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샘 곁의 나무 (창 49:22)

  • 잡초 잡초
  • 435
  • 0

첨부 1


샘 곁의 나무 (창 49:22)


하루를 살아도 보람된 삶이 있고 천 년 만 년을 산다고 한들 무의미한 삶도 있습니다. 같은 일을 하고 있는 두 사람인데도 한 사람은 즐겁게 일하는 반면 한 사람은 온통 인상을 다 써가며 우거지상이 되어서 일할 수도 있습니다. 같은 길을 가는데도 그 길이 순적하게 열려지는 길도 있고 반면 하는 일마다 막히는 그런 길도 있습니다. 비가 많이 내리고 있습니다. 이 빗물이 모여 내를 이루어 흐르게 되는데 내가 잘 정비되어 있으면 막힘없이 물은 흐를 것입니다. 하지만 나무토막이라든가 어떤 장애물이 다리에라도 걸쳐서 그 흐름을 막게 되면 그 물은 다리를 넘어 물길이 아닌 다른 곳으로 흐르며 마을과 농토를 초토화시켜 버리게 될 것입니다. 

한 여름 태양을 뜨겁게 내려쬐는데 땅에는 아무런 물기 하나 없습니다. 그러니 모든 것이 말라 죽습니다. 물이 없고서야 어찌 살 수가 있겠습니까? 단지 땅 속 몇 십 미터까지 뿌리를 내려 뻗는 조각목이라고도 부르는 사막 아카시아 나무만이 자리를 지킬 뿐이요 끈질긴 생명의 사막 풀들조차도 말라비틀어지는 곳이 바로 광야의 건기입니다.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헬몬 산처럼 지중해로부터 몰려오는 습한 안개가 있어서 물기를 공급받는 것도 아닙니다. 새벽녘에 잠깐 맺히는 이슬이 전부일 뿐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메마른 광야라 해도 거기에 샘이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사막이라면 오이시스가 형성될 것입니다. 따라서 그 주위에 여러 나무가 자라게 되고 물이 있고 그늘이 있으니 또한 많은 짐승들이 모여들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광야라면 샘을 따라 시내가 흐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 시내를 따라 나무가 뿌리를 박고 자라게 될 것이고 그 나무는 철을 따라 열매를 맺을 뿐 아니라 당연히 그 잎사귀도 마르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노래하기를 복있는 사람은 마치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했던 것입니다.

영국의 유명한 학자이며 군인이자 저술가인 토마스 에드워드 로렌스(Thomas Edward Lawrence)에 관한 재미있는 일화입니다.
 
그는 1919년 파리에서 개최된 평화 회담 때에 아랍 대표들과의 중재역할을 하는 특별한 임무를 맡았습니다. 그는 아랍 대표들을 위해서 프랑스의 최고급 호텔에 방을 예약해 놓고 그들에게 프랑스의 유명한 명소를 관광시켜 주었습니다. 그들은 관광했던 에펠탑과 루브르 박물관 등의 유명한 명소보다도 호텔의 목욕탕을 훨씬 더 인상적으로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물이 아주 귀한 사막지역에서 온 아랍 대표들에게는 조그만 꼭지만 틀면 물이 펑펑 나오는 호텔의 목욕탕이 너무도 신기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목욕탕을 볼 때마다 "야, 여기 이런 신기한 것이 있었구나!"하며 환호성을 지르며 감탄했습니다.

