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서두르지 말라 (사 5:18~21)

  • 잡초 잡초
  • 219
  • 0

첨부 1


서두르지 말라 (사 5:18~21)


[거짓으로 끈을 만들어 악을 잡아당기며, 수레의 줄을 당기듯이 죄를 끌어당기는 자들에게 재앙이 닥친다! 기껏 한다는 말이 “하나님더러 서두르시라고 하여라. 그분이 하고자 하시는 일을 빨리 하시라고 하여라. 그래야 우리가 볼 게 아니냐. 계획을 빨리 이루시라고 하여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께서 세우신 계획이 빨리 이루어져야 우리가 그것을 알 게 아니냐!” 하는구나. 

악한 것을 선하다 하고 선한 것을 악하다고 하는 자들, 어둠을 빛이라고 하고 빛을 어둠이라고 하며, 쓴 것을 달다고 하고 단 것을 쓰다고 하는 자들에게, 재앙이 닥친다!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슬기롭다 하는 그들에게, 재앙이 닥친다!]

• 포도원 노래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거리 한쪽에 한 사람이 멈추어 섭니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조용히 노래를 시작합니다. 한 두 사람이 발걸음을 멈추고는 그 낯선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그가 부르는 사랑의 노래는 더 많은 사람들의 발걸음을 잡아끌었습니다. 바람결에 들려오는 그의 노래는 ‘포도원’에 빗댄 사랑 이야기였습니다. 노랫꾼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기름진 언덕에서 포도원을 가꾸고 있다’고 노래합니다. 흥미로운 이야기에 사람들은 귀를 기울입니다. 

노랫꾼은 계속해서 포도원주인이 ‘땅을 일구고 돌을 골라내고, 아주 좋은 포도나무를 심었다’고 노래합니다. 주인은 포도원 한 복판에는 망대를 세우고, 거기에 포도주 짜는 곳도 파놓았습니다. 노래를 듣는 사람들은 그 다음 상황을 머리에 그렸을 것입니다. 나무에 주렁주렁 달린 탐스러운 열매, 생각만 해도 흐뭇합니다. 하지만 낭만적이고 밝고 따뜻했던 사랑 노래가 돌연 비장한 음조로 바뀝니다. 노랫꾼은 포도원주인의 실망감을 노래합니다. 좋은 포도가 맺히기를 기다렸지만 열린 것이라곤 들포도뿐이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탄식소리가 들리는 듯하지 않습니까? 

노랫꾼은 그런 공감에 힘입은 듯 포도원주인의 심정이 되어 예루살렘 주민들과 유다 사람들을 배심원으로 초대합니다. 포도원주인과 포도원 사이에서 한 번 판단하여 보라는 것입니다. “내가 나의 포도원을 가꾸면서 빠뜨린 것이 무엇이냐? 내가 하지 않은 일이라도 있느냐? 나는 좋은 포도가 맺기를 기다렸는데 어찌하여 들포도가 열렸느냐?”(5:4) 그 안타까움에 공감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겁니다. 그런데 돌연 포도원주인의 성마른 듯한 말이 들려옵니다. 

이제 그 쓸모없는 포도원을 황무지로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가지치기도 못하게 하고, 북주기도 못하게 하고, 찔레나무와 가시나무가 자라도 뽑아내지 않고, 비조차 내리지 않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노래를 듣고 있던 이들은 이 노랫꾼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단순한 사랑노래가 아님을 어렴풋이 알아차립니다. 그때였습니다. 노랫꾼은 비유의 가면을 벗어던지고 직정적으로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주님의 포도원이고 유다 백성은 주님께서 심으신 포도나무다.” 포도원주인이신 주님은 백성들에게서 선한 일과 옳은 일을 기대하셨는데, 그들이 사는 땅에서 보이느니 살육이요 들리느니 그들에게 희생된 사람들의 울부짖음뿐이었다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이 노랫꾼은 이사야입니다.

