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교회 바깥에 구원이 있는가? (롬 1:1~7)

  • 잡초 잡초
  • 399
  • 0

첨부 1


교회 바깥에 구원이 있는가? (롬 1:1~7)


떠도는 사람들

교회에 관한한 많은 사람들이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떠돕니다. 이 교회에서 저 교회로 떠돕니다. 부평초(浮萍草)처럼 뿌리를 내리지 못합니다. 떠도는 영혼들이 많습니다. 쉼이 없는 영혼들(restless soul)입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는다면 “여러분은 평생에 몇 번째 교회에 다니시고 계십니까?” “너무 자주 옮겨 다닌 적은 없으십니까?” 결혼은 한번, 부득이 경우는 두 번 정도까지는 봐 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몇 번 바꾸셨습니까? 쉼이 없는 영혼은 어느 교회에서도 만족을 얻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상적인 교회를 찾습니다. 그런데 정말 이 세상에 이상적인 교회가 있을까요? 어떤 교회가 이상적인 교회입니까? 마음으로 그리는 이상적 교회는 어떤 모습일까요? 아마 추측하건데 이런 교회가 이상적인 교회가 아닐까 상상해 봅니다.

   ․ 사랑이란 접착제로 서로 끈끈하게 붙어있는 교회
   ․ 다른 사람들의 짐을 대신 지는 사람들이 있는 교회
   ․ 그리스도 안에서 생동감 있게 살아 움직이는 사람들로 가득한 교회
   ․ 성령 충만한 사람들로 구성된 교회
   ․ 선교적 마인드를 가진 사람들로 언제나 활력이 넘치는 교회
   ․ 희생적으로 바치는 사람들이 많은 교회
   ․ 겸손하고 친절한 교회

많은 사람들이 이런 교회를 찾을 것입니다. 이런 교회가 아니다 싶으면 교회를 옮겨 다른 교회를 찾아 갑니다. 그곳에서 찾지 못하면 또 다른 교회로 옮겨 갑니다. 마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탄탈로스의 목마름처럼 말입니다. 물론 아무런 생각 없이 덮어 놓고 교회에 나오시는 분들이 많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이상적인 교회를 찾았던 어떤 불행한 사람에 관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어떤 마을에 한 중년의 남자 집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분은 늘 교회에 대해 불만이 많았습니다. 아마 혈관 속에 불만 유전 인자가 흐르고 있었나 봅니다. 그분의 눈에는 교회에서 하는 일마다 못마땅했습니다. 찬송을 크게 부르면 하나님이 귀가 먹었는가 하고 핀잔을 주고, 찬송을 조용히 부르면 맥없이 부른다고 투정하였습니다. 

설교가 길면 지루하다고 하고 설교가 짧으면 목사가 준비가 없이 강단에 섰다고 불평이었습니다. 자기가 다니는 교회는 물론 이웃 교회에 대해서도 이 말 저 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 교회는 말씀만 강조해서 틀렸고, 저 교회는 성령만 강조해서 틀렸고 이런 식이었습니다. 보다 못한 목사님이 어느 날 반색하며 그 집사님을 맞았습니다. 좋은 소식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집사님을 위해 이상적인 교회를 두루 찾았는데 드디어 한 곳을 발견했습니다. 그곳에 가시면 이상적으로 신앙생활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교회가 있는 곳을 알려 주었습니다. 너무도 반가운 소식에 집사님은 놀라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니, 그렇게 좋은 교회가 있었으면 진작 알려주셔야지 이제 알려주십니까? 그동안 제가 얼마나 마음으로 고생한줄 아세요?” 역시 개념 없는 집사님처럼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어쨌건 그 교회가 어디에 있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목사님이 대답했습니다. 

