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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하는 삶 (고후 1: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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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하는 삶 (고후 1:15~22)
 
 
1. 예스맨 이야기

성도 여러분, “예스 맨”이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이 “예스맨”이라는 말은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부정적인 의미로 통용되어왔습니다. 왜냐하면 “예스맨”은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밝히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끌려 다니는 사람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현대는 적극적으로 자신을 알리고 자기주장을 분명하게 밝히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지는 시대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래도 예스, 저래도 예스”라고 하는 사람은 무능한 사람으로 보이기 때문에 결코 좋은 인상을 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느 광고의 카피 문구처럼 “남들이 모두 YES라고 외칠 때 당당히 NO라고 외치겠습니다”라는 말이 우리의 기억에 잊혀지지 않고 오래 남는 모양입니다. 아무튼 다른 사람들에게 끌려 다니는 피동적이고 자신감 없는 모습보다, “NO”라고 할 수 있는 주관이 뚜렷하고 주체적인 모습이 더 좋겠지요. 

그런데 여러분, <예스맨>이라는 영화를 기억하시죠? 스코틀랜드 출신의 희극 작가인 ‘대니 월리스’의 자전적인 소설인 <예스 맨(2005)>을 영화로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예스맨>이라는 소설과 영화는 지금 말씀드린 것과는 정반대인 결론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습니다. 즉 이 영화는 “예스맨”이 더 좋다고 말합니다. 

“NO”라는 말을 항상 입에 달고 살며, 바깥출입을 잘 하지 않고 혼자서 집에 틀어박혀 지내면서 매사에 부정적인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항상 “안 된다”, “싫다”, “귀찮다”를 입에 달고 살았지요. 그런 그가 친구의 권유로 <긍정적인 사고>와 관련된 프로그램에 가입하면서 인생이 180도 바뀌기 시작합니다. 모든 일에 “YES”라고 대답하는 것이 그 프로그램의 규칙이었는데요. 이 규칙에 따라 그는 “오케이”, “할 수 있다”, “기꺼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게 되고, 또 그렇게 행동하기 시작합니다. 

번지점프, 한국어 강좌 듣기, 모터사이클 타기 등에 도전하는데요. 이것은 그 전에는 생각조차도 못했던 일들이었습니다. 사실 여러분, 매사에 “YES”라고 외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폭력이나 전쟁에 대해 “YES”라고 할 수 있습니까?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일에 “YES”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세상을 향해서는 “YES”라고 해도 자신에게는 “NO”라고 할 수밖에 없는 상황도 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겪으면서 주인공은 여러 가지 혼란과 소동도 경험하지만, 그전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여러 기회를 접하고, 또 다양한 사람들을 알아 갑니다. 주인공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예스라고 말하고 그렇게 행동했더니 나에게 기쁨을 안겨주는 기회들이 더 많이 생기더라.” 그러면서 “YES라고 했다면 찾아왔을 수많은 기회를 그 동안 NO라고 하는 바람에 내쫓아왔다”고 덧붙였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주관 없이 남들 따라 “응, 응”하는 “예스 맨”이 아니라, 매사에 “예스”하는 긍정적인 사고와 적극적인 삶이 더 낫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본문에도 이 “예스 맨”이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남들이 모두 YES라고 외칠 때 당당히 NO라고 외치겠습니다”라는 말이 진리처럼 받아들여지는 우리 시대와는 동떨어진 주장일 수 있고, 또 엄밀한 의미에서 <예스맨>이라는 영화 내용과도 다릅니다만, 아마 성경을 통틀어서 오늘 본문처럼 “예스”와 “노”를 분명하게 구분하면서 성도의 삶은 “예스”하는 삶이어야 한다는 결론을 주는 본문도 없을 것입니다. 

2. 고린도후서의 배경

본문이 기록된 고린도후서는 바울의 자서전이라고 불립니다. 그 이유는 바울이 이 고린도후서를 통하여 자신의 인간적인 모습을 날 나타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에 18개월 정도 머물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세워진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은 바울의 자식들과 같았습니다. 비록 육신이 아니라 복음으로 낳은 자식이지만요! 