• 하나님의 기대와 실망

대체 하나님의 포도원을 이 지경으로 만든 것은 무엇입니까? 현상적으로 보면 그것은 사람들의 과도한 욕망입니다. 그게 인간관계를 망치고, 세상을 살벌한 곳으로 바꿉니다. 물론 욕망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삶의 의욕이기도 하니까요. 아무 것도 바라는 것이 없는 사람의 생은 무기력합니다. 문제는 과한 것입니다. ‘지날 과過’ 자가 들어가서 좋은 말이 별로 없습니다. 

‘과도, 과로, 과식, 과오, 과잉…’ 물론 찾아보면 없기야 하겠습니까만 ‘과’는 늘 병적인 상태와 연관이 됩니다. ‘과공비례過恭非禮’라는 말이 있지요? 지나친 공손은 오히려 예에서 벗어난다는 말입니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정도를 지나침은 미치지 못한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욕망이 과하면 사람은 자기 삶의 주체로 살 수가 없습니다. 욕망의 부림을 받는 노예로 전락하기 때문입니다. 

사나운 말의 고삐를 낚아채는 마부처럼 우리도 욕망의 고삐를 잘 낚아챌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도 길들지 않는 욕망을 향해서는 퇴거를 명령해야 합니다. 과도한 욕망에 휘둘리지 않을 때 우리는 자유의 선물을 누리고, 다른 이들을 내 삶 속에 맞아들일 여백도 만들 수 있습니다. 이사야는 욕망의 포로가 된 이들의 삶과 그 결말을 기가 막히게 표현합니다.

“너희가, 더 차지할 곳이 없을 때까지, 집에 집을 더하고, 밭에 밭을 늘려 나가, 땅 한가운데서 홀로 살려고 하였으니 너희에게 재앙이 닥친다.”(5:8)

왠지 오늘의 현실을 보는 듯하지 않습니까? <부동산계급사회>라는 책을 쓴 손낙구 씨는 부동산투기에 의해 사회계급이 갈리고 삶의 질이 결정되는 우리 사회의 단면을 신랄하게 고발하고 있습니다. 직업과 노동을 통한 소득보다는 부동산을 중심으로 한 자산 소득이 부의 잣대가 되는 사회는 결코 건강한 사회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재건축이니 뉴타운개발이니 야단들이지만, 결국 이런 개발을 통해 살찌는 것은 토건회사와 지주들 밖에는 없습니다. 용산참사는 부동산계급사회가 얼마나 폭력적이고 악마적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입니다.

이사야를 통해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은 오싹할 정도로 무섭습니다. 그들이 무분별하게 차지한 많은 집들이 황폐해지고, 크고 좋은 집이라도 텅 빈 흉가가 되어 사람이 살지 않게 될 것이고, 땅은 척박해져서 소출을 내지 못하게 될 것이라라는 것입니다. 소비의 즐거움과 향락에 취해 사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준엄한 목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예언자의 눈에는 그들처럼 가련한 사람이 없습니다. 

“스올이 입맛을 크게 다시면서, 그 입을 한없이 벌리니, 그들의 영화와 법석거림과 떠드는 소리와 즐거워하는 소리가, 다 그 곳으로 빠져 들어갈 것이다.” (5:14)

이미 사회적 처벌을 받은 사람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 적절한지는 모르겠지만, 검찰청장 후보로 나왔던 천성관 씨는 우리 사회 지도층들의 ‘도덕적 해이’가 어느 정도에 이르렀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입니다. 정계, 관계, 재계, 언론계가 한 통속이 되어 자기들만의 리그를 만든 채 살고 있음을 일반 서민들은 참담한 심정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귀에는 천둥소리보다 쩌렁쩌렁하게 들려오는 예언자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들이 부정한 방법으로 누리는 영화로움은 사실은 스올로 가는 직행로라는 것입니다. 

• 하나님의 시간
권력과 돈의 단맛에 취한 이들에게 하나님은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늘 침묵하는 것처럼 보이는 하나님은 무기력한 존재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정의만을 바라보며 사는 이들을 조롱하듯 말합니다.

