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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소유권이 이전된 몸 (고전 3:18~23, 6: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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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권이 이전된 몸 (고전 3:18~23, 6:19~20)


한 주간 평안하셨는지요? 집중 폭우로 곳곳에 많은 피해가 났습니다. 어려움 중에도, 예배하러 오신 교우들께 하나님 크신 은총이 임하시기를 빕니다. 지난 주일, 바울이 에베소 감옥에서 쓴, 빌레몬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의미가 무엇인지?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계속해서, 바울서신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인 됨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 오래 전, 텔레비전 방송에서 진품명품을 감정해주는 프로가 있었습니다. 가정(개인적으로)에서, 소장해오던 그림, 책, 골동품들이 진품인지? 명품인지? 가치가 있다면 어느 정도 가치가 되는지? 감정사들이, 감정해주는 프로지요. 

그 프로에, 어떤 한 중년 남자분이, 집안 대대로 고이 간직해 오던 300년 된 고문서 한 장을 들고 나왔다고 합니다. 이것을 고이 간직하라는 명을 받은 후손들이 대단한 가치가 있는 조상의 유품인 줄 알고, 가지고 있다가 가지고 나왔던 모양입니다. 출연한 주인공은, 그 문서의 추정가치를 300만원이라고 적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감정사들은 그 문서의 가치를 5만원 밖에 되지 않는다고 했다고 합니다.

진행자가 놀라서, 물었습니다. “왜, 5만원이라는 금액이 나왔습니까?” 그러자 감정사는 “예, 노비문서입니다.” 그 고문서가 비록 300년이 되기는 했지만, 5만원의 가치 밖에 되지 않는 노비문서였다는 겁니다. 무슨 얘기입니까? 그 출연자가 가지고 온 그 고문서가 자기 조상이 예전에 노비였다는 이야깁니다. 그것도 모르고, 조상들이 전해 준 대단한 가보인 줄 알았다는 겁니다. 대단한 가보인 줄 알고 자랑하고 싶어서 그 문서를 가지고 나왔던 출연자가, 얼마나 당황스러웠겠습니까? 

그런가 하면 여기, 자기 정체성(自畵像)이 ‘노예’奴隸라는 것을, 드러내어 놓고 말하는 한 주인공이 있습니다. 그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서 옥에 가두고 죽이기 위해서 ‘다메섹’이라는 도시로 가던 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던 사울이라는 인물입니다(‘사울’은 유대식 이름 ‘바울’은 로마식 이름; 행 13, 9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사울은 그 이후, 자신의 정체성을 말할 때 자신은, 바로 그 때 만났던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라고 공공연하게 드러내어 놓고 말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을 “나는 이런 사람입니다”는 자기 나름대로의 자기 ‘초상’肖像(닮은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肖像만 보아도,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누구인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이후, 바울은 여러 가지 자기 초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정체성, 자화상). 바울이 가지고 있던 초상들이 어떤 것들이었습니까? 

바울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다양한 초상들을 가지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자기를 말하고자 할 때, 그 무엇보다도 가장 먼저 말하고 싶어 했던 초상이 있습니다. 그의 인생 깊은 곳에 내면화되어 있는 초상, 그가 자신이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말하려고 할 때, 가장 기본적으로(basic) 말하고 싶어 했던 초상이 있습니다. 

바울이 말하고 싶어 했던 가장 기본이 되는 자기 초상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라는 겁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둘로스)다.’ 이것이 그가 가장 기본적으로 말하고 싶어 했던 자기 초상(닮은 모습)입니다. 

•빌립보서 1, 1 “그리스도 예수의 노예 바울”
•로마서 1, 1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 바울은”합니다. 바울은 자신을 ‘노예’奴隸라고 불렀습니다. 누구의 노예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라는 겁니다. 바울이 자기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奴隸’라고 불렀던 초상은, 그에게 깊이 내면화되어 있던 가장 기본적인 자기 이해의 초상이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對外的으로 드러내는 또 다른 자기 초상이 있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라는 것입니다(보냄을 받은 자).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라는 초상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라는 이 두 초상은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이 함께 등장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합니다(롬 1, 1). 

이 기본적인 초상 外에도, 바울은 더 다양한 모습으로 자기 초상을 그렸습니다. 그는 스스로 ‘약자(弱者)’라는 자화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고후 11, 30-33; 행 9, 2-25). 그는 자신을 강한 자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약자라고 고백했습니다. ‘상처받은 치유자’(the wounded healer, 헨리 나우웬이 쓴 말; 고후 11, 29)임을 자처합니다. 