하지만 그가 고린도를 떠난 후 고린도로 와서 사역을 한 어떤 사람들이 교회를 어지럽혔습니다. 

❶ 그들은 먼저 교인들로 하여금 바울의 사도직에 대해 의심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직접 만난 적이 없는 바울이 어떻게 사도일 수 있겠느냐?’면서 교인들을 선동했습니다. 

❷ 또한 자기들이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와 황홀경을 체험했다고 말하면서 사람들을 유혹했습니다. 즉 바울이 전한 복음보다는 신비한 체험이 더 중요한 것이고, 그 신비한 체험을 가진 자신들의 복음이 진짜 복음이라고 가르친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것들이 고린도 교회를 심각한 위기로 몰고 갔습니다. 자신들에게 복음을 전한 바울을 의심하면 자신들이 받은 복음에 대해서도 의심을 하게 되고, 그와 함께 복음보다는 체험과 신비가 강조되면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본질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자식과도 같은 고린도 교회가 이런 위기를 만난 것을 바울이 어떻게 두고 볼 수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전도 여행 계획을 변경하여 고린도를 방문했습니다. 

❶ 바울의 원래 전도 여행 계획은 본문 15절과 16절에 있는 대로 고린도전서를 기록한 에베소에서 바닷길을 통하여 고린도로 직행했다가 마케도니아를 들른 후 다시 고린도로 돌아와 유대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의 이러한 계획이 고린도에 전달되어 고린도 교인들도 이것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❷ 그런데 고린도전서 16장 5절부터 9절에 보면, 이 계획이 변경되어 에베소에서 고린도를 거치지 않고 마케도니아로 갔다가 그 다음에 고린도로 가기로 수정이 되었습니다. 

❸ 그런데 말씀드린 것처럼, 고린도 교회의 위기상황으로 인하여 또 다시 계획이 변경되었습니다. 에베소에서 곧바로 고린도 교회를 심방한 것입니다. 

❹ 그런데 고린도에 갔을 때,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바울은 금방 에베소로 되돌아갔습니다. 이 역시 보기에 따라서는 또 한 번의 계획 변경이었습니다. 바울은 큰 시험과 위기에 처한 고린도 교회와 성도들이 다시 주님의 복음과 진리로 돌아와 회개하는 것을 보고 싶었지만, 그것을 보지 못하고 다시 에베소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그렇게 에베소로 돌아간 바울은 거기서 현재 남아있지 않아 그 내용을 알 수는 없지만, “눈물을 흘리며” 격정적인 편지를 써서 디도를 통해 고린도 교회에 보냈습니다. 

❺ 이 <눈물의 편지>를 보낸 후 바울은 에베소에서 드로아를 거쳐 마케도니아에 도착했습니다. 이 역시 계획된 경로는 아니었습니다. 말하자면 고린도 교인들이 알고 있던 경로에서 네 번이나 이탈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후 고린도로 가지 않았습니다(23). 

그렇게 해서 마케도니아에 가 있던 바울은 거기서 고린도에서 돌아온 디도를 만났고, 디도로부터 고린도 교인들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바울이 내린 지시 사항을 수용했으며, 문제를 일으켰던 사람을 처리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정말 반가운 소식이었지요. 그러나 디도가 가지고 온 또 다른 소식, 고린도로부터 들려온 제2의 보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울의 헌금 사역이 오해를 받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보다는 뒤에, 그리고 고린도후서보다는 먼저 보낸 편지에서 고린도 교회의 여러 가지 문제들이 해결된 것에 기뻐하면서 그들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전하고, 또 자신을 대적했던 사람을 용서하도록 권면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자신의 사도직에 대해 변호했으며, 특별히 기근을 만나 어려운 가운데 있는 예루살렘 교회에 대한 헌금을 권면했습니다. 

