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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맥추감사절]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제사 (창 4:1~8, 히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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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제사 (창 4:1~8, 히 11:4)


어느 대학 도서관에 한 노인이 고서를 기증하기 위해 왔습니다. 사서가 그 책을 살펴봤더니 그 고서는 그렇게 보관상태가 깨끗지가 못했습니다. 아주 낡았고 더러웠고 글씨도 다 문드러져서 읽기 어려울 정도의 책이었습니다. 도서관 사서는 이 책을 정리하면서 이렇게 불평했습니다. “도서관에 책을 기증하려면 좀 깨끗한 걸 해야지 이 걸레 같은걸 해서 뭐하나.” 하면서 불평을 했답니다. 

그런데 그 사서가 불평하는 것을 뒤에 지나가던 도서관장이 들었습니다. 도서관장이 이 사서를 불러다가 엄중하게 경고했습니다. “당신은 이제 돌아가서 그 노인에게 사과를 하던지, 아니면 사표를 쓰시오. 당신 같은 사람이 있으면 우리 도서관의 이미지가 나빠지고 우리는 목표한 책을 기증받을 수가 없을 것이오. 당신은 우리 직장에 해악을 끼치는 사람이기 때문에 더 이상 용납할 수 없소.” 하고 잘라 말했습니다.

이 도서관 사서는 어쩔 수 없이 노인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정중하게 사과를 드렸습니다. “노인께서 기증하신 책을 제가 정리하며 불평을 해서 너무 죄송합니다. 이렇게 귀한 책을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하고 고개를 숙여 정식으로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제야 그 노인이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나 당신네 도서관은 참 훌륭하오. 사실은 내가 진짜 좋은 책들은 따로 모아 놨는데, 걸레 같은 책을 가져다 준 것은 당신들이 그 책에 대해서 감사하는지 불평하는지 내가 알고 싶어서 그랬습니다. 당신들의 본심을 알았으니 내가 며칠 후에 다시 한 번 방문하겠소.” 그 다음에 이 노인이 책 한 꾸러미를 들고 왔는데 정말 오래되었고 가치 있는 책, 아주 귀중한 책들을 그 도서관에 기증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감사는 더 큰 축복의 열쇠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감사는 우리 인생을 더 아름답고 풍요로운 삶으로 인도해 가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감사는 우리 삶의 기적을 일으키는 기적의 씨앗이 될 수가 있습니다. 오늘 맥추감사절을 맞이해서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의 축복과 평안이 늘 함께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을 보면 두 사람이 소개됩니다. 두 사람이 똑같이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렸는데 한 사람의 제사는 하나님이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또 한 사람의 제사는 하나님이 거부하셨습니다. 열납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왜 한 사람의 제사는 받고 한 사람의 제사는 거부하셨을까요? 우리가 그 이유를 깊이 묵상해 보면 좋겠습니다. 이 두 사람은 누구입니까? 아담과 하와의 두 아들, 가인과 아벨입니다. 가인은 직업이 농부인지라 일 년 농사를 지어서 그 소산물을 하나님 앞에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예물을 받지 않으셨습니다. 아벨은 목축업자이기 때문에 그가 양을 키우는데 양의 첫 새끼를 잡아서 하나님 앞에 기름과 함께 드렸더니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오늘 이 예배의 결과를 통해서 두 사람의 운명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형 가인은 자기 제물이 열납되지 않았을 때 그 이유를 동생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동생에 대해 질투심을 느끼고 그를 미워하다가 결국 들에서 돌로 쳐서 죽이게 됩니다. 형 가인은 살인자가 되어서 이리저리 방황하는 나그네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아벨은 후에 의인 아벨로 인정을 받고 칭송을 받게 됩니다.

여러분! 목사가 헌금에 대해 설교할 때 교인들은 종종 이런 생각이 든다고 합니다. ‘아니 목사님은 만날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부요하시고 부자시고 풍요로우시고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시면서 왜 부족한 우리들에게 늘 헌금을 강요하실까?’ 이렇게 생각한답니다. 제가 거기에 대해서 한 가지 이야기를 드리고 싶습니다.

