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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정함과 부정함 (레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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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함과 부정함 (레 11:1~8)
 
 
저는 본문을 읽을 때마다 청년시절이 떠오릅니다. 한참 성경공부에 푹 빠져 있을 때입니다. 성경 말씀을 읽으며 은혜도 많이 받고, 몰랐던 사실을 깨닫고, 또 그 깨달음대로 살려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공부하다가 한 가지 문제가 생겼습니다. 본문에는 분명히 먹을 수 있는 음식과 먹어서는 안 되는 음식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니까 제가 먹어서는 안 되는 음식을 이미 많이 먹고 있었습니다. 저 뿐 아니라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다 그러고 있었습니다. 

우선 짐승들 중에 먹을 수 있는 것은 발의 굽이 갈라지고 또 되새김질을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면 소, 양, 염소 같은 것들입니다. 그리고 이것들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됩니다. 특히 돼지는 이름을 거명하면서 먹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개나 다른 육류들은 먹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돼지고기나 보신탕을 얼마나 좋아합니까?

다음으로 9절 이하를 보면 어류들 중에 먹을 수 있는 것은 지느러미가 있고 또 비늘이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면 연어, 붕어, 송어, 민어, 조기 같은 것들입니다. 그런데 지느러미가 없거나 비늘이 없는 것은 먹지 말라고 했습니다. 예를 들면 비늘이 없는 갈치, 장어와 같은 것들과 지느러미도 없고 비늘도 없는 문어, 오징어, 낙지, 꼴뚜기, 그리고 새우, 게, 랍스터와 같은 갑각류와 전복, 소라, 바지락과 같은 각종 조개류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해산물들을 얼마나 좋아합니까?

그러면 오늘 저를 비롯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있는 것일까요? 지금이라도 이 말씀대로 즐겨 먹던 것 중단하고 식습관을 바꿔야 할까요?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 인간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변해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아담으로부터 노아 홍수 때까지는 채식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 노아 홍수 후부터 육식을 할 수 있게 됐습니다. 이제 본문에 와보면 육식을 제한했습니다.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지 말아야 할 것을 구별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때부터 상황은 급변합니다. 막 7:19를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음식물을 깨끗하다 하시니라”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음식에 대한 구별을 없애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때부터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한 구별이 없어진 것입니다.

행 10:14-15에서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이 점을 다시 확인시켜주셨습니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 한대 ...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그리고 바울은 딤전 4:4에서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음식 규정은 문자 그대로 지킬 필요는 없습니다. 모세 당시 유대인들에게만 해당되는 규정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먹거리에 대한 성경적 규정은 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그리스도인들의 품위를 지키기 위해, 건강상의 이유로, 그리고 특별한 상황적 이유로 내규를 정해서 지킬 뿐입니다. 예컨대 혐오식품의 문제, 마약이나 술 담배와 같은 것들을 금하는 것 말입니다.

그러면 오늘 그리스도인들에게 본문은 필요치 않는 부분일까요? 읽을 필요가 없을까요?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의 문자적인 규정 내용은 시대적으로 극복되었지만 그 안에 담겨있는 영적 메시지는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본문을 읽으며 그 영적 메시지를 찾아야 하고, 그 메시지를 소중하게 지켜가야 합니다.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을 구별하셨습니다. 가장 먼저 먹을 것에서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을 구별하셨습니다. 그리고 정한 것은 먹되 부정한 것은 먹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는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생각해 보면서 본문에 담긴 영적 메시지를 찾아보겠습니다.

1. 구별된 삶을 살라

하나님께서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을 구별하시고 이에 따라 먹을 것과 먹지 못할 것을 구별하신 이유는 우선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구별된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모든 민족 가운데 구별하셨습니다. 저들을 하나님의 백성 삼으셨습니다. 이제 저들이 다른 모든 민족과 구별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몇 가지 구별하기 위한 장치를 두셨습니다. 우선 할례를 받게 하셨습니다. 그 몸에 구별된 표시를 남기신 것입니다. 다음으로 제사를 드리게 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구별되게 서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여기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평상시 삶 속에서도 구별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고안한 장치가 바로 먹거리의 구별입니다.