다메섹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핍박을 받자, 용감하게 싸우기보다는 그 핍박을 피해서 야밤에 광주리를 타고 도주해서 겨우 목숨을 부지합니다. 남에게 드러내어 놓고, 말하기 쉽지 않은 부끄러운 모습 아닙니까? 특히 고린도교회에서 그가 목회하는 내내, 바울은 고린도교인들로부터 얼마나 시달렸는지 모릅니다(사도권 문제, 구제헌금 문제, 언행의 일관성 논란, 인정받지 못했다). 

그는 또 ‘바보’ 초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고전 1, 23; 1, 29). ‘하나님의 바보스러움’이 ‘사람의 지혜’보다 뛰어나다는 믿음을 가지고 복음을 전했던 자입니다(“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전 1, 18). 고린도후서 11, 1에서는 “나의 조금 바보스러움을 참아 달라”고 애원하기까지 합니다. 

또 그는 자신을 “그리스도 예수의 죄수(de,smioj Cristou/ vIhsou/; 몬 1, 1&$1; “내가 생각하건데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이 무슨 뜻입니까? 바울 당시 로마는, 원형극장에서 죄수를 처형했습니다. 특히 로마의 제삿날(大祭日)에는, 뛰어난 검투사나 맹수들과의 대결하는 형식으로 죄수(기독교인)를 잔인하게 죽이는 행사를 했습니다. 

바로 그 때, 구경거리의 ‘맨 마지막 주인공’으로 자기 자신을 그리고 있습니다. 자기 앞서 불려나간 수많은 죄수들이, 뛰어난 검객에게 죽임당합니다. 굶주린 맹수들의 밥이 됩니다. 처참한 비명소리를 지르며 죽어가는 그 광경을 목도합니다. 그 뿐이겠습니까? 원형극장에 모여든 7만 명이 넘는 광기어린 로마시민들의 비열한 歡呼聲도 들어야 했습니다. 바로 그 원형극장에서 처형될 마지막 구경거리의 주인공이 누구라는 겁니까? 바울 자신이라는 겁니다. 그런 심정, 조바심, 두려움, 공포심에 떠는 자가 바로 바울의 초상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원형극장에서 맨 끄트머리에 죽을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자라고 생각했다는 겁니다. 그 광경을 연출하고 있는 감독이 누구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관중들은 누구입니까? 천상천하 우주의 천사들과 인간들입니다. 누구를 위해서 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위해서 말입니다.

그것뿐이 아닙니다. 바울은, 자신을 “세상의 쓰레기”, “만물의 찌꺼기”라고 합니다(고전 4, 13). 쓰레기와 찌꺼기라는 말의 어원적인 뜻은 이렇습니다. 청소할 때, 철저하게 쓸고 닦지 않습니까? 그 때, 온갖 쓰레기, 먼지, 때, 오물 들이 제거됩니다. 청소할 때, 미련 없이 제거하고 내다버리는 쓰레기, 찌꺼기처럼 자신을 ‘인간 쓰레기’로 ‘만물의 찌꺼기’로 여겼다는 겁니다. 

▶ 여러분 아시지요?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매년 7월 10일이면 대속죄일로 지킵니다. 그 때, 아사셀염소예식을 행합니다. 아사셀 염소예식이란, 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대신 짊어진(안수하여, 이스라엘의 죄를 염소의 머리로 전가시킨 후) 아사셀 염소가 曠野無人之境으로 끌려 나가서 버림당합니다(거기서 굶주림과 맹수의 밥이 됩니다). 

그 때 그 아사셀 염소는, 무엇입니까? 온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내다 버림당한, 더럽고 추한 ‘죄 덩어리’라는 겁니다. 바울은, 마치 자신을 그와 같은 존재로 취급했다는 겁니다. 쓰레기와 넝마주의자들이 더 이상 내려갈 데란 없지 않습니까? 이런 자화상, 정체성, 초상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 바울입니다. 이런 초상들이 그가 만난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가지고 있던, 고백이고, 그리스도인 됨의 의미입니다. 

▶ 그러면 본문으로 돌아가서, 바울이 말하는 가장 기본적인 그리스도인 됨의 초상,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라는 말이 무엇을 말하는 지 보십시다.

우리가 바울의 편지들을 읽다가 보면, 수없이 등장하는 대단히 중요한 ‘단어’ 하나를 발견합니다. 그것은, ‘몸’이라는 단어입니다(헬, ‘소마’ sw,ma). 

