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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살아계신 하나님 (창 28: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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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계신 하나님 (창 28:10~22)
  

현대를 가리켜 무한경쟁의 시대라고 합니다. 
과학문명의 발달로 인해,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인터넷을 비롯한 통신수단과 교통수단의 발달은 
이제 세계를 작은 지구촌으로 만들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경쟁해야 하는 상대는 내 옆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분야이든지 이제는 세계 최고가 되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든 
그런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치열한 생존경쟁의 현실 속에서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성도들의 모습을 보며 
저는 정말 하나님의 은총과 복이 임하기를 간절히 소원하며 기도하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의 삶 속에 우리 주님의 은혜와 축복이 가득하길 축원합니다. 

  

저는 오늘 다시 야곱이라는 인물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야곱의 생애를 통해서 현대인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삶은 그야말로 치열한 몸부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야곱은 에서와 쌍둥이 형제로 태어났습니다. 
이 둘은 엄마의 뱃속에서부터 싸웠습니다. 

엄마가 얼마나 괴로웠는지 “이 같으면 내가 어찌할꼬” 탄식할 정도였습니다.
야곱은 태어날 때 형 에서의 발꿈치를 잡고 나왔습니다. 
동생으로 태어난 것이 너무나 억울하고 분했습니다. 
그러다가 장자 상속권이 합의에 의하여 옮겨질 수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형이 사냥을 하고 돌아와 심히 곤비할 때, 이 절호의 찬스를 놓치지 않고 
야곱은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사고 마는 집요함을 보였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이삭이 늙어 큰 아들 에서에게 축복하고자 할 때 
눈이 어두운 아버지를 속이면서까지 축복기도를 가로챘던 야곱입니다. 
하지만 이 일은 곧 발각이 나고 말았습니다. 
에서는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동생을 죽이려는 복수의 칼을 갈게 됩니다. 

이를 알게 된 야곱은 형의 눈을 피해 먼 하란 땅으로 줄행랑을 치고 있습니다. 그 모습은 참으로 가상하고 측은해 보이기도 합니다. 
야곱은 이제 정신없이 도망을 치다가 ‘루스’라는 광야에 이르게 되었을 때 
밤을 맞이하게 됩니다. 
풀 한포기 없는 황량한 광야에서 돌베개를 베고 누웠습니다. 

잠은 오지 않고, 별은 초롱초롱 빛나건만, 신세가 처량하기 짝이 없습니다. 
스산한 바람이 불어오고, 언제 달려들지 모르는 맹수의 울음소리가 들립니다.

가만히 뒤를 돌아보니 한심하기 짝이 없습니다. 
복 받아보겠다고 형도 속이고, 아버지도 속이고 수단 방법 가리지 않았는데 
이제는 형과 철전지 원수가 되어, 목숨을 건지기 위해 도망을 치고 있습니다.
앞길이 막막하기만 합니다. 
과연 살 수 있을 것인지, 아니면 형에게 붙들려 죽고 말 것인지도 모릅니다.

저는 졸지에 루스 광야에서 노숙자의 신세가 되어 버린 야곱의 모습에서 
오늘날 고개 숙인 아버지의 모습을 봅니다.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우리의 아버지들은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일합니다. 
때로는 못 들을 소리도 들으면서, 때로는 구박받고 천대받으면서 
처자식 먹여 살리겠다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일을 합니다. 
잠도 충분히 못 자면서, 자신의 건강도 돌보지 않으면서 열심히 일했는데
충성한 기업에서 소모품처럼 명퇴를 당합니다. 아직도 젊은 나이에.
이젠 아침이 되어도 출근할 직장이 없습니다. 

처자식 눈치 보느라 집안에 틀어박혀 있을 수도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환멸감을 느끼게 됩니다. 
때로는 생각지도 않은 질병에 걸려 병원 신세를 져야 합니다. 

사업을 하는 분들은 
극심한 생존경쟁 속에서 기업을 일으켜보겠다고 몸부림을 칩니다. 
노조들의 거친 항의를 받으면서 참고 견뎌야 할 일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러다가 집안에 들어오면 대우를 받아야 할 텐데 
더 이상 남자로서, 아버지로서 권위를 잃어버리고, 바가지를 긁힙니다. 