당시 먹거리는 매우 중요했습니다. 대체로 먹거리들은 종교적인 의미와 연관된 경우가 많았습니다. 우상 제사에 바쳐졌던 것을 먹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섬기던 신과의 관계 속에 의미가 부여된 것들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을 먹지 않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구별된 삶을 산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실제로 본문의 말씀을 철저하게 지키기만 한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이나 당시 중동지방의 여느 민족들과 명확하게 구별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먹거리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 먹거리를 구하는 과정도 달랐고, 먹거리를 음식으로 요리하는 방법도 달랐고, 먹거리의 종류도 달랐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하나님의 백성이 이 세상사람들과 구별되기를 바라셨습니다. 물론 오늘은 먹거리로 구별될 수 있는 시대는 아니기 때문에 다른 방법으로 구별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러면 오늘은 무엇으로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할까요? 막 7:15-16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먹는 것으로 정함과 부정함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사람 안에 자리하고 있는 마음으로 정함과 부정함을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는 먹거리로 우리를 구별하기 보다는 우리 마음으로 구별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마음 자세를 구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사람들과 다른 마음가짐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미국 홀리데이인 호텔을 이끌던 L.M 클라이머 회장 이야기입니다. 이분은 회장으로 취임한 이후부터 호텔에 카지노 두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그래서 이미 있었던 라스베가스의 홀리데이인의 카지노를 제외하곤 다른 지점에 카지노를 두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뉴저지 주에 있는 아틀랜틱 홀리데인 인에 카지노를 두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생겼습니다. 도박이 허용된 이 도시에서 카지노 없이 호텔을 연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절대 다수의 간부들이 카지노를 두자며 강력하게 클라이머 회장을 압박해왔습니다. 더 이상 버티기 어렵게 되자 그는 깨끗하게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은퇴석상에서 이렇게 연설했습니다. “나는 내가 경영하는 호텔 안에 카지노를 두지 않기로 하나님과 약속했습니다. 이제 그 약속을 지킬 수 없어 물러납니다. 나는 평생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고 살면 하나님도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 무지개를, 구름을 헤치고 자신을 보여주신다는 사실을 알고 믿어왔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세상사람들과 다른 마음가짐으로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구별된 삶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이런 구별된 삶을 요구하십니다.

2. 깨끗함을 추구하라

오늘 본문에서 강조하고 있는 내용은 먹을 것과 먹지 못할 것을 명확하게 구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준은 “부정하냐 그렇지 않으냐”에 달려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어서는 안 되는 것들은 부정하기 때문이고, 먹어도 되는 것들은 부정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부정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요? 본문에 부정하다는 말이 무려 다섯 번이나 나옵니다.(4, 5, 6, 7, 8) 이 말은 히브리어로 “타메”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구약성경에 무려 155회나 사용될 정도로 흔히 사용되는 말입니다. 그 의미가 몇 가지로 사용됩니다. 

첫째, 성적으로 더럽히다라는 뜻입니다.(창 34:5, 민 5:13)

둘째, 종교적으로 거룩한 장소를 더럽히다라는 뜻입니다.(민 19:20)

셋째, 범죄로 더럽히다라는 뜻입니다.(겔 14:11)

넷째, 인간의 죄로 자연을 더럽히다라는 뜻입니다.(레 18:25)

이렇게 볼 때 부정하다는 말 테메는 철저하게 하나님이 보실 때 더럽다는 것을 말합니다. 

사실 오늘 본문에도 낙타, 사반 즉 팔레스틴의 너구리, 토끼, 그리고 돼지가 부정하다 다시 말해서 더럽다고 규정돼 있습니다. 사람이 볼 때 돼지나 사반이 더럽다는 것은 조금 수긍이 가지만 낙타나 토끼가 더럽다는 것은 수긍이 가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더럽다고 되어있습니다. 그러니까 정함과 부정함은 어디까지나 “하나님 보시기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선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을 분별할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볼테르라는 철학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들은 눈이 두 개 있다고 해서 그만큼 조건이 더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한쪽 눈은 인생의 좋은 쪽을 보며 또 한쪽 눈은 나쁜 쪽을 보는데 사용된다. 착한 것을 보는 눈을 가리워 버리는 사람은 많으나 나쁜 것을 보는 눈을 가리워 버린 사람은 극히 드물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타락한 후 세상을 보는 눈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깨끗한 것을 보는 눈이 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보시기에 깨끗한 것을 더럽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하나님 보시기에 더러운 것을 깨끗하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이제 우리는 그 눈을 교정해 가야 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깨끗한 것들을 볼 수 있는 눈을 열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의 안경을 써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조명해 주시는 대로 세상을 보려고 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늘 물어야 하겠습니다. “나는 과연 하나님 보시기에 깨끗한가?” “내가 하는 일은 하나님 보시기에 깨끗한가?” 