“제가 파악하기로는 분명히 그 교회는 이상적인 교회라고 합니다. 저도 합류하고 싶은 교회입니다. 교인들이 얼마나 친절하고 겸손한지요. 집사님이 꿈꾸고 그리던 이상적인 교회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다고 하더군요.” “뭡니까?” 집사님이 궁금한 어조로 물었습니다. “예, 그 문제란, 집사님이 그 교회에 들어가시는 순간 그 교회는 더 이상 이상적 교회가 아니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상적 아내를 찾아서

이상적 교회를 찾는 것은 무엇과 같을까? 무엇에 비유하면 좋을까? 이상적 교회를 찾는 일은 마치 이상적 아내를 찾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아내가 이상적인 아내입니까? 여러분이 알고 있는 여러 여성분들이 각자 지니고 있는 최상의 장점들을 모두 합한 아내가 이상적인 아내일 것입니다. 자, 갑니다. 어떤 아내가 나올 것인가?

   ․ 영자 집사의 에스라인 몸매
   ․ 미자 집사의 화사한 얼굴
   ․ 미선 집사의 재치와 유머 감각
   ․ 혜련 집사의 두둑한 돈 가방
   ․ 경숙 집사의 탁월한 머리와 지능
   ․ 명숙 집사의 따스한 인간성
   ․ 영선 집사의 세련미와 우아함

또 무엇이 있습니까? 이 정도만 해도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장점들을 다 갖춘 이상적 아내, 더 쉽게 이야기해서 완벽한 맵시, 완벽한 솜씨, 완벽한 마음씨를 갖고 있다면 이것이 여러분이 꿈에도 그리는 이상적 아내상일 것입니다. 그러나 꿈을 깨십시오. 저도 그런 아내 상을 ‘내려놓고 산지’ 오래되었습니다! 커피향내를 맡으면서 모차르트의 음악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매일같이 궁정 요리를 먹으면서 헤르만 헤세의 시를 읊조리고 석양에 낙조를 감상하다가 오솔길을 산보하고 우아한 자태의 왕비 같은 아내와 잠자리에 든다면…  “여보세요, 꿈을 깨세요!” 

어디서 그런 이상적인 아내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 소설에서나 가능한 요정이야기입니다.


이상적 교회를 찾아서

이와 같이 이상적인 교회를 찾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디서 그런 이상적 교회를 발견한단 말입니까? 어디서 이상적인 교회를 찾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상적인 교회를 찾는 일이 최근의 일만은 아닙니다. 이상적인 교회를 찾는 노력은 적어도 중세기 이상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중세기에도 많은 사람들이 진짜 교회를 찾으려고 무던히 애를 썼습니다. 그래서 중세기의 신학자들은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먼저 그들은 교회를 두 가지 종류의 교회로 구분 지었습니다. 하나는 ‘보이는 교회’로 다른 하나는 ‘보이지 않는 교회’로 구분하였습니다. 그들에 따르면, 먼저 ‘보이는 교회’가 있습니다. 전문적인 용어로 ‘가시적 교회’(visible church)라 부릅니다. 

가시적 교회란
   ․ 여러분이 눈으로 볼 수 있는 교회입니다.
   ․ 빌딩과 재정을 갖고 있는 교회입니다.
   ․ 실제적인 문제를 갖고 있는 진짜 사람들로 구성된 교회입니다.
   ․ 교회의 지체들 모두 불완전하고 깨어진 사람들로 구성된 교회입니다.

그런데 이와는 대조적으로 ‘보이지 않는 교회’(invisible church)가 있습니다. 
   ․ 이 교회는 하나님이 의도하신 교회입니다.
   ․ 이상적인 교회입니다.
   ․ 진짜 교회입니다.
   ․ 참된 교회입니다.

여러분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여기에 있습니다. 이 교회의 멤버들은 보이는 교회의 지체들 가운데 두루 흩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보이지 않는 이 교회의 지체가 누구인지 모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이 보이지 않는 교회에 속한 지체가 누구인지 압니다.” 라고 하는 교회입니다. 