얼마 안 되는 용돈을 타기 위해 눈치를 봐야 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월급봉투 받아 내밀어 줄 때 남편의 권위가 있었는데 
이제는 온라인으로 통장에 입금이 되니 남편의 권위는 세워지지 않습니다. 
어느 샌가 가정의 주도권은 이제 다 아내에게 가 버렸습니다. 
아내들은 남편이 돈 벌어 올 때는 참았는데, 이제 돈도 못 벌어 오는 남편이 
집안에 떡하니 공간을 차지하고 있으니 지긋지긋해 합니다. 

하루 세끼 모두 집에서 먹는 사람은 삼식이인데, 아예 놈 자까지 붙입니다. 
남편들은 점점 뭔가 자신감이 없습니다. 
그나마 남아 있는 자존심마저 내려놓아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고개 숙인 우리들의 아버지의 모습은 아닌가요? 
결국 갈 데도 없으면서 집을 나섰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므로 
그냥 노숙자가 되어버리는 아버지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아내들에게 이해받지 못하고, 자식들에게 존중받지 못하는 아버지들입니다. 

우리는 오늘 광야에서 돌베개를 잠을 자고 있는 야곱을 통해서 
수많은 현대판 야곱들을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아직 절망하기에는 이릅니다. 
왜냐하면 노숙자 야곱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셨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은 비참하기 짝이 없는 외로운 야곱, 무능한 야곱, 실패한 야곱에게 
결코 홀로 두지 않으시고 찾아오셨습니다.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모습은 지쳐 있는 현대인에게 한 가닥의 희망입니다. 
혼자인줄 알았던 야곱에게 찾아오셔서 그에게 약속하십니다. 

13절-15절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 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이 말씀은 야곱에게 메마른 땅에 한 줄기 단비와 같은 축복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찾아오셔서, 그를 만나주셨습니다. 
그가 자신만만하거나, 잘나가던 때가 아니었습니다. 
형에게 쫓겨, 살 수 있을지 없을지 생존을 위협받는 위기의 순간이었습니다.
절망과 좌절의 순간이었습니다. 

아무도 없는 외롭고 쓸쓸하고 처량하기 짝이 없는 그런 때였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 메마른 광야에서 처음으로 야곱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이제는 듣기만 했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하나님임을 발견한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창28:16) 
오늘도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찾아가십니다. 
직장을 잃어버리고, 할 일을 잃어 버린 사람들.
아무도 거들 떠 보지 않고, 부러워하지 않는 사람들.
절망과 좌절에 빠져 삶의 의욕을 잃고 자살의 유혹을 받고 있는 사람들.

남을 도와주지는 못하고 오히려 남에게 짐이 된다고 생각되는 사람들.
병이 들어서, 내 몸 하나도 제대로 추스르지 못해 고통당하는 사람들.
하나님은 특별히 이런 사람들에게 관심을 기울이시며 찾아가십니다. 
어떤 면에서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편애하십니다.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교회가 관심을 가지고 찾아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이런 분들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사실 하나님은 언제나 야곱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절망의 나락에서 비로소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이 하나님과의 만남이 야곱의 삶을 변화시켰습니다. 
그는 이곳을 루스가 아니라 벧엘 즉 하나님의 집이라고 이름을 바꿉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서원을 합니다. 

20절- 22절
“야곱이 서원하여 이르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하나님과의 만남은 절망하던 사람이 희망의 사람으로 바꿉니다. 
용기 있고 자신감 있는 사람으로 변화시킵니다. 
삶의 목적과 방법이 달라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 하나님은 관념 속에만 있는 하나님이 아니라 오늘 살아계신 인격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야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될 수 있습니다. 
경제문제도, 인간관계의 문제도, 육신적인 질병도 해답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 하나님은 멀리 계신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지금 바로 이 자리에 여러분 속에 살아계십니다. 

야곱의 표현처럼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하나님이 안 계시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십니다. 
오늘도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마음을 여세요. 

우리는 성경에서 얼마든지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듣게 됩니다. 
먼저 다윗이 골리앗과 전투할 때를 봅시다. 
골리앗은 블레셋의 장군인데 거인이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군대를 모욕하였습니다. 
이 소리를 들은 다윗이 뭐라고 합니까?

삼상17:26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 누구이기에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 36절에도 그런 표현 있음.
다윗은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믿었기에 결국 승리하였습니다. 

앗수르의 산헤립이 이스라엘을 쳐 들어와서 하나님을 업신여기며 망발할 때
히스기야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 이렇게 기도합니다. 

사37:16-17
“그룹 사이에 계신 이스라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는 천하만국에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라. 주께서 천지를 만드셨나이다.
여호와여 귀를 기울여 들으시옵소서. 여호와여 눈을 뜨고 보시옵소서.
산헤립이 사람을 보내어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훼방한 모든 말을 들으시옵소서”
히스기야는 살아계시는 하나님께 기도할 때 18만 5천명의 군대를 무찔렀습니다.

