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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무능하고 창피한 그리스도인 (막 9:2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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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능하고 창피한 그리스도인 (막 9:25~29)
 

시작하는 말

성도 여러분, 지난 한 주간도 안녕하셨습니까? 비가 참 많이 왔습니다. 비라는 게 낭만적인 면도 있어 비오는 날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내리는 비는 멋이 없어요. 남북으로 오르락내리락하며 쏟아지는 비가 멋은 커녕 미친 듯이 무섭게 쏟아 붓습니다. 자연마저 현대인의 심성을 닮아가는 건지, 사람이 자연을 그렇게 만든건지 삭막하고 무섭기까지 합니다. 이번 여름도 무사히 건강하게 잘 지내시기를 바랍니다. 

요즈음 처럼 비가 쏟아지는 날, 자동차를 몰고 가다가 기름이 떨어져 길 한복판에 서있어 본 경험이 있으십니까? 기름이 떨어지면, 아무리 좋은 차를 타도, 새 차를 타도 기름이 없으면 소용없습니다. 자동차에 대해 아무리 많이 알고 있어도, 그 차를 만든 사람이라 할지라도 소용이 없습니다. 운전경력이 수십년이어도, 무사고 경력자라도 소용이 없습니다. 

게다가 기름이 한 방울도 없을때까지 모르고 있었다는 것은 정말 창피한 일입니다. 이런 일은 없어야겠지요.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혹시 우리들의 영적인 생활에서 겉모양은 화려하지만 꼭 있어야 할 것이 없어 움직이지도 못하고 서있는 무능하고 창피한 모습은 없는가 하는 것입니다. 

몸 말

오늘 본문에 나오는 제자들의 모습이 기름 없어 움직이지도 못하고 길 가운데 서 있어 지나는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장면과 같습니다. 어느날 예수님께서 변화산에 올라가셨습니다. 이제 눈앞에 십자가가 있기 때문에 제자들로 하여금 능히 이 많은 고통을 이기고 승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장차 나타날 영광을 미리 보여주셨습니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에게 아주 엄청난 체험을 하게 하셨습니다. 이런 귀한 은혜의 사건이 일어나고 있는데 아홉 제자는 산 밑에서 예수님을 기다리면서 졸고 있고 자고 있었습니다. 아침이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는 바로 그 시간에 한 사건이 벌어졌었습니다. 어떤 아버지에게 귀신들린 아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대로 그는 불로 뛰어들어가고 물로 뛰어들어가고 제 몸을 찔러서 피를 내고... 멀쩡한 아들이 종종 이렇게 발작을 일으키는 것을 보는 그 아버지의 괴로움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이것을 고치려고 치료도 많이 다니고, 미신도 섬겨보고, 백방으로 애를 썼는데 고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그 아버지는 눈이 번쩍 뜨이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병이라도 고칠 수 있다더라, 하는 소문이었습니다. 그는 기대를 걸고 예수님을 찾아 아이를 데리고 왔는데 마침 예수님께서 안계십니다. 제자들만 산기슭에 옹기종기 앉아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제자들이 찾아온 그 아이의 아버지에게 “이제 예수님께서 곧 내려오십니다. 산에 올라가 밤새 기도하셨는데 이제 새벽이 됐으니 곧 내려오실 겁니다. 여기서 잠깐만 기다리면 예수님을 만나게 될 것이고, 예수님만 만나면 뭐, 이까짓 귀신이나 이까짓 병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깨끗하게 고쳐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안심하고 좀 기다리십시오.”제자들이 이렇게 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런데 그렇지를 않았습니다. 아홉 제자가 저마다 그 아이한테 덤벼들어 자기가 귀신을 내쫓겠다고 한 것입니다. 뭔가 희한한 것을 좀 보여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자기자랑을 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홉 제자가 다 시도를 합니다.“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귀신아 나가라”“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썩 물러가라”하고 각자 나름대로 기를 써보았지마는 소용없었습니다. 

이 아이는 더욱더 소리를 지르고 발악을 합니다. 이 일로 인하여 아버지는 낙심하게 되고 제자들은 말할 수 없는 부끄러움을 당하게 됩니다. 많은 사람이 모여 웅성거리니 창피하고 몹시 당황하게 됐습니다. 

