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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진정한 자유인 (요 8:3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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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자유인 (요 8:31~38)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나의 말에 머물러 있으면, 너희는 참으로 나의 제자들이다. 그리고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그들은 예수께 말하였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아무에게도 종노릇한 일이 없는데, 당신은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였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죄를 짓는 사람은 다 죄의 종이다. 종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물러 있지 못하지만, 아들은 언제까지나 머물러 있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참으로 자유롭게 될 것이다. 나는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안다. 그런데 너희는 나를 죽이려고 한다. 내 말이 너희 속에 있을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의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한다.”]

• 누가 제자인가?

어느 날 공자의 제자 자하가 스승에게 묻습니다. “안회는 사람됨이 어떻습니까?” “인의(仁義, 어짊과 바름)는 나보다 낫지.” “자공은 어떻습니까?” “말재주는 내가 따라갈 수가 없을 정도야.” “그럼 자로는요?” “용기에는 내가 엄두도 못내지.” “자장은요?” “장중함(점잖음)은 나보다 나아.” 이쯤 되자 자하는 궁금증을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벌떡 일어나며 묻습니다. “그들이 다 선생님보다 나은데 왜 선생님께 머리를 조아리고 스승으로 삼으며 배우고 싶어 하지요?” 공자는 조급한 제자를 안돈시켜 자리에 앉게 한 후 말합니다. 

“안회는 인의를 말 할 줄은 알지만 변통은 모른다. 또 자공은 말은 잘 하지만 겸손하지 못하다. 자로는 용감하지만 물러날 줄을 몰라. 그리고 자장은 장중하지만 남과 어울리지 못해. 그들은 각각 장점을 가지고 있지만 단점도 있다. 내가 네 사람에 대해서 잘 알고 인정하기 때문에 그들이 나를 섬기되 두 마음으로 섬기지 않는 것이다.”

<<列子>>의 仲尼 편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스승이란 많이 아는 사람이 아니라, 꿰뚫어 볼 줄 아는 사람임을 깨닫습니다. 스승은 어느 한 편에 치우치지 않는 사람, 즉 균형 감각이 탁월한 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을 닮은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생이란 벼랑과 벼랑 사이에 놓인 줄 위를 걷는 것과 같다고들 말합니다. 그 위를 잘 걷는 방법은 뭘까요? 몸이 왼쪽으로 기울면 오른쪽으로 돌이키고, 오른쪽으로 기울면 왼쪽으로 돌이켜야 합니다. 치우침이야말로 우리 삶의 병통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구주로서 믿고 신뢰하지만, 삶의 길을 여쭐 수 있는 균형잡힌 스승으로서도 존경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요한은 유대인들과 예수님의 대화 한 토막을 들려줍니다. 요한은 그들을 ‘믿은 유대인’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믿는’이라고 하지 않고 굳이 ‘믿은’이라고 번역한 것은 그 동사가 원문에서 완료분사 형태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지금 막 예수님과 대면한 사람들이 아니라 상당한 시간을 예수님 곁에 머물렀던 사람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제자가 된다는 것이 뭘 의미하는지를 가르치십니다. “너희가 나의 말에 머물러 있으면, 너희는 참으로 나의 제자들이다.”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많은 가르침을 받았을 것입니다. 이제 남은 문제는 그 말씀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말씀을 살아내는 것을 여기서는 ‘나의 말에 머물러 있으면’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처럼 성경공부를 열심히 하는 나라도 많지 않을 겁니다. 어떤 성도들은 목회자보다도 더 전문적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삶을 통해 구현되지 않으면 오히려 우리의 거짓 자아를 강화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말씀 안에 머문다는 것은 그 말씀을 바탕으로 해서 나의 사욕을 제거하고, 하나님의 뜻에 일치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한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사람됨의 길을 가르치는 논어의 맨 첫 대목이 ‘배우고 또 경우에 맞게 그것을 익힌다(學而時習之)’인 것은 참 의미심장합니다. 참 사람됨의 길은 마음을 열고 열심히 배우는 데서 시작됩니다. 하지만 그 배움은 삶 속에서 적절하게 훈련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당신의 말씀 안에 머무는 사람이 곧 제자라고 말씀하십니다. 

• 진리와 자유의 상관관계

그리고 결정적인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그 말씀을 살아내려고 애쓰면 결국 진리가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진리’라는 말은 매우 추상적으로 들립니다. 진리는 철학을 전공하거나, 그래도 교양적 지식이 풍부한 사람이나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진리는 우리가 노력하여 얻을 수 있는 어떤 지식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된 가르침을 뜻합니다. 