우상을 섬기던 아합왕 시대에 엘리야라는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갈멜산에서 누가 참 살아계신 하나님인지 한판 승부를 벌이게 됩니다. 
먼저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던 선지자들이 아무리 기도해도 무응답입니다. 
그러나 엘리야가 간절히 기도할 때 하늘에서 불이 내려 제단을 태웠습니다. 
그 때 모든 백성의 입에서 터져 나온 말이 무엇입니까?

왕상18:39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하나님만이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다니엘은 다리오 왕 시절에 기도한 일로 사자 굴에 던져지게 됩니다. 
이튿날 왕은 새벽에 일어나 급히 사자 굴로 가서 소리를 지릅니다. 
단6:20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종 다니엘아 
네가 항상 섬기는 네 하나님이 사자들에게서 능히 너를 구원하셨느냐?”

이 때 다니엘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단6:22 “나의 하나님이 이미 그의 천사를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봉하셨으므로 
사자들이 나를 상해하지 못하였사오니”
다니엘의 하나님은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그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와 함께 살아계십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이십니다. 

베드로는 고백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바울 사도는 딤전4:10에서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힘쓰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

오늘 여러분들이 어떠한 환경 중에 있다고 할지라도 
살아계신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그 믿음으로 승리하길 바랍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그 위대하신 능력으로 역사하십니다. 

우리교회의 집사님 한 분에 대해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50대 후반의 부인이십니다. 
약 2년 전에 간암 말기 진단을 받고 현재까지 투병 중에 있습니다. 
본래 의사는 2개월 밖에 살지 못한다고 했는데 
현재 약2년 정도 살고 있으니 이것만도 이미 기적입니다. 

제가 전문적인 의학지식이 없어서 잘 모르지만 
일반적으로 색전술이란 것을 8회 내지 9회 정도 하면 혈관이 말라서 
더 이상 그 방법을 사용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집사님은 18번이나 색전술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고주파로도 2회나 치료를 받았습니다. 
의사로서는 놀라운 일이라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한 번은 제가 심방을 다녀 온 다음 날인가 역시 색전술을 하게 되었는데
CT 촬영으로는 혈관이 나오지 않아서 그냥 약물을 뿌리려고 했는데
놀랍게도 약물을 주입하니 약물이 들어가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니까 이제까지 보이지 않던 미세한 혈관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새로 생긴 것인지 그 동안 발견하지 못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이 사실을 접하면서 의사는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일이라고 했답니다.
그래서 가족들이 어제 목사님이 심방을 다녀갔다고 하니까
의사는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신가 봐요”라고 했답니다. 

얼마 전에 뇌혈관이 두 군데 막히는 일이 생겨서 결국 마비가 오고 
중환자실로 들어가 지금까지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의사는 3일 정도 밖에 살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답니다. 
그런데 뇌압도 높아지지 않고, 혈압이나 모든 것이 다 정상이라 놀랍답니다.
지금 20일이 지나도록 살아 있을 뿐만 아니라 
눈을 뜨고 사람을 알아봅니다. 

제가 지난 목요일에 심방을 가서 말을 건네면서 
아멘 하면 왼 손을 꽉 쥐어 보라고 했더니 왼 손을 꽉 쥐더라구요. 
얼마나 감사한지 모두가 놀라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중환자들과 차이는 
그 집사님은 한 번도 면회시간을 거르는 경우가 없고 
또 어떻게든지 목사님이든, 전도사님이든 혹은 교인들이든
꼭 찾아와서 기도를 해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기도가 이런 기적을 불러 오는 것 같다고 감사해 했습니다. 
저는 그 집사님이 회복이 되어 살아날 지, 아니면 하나님이 불러 가실이지
그것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이미 그 분 안에 놀라운 일이 일어나고 있어요.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나타내주고 있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이 기적을 일으켜 주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우리교회에 70대 남자 권사님에게도 이런 기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뇌졸중으로 인해 쓰러지셨는데 처음에는 그 상태가 너무 나빠서 
의사는 회복은 거의 불가능하며, 
혹 살아난다고 해도 제 역할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그 권사님에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마비된 부분이 풀리기 시작하고 많은 부분을 움직이고 있습니다. 
기적 같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가족들과 성도들의 기도로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 가운데 살아계십니다. 역사하십니다. 사랑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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