이 본문을 보면 생각나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아주 오래전 일입니다. 잘 아는 후배 목사 한 사람이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몇십명 정도 교인을 모으고 교회를 개척, 상가에 예배처소를 마련하고 열심히 목회를 하는 유망한 젊은 목사였습니다. 어느날이었습니다. 예배를 드리는 중인데 느닷없이 한 사람이 가운데서 벌떡 일어서더니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것입니다. 귀신들린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대응하여야 되는지를 경험해 본 일이 없는 목사입니다. 이 사람은 그 시간에 무슨 생각을 했는고하니 ‘내가 이 시간에 저 귀신을 내쫓으면 이야말로 우리 교회의 부흥에 불씨가 될것이다. 좋다. 뭔가 보여주겠다’하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설교하다말고 내려가 교인들 한가운데 있는 그 사람을 붙들고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귀신아 물러가라”하고 냅다 소리를 질렀는데, 그놈의 귀신이 나가주었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런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 귀신이 더 소리를 지르면서 “야, 이놈아! 네놈은 누구야?”하고 덤벼드는 것입니다. 난장판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교인들도 실망하고 목사님은 더없이 부끄러워졌습니다. 제게 전화가 왔는데 “목사님,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이런 때는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합니다. 내가 대답했습니다. 사표 내라고. 영권이 없으면 목사가 아닙니다. 

지식도 있고 능력도 있고 학벌 다 있다해도 영적 권세가 없다면 일은 끝난 것이 아니냐고 충고했습니다. 그 일로 그는 아주 큰 충격을 받고 목회를 쉬고 기도하며 다시 준비하였습니다. 그분에게 그 일은 아주 좋은 경험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후 더욱 더 능력있는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스스로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심받았다는 사실 하나를 너무 크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가 뭐 특별해서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처럼 말입니다. 하기야 많은 사람 중에서 열두 사람만 부르심으로 주님과 함께할 수 있게 하셨으니 예삿일은 아니지요. 나는 예수님의 제자다, 하고 위세를 떨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과 같지 못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 대한 지식을 신앙으로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따라다니면서 구경 많이 했습니다. 귀신 내쫓으시는 것, 병 고치시는 것, 죽은 사람 살리시는 것까지 보았습니다. 희한한 구경 많이 했습니다. 그저 어떤 병이든 어떤 사건이든 다 해결하시는 그 굉장한 능력을 매일처럼 구경했습니다. 그러나 그랬다고해서 그런 능력이 내것이 되는 것입니까. 죽은 사람 살리는 자리에서 구경했다 하여 이제 내게 달라진 것이 무엇입니까. 

그 많은 지식을 가졌다고해도 그 지식이 내 인격에, 내 믿음에 어떤 변화를 주지 않는 한 그 지식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깊이 생각하여야 합니다. 문제의 초점은 어디에 있는고하니 자신의 무능을 스스로 몰랐다는 사실입니다. 자기능력이 이미 빠져나갔다는 사실을 자기가 모르고 있었습니다. 무엇을 아는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아무것도 모릅니다. 무엇을 할 수 있는 줄 알았는데 보니 그게 초라하기 짝이 없습니다. 아주 무능합니다.

빌립보서 4장 13절에“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만,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스도 밖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4장 20절에 보면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합니다. 

말 잘하는 것, 많이 아는 것, 이런 것과 상관이 없습니다. 문제는 능력입니다. 자기를 이기는 능력, 유혹을 이기는 능력, 죄를 이기는 능력, 불의를 극복하는 능력, 모든 것을 물리치는 권세 - 이것이 있어야 하는 것이었단말입니다. 이 사람들은 지난밤 예수님께서 산에서 기도하실 때 함께 기도하지도 못하는 정도의 인간들이었습니다. 예수님 기도하시는데 어떻게 거기서 잠을 자고 있단말입니까. 그러고도 어찌 능력의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까. 

또 중요한 점은 어설픈 경험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며칠전에 병을 고친 경험이 있거든요.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신 다음에 두 사람씩을 내보내셨습니다. 가서 귀신을 내쫓고 병을 고치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고 복음을 전하라 하시는 분부를 받고 둘씩 둘씩 흩어져 사방에 다니면서 전도했습니다. 