‘하나님더러 서두르시라고 하여라. 그분이 하고자 하시는 일을 빨리 하시라고 하여라. 그래야 우리가 볼 게 아니냐. 계획을 빨리 이루시라고 하여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께서 세우신 계획이 빨리 이루어져야 우리가 그것을 알 게 아니냐!’(5:19)

이들은 거짓으로 끈을 만들어 악을 잡아당기는 이들입니다. 수레의 줄을 당기듯이 죄를 끌어당기는 자들입니다. 기세등등한 이들 때문에 밑바닥으로 내몰린 이들의 신음소리는 깊어만 갑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역사를 이끌어가심을 믿습니다. 하지만 가끔은 의심이 들 때도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정의가 승리할 것임을 믿습니다. 하지만 가끔은 현실 앞에 기가 질릴 때도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길이 우리 길보다 높고, 하나님의 생각이 우리 생각보다 깊다는 것을 믿습니다. 하지만 가끔은 하나님의 지혜가 답답할 때도 있습니다. 문제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시는 시간에, 원하시는 방법대로 일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속도에 적응하지 못하기에 우리 마음은 늘 조급합니다. 안달을 합니다. 그 조급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침묵 속에 우리 마음을 놓아두어야 합니다. 엎드리지 않고는 이 회의와 불안의 늪을 건널 수 없습니다. 침묵의 소리를 들은 히브리의 한 시인은 우리에게 세상의 신비에 대해 들려줍니다.

“낮은 낮에게 말씀을 전해 주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알려 준다. 그 이야기 그 말소리, 비록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그 소리 온 누리에 울려 퍼지고, 그 말씀 세상 끝까지 번져간다.”(시19:2-4a)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신비입니다. 더함도 덜함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속도에 적응해야 합니다. 그래야 삶을 즐길 수 있습니다. 세상이 내 뜻대로 안 된다고 안달할 것도 없고, 내 뜻대로 되었다고 날뛸 것도 없습니다. 그 순간이 내게 주는 은총을 한껏 맛보며 살면 됩니다. 과정보다는 결과에 따라 평가받곤 했기에 어느덧 성과주의적 삶의 태도를 익히며 살아온 우리들, 경쟁의식이 내면화된 우리들은 행복을 누릴 수 없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피아노 경연대회 중 최고로 치는 게 쇼팽 콩쿠르입니다. 5년마다 열리기 때문에 웬만해선 평생에 한두 번 출전할 수 있는 게 고작이니, 거기서 입상한다는 건 대단한 일입니다. 2005년 바르샤바에서 열린 쇼팽 콩쿠르에는 한국의 젊은 피아니스트가 무려 세 명이나 본선에 올랐고, 그 중 임동민, 동혁 형제가 2위없는 공동 3위에 입상했습니다. 그런데도 임동혁은 조금 화가 난 듯했습니다. 

그는 형과 공동으로 3위가 된 사실뿐만 아니라 자기가 1등을 차지하지 못한 결과에 불만이었습니다. 1등은 폴란드 청년 블레하츠 라파우에게 돌아갔습니다. 일부 네티즌들은 심사위원들의 부당한 차별 때문에 임동혁이 1등을 빼앗겼다고 흥분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 콩쿠르에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던 서울대 강충모 교수의 견해는 달랐습니다. 