서울여대에서 가르치시는 장경철 교수님이 계십니다. 이분은 목사님이십니다. 이분이 쓴 책이 <축복을 유통하는 삶>이라는 책에서 아주 재밌는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본인이 가끔씩 야간에 강의를 할 때가 있답니다. 직장에 나가는 학생들이 야간에 공부하러 옵니다. 6시부터 수업이 시작되는데 대게는 저녁을 못 먹고 옵니다. 밤 10시까지 수업을 하려면 배가 고픕니다. 그래서 본인이 가끔 초코파이를 몇 통씩 사가지고 가서 학생들에게 나눠주었습니다. “이거 먹고 열심히 공부하자.”하고 격려한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초코파이를 나눠주고 먹기를 기다렸는데 한 학생이 초코파이를 들고 나오더니 “교수님! 이 초코파이 좀 드셔보세요. 너무 맛있어요.” 그런데 그 학생이 준 초코파이 하나를 받는데 그렇게 맘이 기쁘더랍니다. 너무 기뻐서 눈물이 날 정도로 기쁘더랍니다. 왜 기뻐했을까요? 자신은 아무리 생각해도 기뻐할 이유가 없더랍니다. 자신은 저녁을 든든히 먹고 왔습니다. 배가 안 고픕니다. 먹고 싶은 마음도 없습니다. 초코파이는 자기 돈으로 다 샀습니다. 본인이 산 것을 돌려받는데 뭐가 기쁘겠습니까? 그런데도 마음에 기쁨이 일더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로 우리가 주님께 드리는 예물은 그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다 주님의 것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 생명, 내 시간, 내 재물 다 주님의 것입니다. 헌금이란 그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다시 하나님께 돌려드릴 때 하나님의 마음에 기쁨을 드리고, 하나님의 마음에 영광을 돌리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헌금의 원리입니다.

저희 아이들이 지금은 다 컸지만 어릴 때는 가끔 둘을 데리고 시장에 갈 때가 있었습니다. 시장에 가면 먹을 게 많습니다. 아이들이 풀빵을 먹고 싶다고 하면 풀빵을 사줍니다. 비싼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큰 아이, 작은 아이에게 따로 한 봉지씩 사줍니다. 그리고 시장을 다 돌아보고 집에 돌아올 때는 저도 배가 고픕니다. 큰 아이에게 “야! 그 풀빵 하나 아빠도 먹자.” 큰 애는 “아빠 하나 드세요.” 하고 줍니다.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제가 사준 것이지만 ‘참 기특하다, 다음에는 큰 걸로 또 사줘야지.’라는 마음이 듭니다.

 그런데 작은애한테 “하나만 먹자.”하면 안 된다고 합니다. 자기도 부족하다고 합니다. 그럼 섭섭한 마음이 듭니다. ‘내가 사 준 것이지만 아빠가 배고파서 좀 달라는데 이 녀석이 그걸 안 주다니 괘씸한 놈, 다음에 사 주나 보자.’ 이런 마음이 듭니다. 여러분! 이게 바로 헌금의 원리입니다. 헌금은 하나님의 부족을 우리가 돕는 행위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구제하는 것이 아닙니다. 헌금은 믿음의 표현이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보답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헌금을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이고, 우리 마음을 거기에 담아 드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이 어느 날 예루살렘 성전에 가셔서 연보궤 앞에 앉으셔서 헌금하는 사람들을 눈여겨보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돈 많은 바리새인 부자들이 와서 움큼 움큼 많은 액수를 넣는데 그것을 칭찬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한 가난한 과부가 정말 두 렙돈, 지금으로 말하면 백 원짜리 한 두 개 정도를 부끄럽게 연보궤에 넣는데, 그것을 보시고 예수님이 칭찬하십니다. “저 부유한 사람들은 많은 것 가운데 일부분을 넣었지만, 이 여인은 구차한 중에 자기의 전부를 넣었다.” 그러시면서 칭찬하십니다.

그 여인에게는 그것이 전부였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의 마음이 그 두 렙돈에 담겨있었습니다. 여러분! 재물의 양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의 정성과 그의 진실함과 그의 감사가 거기에 담겨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헌금할 때는 의무적으로 하면 안 됩니다. 세금고지서 내듯이 하면 안 됩니다.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면 안 됩니다. 즐거운 마음, 감사한 마음으로 드릴 때 하나님이 그 예물을 기뻐하시고 그 예물에 축복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읽은 창세기 4장에는 참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가인은 농사지은 소산물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가인과 그 재물을 열납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기름을 드렸는데 하나님이 아벨과 그 재물은 기쁘게 열납하십니다. 한쪽 편은 열납하고 한쪽 편은 왜 하나님이 거부하셨을까요? 전통적으로 주석가들은 이렇게도 해석합니다. “하나님은 피의 제사를 기뻐하신다. 그래서 가인의 농산물은 피가 없고, 아벨의 양은 피를 흘린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피의 제사를 기뻐하시기 때문에 아벨의 제사를 받으신 것이다.” 