그러나 16세기의 종교개혁자들은 이런 구분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즉 교회를 ‘가시적 교회’와 ‘불가시적 교회’로 구분하는 방식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런 구분을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아무도 교회에 대해 어쩔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다음 주일을 성찬 주일로 지키겠다고 선언했다고 합시다. 그리고 주님의 만찬에 ‘보이지 않는 교회’에 속한 모든 교인들을 다 초청했다고 합시다. 얼마나 많은 교인들이 성찬식에 참석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무도 모르겠지요. 누가 그 교회에 속해있는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불가시적 교회’라는 개념 자체에 문제점이 있습니다. 그 문제점은,
   ․ 어떤 특정한 사람들을 상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 그저 추상적인 개념일 뿐입니다.
   ․ 여러분은 불가시적 교회의 지체들과 성찬을 함께 할 수 없습니다.
   ․ 여러분은 그들과 함께 찬송을 부를 수 없습니다. 
   ․ 그들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그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교회의 가시성

이런 이유 때문에 종교개혁자 요한 칼빈(John Calvin)은 항상 교회의 ‘가시성’(可視性, visibility)을 강조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가시성’이야말로 교회의 핵심(essence)라고 합니다.

   ․ 진짜 교회, 실제적 교회는 항상 가시적입니다.
   ․ 진짜 교회, 실제적 교회는 가시적인 크리스천 공동체입니다. 
   ․ 진짜 교회, 실제적 교회는 가시적 교회들 가운데 두루 흩어져 있는 불가시적인 
    이상적 크리스천들이 모인 그룹이 아닙니다. 
   ․ 진짜 교회, 실제적 교회는 가시적인 크리스천들의 공동체 그 이상일 수는 
    있지만 가시적 공동체가 아닌 다른 무엇은 아닙니다.

여러분이 교회에 대해 생각을 한다면 어떤 교회가 떠오르십니까?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의도하신 완벽한 교회, 이상적 교회가 떠오릅니까? 아니면 현재 상태의 교회가 떠오릅니까? 분명히 후자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유일한 교회는 교회의 지체들이 실제 식탁 주위에 둘러 앉아 실제 빵을 먹고 실제 포도주를 마시는 교회일 것입니다. 

자, 살아 호흡하고 있는 진짜 사람들로 구성된 이러한 진짜 교회, 실제적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을 수여 받는 자들입니다. 뒤집어 말하자면,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을 수여받는 대상은 생각이나 마음속에서나 존재하는 이상적인 교회가 아니라 여러분과 저처럼 실제 살아 호흡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이러한 교회와 같은 실제 교회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로마서 1:7에서 말씀하고 있는 바입니다. 

   “로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聖徒, saints)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 로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
   ․ 교회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기를 기원합니다!


은혜란?

․ 은혜는 복음의 핵심이며 복음의 전부입니다.
․ 은혜는 탕자 아들을 얼싸 안으시는 아버지입니다.
․ 은혜는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바울에게 나타나 그를 치시지 않고 오히려 
 그에게 사명을 주시며 계약(sign)을 하신 그리스도이십니다.

은혜가 무엇입니까?

   ․ 하나님께서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우리를 위한 자기의 사랑을 보이신 것입니다. 
   ․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들이었을 때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우리가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 우리가 길을 잃고 산중에서 헤맬 때 선한 목자께서 찾아와 우리를 어깨에 
    둘러메고 양 우리로 돌아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 우리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우리의 부모들이 우리를 포대기에 
    싸서 교회 강단 앞에서 세례를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 전에 하나님이 먼저 “너는 내 것이라”고 권리 주장하신 것입니다.
   ․ 자비에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큰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시고 심지어 우리가 
    범죄로 인해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은혜가 무엇입니까?

   ․ 우리가 아무리 사랑받을 수 없는 처지와 형편에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랑에 눈이 먼 하나님입니다.
   ․ 하나님께서 우리의 슬픔을 짊어지시고 우리의 비통함을 대신 지신다는 
    것입니다. 지게꾼 하나님이십니다.
   ․ 깨어지고 산산 조각난 우리의 삶들을 자신의 손으로 친히 주워 담아 
    기적적으로 새롭게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명품을 만드시는 장인(匠人,
    Master) 하나님이십니다. 
   ․ 이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 은혜는 약처럼 우리 안에 스며들고 온 몸에 퍼져가는 그리스도의 희생이며 
  그리스도의 부활이십니다.  
․ 은혜는 복음의 핵심이며 복음의 전부입니다.