그런데 그 회담이 끝날 무렵 로렌스에게 그들이 묵고 있던 호텔의 직원이 황급히 찾아왔습니다. “정말 큰일났습니다. 로렌스 경, 지금 아랍 대표들이 호텔의 목욕탕을 다 뜯고 있습니다. 빨리 와 보십시오.” 그래서 달려가 보니 그들이 정말로 정신없이 목욕탕을 뜯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황급히 그들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아니 왜 목욕탕은 모두 뜯고 있습니까?” 그러자 아랍 대표들은 “이것을 다 뜯어서 아라비아로 가져가려고 합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들의 대답에 당황한 로렌스는 자세한 내용을 차근차근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의 대답은 정말 황당했습니다. “물이 없는 사막에서 이 목욕탕은 정말 인기가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정말 놀랄 겁니다. 사막 한가운데에 이 목욕탕을 놓고 수도꼭지만 틀면 물이 펑펑 쏟아질 테니까요.” 속사정을 들은 로렌스가 아랍 대표들에게 목욕탕에 물을 공급해 주는 수도관이 따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땀을 뻘뻘 흘리면서 겨우 설명했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오늘 우리는 맥추감사주일을 맞아 요셉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보는 것처럼 요셉은 샘 곁의 무성한 가지였습니다. 그는 하나님께만 뿌리를 내리고 그 도움으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은 그의 생명이 되고 하나님의 능력은 그의 능력이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그의 삶이 처음부터 잘된 것은 아닙니다. 형들에게 구박을 당하며 큽니다. 열일곱 살에 노예가 되어 십 년을 보냅니다. 다시 감옥의 죄수가 되어 여러 해를 보냅니다. 

그러나 그러한 역경은 오히려 하나님의 도움으로 존귀한 자가 되어가는 삶의 훈련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도움으로 아름다운 열매를 만들어 내었습니다. 그는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었고 야곱의 모든 자녀 손들을 살립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큰 민족이 되도록 만듭니다. 그런 요셉을 야곱은 마지막 자녀들을 축복할 때 다른 형제들보다 두 배나 더 축복을 합니다. 다른 형제들에게서는 한 족장만이 나올 뿐이었습니다. 

그래도 이스라엘의 한 지파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영광입니까 하나님의 택한 백성으로 당당하게 서는 것입니다. 하지만 야곱이 요셉에게 한 축복은 그 이상이었습니다. 그는 다른 족장의 두 배였습니다. 그로부터는 두 지파 즉 두 족장이 나올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샘 곁의 무성한 가지였습니다. 그는 살아있는 동안도 그러했고 그의 죽은 뒤에도 후손을 통해서 그는 이스라엘의 목자의 역할을 감당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지도자의 역할을 한 것처럼 그의 후손들도 그러했기에 그렇습니다. 여호수아, 드보라, 사무엘은 에브라임의 후손이며 기드온과 입다는 므낫세의 후손입니다. 그렇다면 야곱이 축복했던 바 요셉에게 주어진 축복은 무엇이며 따라서 우리가 받아야 할 복이 무엇입니까?

먼저 생각할 것은 가지가 무성해지는 복입니다.
요셉이야말로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과 같은 존재가 아니었습니까? 하나님은 항상 요셉과 함께 계셨고 요셉 속에서 그를 통해 사셨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에 그가 평안한 삶만을 살았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요셉으로 하여금 노예 생활을 피해가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감옥에서 고생하는 것을 피하게 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어려운 일을 당하는 사람들은 말합니다. “왜 나에게 이런 어려움을 주셨을까요?” 어떤 사람은 그러면서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하지만 반면에 하나님께 나에게 이런 어려움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고백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실이지 하나님이 내게 어려움을 주셨다고 믿는다면 참고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참고만 있는다고 잘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요셉의 삶은 단지 참고만 지내는 그렇게 수동적인 삶이 아니었습니다. 노예의 고통을 참고 십년을 보낸 게 아니었습니다. 

죄수의 수치를 참고 4년을 보낸 게 아니었습니다. 그는 적극적으로 그 어려움들을 맞이하여 국복하였습니다. 노예 생활을 하는 동안의 하루하루를 통해서 그는 성장하였습니다. 한 순간도 슬픔에 눌려 불평하며 보내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자신에게 상처를 주지 않았습니다. 모든 역경을 이용해서 자신을 성장시켰습니다. 충실한 노예로서 주인에게 유익을 주었습니다. 주인이 그를 보기만 해도 든든하게 만들었습니다. 동료 노예들에게도 사랑과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그가 하나님이 함께 계셔서 형통한 자가 되었다고 하는 것이 거저 된 것이 아닙니다. 그만큼 눈물 젖은 빵을 그가 먹었다는 뜻입니다. 남들보다 열심히 같은 일을 하면서도 그의 얼굴이 항상 밝았기에 가능했습니다. 어떻게 그 힘든 노예 생활을 하면서도 밝은 얼굴로 살아갈 수 있었을까요? 그는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계시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랬기에 조금도 낙망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어진 일에 감사하며 온 힘을 다해 일했던 것입니다. 

