함께 하실 때 이루지 못할 일이 무엇이 있겠고 해결하지 못할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돈 가지고 권력 가지고도 못할 일이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다 하실 수 있습니다. 그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주님이 다 해결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다 해결할 테니 너는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를 절망케 하는 일이 있습니까? 염려하고 두려워하게 하는 것이 있습니까? 주님의 말씀처럼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망하며 비웃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쉰두 살의 남자가 노만 빈센트 필 박사를 찾아와 극도의 절망에 사로잡혀 말했습니다. 
“이제는 끝장났어요. 사업에 실패하여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필 박사가 말했습니다. 
“모든 것을요? 그럼 우리 한번 종이에 당신의 남아있는 것을 적어봅시다. 부인은 계십니까?” 
“예, 좋은 아내입니다.” 

필 박사는 종이에 ‘좋은 아내’라고 적었습니다.
“자녀들은 있습니까?” 
“예, 귀여운 세 아이가 있습니다.”
“친구는요?” 
“있습니다.”
“건강은요?” 
“좋은 편입니다.”

계속해서 종이에 적어나가던 남자가 말했습니다.
“어쩌면 내 사정이 그리 나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될 때 한번쯤 음미해 볼만한 이야기가 아닐까요?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이르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라고 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이를 고쳐달라고 예수님을 찾아갔는데 그 아이는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절망이라는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누구나 다 생각하기를 죽으면 끝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참으로 우스운 것은 죽으면 끝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장례를 치르면서 뭐라고 합니까? 명복을 빕니다. 좋은 곳으로 가십시오. 또는 극락왕생하십시오, 그럽니다. 그렇다면 이건 끝이 아니잖아요? 하지만 이 세상에는 더 이상 없지 않느냐고 합니다. 그래요 부활을 알지도 못하고 믿지도 못하는 사람들로서는 당연한 반응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야이로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고 하셨고 다른 사람들은 따라오지 말라고 하신 다음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데리고 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셨습니다. 가보니 사람들이 떠드는 것과 사람들이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셨습니다. 

그래 예수님께서 집 안으로 들어가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그들이 비웃었다고 합니다. 그들로서는 비웃는 것이 당연합니다. 아니 분명히 죽었는데 그리고 죽었다는 소식을 전했는데도 불구하고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니 이처럼 어이없는 말이 어디 있습니까? 아이가 죽었으니 슬픔에 잠겨 떠들고 우는 것이 당연한데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니 세상에 그런 말이 어디에 있습니까? 제게 정신이 똑바로 박힌 사람이야? 

어찌 온전한 정신이라면 초상집에서 떠들며 우는 것을 가지고 이야기를 할 수 있어? 더군다나 죽은 사람을 앞에 놓고서 하는 말이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니 정말 미쳤구먼. 그래 비웃을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누가 말한다고 하면 비웃음 사기가 쉽습니다. 말도 안 되는 뚱딴지같은 이야기를 한다고 할 때 비웃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그건 믿음의 길이 또한 그렇습니다. 그 세계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로서는 믿음의 길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길입니다. 

그들로서는 마음이 가려져 있고 눈이 가려져 있으니 알지도 못하고 알지를 못하니 보아도 그게 무언지 알 수가 없는 것 당연합니다. 예를 들어서 쇳덩어리가 물에 뜰 수가 있겠습니까? 일반적으로 쇠는 물에 뜰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 쇠를 그릇처럼 만들면 물에 뜹니다. 자그마치 수십만 톤 무게의 삼백 미터 이상 길이의 배가 물에 뜨지를 않습니까? 그건 부력 때문에 그런데 부력이 뭔지 모르는 사람은 쇠가 물에 뜬다고 하면 당연히 비웃지 않겠습니까? 