쉽게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진리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살려고 애쓰다 보면 결국에는 그 분이 참 삶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알 수밖에 없습니다. 나중에 빌라도는 자기 앞에 서 있는 주님께 ‘진리가 무엇이오?’ 하고 묻습니다. 아이러니입니다. 진리를 눈앞에 두고도 그는 진리가 뭐냐고 묻고 있습니다. 눈을 감은 사람에게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법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진리는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삶과 가르침 자체입니다. 그 진리를 깨달은 사람에게 주어지는 선물은 자유로움입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얼마나 가슴 벅찬 말입니까? 예수가 우리 삶에 들어오면 우리는 자기 삶의 주인이 됩니다. 성전 미문 앞에 앉아 있는 것을 자기의 숙명으로 여기던 앉은뱅이 걸인은 베드로와 요한을 만난 후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주님은 진리를 인하여 환난을 겪게 될 제자들에게 아주 솔직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16:33) 주님은 고난을 눈앞에 두고도 세상을 이겼다고 하십니다. 세상의 어떤 세력 앞에서도 짓눌리지 않는 영혼만이 할 수 있는 말입니다. 

그를 위협하고, 감옥에 가두고, 죽일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굴복시킬 수는 없습니다. 프란체스코는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으로 살았지만, 그의 삶을 누추하다고 말하는 이는 없습니다. 마틴 루터 킹도, 마더 테레사도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믿음 하나로 세상을 변혁한 이들입니다. 그들이 누린 영적인 자유를 누가 빼앗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과 처음으로 만났을 때 나는 새로운 세상과 만난 느낌이었습니다. 세상에 두려울 게 없었고, 주저할 것도 없었습니다. 예수처럼 살고, 예수처럼 죽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를 믿어서 얻는 복 따위는 제게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예수와 복을 연결시키는 생각 자체를 저는 불순한 것으로 알았습니다. 이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을 향한 나의 단순하고 소박했던 사랑도 세월과 함께 퇴색된 듯합니다. 자꾸 몸을 사리고, 계산을 합니다. 

예수의 손과 발이 되어 살기보다는 예수를 해석하고 설명하는 일에 훨씬 익숙하게 되었습니다. 다시금 주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해야 할 때입니다. 예수님은 자유입니다. 진리입니다. 진리 아닌 다른 군더더기에 마음이 팔리는 순간 우리 영혼은 위축되게 마련입니다. 33살에 생을 접을 수밖에 없었던 그 청년 예수의 외침,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라는 말이 가슴 벅차게 다가옵니다. 

• 생명을 주는 자

주님의 이런 선포에 대해 사람들은 의아해 합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아무에게도 종노릇한 일이 없는데, 당신은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까?”(33) 문자 그대로 보면 옳은 말입니다. 넘어진 사람이라야 일어설 수 있고, 떠난 사람이라야 도착할 수 있지 않습니까? 종노릇한 적이 없는데 어떻게 자유롭게 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주님을 믿어온 그 유대인들의 반응에는 노여움이 배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들에게 종교적, 민족적 자긍심에 상처를 입히는 말씀이었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이 말이야말로 그들의 내면에 있던 자부심의 근원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간단하게 대답하십니다. “죄를 짓는 사람은 다 죄의 종이다.”(34) 간명하지만 핵심을 꿰뚫는 말씀입니다. 이 말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말합니다.

“그런데 전에는 여러분이 하나님을 알지 못해서, 본디 하나님이 아닌 것들에게 종노릇을 하였지만, 지금은 여러분이 하나님을 알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알아주셨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그 무력하고 천하고 유치한 교훈으로 되돌아가서, 또다시 그것들에게 종노릇 하려고 합니까?”(갈4:8-9)