그 당시 바울은 마케도니아 교회들이 준비한 헌금을 가지고 각 교회 대표단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갈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계획을 고린도 교회에 전달한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도 이 헌금에 동참하면 바울이 그것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가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헌금 문제와 관련하여 또 다시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그들은 최근 바울이 보여준 행동을 근거로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즉 지금까지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대하여 보여준 행동이 ‘신실하지 못하고 인행이 일치하지 않는 경솔한 사람’이라는 증거라는 주장이었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신실하지 못하고 언행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인데, 그런 그에게 거액의 헌금을 맡길 수가 있겠느냐?’ 

그러면서 지금까지 해 오던 주장을 다시 반복했습니다. ‘바울은 거짓 사도, 자칭 사도이다. 그는 여러분의 지도자가 될 수 없다.’ ‘또한 바울이 전한 복음 역시 문제가 있다. 신실하지 못한 사람이 전한 복음은 가짜일 수밖에 없고, 반면에 체험과 영적인 은사를 가진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야 말로 진짜 복음이다.’ 

바울은 이러한 소식을 전해 듣고, 자신을 비난하는 거짓 선생들의 가르침을 바로 잡기 위해서 편지를 썼는데, 그것이 바로 고린도후서입니다. 이러한 배경을 놓고 보면 고린도후서의 내용은 세 가지입니다. ❶ 우선 자신의 고린도 방문 계획이 자주 변경되었던 이유를 밝히는 것이고, ❷ 두 번째는 예루살렘 지역의 기근으로 인하여 예루살렘 성도들을 위한 구제헌금 문제에 대해 해명하는 것이었습니다. ❸ 마지막으로 바울은 자신의 사도 권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더 변호하려고 했습니다. 

3. “Yes" or "No" 

그 중에서 오늘 본문은 바울이 자신의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려던 계획이 자주 변경된 것에 대해서 변호하는 부분입니다.

1) 바울은 “예스맨”

바울의 원래 전도 여행 계획은 고린도전서를 기록한 에베소에서 해로를 통하여 곧바로 고린도로 갔다가 마케도니아를 들른 후 다시 고린도를 거쳐 유대로 가는 것이었습니다(15,16). 그리고 그 중심에는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헌금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조금 전에도 설명을 잠시 했습니다만, 이러한 바울의 계획은 네 번이나 변경되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을 싫어하던 사람들이 이러한 바울의 모습을 ‘변덕스러우며 신실하지 못하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렇지만 바울은 자신의 계획 변경은 자신이 신실치 못해서나, 혹은 감정에 치우친 행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미쁘신 뜻에 순종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17절, “이렇게 계획할 때에 어찌 경솔히 하였으리요? 혹 계획하기를 육체를 따라 계획(하였겠느뇨?)” <공동번역성경>은 17절을 다음과 같이 번역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런 계획을 세운 것이 경솔한 일이었습니까? 또는 인간적인 동기로 계획을 세워 제 편의에 따라 이랬다저랬다 하려는 줄 압니까?” 즉 자신이 계획을 변경하여 급히 고린도로 갔다가 금방 돌아오고 한 행동이 결코 경솔한 행동이 아니었으며, 자신의 육신적인 편의를 따라 이랬다저랬다 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의 선교 계획은 결코 일시적인 목적이나 육신의 利害打算에 따라 변경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한 일이었다고 말합니다. 

❶ 그러면서 바울은 “하나님은 미쁘시니라(18)”고 하여 하나님의 신실성을 강조하면서 그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근거하여 자신의 진실성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비록 자신은 신실하지 못하다고 비난을 받고 있지만, 하나님이 신실하시기 때문에 자신도 신실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진리이고 또한 사실입니다(사2:2-4; 눅1:68-79; 고전1:9). 바울은 자신의 신실함의 근거가 바로 신실하신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아주 담대하게 더 이상 자신의 신실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지 말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바울이 대단하지 않습니까? 

계속해서 바울은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고 합니다(18). 하나님은 신실하시기 때문에 ‘예’라고 하셨다가 ‘아니오’라고 하는 일이 없습니다. 민수기 23장 19절,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말을 바꾸거나 속이지 않습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의 종인 자신도 ‘예’라고 하면서 동시에 “아니오”하는 일은 없다고 말합니다. 