절망하는 이유 역시 도무지 길이 없을 때 절망합니다. 어떤 방법이 없어요. 해쳐나갈 힘도 없고요. 방법도 없고 능력도 없고 그렇다고 도울 사람도 없는 입장에서는 절망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지만 절망은 포기로 이어지고 이윽고는 죽음에 이르고 맙니다. 비웃음은 사람을 냉소적인 사람으로 만들고 이윽고는 매사에 부정적인 사람으로 바꾸어갑니다. 하지만 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절망하고 비웃고만 있다면 이처럼 어리석은 사람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그 주님이 또 말씀하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 이는 곧 주님이 해결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처럼 죽은 것이 아니라 자는 것이라면 이건 아주 쉽습니다. 깨우기만 하면 되니까요. 그렇습니다. 주님 앞에는 죽음이 없어요. 오직 잠들었을 뿐입니다. 우리의 생각이 잠들었고 우리의 환경이 잠들었고 우리의 몸이 잠들었고 우리의 시간들이 잠들어 있을 뿐입니다. 그러기에 깨우면 됩니다. 그걸 누가 깨웁니까? 주님이 깨우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잠들어 있는 모든 것을 깨워주옵소서 간구함으로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잠들어 있는 여건들을 깨워 일으키시는 귀한 역사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달리다굼의 역사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다 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가 열두 살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이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시기 전에 먼저 떠들며 우는 자들과 주님이 말씀하심에도 불구하고 비웃고 있는 사람들을 다 내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오직 아이의 부모와 제자 세 사람만 데리고 아이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는 아이의 손을 잡고 달리다굼 하시니 아이가 일어나 걸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다 내보내셨을까요? 그것도 일부가 아닌 다 내보내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믿지 못하고 절망하며 비웃는 자들 앞에는 아무런 역사가 없다는 것입니다. 절망하는 자에게서 무슨 역사가 나타날 수 있겠습니까? 비웃음으로 무슨 역사를 나타낼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역사는 오직 두려워하지 않고 믿기만 하는 자에게 나타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여기 다른 사람은 몰라도 아이의 부모는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 그래 우리 아니가 다시 살아날 수 있어 하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건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는 주님의 모습을 보았던 세 제자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더군다나 주님이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까지 표현하셨다면 이건 틀림이 없는 것입니다. 잠들었으니까 깨우면 되는 것 아냐 그건 뭐 어려운 일도 아니데 쉽다 아주 쉬워. 그들 마음에 이런 믿음으로만 가득합니다. 그러기에 달리다굼은 아무데서나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이런 믿음이 있는 곳에 나타나는 것이 바로 달리다굼의 역사입니다. 

오늘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들이 있는 것은 곧 마땅히 있어야할 것이 부족하거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 부족한 것을 갖추기 위해서 힘을 쓰지만 그게 쉽지가 않습니다. 그런 시간이 오래 지속되다 보면 나도 모르게 절망에 빠져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코 두려워할 이유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내 몸이 너무 피곤해서 무얼 할 수도 없을 정도입니다. 그러면 그 몸을 가지고 억지로 무얼 하려고 하지 마세요. 그냥 누워 자버리세요. 그리고 나면 다음 날 맑은 정신으로 일어나 더 쉽게 일을 해나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피곤하다고 하면서도 일을 놓지를 못합니다. 

집안이 돼지우리 같아서 치우지 않고는 잘 수가 없데요. 정말 그런가요? 잠이 들고나면 돼지우리에 있던 어디에 있든 뭐가 다른 게 있습니까? 그걸 먼저 치워야 된다고 솜처럼 무거운 몸을 이끌고 덤벼드니 이거 하면 저게 눈에 띄고 저거 하면 이게 또 눈에 들어와 결국 빨리 자야지 하던 사람이 더 늦게 눕지를 않습니까? 그러니 더 피곤하고 더 힘들어지죠? 그냥 내 마음만 바꾸면 돼요. 누가 보면 어떡하냐고요? 누가보고 한 마디 한들 그냥 흘려버리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걸 못 견디고 계속 매이다 보니 나중에는 내 몸이 견디지를 못해요. 그러다 병원에라도 입원한다 칩시다. 그러면 집은 또 누가 치우죠? 더 돼지우리처럼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병원에서도 집안 걱정을 하고 있어요? 하지만 정작 걱정해야 할 사람은 자신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절망하고 비웃은 사람들의 문제는 결국 예수님을 바로 알지 못한다는데 있습니다.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신다는 것을 분명히 믿는다면 우리가 절망할 이유도 비웃을 이유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서 바로 알아야 됩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주님이 하신 말씀처럼 우리는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면 됩니다. 다른 사람이 한 말이 아닙니다. 주님이 직접 주신 말씀입니다. 