여러분! 이것이 꼭 100% 정답이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구약의 제사의 종류를 보면 분명히 소제가 있습니다. 소제라는 것은 곡식가루를 빻아드리는 것입니다. 농사지은 농부의 곡식을 드리는 제사도 그의 수확물을 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그렇기에 이것도 정확한 설명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한 사람의 예물은 받으시고 한 사람의 예물은 거부하셨을까요? 이것을 설명하는 대답이 히브리서 11장 4절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아벨은 믿음으로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벨은 믿음으로 더 나은, 더 훌륭한, 더 받으실만한, 더 아름다운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 차이밖에 없습니다. 가인이 믿음으로 예배드렸다는 사실은 없습니다. 그러나 아벨은 믿음으로 예물을 드림으로 하나님이 그 예물을 기쁘게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히브리서 11장 6절에 보니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럼 우리가 믿음으로 예물을 드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원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예물입니다. 또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마음입니다. 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온갖 축복에 대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예물이 바로 믿음의 예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늘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분이십니다.

야고보서 1장 17절에 보니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라고 나옵니다. 하나님은 늘 좋은 것을 내려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드린다는 말을 다른 말로 바꾸면 감사함으로 드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벨이 믿음으로 드렸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와 감격으로 예배드렸다는 것입니다. 예물을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인은 그렇지 못합니다. 그는 그저 적당히, 아무런 감동 없이 그저 사무적으로 드렸다는 것입니다. 어떤 영화를 보면 가인과 아벨의 제물 드리는 광경이 나오는데 아벨은 하나님 앞에 정성을 다해 예물을 준비합니다. 그런데 가인은 적당히 준비합니다. 소산물을 준비하다가 너무 많은 것 같아 조금 뺍니다. 그 모습이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드리는 예물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차이가 분명합니다. 정말 거기에 감사한 마음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신세를 많이 진 분에게 무엇을 하나 보답을 하고 싶습니다. 집에서 사과나무와 감나무를 키우는데 감 열매가 많이 열렸습니다. 내가 존경하고 신세 갚고 싶은 분에게 내가 이 감을 드리려고 한다면 어떤 감을 드리겠습니까? 제일 큰 나무에서 제일 먼저 딴 감, 제일 싱싱하고 제일 큰 것으로 잘 골라서 상자에 잘 포장을 해서 가져가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별로 하고 싶지 않는데 남들이 해야 된다고 하니까 억지로 하는 선물이라면 적당한 것으로, 그냥 아무거나 대충 모아서 갖다가 드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 차이입니다. 거기에 정말 마음을 담았는가? 거기에 정성이 있느냐? 감사한 마음이 담겨있느냐?는 것을 주님은 오늘도 묻고 계신 것입니다.