한 입으로 두 말을 하고, 상황에 따라, 이익에 따라 이랬다저랬다 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바울의 말은 그의 여행 계획뿐만 아니라 그의 사역 전체에 대한 말입니다(13). 바울은 그 사역이나 생활에서 범사에 하나님의 사람답게 신실했습니다. 여러분, 성도라면 누구나 다 바울과 같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러한 바울의 고백이 여러분의 고백도 되시기 바랍니다. 

나아가서 바울은 주님만 신실하신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19절에서 자신과 실라(실루아노는 로마식 이름)와 디모데가 고린도 교회에 전한 복음 역시 신실한 것, 즉 믿을 만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대적들이 바울이 신실하지 못하니 그가 전한 복음도 믿을 것이 못 된다고 했기 때문이지요. 
세 번째로 바울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역시 “예”하셨지 “아니라”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19). 그리스도는 신실하신 분이시므로 “예”만 통용되는 것입니다. 그 분은 表裏不同한 분이 아니시며 이중성이 없는 분이십니다. 

네 번째로 20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된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된다는 말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이나 당신의 종들을 통해 주신 약속은 모두 예수님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뜻입니다. 창조 직후 아담과 하와의 범죄 때 하나님께서 “여자의 후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구주로 세우시고 그를 세상에 보내심으로 구원을 이루실 것이라고 하셨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것이라고 하셨는데, 그 모든 것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도 “아니오”가 없이 모두 “예”로써 성취된 것입니다. 또한 아직 성취되지 않은 수많은 약속들도 예수님 안에서 반드시 성취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미쁘신 분이고, 자신의 사역은 이 하나님의 미쁘심에 근거한 것이라고 해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❷ 두 번째로 바울은 23, 24절에서 자신이 계획을 변경할 수밖에 없었던 두 번째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내가 내 목숨을 걸고 하나님을 불러 증언하시게 하노니 내가 다시 고린도에 가지 아니한 것은 너희를 아끼려 함이라(23).” 바울이 계획을 변경했던 이유는 자신의 편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고린도 교인들을 아끼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만약 바울이 그들을 아끼는 마음이 없이 본래의 계획대로 고린도를 찾아갔다면 그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마음 아픔뿐이었을 것입니다(2:2,3). 왜냐하면 고린도 교회에는 벌을 받아야 할 만큼 바울을 근심되게 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2:5-7). 또 바울이 대적자들로 인하여 뜻하지 않은 과격함이나 어떤 실수를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나아가 바울은 자신이 직접 가지 않음으로 그들을 징계하기보다는 그들에게 스스로 회개할 기회를 주고자 했습니다(2:7). 그런데도 이러한 중심을 몰라주고 도리어 그를 비난한 것이죠.

성도 여러분, 여기서 바울의 삶의 원리를 읽을 수 있습니까? 바울은 하나님의 뜻이라면 전적으로 “예”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성도의 유익을 위해서라면 또한 전적으로 “예”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의 삶이 이와 같이 되시기 바랍니다. 교회를 위하여, 성도를 위하여 언제 어떤 상황이든지 “예”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2) 성도 역시 “예스맨”

바울은 20절에서 결론적인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아멘”이란 말은 ‘진실로 그렇습니다’라는 의미이지 않습니까? 이 말은 ‘하나님의 신실한 말씀에 참으로 동의한다’는 의미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❶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20)” 삶은 찬양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이미 예수님 안에서 성취된 것을 찬양하는 것이고, 앞으로 이루어질 것을 믿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감옥이라는 극한의 상황에서도 찬양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의 약속이 “예스”가 되어 이루어질 줄로 믿었기 때문이지요. 

❷ 또한 예수님의 “예”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을 의미하는 것처럼, 성도들의 “아멘” 역시 하나님의 뜻에 순종을 결단하는 것이며, 바로 그 순종을 통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습니다. “예”의 신앙, “아멘”의 신앙은 순종의 삶입니다. 주님의 명령에 대하여, 그것을 그대로 실천하는 삶에 대하여, 복음을 전하라 하심에 대하여 순종하는 것이 “예”의 신앙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주님의 모든 약속과 명령에 “예”하여 순종하고 있습니까?