그 주님이 오늘 우리들에게도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염려할 일이 있느냐? 두려움이 있느냐?: 근심 걱정이 있느냐?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설사 그것이 죽음에 이르는 길이라 해도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시간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그 믿음은 내게도 주옵소서. 나도 그렇게 믿기를 원합니다. 내 마음에 두려움이 아닌 믿음으로만 가득하게 하옵소서 기도하시고 그 구원의 주가 되시고 믿음의 주가 되시는 주님만 바라보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새끼 고양이 한마리가 그만 우물 속에 빠졌습니다. 그 우는 소리를 듣고 농부가 달려왔습니다. 우물 밑을 내려다보니 새끼 고양이가 물속에서 나와 돌출된 돌 위로 올라와 있었습니다. 농부는 급히 양동이에 끈을 매어서 우물 속으로 내려 보낸 후 어떻게 해서든지 그 새끼 고양이를 양동이 속으로 유도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새끼 고양이는 작은 앞발을 뻗어 양동이에 오르려다가는 발을 다시 거두고 절망적으로 울어댈 뿐이었습니다. 그것은 쓸데없는 일이었습니다. 고양이는 오직 그 돌에서부터 양동이로 속히 옮겨야만 구원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은 한참이나 계속되었습니다. 고양이는 양동이 속에 물이 차 있기 때문에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잔뜩 겁이 나서 이렇듯 주춤거렸던 것이었습니다. 마침내 새끼 고양이는 오랜 실랑이에 지친 나머지 하는 수 없다는 듯 양동이 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이제 문제는 해결되었습니다. 농부는 그것을 끌어 올려 땅바닥에 고양이를 안전하게 놓아 주었음은 당연합니다. 구원의 길을 눈앞에 두고 망설이며 애쓰던 사람들은 결국 자기의 몸이 피곤해지고 아무방도가 없어졌을 때에야 몸을 맡깁니다. 양동이 속에 들어온 생명을 하나님께 구원으로 이끄시는 것은 간단하며 순식간에 이루실 수 있는 것입니다.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가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그들을 많이 경계하시고 이에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십니다. 어찌 생각하면 사람들에게 크게 소문을 내라고 하셔야 마땅할 것 같은데 어째서 예수님께서는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하신 것일까요? 그것은 정작 역사를 일으키신 주인공 되시는 예수님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없고 그저 나타난 역사에만 관심이 집중되어서는 안 된다는 주님의 경고입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두려워하지 않고 믿는 것이요 그를 통해서 이루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뜻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그 일을 통해서 예수님이 나타내고자 하시는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무엇을 기뻐하시고 무엇을 이루고자 하시는가를 우리가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뜻은 어디가고 무엇을 하든지 내 생각에 사로잡혀 내가 기뻐하고 내가 원하는 것을 앞에 내세우고 있지는 않습니까? 세상에 의미 없는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을 통해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계획하심 하나님의 뜻을 우리는 바르게 알아야 하고 두려워하지 않고 믿기만 할 때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도록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두려워하지 않고 믿었던 야이로의 믿음이 그냥 생겨진 것이 아닙니다.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일, 거라사 귀신들린 자를 고치신 일, 열두 해 혈루병 들려 앓던 여인을 고치신 일들에 대해 듣기도 하고 직접 눈으로 보고 한 것이 그로 하여금 이런 믿음에 이르도록 만들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오늘 우리들에게 주어진 어찌 보면 절망할 수밖에 없고 좌절할 수밖에 없는 일들이야말로 오히려 모든 문제를 해결해 나가기 위한 열쇠가 된다는 것을 우리는 먼저 알아야 하는 것이요 그 모든 열쇠의 주인공이 바로 우리 주님이시라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문재 해결의 열쇠를 찾으려 하지 마십시오. 그건 헛된 수고일 뿐이요 결국은 절망에 빠지게 만들 뿐입니다. 또한 믿기만 하라고 할 때 비웃지 마십시오. 누군가는 말합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할 말이 없으면 믿기만 하라고 하고 기도하라고만 한다고요. 아니요. 그게 열쇠입니다. 두려워하지 않고 믿기만 함으로 주님께 맡길 때 주님은 달리다굼 하십니다. 기기서 일어남이 있습니다. 이 달리다굼의 역사가 오늘 우리 모두의 삶에 나타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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