•로마서 12, 1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너희 몸, ta. sw,mata u`mw/n〉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고린도전서 6, 19하-20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요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너희 몸으로, to. sw/ma u`mw/n〉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빌립보서 1, 20에도 “살든지 죽든지〈내 몸에서〉그리스도가 존귀하게 하려 하나니.” 여기 보면〈몸, 헬, ‘소마’ sw,ma〉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미 말씀드렸지만 여기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몸〉이라는 말은, 우리 몸의 육체, 고기 덩어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 몸은, 노예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바울 당시 로마의 노예제도 하에서, 노예들이 자주 매매가 되었습니다. 노예 주인들이 노예시장에서 노예를 매매할 때, 매매문서를 작성합니다. 그 매매문서를 작성할 때, ‘노예’를 가리켰던 말이 󰡔몸, sw,ma󰡕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라는 말입니다. 죄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사탄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완전하게 소유권이 이전 된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의미는, 내 전 존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완전하게 소유권이 이전 된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라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내 인생의 새 주인’이 되셨다는 뜻이지요. 

바울은, 자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존재도 󰡔몸󰡕이라 했습니다. 우리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라는 이야깁니다. 

그러기에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명령한 것 아니겠습니까? 또 본문에서, “누구든지 자기를 지혜 있는 자 같이 생각하지 말라. 만일 그렇다면, 도리어 어리석은 자가 되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합니다(고전 3, 18이하). 또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하십니다. 사람 자랑할 것 아무것도 없다는 겁니다. 설교 초두에서 말씀드렸지만, 가문의 귀중한 유산인줄 알고 300년 동안 간직하였던 문서지만, 그 문서가 ‘노비문서’였지 않습니까? 노비문서를 자랑할 사람 있겠습니까? 내 인생의 주인되신, 생명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하는 자 되어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또 “萬物이 다 너희 것임이라”했습니다. 귀하게 여기던 바울도, 학식이 많던 목회자 아볼로도,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도, 하나님 창조하신 세계도, 생명도, 다 너희 것이라. 그 다음 말씀이 중요하지요. 그런데, 그 너희는 누구의 것이라 하십니까?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라”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라”했습니다. 

▶ 저와 여러분도, 주님의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내 인생의 주권자이십니까? 내 인생의 유일한 가치이십니까? 내 삶의 이유이십니까? 주님의 부르심이 내 인생의 의미입니까? 예수님의 복음말씀이 길이고, 진리이고, 생명이십니까?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生命조차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 24). 사도 바울의 이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될 수 있겠습니까? 믿음의 선진들은 다 이렇게 살았습니다. 
왜 입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입니다. “값으로 산,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만일, 자랑하려면 주 안에서 자랑하라” 했습니다(고후 10, 17).

불멸의 거작 ‘참회록’을 쓴 아우구스티투스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그가 참회록을 쓴 때는, 주교가 되고 난 다음입니다(A. D. 396년 이후). 쉽지 않은 일일이지요. 당시 그는, 이미 높은 덕망과 탁월한 학식으로 아프리카 교회와 전 세계 교회로부터 ‘살아 있는 성자’(St. Augustinus)로 추앙받고 있던 때입니다. 바로 그 때, 붓을 들어 쓴 책이 ‘참회록懺悔錄’입니다(397년 완성). 

참회록에서 그는, 모든 교회로부터 성자로 추앙받고 있던 자신을 가차 없이 벌거벗겨 놓고 맙니다. 쉽게 할 수 없는 일을 한 셈이지요. 자랑하기는 쉬워도, 부끄러움을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참회록을 쓴 동기가 정말 귀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지혜 있는 자라고 생각하지 마십시다. 자기를 자랑하지 마십시다. 그 누구도 자랑하지 마십시다. 자신을 속이지도 마십시다.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지도 마십시다. 하나님은 지혜 있는 자들에게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라 하셨습니다. 우리는 다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우리는 값으로 산 것이 되어 소유권이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이전 된 노예들입니다. 오직 우리 ‘몸’으로 하나님께만 영광 돌리는 자들이 되십시다. 아멘.

[기도]
하나님 아버지, 죄의 노예로 살던 우리들을 값으로 사셔서 주님의 것 삼아 주심 감사합니다. 주님의 것이 되었사오니, ‘우리 몸’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자 되게 하옵소서. 우리의 자화상 안에 아직도 남아 있는, 자신의 義와 세상의 지혜를 자랑하는 어리석음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 됨을 고백하는 자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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