라파우는 다른 이들보다 월등한 기량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른 열한 명은 콩쿠르에 나와 승부를 가리는 듯했지만, 라파우는 그냥 연주를 들려주고 간 것 같았다는 것입니다. 심사위원 중 한 사람은 “열한 명의 피아니스트와 한 명의 아티스트가 있다”고 평했다고 합니다. 라파우는 입상을 축하하는 심사위원들 앞에서 몹시 수줍어했다고 합니다. 강교수는 피아노 연주 실력뿐만 아니라 전반적으로 공부하여 인격을 쌓는 일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고 고백했습니다.(차병직, <<상식의 힘>>, 홍익출판사, 2009, 195-6쪽 참조) 

• 함께 만들어갈 세상의 꿈
고려대학교의 강수돌 교수는 우리 사회를 새롭게 세우기 위해서 마음속의 사다리부터 걷어내자고 말합니다. 옳은 말이지만 쉽지는 않습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를 경쟁의 전쟁터로 내몰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등만이 살아남는다는 살벌한 말은 자본주의 세상이 우리 영혼에 가하는 폭력입니다. 하지만 일등 아닌 사람도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조금 덜 갖고 조금 더 불편하게 살기로 마음먹는 순간 행복이 우리 곁에 다가옵니다. 세상에는 계시록에 나오는 두 짐승(계13장)처럼 용에게서 받은 권세를 가지고 사람들을 미혹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이사야는 그런 이들의 정체를 이렇게 폭로합니다.

“악한 것을 선하다고 하고 선한 것을 악하다고 하는 자들, 어둠을 빛이라고 하고 빛을 어둠이라고 하며, 쓴 것을 달다고 하는 자들에게, 재앙이 닥친다!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슬기롭다 하는 그들에게, 재앙이 닥친다!”(5:20-21)

그들은 우리의 가치관을 혼돈시키는 자들입니다. 미가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 세 가지가 있다고 말합니다. 오로지 공의를 실천하는 것, 인자를 사랑하는 것,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노자도 비슷한 말을 했는데 그는 자기에게 세 가지 보물이 있다고 했습니다. ‘인자함慈, 검소함儉, 중뿔나게 나서지 않는 것不敢爲天下先’이 그것입니다. 정신을 차린 사람들은 무엇이 우리 삶에 가장 필요하고 중요한 것인지를 잘 압니다. 하지만 악한 영들이 지배하는 세상은 우리의 가치관을 뒤바꾸어놓으려고 합니다. 악한 것을 선하다 하고, 어둠을 빛이라 하고, 쓴 것을 달다 합니다. 

우리 사회에 반사회적 행동이 늘어나고, 가족관계가 해체되고, 공공선에 대한 무관심이 증대되고, 노골적인 개인 욕망을 추구하는 것이 부끄러움이 되지 않는 것은 악한 영에 사로잡힌 이들의 속임수에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전도된 가치관을 바로잡는다는 뜻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과도한 욕망의 덫에 빠진 이들은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우리 영혼에 난 커다란 허무의 구멍은 나눔과 돌봄과 섬김의 기쁨을 통해서만 메울 수 있습니다. 물론 사람마다 가치관의 우선순위는 다 다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이들은 자기 삶의 순도를 재는 시금석을 늘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나의 말과 행동이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것인가를 늘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믿음은 실천을 요구합니다. 그 실천은 의지가 애착하는 것들의 희생을 요구합니다. 애착으로부터 벗어나는 순간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우리 속에 비쳐들기 시작합니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뜻에 맞게 마음 아파하는 것은, 회개를 하게 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므로, 후회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 일로 마음 아파하는 것은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고후7:10)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게 마음 아파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사회를 병리적 증상에서부터 치유할 수 있는 길입니다. 

하나님이 지금 우리 사회를 보시면서 마음 아파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주변부로 내몰린 이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이십니다.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 그들의 삶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그들 곁에 다가서지 않고, 그들의 살 권리를 찾아주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믿는다는 우리의 고백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이 무더운 여름날, 하나님의 마음은 얼마나 답답하실까 생각하니 죄송스런 마음뿐입니다. 히브리의 지혜자는 “믿음직한 심부름꾼은 그를 보낸 주인에게는 무더운 추수 때의 시원한 냉수와 같아서,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준다”(잠25:13)고 노래했습니다. 우리의 삶이 주님께 바치는 시원한 냉수가 된다면 그보다 더 복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 꿈 하나 마음에 품고 이 험한 세월을 건너십시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