지금 우리도 누구의 혹은 무엇의 종노릇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왕자의 운명을 타고 나서 거지의 운명을 살아가는 것이 죄라 합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유인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자유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소명입니다. 제멋대로 살자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아닌 어떤 것에도 휘둘리지 말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과도한 욕망의 노예가 되어 살고 있습니다. 한동안 사람들 사이에 유행어처럼 번지던 말이 있습니다. “부자 되세요.” 이 말은 한동안 최고의 덕담 대접을 받았습니다. 기독교인들도 이 말의 주술에서 자유롭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정신을 차린 사람들은 이 말이 갖는 위험성을 잘 압니다.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유혹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도 해로운 욕심에 떨어집니다. 이런 것들은 사람을 파멸과 멸망에 빠뜨립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좇다가, 믿음에서 떠나 헤매기도 하고, 많은 고통을 겪기도 한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딤전5:9-10)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은 많은 재물이 아니라, 자족하는 마음입니다. 소유에 대한 욕망에 사로잡히는 순간 이성이나 양심은 작동을 멈춥니다. 종노릇이 시작됩니다. 예수 잘 믿으면 만사형통한다고 가르치는 이들도 있고 또 그렇게 믿는 이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 경험은 다릅니다. 잘 믿는데도 실패를 경험하고, 병으로 신음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신앙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문제가 많은데 세속적인 성공을 거두는 이도 많습니다. 여기서 사람들은 신앙적 딜레마에 빠집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지? 전도서는 말합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과거와 미래를 생각하는 감각을 주셨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이 하신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깨닫지는 못하게 하셨다.”(전3:11) 옳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다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등지고 거두는 성공보다 하나님을 향해서 거두는 실패를 더욱 소중히 여깁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누리는 건강보다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면서 겪는 연약함을 소중히 여깁니다. 

• 말씀이 머물 자리를 마련하라

37절과 38절에 나오는 말씀은 31절과 맥락이 조금 다른 듯합니다. 당신을 믿고 따르는 이들에게 제자의 삶을 가르치시던, 예수님은 본문의 뒷부분에서 당신을 대적하는 이들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내세우지만 진리이신 예수님을 죽이려 합니다. 그 까닭을 주님은 “내 말이 너희 속에 있을 자리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한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텅 빈 공간에 분자가 들어 있습니다. 그 숫자가 많지 않아 자유롭게 노닐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공간에 분자 수가 늘어나면 움직일 수 있는 여백은 점점 줄어듭니다. 분자 수가 더 늘어나 더 이상 들어올 수 없을 지경이 되면 분자들은 조금도 움직일 수 없게 됩니다. 최초의 상태가 기체였다면 마지막 상태는 고체입니다. 사람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로 가득 차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받아들일 수도 없고, 스스로를 바꿀 수도 없습니다. 부드러움은 생명의 친구이지만, 굳어짐은 죽음의 친구입니다. 굳어짐은 죽음입니다. 정신의 굳어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에스겔을 통해 그 백성들의 굳어진 마음을 도려내고, 새 살과 같은 마음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내 말이 너희 속에 있을 자리가 없다’는 주님의 말씀이 참 아프게 다가옵니다. 신앙생활이란 다른 것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여백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분주한 일상 가운데서도 시간을 구분하여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까닭은 정신의 굳어짐을 막기 원해서입니다. 감각적인 세상의 물결에 휩쓸려 우리 영혼이 떠내려가지 못하도록 하려면 우리를 든든히 붙들어줄 내적인 닻이 필요합니다. 그 닻의 이름은 기도와 성도들과의 깊은 사귐입니다. 

이번 유럽 여정 가운데 가장 행복했던 시간을 물으신다면 카푸친 수도회 교회에 앉아 있던 시간이라고 말하겠습니다. 잘츠부르크의 뒷골목을 배회하다가 나는 우연히 카푸친 수도회의 영내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비가 내리던 날, 마치 뭔가에 이끌리듯 나지막한 산길을 따라 1시간 30분 동안 숲속을 홀로 걸었습니다. 새소리는 황홀했고, 무엇보다 적막함이 참 좋았습니다. 산책길 끝에 있던 수도원 교회에 들어서는 순간 나는 발소리를 죽여야 했습니다. 

누군가가 파이프오르간을 연주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교회 안에는 연주자와 나 외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가만히 자리에 앉아 연주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 아름다운 선율은 예배당 곳곳을 어루만지고, 성상들을 쓰다듬고, 마침내 내 가슴에 파고들어 내 영혼 구석구석을 어루만졌습니다. 치유의 시간이었고, 회복의 시간이었습니다. 연주가 끝난 후에도 나는 가만히 자리에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나를 감싸 안고 있음을 이론이 아니라 몸으로 느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을 때, 그래서 우리 마음이 아버지이시고 어머니이신 하나님과 하나가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지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이 복잡할수록, 해야 할 일이 많을수록, 분노와 절망의 감정이 깊을수록, 주님께 기회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 속에 오셔서 고치시고, 회복시키시고, 새로운 소명을 주시도록 말입니다. 엎드리지 않고는 세상을 바꿀 수 없습니다. 내가 변하면 세상도 변합니다. 세상은 예수와 진정으로 만난 사람을 뒤흔들어 놓을 수 없습니다. 이 자리에 있는 우리 모두가 진리이신 예수로 인하여 진정한 자유인으로 거듭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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