로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기를 기원합니다! 평강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교회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기를 기원합니다! 평강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은혜가 있기를 기원합니다! 샬롬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샬롬이란?

‘샬롬’(shalom)은 
   ․ 화해(和解, reconciliation)를 뜻합니다. 
   ․ 온전함(wholeness)을 의미합니다. 
   ․ 복지(well-being)를 의미합니다. 
   ․ 잘 있음, 가득함, 넉넉함 등을 뜻합니다. 

히브리어 ‘샬롬’은 꿈꾸는 세계에 대한 비전입니다. 어떤 세상입니까? 어떤 꿈꾸는 세상입니까? 구약의 예언자들은 샬롬의 세상을 꿈꾸었습니다. 미래의 시나리오처럼 전개될 나라가 아니라 지금 현세에 대한 대안의 세상을 꿈꾸었던 것입니다. 

   ․ 싸움과 다툼하는 상대들이 서로 화목하고 화해하게 되는 그런 세상에 대한 꿈입니다.
   ․ 늑대가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어린 아이와 함께 노는 그런 세상에 대한 꿈입니다.
   ․ 사람들이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들의 창을 쳐서 낫을 만든 세상에 대한 꿈입니다. 
   ․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않는 세상에 대한 꿈입니다.(사 2:4) 
   ․ 파종하는 자가 곡식 추수하는 자의 뒤를 이으며 포도를 밟는 자가 씨 뿌리는 
    자의 뒤를 이으며 산들은 단 포도주를 흘리며 작은 산들은 녹는 세상에 대한 
    꿈입니다.(암 9:13) 

첫 번째 부활절 주일 저녁에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그의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강(平康)이 있을 찌어다! 너희에게 샬롬이 있을 찌어다!” 위대한 예언자처럼 그는 새로운 이스라엘인 교회에게 샬롬의 세상을 선물하신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중, 로마서 1:7에서 바울은 로마에 있는 교회의 교인들에게 이와 똑같은 말로 인사하고 있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샬롬)이 있을 찌어다!”

‘은혜’(grace)와 ‘평강’(peace) - 이 두 단어는 교회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 교회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은혜와 평강을 베푸시는 공동체입니다.
   ․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서서히 우리를 예수님처럼 닮아 가도록 
    변화시키는 일이 일어나는 공동체입니다. 
   ․ 교회는 한 영광에서 한 등급 높아진 다른 영광으로 업그레이드 되어가는 
    공동체입니다. 

자, 이제 우리가 이런 사실을 알게 되었다면, 즉 교회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 은혜와 평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으면, 우리는 이제 교회가 선포하는 놀라운 선언, 즉 “교회 바깥에는 구원이 없다!”는 선언의 참된 뜻을 알게 될 것입니다. 


구원: 교회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

주후 3세기의 교회 교부(敎父, church father) 가운데 키프리안(Thascius Caecilius Cyprianus, 200?-259)이란 분이 계셨습니다. 이 분이 바로 이런 강하게 들리는 말씀을 한 장본인이십니다. 그는 라틴어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EXTRA ECCLESIAM NULLA SALUS”

   ․ Extra: 바깥(outside)
   ․ ecclesiam: 교회(church)
   ․ nulla: 없다(no)
   ․ salus: 구원(salvation)

Extra ecclesiam nulla salus: “교회 바깥에 구원은 없다!”

키프리언은 말하기를, 
   ․ 하나님을 여러분의 아버지로 삼기를 바란다면, 여러분은 교회를 여러분의 
    어머니로 삼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 이 세상으로부터 구원 받기를 원한다면 여러분은 먼저 구원의 방주, 즉 교회 
    안으로 들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 교회 바깥에는 구원이 없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선언이 벨기에 신앙 고백서(Belgic Confession)에도 나온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벨기에 신앙고백서 28항에 보면 다음과 같은 문구가 나옵니다.