주님이 보내시고 주님의 능력이 함께하심으로 큰 역사를 이루고 돌아와 신이 나서 자랑을 한 일이 있거든요. 아, 귀신 보고 나가라니까 당장 나가더라, 병자가 낫더라, 했습니다. 굉장한 경험들입니다. 그게 다 며칠전의 일이었습니다. 그래놓으니, 그 경험에 비추어 오늘도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무릇 지난날의 경험, 그 경험이 곧바로 오늘에도 똑같은 형식으로 반복되어 지는 믿음의 능력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지난날 교회에서 수없이 많은 일을 하였고, 기도의 경험이 있고, 또 교회에서 큰 직분을 받았다고 해서 그것이 곧 오늘 나의 믿음이라고 나의 능력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어느 사이에 그 경험이 나의 의지가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마음만 먹으면 그런 일을 곧 다시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니었습니다. 시간은 지났습니다. 내 경험은 내 지식은 남고 나라는 인간은 벌써 바뀌었습니다. 내 마음은 이제 처음 마음이 아닙니다. 그 때의 그 감격은 없어졌습니다. 지금은 경건의 모양만 남아있어 무능한 자신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더욱 중요한 신학적 문제가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나가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하였는데 그 일로 인하여 저들은 이제 나는 능력의 사람이 되었다고 착각을 했습니다. 내가 몇 번 해보니까 되더라, 이제부터는 한평생 내가 이런 능력의 사람으로 나타날 거라고 착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게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통하여 역사하신 것일 뿐입니다. 자기가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능력의 사람이 된 게 아니라는 것을. 이것을 몰랐습니다. 파워맨이 된 게 아니란 말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를 통해 나타난 것일 뿐이지요. 이 사실을 그들은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유사한 일의 대표적인 예로 모세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모세는 능력의 사람입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하심으로 홍해를 육지같이 건너는 사람이 됐고, 반석을 쳐서 물을 내는 사람이 됐고,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서 40년 동안 인도한 능력의 사람이 됐습니다. 

그러나 그가 가데스바네아에 왔을 때, 백성들이 물이 없어 원망할 때 큰 실수를 합니다. 백성들 앞에 나아가 소리지르기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민20:10)”합니다. 바꿔말하면‘내가 물을 나오게 함 해보마, 보여줄까’하고 소리를 지르는 셈입니다. 자기가 물을 솟게 한게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물은 주셨고 자기는 심부름을 한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는 어느결에 내가 능력의 사람이 된 것처럼 착각을 합니다. 몇년 동안 하나님의 능력안에 살다보니 어느결에 내가 능력자가 된 줄로 착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소리를 지르는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크게 책망을 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자손의 목전에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고로(민 20:12)”너희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 책망하셨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꿈에도 그리던 가나안에 못들어가고 느보산에서 죽었습니다. 이 사실을 우리는 깊이 생각하여야 합니다. 무슨 일을 이루었다고해서 이제 내가 능력자가 된 줄로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통하여 그 일을 이루신 것일 뿐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고백했듯이 나의 나된 것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일 뿐, 나 자신이 무엇을 했다고 할 수도 없고, 할 수 있다고도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되고 인도하시면 가능할 뿐입니다. 우리 자신은 언제나 이대로 부족하고 허물많은 죄인의 모습으로 남는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면 이렇게 자신들에게서 지금 능력이 빠져나갔고, 신앙적 자세에 변질이 왔고,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자신들이 몰랐습니다. 모르는 채로 섣불리 소리를 지르다가 망신을 당한 것입니다. 과신을 했던 것입니다. 잘못된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후 그들이 성령을 받게 될 때, 사도행전 3장에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참 중요한 말씀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 올라가다가 거기에 있는,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된 사람을 일으킵니다. 굉장한 사건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들인 양 우러러보고 높이 추앙하고 있을 때 베드로와 요한은 진실한 말을 합니다.“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행3:12)”합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예수의 이름이 저를 낫게 했느니라, 그런고로 나를 보지말라- 이것이 성령 충만한 베드로와 요한의 진실한 모습 이었습니다. 깊이 생각하여야 합니다. 예수님 말씀하시기를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일이 없느니라”하십니다. 그런데 믿음이 빠져나갔습니다. 그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 친히 말씀하십니다.“믿음이 없는 세대여”- 그렇습니다. 

믿음이 중요합니다. 무엇보다도 믿음이 있고야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믿음 없어지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마치 기름이 없어 길 가운데 서 있는 자동차와 같습니다. 오늘의 한국교회와 성도들이 겉모양은 에쿠스요 제네시스입니다. 그러나 기름이 empty 라 무능하고 창피한 모습으로 사람들이 수군데고 있습니다. 있어야 할 기름이 다시 채워지기를 기도합니다. 간절히 축원합니다.