그것을 지켜보는 눈길들이 처음에는 고개를 갸웃할 정도로 이상하게 바라보는 눈길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윽고는 고개를 끄떡이며 감탄하는 눈길로 바뀌게 된 것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이건 그가 감옥에 갇히고 난 다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자기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한탄하지 않았습니다. 모범수 이상의 존재로서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었습니다. 이처럼 그는 가는 곳마다 남에게 유익을 주는 삶을 만들어갔습니다. 그랬기에 가는 곳마다 사람들도 그를 도와주었습니다. 

샘 곁의 나무가 가지를 곱게 펴 나가는 것은 그 뿌리를 샘에 박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요셉이 이렇게 복된 삶을 살아 요셉이 형통한 자가 되었다고 성경이 기록하는 이유는 다름 아닌 요셉이 자기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만 뿌리를 내리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믿음으로 주님만 바라보시고 주님만 의지하십시오. 그러면 주님이 나로 하여금 가지가 무성하게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네 삶이 가지가 말라비틀어지고 잎이 다 떨어져서 앙상한 가지만 남아 있게 된다면 이보다 더 슬픈 일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만 믹고 의지하게 되면 우리의 삶이 마치 샘 곁에 뿌리는 내린 나무가 그 가지가 무성해지고 또한 풍성한 열매가 달리게 되어 그 가지와 그늘에 많은 사람과 생명들이 깃들이게 되는 것과 같은 하나님의 복이 우리에게 임하게 될 것입니다. 샘 곁에 자라는 감람나무를 보면 얼마나 열매가 탐스럽게 달리는지 모릅니다. 아주 나무 가득 열매가 달립니다. 어쩌면 저렇게 열매가 많이 달릴까 싶습니다. 이런 가지가 무성한 복을 우리 모두가 다 받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의 영이 항상 함께 있는 복입니다.
하나님은 요셉에게 항상 힘을 공급해 주셨습니다. 그 힘은 세상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신기한 것이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그는 노예였습니다. 또한 죄수였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전혀 그에게서 노예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죄수를 볼 수 없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존재였습니다. 보디발은 그를 믿고 그에게 모든 것을 다 맡겼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그 위에 있는 것은 볼 수 없어도 그가 하면 뭐든지 잘 되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다른 모든 노예들도 그에게 복종하였습니다. 그는 거기서 지도자의 역량을 키웁니다. 보디발의 아내는 그를 유혹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함께 있기에 그의 모습은 준수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시기에 그는 거기에 빠지지 않고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감옥에 들어가도 여전히 하나님은 그와 동행하셨습니다. 그는 감옥에서도 스타였습니다. 모두가 그를 존경했습니다. 간수도 다 그에게 일을 맡겼습니다. 왕의 신하들도 그의 옆에 있으면서 꿈을 꾸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한 사람 옆에서는 다른 사람도 영향을 받습니다. 그들이 꿈을 꾸자 그 꿈을 해석해 줍니다. 하나님의 영이 도우시기 때문입니다. 결국에는 왕의 꿈도 해석해 줍니다. 하나님의 영은 끝까지 그를 인도하셨습니다.

학개 2장 4절은 “그러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스룹바벨아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땅 모든 백성아 스스로 굳세게 하여 일할지어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이사야서 4장 10절은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 지금 이 순간에도 저와 여러분과 함께 계십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고 하는 것보다 더 큰 복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시기에 우리에게 생명이 있고 하나님이 함께 계시기에 더 이상 두려워할 아무 것도 없으며 하나님이 함께 계시기에 그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시며 나를 붙들어주심으로 든든히 세워가시기 때문입니다. 이를 가리켜 본문에서는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그 영역이 더욱 넓어지는 것입니다. 