이 거룩한 모임과 회중은 구원받은 자들의 모임이며, 이것을 떠나서는 구원이 없으며, 아무도 이것으로부터 물러서서 스스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믿습니다.

교회를 떠나서는 구원이 없습니다! 교회에 바깥에 구원은 없습니다!

이 말이 우리의 귀에는 매우 강하고 심하게 들릴 것입니다. 좀 지나친 말처럼 귀에 거슬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너무 심하다 너무 강하다 너무 배타적이라고 하기 전에 여러분은 이 말이 신학자들의 교리(敎理, dogma)로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억눌린 우리를 해방시켜주는 시원한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임을 기억해야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잔인하고 불경건한 환경에서 살아야 했던 남녀들이 교회 안에서 ‘은혜’와 ‘평강’을 찾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진정한 구원을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주후 3세기의 크리스천들이 ‘교회 바깥에는 구원이 없다’고 주장했을 때, 그런 주장은 그들이 상아탑에서 발견한 교리는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개인적으로 경험한 사실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었습니다.

3세기의 키프리언은 그의 한 친구에게 이렇게 쓴 일이 있었습니다.

도나투스, 포도나무 그늘 밑, 이 깨끗하고 아름다운 정원에서 바라보고 있는 세상은 생기로 가득한 세상이라네. 그러나 내가 크고 높은 산에 올라 눈앞에 펼쳐진 넓은 땅들을 본다고 하세. 아마 자네도 내가 무엇을 보는지 잘 알걸세. 대로에는 산적들이 있고 바다에는 해적들이 널려 있고, 원형경기장에서는 광기에 소리 지르는 관람객들을 위해 검투사들은 사람들 죽이고 있지 않는가? 그리고 모든 지붕아래는 비참함과 이기주의로 가득하지 않는가? 정말로 형편없는 세상이지. 아주 나쁜 세상이야. 도나투스. 믿기 어려울 정도로 악하고 몹쓸 세상이야. 그러나 그 가운데서 나는 조용하고 거룩한 사람들을 찾았다네. 그들은 이 죄 많은 세상의 그 어떤 쾌락보다도 천배나 더한 기쁨을 발견한 사람들이야. 그들은 무시되고 박해를 받지만 그런 것은 별로 상관하지도 않아. 그들은 이 세상을 극복하고 이겼다네. 도나투스, 이 사람들이 누군 줄 아는가? 크리스천들이라 하는 사람들이야. 나도 그들 중 하나라네.

“교회 바깥에 구원은 없습니다!” 이 말을 롬 1:7의 빛 아래서 읽어보십시오.

로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로마에 있는 교회에게 주어집니다.
   ․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모든 이방인들 가운데서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 주어집니다.
   ․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그리스도에게 속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 주어집니다. 
   ․ 교회 바깥에 구원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없는데 어찌 하나님의 
    구원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 말씀은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불러내신 사람들의 공동체를 떠나서 별도로 이해되거나 감상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증하는 말입니다. 

크리스천들의 삶, 크리스천의 제자도는 혼자 가기에는 너무도 힘들고 거칩니다. 그런데 혼자 가려고 하는 사람들은 보통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 “예수? 좋아요! 교회? 아니오!”
   ․ “예수님은 좋아요. 그런데 교회는 필요 없어요!” 하는 사람들입니다.


교회 공동체

크리스천의 삶은 공동체 안에서 살아내는 삶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은 바로 이 공동체를 위해입니다. 이 사실을 바울은 에베소의 크리스천들에게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입니다.
   ․ 그리스도는 교회의 구원자입니다. 
   ․ 그리스도는 교회를 사랑하시어, 교회를 위해 자기를 버리셨습니다. 
    자기를 버리신 것은 교회를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입니다. (엡 5:23-27) 

교회 안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거룩한 사람들(성도)이라고 불리는 여러분 모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류호준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