믿음으로 감사함으로 드리는 아벨의 예물은 가인과 비교해서 어떤 차이가 있었을까요? 첫째로 아벨은 양의 첫 새끼를 드렸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을 드렸습니다. 첫 새끼라는 것이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전통적으로 자녀들이 있으면 막내보다는 장남을 제일 귀중하게 여깁니다. 저도 가족이 7남매인데 5남 2녀입니다. 저희 집에서도 보면 제일 큰 형님을 우리 어머님이 제일 귀하게 여기십니다. 제일 좋은 옷은 큰 형님만 주로 입습니다. 어릴 때보면 7남매 중에 시계 찬 사람은 큰 형밖에 없습니다. 딴 사람은 시계 구경도 못합니다. 둘째, 셋째 형들은 새 옷도 못 사 입습니다. 큰 형이 입다가 싫증나면 물려 입습니다. 그래서 늘 옷이 잘 안 맞고, 떨어진 곳이 기워져있습니다. 그런 옷을 입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장남으로 태어나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지하철에서 어떤 젊은 여대생이 배꼽티를 입고 있었다고 합니다. 옆에 할머니가 이 여대생을 칭찬하더랍니다. “아이고 기특하기도 하지. 언니에게 옷을 물려 입었구나!” 다들 그렇게 살았습니다. 새 옷은 장남만 입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장남을 귀하게 여기는데,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출애굽기 13장 2절에 보니 “사람이나 짐승이나 초태생은 다 거룩히 구별하고 내게 돌리라.” 짐승이고 사람이고 처음 난 것은 하나님께 돌리는 것입니다.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잠언 3장 9절에 보니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처음 익은 열매가 중요한 것입니다. 직장에 나가는 분들도 월급을 받으면 먼저 십일조를 때에서 하나님께 드리고 생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월급을 받아서 한 달 쓰다가 ‘남으면 십일조를 해야지.’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첫째를 드린다는 것은 흠이 없는 것을 드린다는 것입니다. 제일 깨끗하고 좋은 것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쓰고 남은 것을 드리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이것이 양의 첫 새끼입니다. 우선순위가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께 먼저 드리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가장 좋은 시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가장 좋은 물질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가장 좋은 건강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나를 위해 살다가, 마지막 노년에 이제 제대로 힘도 쓰지 못할 때 하나님께 돌아와서 하나님께 드리려니 힘이 부족합니다. 재력도 부족하고 건강도 부족하고 시간도 부족하고 모든 것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최고의 것을 드린다는 것은 양의 첫 새끼를 드린다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제가 어릴 때만 해도 토요일이 되면 가끔 어머니가 이런 행동을 하십니다. 하나님 앞에 주일에 헌금을 드리는데 꾸깃꾸깃한 천 원짜리를 다리미로 깨끗하게 펴서 성경책에 넣었다가 헌금시간에 헌금을 드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이 첫 새끼를 드리는 마음입니다. 최고의 것을 드리는 것입니다. 아벨은 양의 첫 새끼를 드린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가인은 그런 말이 없습니다. 첫 소산을 드렸다는 말이 없습니다. 그냥 농사지은 것 중에 소산을 드렸다고 나옵니다. 그러나 아벨은 첫 새끼를 그 기름과 함께 드린 것입니다.


두 번째 가인과 아벨의 차이는 아벨은 기름으로 드렸다는 것입니다. 4절 말씀을 다시 읽어봅니다.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여러분! 대게 음식을 드실 때 기름은 잘 안 드시죠? 기름은 걸러냅니다. 그러나 예전에는 기름을 아주 귀하게 여겼습니다. 고기도 자주 못 먹지만 고기 한번 나오면 기름 뜨는 것을 서로 먹으려고 했습니다. 대게 어른 먼저 드리고 막내인 저도 사랑을 많이 받았기에 기름을 가끔 먹을 수가 있습니다. 어머니가 늘 하시는 말씀이 “야! 기름을 많이 먹어야 겨울에 추위를 안탄다.” 기름을 많이 먹어서 제가 과체중이 되어서 조금 체중이 많이 나갑니다. 그 때는 기름이 최고였습니다. 지금도 어려운 지방에서는 지방을 섭취하기 위해 일부러 기름을 먹습니다. 우리는 다이어트 하려고 일부러 기름을 안 먹습니다. 그런데 예전에는 기름이 최고로 귀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최고의 제사는 기름을 태워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사무엘상에 보면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제사장이었는데 아주 못된 아들이었습니다. 가끔 못된 짓을 합니다.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려고 하면 종들을 보내서 고기를 빼앗아 옵니다. 하나님 앞에 기름진 것을 태워드리기 전에 가서 “우리 제사장은 익은 고기보다 날고기를 더 원한다.”고 빼앗아 가는 것입니다. 그 때 제사를 집례 하는 사람들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 사람이 이르기를 반드시 먼저 기름을 태운 후에 내 마음에 원하는 대로 취하라.” 먼저 기름을 태우라는 이야기는 하나님 앞에 먼저 기름을 태워서 올려드리고 나머지 고기는 그 때 가져가서 먹으라는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예전의 구약제사는 하나님 앞에 기름을 드린 다음에 그 남는 것은 제사장의 몫이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 앞에 먼저 기름을 태워드려야 합니다. 기름이 그만큼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기름진 것으로 드렸습니다. 그 기름진 것은 최고의 예물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은 정말 최고의 예물을 준비하셨습니까? 그래서 시편 기자는 “내게 주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고” 라고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 아벨의 예물이 가인의 예물과 차이가 나는 것이 있습니다. 아내는 먼저 자기 자신을 드렸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벨과 그 예물은 열납하셨습니다. 그러나 가인과 그 예물은 열납하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을 바꿔 말하면 예물을 받기 전에 그 사람의 마음을 먼저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 사람 자신을 먼저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드리는 헌금은 돈만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우리의 마음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까지도 함께 드리는 의미가 거기에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드리는 것이 바로 헌금의 행위입니다. 우리가 헌신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내 몸을 드리는 것이 바로 헌신예배의 의미입니다. 돈만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특별히 고린도후서 8장에 보면 사도바울이 마게도냐교회를 칭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마게도냐교회는 이방인지역에 세워진 고린도지역의 교회인데 교회가 세워진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교회가 기근을 만나 교인들이 어려움을 당할 때 이 마게도냐교인들이 헌금을 내서 그것을 기꺼이 사도바울에게 가져왔습니다. 사도바울이 그 헌금을 보니 너무 감사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그들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이렇게 썼습니다. 