21절과 22절에서 바울은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기름을 붓는다’는 말의 어원은 “메시아”, 즉 “그리스도”란 말에서 나왔는데, 그 뜻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란 뜻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에게 기름을 부었으며, 신약시대에 와서 모든 성도에게 기름 부으심을 주심은 그리스도의 소명에 동참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에서 인은 소유권의 표시입니다. 어떤 문서의 효력을 보장해 준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구원과 연결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된 것을, 영생을 주신 약속을 보증하신 표로 인 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확실한 보증으로 성령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모두 확실한 것 뿐입니다. 즉, “예”하는 것뿐이니 여러분의 삶과 신앙도 “예”여야 한다는 것이죠.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하게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약속이 “예”가 되기 때문에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만약 주님의 약속이 그대로 “예”가 되지 않는다면, 우리가 어떻게 “아멘” 하겠습니까? 

그렇다고 무조건 “예”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과 진리와 주님의 명령에 대해 “예”하라는 것이지요. 따라서 어떤 일에 “예스”하고, 또 어떤 일에 “노”할 것인지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에 대하여 “Yes”하고 무엇에 대하여 “No”할 것인지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언제 “Yes”하고, 언제 “No”할 것인지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기 되기 위해서는 항상 성경 말씀 가운데 거하고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오늘 본문은 주님과 주님의 말씀과 약속에 관하여는 전적으로 “예”하는 삶을 살라고 말합니다.

4. “예”하는 삶

말씀을 맺겠습니다. 바울 사도는 19절에서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셨으니 그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하는 삶을 살았다는 말입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내려가거라.” “예.” “가난한 집에 태어나거라.” “예.” “오래 살지 말고 딱 33년만 살거라.” “예.” “매맞고 고생하다가 십자가 지고 죽으라.” “예.” 이렇게 예수님은 “예”라 하고 “아니라” 함이 없으셨습니다. 

바울도 예수님처럼 “예”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최고 중의 최고였던 자신의 과거로부터 떠나라고 하실 때 “예”하고 떠났으며, 그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빌3:8). 그리스도의 복음의 증인, 그것도 가장 까다롭고 어렵고 힘들다는 이방인을 위한 선교 사역으로 부르실 때에도 “예”했습니다. 도리어 그것을 “부득불 할 일”, “하지 않으면 화가 임할 일”로 여겼습니다(고전9:16). 사역의 과정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생과 수도 없는 죽을 고비를 맞았지만 그것도 “예”로 받아들였습니다. 

우리 주님이, 그리고 바울이 “예”하는 삶을 살았듯이 이제 여러분도 그렇게 “예”하면서 살고, 그렇게 살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것이 오늘 본문의 결론입니다. 주님도 “예” 하셨고, 바울도 “예” 했으니, 어떻게 저와 여러분들이 “아니요” 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의 뜻과 명령에 전적으로 “예”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흔히 <미국의 ‘백화점 왕’>이라고 부르는 존 워너메이커(John Wanamaker)가 어렸을 때 다음과 같은 경험을 했습니다. 한 번은 부모님이 사 준 장난감이 불량품이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갖고 싶어 하던 장난감이 불량품이었으니 얼마나 속이 상했겠습니까? 그래서 어린 워너메이커는 그 장난감을 가지고 백화점으로 가서는 ‘바꾸어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일언지하에 거절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때 그 어린 소년은 ‘내가 장차 어른이 되고 백화점에서 일하게 된다면 열 번이라도 교환해 줄 것이다’라고 결심을 했습니다. 

즉 자신은 ‘노’라고 거절당했지만, 장차 자신은 그런 경우에 ‘예스’하겠다고 결심한 것입니다. 그런 그가 백화점 사장에 되었을 때 자신이 운영하는 백화점들에서는 언제나 불량품을 교환해주었습니다. 이것은 그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서비스였습니다. 그의 이러한 서비스 정신이 소문이 나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그의 백화점은 번창하여 마침내 미국 백화점 업계의 황제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과 주님의 명령에 “예”하십시오. 교회가 여러분에게 하라는 것에 대해서도 “예”하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복주시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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