마무리하는 말

여러분, 불안한 이 나라의 경제를 염두에 두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경제성장의 지수 GNP가 어떻구 몇 %의 수출이 늘어나고 하는 것보다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은 신뢰의 지수입니다. 무엇을 과거에 좀 이루었다고 될일이 아닙니다. 오직 크레디트(credit)의 문제입니다. 신뢰성이 문제입니다. 우리 한국사람들이 요새 외국을 많이 여행합니다. 이민도 많이 갑니다. 갔다가 다시 돌아오기도 합니다. 문자그대로 소위 세계화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미국에 가보면 이런 얘기를 많이 듣습니다. 미국사람들은 자동차를 살 때 전부 할부로 삽니다. 월부로 사요. 심지어는 양복 하나도 월부로 사고 꼬박꼬박 뭅니다. 월부금 무느라고 죽을 고생을 합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사람들은 가서 일시불로 꽝 돈 내고 바로 삽니다. 그런데 어느쪽이 신용을 얻고 있느냐 하면, 보십시오. 일시불로 자동차를 사는 사람은 전혀 믿어주지를 않습니다. 

그 인격은 허풍이요 거품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나 자동차를 사고 이것을 3,4년 동안 꼬박꼬박 월부로 하루도 지연되지 않고 계속 잘 물면 이것이 신용도가 됩니다. 크레디트가 되어서 그 다음에 담보없이 돈을 꿀 수 있습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돈이 많아서 일시불로 꽝 내면 기분은 좋을지 몰라도 신용도는 영점입니다. 신용이란 하루아침에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3년, 혹은 몇십년을 꼬박꼬박 월부로 잘 물어나가는 사람은 믿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 경제의 문제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돈을 얼마나 벌었는지 몰라도(사실 번 것도 없지마는)국제적으로 신용도가 아주 밑바닥입니다. 한국의 은행들은 세계적으로 신용도가 밑바닥입니다. 한국경제란 믿을 것이 못됩니다. 한국사람 믿을 사람들이 못됩니다. 믿기지 않으면 끝난 거지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신용도가 없는 것입니다. 신뢰지수가 문제입니다. 개인적으로도 그렇습니다. 그 말을 믿을 수 있고, 약속을 믿을 수 있고, 인격을 믿을 수 있고, 진실을 믿을 수 있고… 그래야 무엇이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회는 무능합니다. 신용도가 낮으면 모든 것이 송두리째 무너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untasted faith' 라고 하는 유명한 용어를 썼습니다. 체험되지 않은 신앙, 다져지지 않은 신앙, 한 번도 깊은 체험이 없는 신앙이란 믿을 것이 못됩니다. 

아무 의미도 없는 것입니다. 생각으로, 지식으로, 고백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닌 살아 있는 믿음, 현실에 부딪치며 몸부림치고 기도하여 얻어진 믿음, 그래서 나의 한계와 무능함을 인정하고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오직 은혜로 내가 있다, 하는 믿음이 확실하게 들어갈 때 이것이 가장 큰 믿음입니다. 잘되는 일이건 못되는 일이건, 건강하건 병들건, 그 모든 것이 나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라는 인식에 도달할 때, 이 사람이 강한 능력의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능력의 근거는 이 믿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 속에 있음을 고백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 더 추가 한다면 그 믿음은 오직 기도로써 성립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영적으로 교통하는 유일한 채널입니다. 그런고로 기도가 없는 믿음은 믿음일 수가 없습니다. 기도 없는 믿음은 지식입니다. 그것은 자기 신뢰에 불과합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기도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기도 아니고는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다.’하셨습니다. 너희가 능력을 행한 것은 안다마는 간밤에 기도하지 않았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기도의 관계가 없는 너희의 신앙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하심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만이 존재합니다. 그 능력은 믿음을 가진 자와 함께합니다. 기도와 함께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바로 될 때 확고한 믿음에 서고, 믿음의 사람이 될 때 능력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과거의 경험이 오늘의 믿음이 아닙니다. 지금의 크고 화려함이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존재하는 참 믿음만이 오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있어야 할 믿음없이 무능하고 창피한 오늘의 내 모습과 한국교회가 믿음을 다시 채워 능력을 보일 수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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