다음으로 눈이 교정 됐으면 삶을 바꿔야 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깨끗함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깨끗한 삶을 살려고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미국 남북전쟁 때의 이야기입니다. 한번은 링컨이 이끄는 북군의 전세가 불리해졌습니다. 이 때 한 참모가 링컨에게 와서 이렇게 질문을 했습니다. “각하, 하나님은 우리 북군 편에 계실까요, 아니면 남군 편에 계실까요?” 그때 링컨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내가 고민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편에 계신가 아닌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 편에 서 있는가 하는 것일세”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 있는가를 고민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고 있는 가를 고민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 보시기에 깨끗한 것을 알았다면 그대로 살려고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합니다. 어떤 유혹이 있더라도 흔들리지 말고 그대로 살려고 해야 합니다. 그리고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 포기하지 말고 그대로 살려고 해야 합니다.

3.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라

본문의 음식 규정은 어떻게 보면 무척이나 번거로운 일입니다. 그런데 세심하게 살펴보면 이 안에 하나님의 사랑의 배려가 담겨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현대 성서신학자들 중에 분문을 위생학적으로 해석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시문스(J. Simoons)나 몰간(Morgan)같은 학자들이 대표적입니다. 이들은 이 규정이 선포된 때 상황을 면밀히 조사했습니다. 당시 그러니까 지금부터 3500년 전에 위생상태는 정말 형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질병에 취약했고 각종 전염병에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실제로 당시 돼지는 선모충병을 옮기고, 토끼는 야토병을 옮겼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들판에서 초식만을 하는 소나 양과 같은 가축만을 먹게 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했습니다.

이 규정이 선포된 때는 지금부터 무려 3500년 전입니다. 그 당시는 위생상태가 정말 형편없을 때입니다. 그래서 질병에 취약했고, 특히 세균에 의한 전염병과 각종 기생충이나 박테리아에 의한 질병에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그래서 본문의 규정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질병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먹거리를 구별해 놓으신 것이기도 합니다.

사실 이 규정은 오늘날 인간의 건강에 좋다는 것이 속속 입증이 되고 있습니다. 지금도 이 율법 규정을 그대로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전 세계에 흩어져있는 유대인들 가운데 약 20%의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지켜가고 있는 음식 규정을 코셔(kosher)라고 부릅니다.

코셔 규정의 대표적인 특징은 이런 것들입니다. 꼭 허용된 먹거리만 먹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허용된 먹거리라도 정해진 대로 사육하고 재배한 것만 먹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런 규정에 맞더라도 도살과 조리 과정에도 규정대로 해야만 먹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이 코셔 규정은 미국에서는 하나의 문화적 아이콘으로 자리잡아가고 있습니다. 코셔 음식, 코셔 키친, 코셔 티셔츠, 코셔 레스토랑, 코셔 와인, 코셔 메뉴 등으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미국사회에서 코셔는 하나의 인증제도로도 자리잡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2005년부터 이 코셔 상품들이 소개되기 시작했습니다. 매년 매출액이 20% 이상 늘어나고 있는 추세랍니다.

사람들이 이 코셔에 주목하는 것은 한 마디로 정결한 음식, 정결한 삶이라는 이미지 때문입니다. 실제로 웰빙과 건강에 대한 관심이 이 코셔를 주목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의 건강 기준에도 이 코셔가 바람직한 대안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때로 하나님의 엄격한 명령이 귀찮고 부담스럽고 떨쳐버리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랑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청소년들에게 술 담배를 규제하고 음난물을 규제하는 것은 그들을 구속하기 위함이 아니고 그들을 지키려는 사랑의 배려인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힘들고 어렵더라도 성경 말씀대로 살려고 해야 합니다. 철저하게 그 규정을 따르려고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정함과 부정함의 기준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세상사람들과 다른 구별된 삶을 살라는 명령입니다. 그리고 깨끗한 삶을 살라는 명령입니다. 나아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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