이는 곧 영향력이 커지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우리의 영향력 아래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그리고 그 결과 되어지는 것들을 그들 역시 두 눈으로 분명히 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기에 이제는 조금도 나를 보잘 것 없는 사람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 안에 하나님이 함께 계십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시기에 우리 역시 존귀한 자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것도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기에 나 역시 그 하나님 안에서 함께 존귀한 자로 세워져간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항상 주님과 동행하는 귀한 삶을 통해 그 가지가 담을 넘는 귀한 복을 함께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셋째로는 원수가 넘어뜨리지 못하는 복입니다.  
요셉의 삶은 그토록 이상적이었습니다. 그렇게 인격이 훌륭하다고 모두가 다 사랑한 것은 아닙니다. 그에게도 원수들은 있었습니다. 그가 망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활쏘는 자가 그를 학대하며 적개심을 가지고 그를 쏘았으나 요셉의 활은 도리어 굳세며 그의 팔은 힘이 있으니 이는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의 손을 힘입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어린 나이에 형들에게 잡혀서 죽을 뻔했습니다. 다행히 노예로 팔리게 됐는데 그가 노예로 살던 집에서는 여주인이 또한 그를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를 해치려고 한 사람들은 잘 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그들이 한 행동의 결과로 온갖 고생을 겪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넘어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모든 역경을 유익하게 활용하였습니다. 중요한 점은 그가 원수들보다 강한 존재였다는 것입니다. 비록 억울하게 당해도 영적으로는 훨씬 큰 존재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십시오. 예수님에게 침 뱉고 모욕을 주며 십자가에 못 박은 이들보다 예수님은 훨씬 큰 존재였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에게 모진 고통을 가했지만 예수님을 망하게 하진 못했습니다. 마찬가지의 마음으로 요셉은 임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원수가 괴롭힐 때 그럼에도 그 원수보다 우리 자신이 더 큰 존재임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나를 괴롭히는 그 원수를 축복하고 사랑하십시오. 

앤서드 멜로이의 글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가게 주인이 자기 스승에게 찾아가서는, 맞은편에 큰 연쇄점이 생겨서 자기는 망하게 생겼다고 했습니다. 자기 가정이 10년 동안 지켜 온 가게를 잃어버린다면 자기는 다른 기술도 없으니 파멸할 것이라고 걱정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그 가게 주인의 스승은 이렇게 충고를 했습니다. 

“그 연쇄점 주인을 두려워한다면, 그를 증오하게 될 것이고 그 증오가 자네가 파멸하는 원인이 될 걸세.”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매일 아침 가게 앞에 나가서 자네 가게를 축복하고, 돌아서서 길 건너 연쇄점도 축복하게.” 
“아니, 경쟁자이자 파괴자를 축복하라고요?”
“자네가 그에게 축복하는 것은 무엇이든 자네에게 좋게 되돌아올 걸세. 자네가 그에게 바라는 악은 무엇이든 자네를 멸망시킬 걸세.”