고린도후서 8장 5절에 보니 “우리가 바라던 것뿐 아니라 그들이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주었도다.”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렸습니다. 헌금을 먼저 드리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을 먼저 드리고 헌금은 그 다음에 따라가는 것입니다. 이걸 사도바울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아벨은 먼저 예물을 드리기 전에 자기 자신과 함께 드렸습니다. 헌금은 나 자신을 드리는 행위인 것입니다.

유명한 리빙스턴 선교사의 어린 시절 일화가 있습니다. 어느 시골 교회에서 주일학교생활을 했는데 한번은 교회에서 선교헌금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교인들이 기쁘게 파송하는 선교사를 위해서 선교헌금을 했습니다. 하지만 리빙스턴은 어린 나이라 드릴 헌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헌금위원들이 헌금을 다 걷어서 앞으로 나오는데 이 어린 리빙스턴이 따라 나옵니다. “너는 왜 따라 나오니?” “저는 드릴 헌금이 없고요 저 자신을 드리고 싶어요. 저 자신을 헌금으로 드리고 싶어요.” 리빙스턴은 그 약속대로 자기 일생을 선교사로 헌신하는 것입니다. 나 자신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여러분의 일생을 주께 드릴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선교지에 가서 선교하는 것만이 헌신이 아닙니다. 우리 직장에서, 우리 가정에서 우리 자신의 몸을 주께 드리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복음전도를 위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나 자신을 드리는 삶이 바로 헌신의 삶입니다. 헌금은 자신을 담아 드리는 일이요, 그리고 사랑과 헌신을 주께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벨은 이렇게 아름다운 예물을 드렸습니다. 그 예물을 드린 결과가 어떻겠습니까? 

히브리서 11장 4절에 보니 “의로운 자라 칭함을 얻었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 예물로 인해서 죄를 용서받고 의로운 자라고 하는 증거를 얻었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아벨이 드린 그 정성의 예물을 하나님이 증인이 되어 주셨습니다. 정말 아벨은 참 신실한 예물, 참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예물을 드렸다는 것입니다. 죽음 후에도 그는 다른 사람에게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오늘은 우리가 맥추감사절로 지킵니다. 구약에서는 유월절과 맥추절과 장막절이라고 부르는 추수감사절, 이 3대 절기가 있습니다. 특별히 신명기 16장에 보면 이 맥추절을 칠칠절이라고 부르는데 그 때 우리가 어떻게 칠칠절을 지켜야 하느냐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신명기 16장 10절에 보니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칠칠절을 지키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네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먼저 하나님이 내게 주신 복에 따라서 내 힘을 다하여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라는 것입니다.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드리지 말고 기쁨으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릴 때 하나님이 그 예물을 기뻐 받으시고 축복하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C.S.스터드라는 분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정말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면 내가 그분을 위해 드리는 것은 결코 아깝지 않을 것이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붉은 피를 흘리시고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다면 우리가 주님 앞에 드리는 것이 어찌 아까울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의 삶에 늘 하나님을 향한 아름다운 예배와 예물과 헌신의 삶이 있어서 주께 영광 돌리는 우리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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