여섯 달 후에 그 식료품 가게 주인은 자기 스승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걱정과 근심만 했다면 정말로 가게를 닫아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선생님 말씀대로 했더니 지금은 그 연쇄점까지 맡고 있으며 어느 때보다도 경기가 좋습니다.”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악의는 자신을 파괴하고 이웃을 파괴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마음은 서로를 축복의 삶으로 인도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자이라는 사실을. 그러기에 미워하고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용서하고 용납함으로 화해를 이루어나가며 날마나 축복함으로 원수도 변하여 친구가 되는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이 흘러나옴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마치 요셉처럼 말입니다. 이런 귀한 성도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많은 사람을 유익하게 하는 복입니다.
요셉은 그리하여 “네 아버지의 하나님께로 말미암나니 그가 너를 도우실 것이요 전능자로 말미암나니 그가 네게 복을 주실 것이라 위로 하늘의 복과 아래로 깊은 샘의 복과 젖먹이는 복과 태의 복”을 누리되 영원히 누리는 복도 그러했습니다. 그는 늘 하나님의 힘이 자신을 돕는다고 느꼈습니다. 겉으로만 그가 한 행동을 흉내 내 보아야 별 유익이 없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전능의 손이 나를 감싸고 있음을 느껴 보십시오. 그 확신이 클수록 그 능력도 더 확실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이 명상을 늘 유지하십시오. 우리는 한 사람의 역할이 얼마나 귀중한지 한 사람으로 인해서 성읍이 복을 받기도 하고 한 사람으로 인해서 형벌을 내리려고 했던 성읍을 사하여 주실 것을 말씀하여 주시기도 했습니다. 그 말씀처럼 요셉 한 사람으로 인해서 이스라엘 모든 자녀들이 그리고 애굽과 인근의 모든 백성들이 다 죽음의 구렁텅이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바로 요셉과 같은 삶을 살도록 부르심을 받았고 택함을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러기에 언제든지 변함없이 축복자로서의 귀한 사명을 감당하십시오. 그러면 요셉처럼 능력 있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요셉은 만나는 사람들마다 그 복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럴수록 자신도 커갔습니다. 그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다 잘 되었습니다. 그가 노예였을 때는 주인과 그 집과 다른 노예들이 복을 받았습니다. 

그가 감옥에 들어가자 감옥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복을 받았습니다. 국무총리가 되자 온 애굽과 세상이 다 복을 받았습니다. 그를 통해서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는 참으로 샘 곁에 심겨진 나무였습니다. 그 가지가 담을 넘었습니다.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 한없이 퍼져 나갔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 그늘에서 쉬고 그 열매를 먹었습니다. 요셉이 따로 있습니까? 우리가 바로 요셉입니다. 하나님께만 뿌리를 내리십시오. 그의 힘으로만 살겠다고 마음을 정하십시오. 

언제든지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겠다고 결심하십시오. 그리고 그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으로 우리가 형통한 자가 되었음을 믿으십시오. 날마다 시간마다 그렇게 하십시오. 지금 나는 아니라고 생각하십니까? 한 때는 요셉과 그러했습니다. 그 당시만 보면 아닌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함께 하시는 요셉이 형통한 자가 되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노예 생활이 감옥 생활이 무어 형통한 것이냐고요? 그랬기에 그가 총리가 될 수 있었음을 기억하십시오. 따라서 어떤 형편에서든지 감사하면서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심으로 나로 인해서 모든 사람이 유익함을 얻는 복의 통로로서의 한 사람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인생을 노력으로 살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성공은 노력의 산물이라는 생각 아래 매사에 최선을 다합니다. 열심히 인생을 계획합니다. 그리고 계획한 대로 열심히 삽니다. 그런가 하면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의 틀은 결코 바꿀 수 없다는 운명론적 생각을 갖고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운명이 인생을 좌우한다고 믿기 때문에 모든 인생의 생로병사를 마치 운명처럼 받아들이며 나약한 인생을 삽니다. 

그러나 인생은 노력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 운명이 인생을 만들어내는 것도 아닙니다. 인생은 하나님의 내려주시는 복으로 삽니다. 그러면 무엇이 복입니까? 사람들은 부요와 건강과 장수와 성공 같은 세상적인 것을 복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어디까지나 복의 열매일 뿐입니다. 진정한 복은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원하여 자녀 삼아주시고, 이 모든 삶의 조건을 날마다 충족시켜 주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요 그 믿음 안에서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임마누엘이 되시는 그 하나님이야말로 모든 복의 근원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책임져 주십니다. 따라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아래 날마다 감사와찬양이 넘치는 삶을 살아가심으로 요셉처럼 복의 귀한 통로의 역할을 다 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