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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오네시모 (몬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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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네시모 (몬 1:8~18)


최근 몇 해 전부터, 장맛비 수준을 너머서는 돌발성 폭우가 쏟아지는 여름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비 피해가 없도록, 대비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아울러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넘치는 여름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우리가 신구약성경 읽으려고 하거나, 복음이 무엇인가를 이해하고자 할 때, 꼭 아셔야 하는 중요한 사회제도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신약성경의 배경이 되고 있는, 그리스–로마사회를 지탱해주었던 ‘노예제도’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초기기독교가 당시 ‘로마의 노예제도’라는 사회적인 제도와 문화, 환경 속에서 자라났고 선포되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선포한 사도들 중, 특히 사도 바울이 복음을 선포할 때, 복음을 당시 로마의 ‘노예제도’라는 사회적인 제도와 문화, 삶의 방식 속에서 복음을 이해하고 선포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역사적인 배경 때문에 로마의 ‘노예제도’가 어떤 것이었는지 알지 못하고는, 우리가 예수 믿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올바르게 이해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래서 몇 주 동안 기독교 복음의 저변을 형성하고 있는—노예(종)라는 의미는 무엇인지? 또 자유라는 의미는 무엇인가?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나라에 복음이 전파되던 초창기(1884년, 한국교회기점), 우리나라도 로마시대에 버금가는 班常의 구별이 있던 사회입니다(兩班, 常民, 賤民). 그 신분은 세습되었습니다. 양반도, 노비도 세습되었습니다. 그런 시대에, 복음이 우리나라에 전파되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신분이나 사회제도를 뛰어넘는 사회변혁적인 힘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 비유말씀처럼, 가루 서 말 속에 든 적은 양의 누룩이 가루 전부를 부풀게 하는 것처럼, 복음은 화학적인 사회변동을 일으키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 우리교단 대전신학대학교의 설립자인 이자익(李自益, 1879-1958) 목사님이 계십니다. 이 목사님의 출신 배경은 당시 천한 종노릇(머슴)하던 馬夫입니다. 경상남도 남해 자그마한 섬,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굶어죽지 않기 위해서 가출했는데, 이집 저집 방황하며 걸식하다가, 곡창지대인 전라도 김제까지 오게 되어, 어느 부잣집 머슴이 되었던 사람입니다. 

“밥만 먹여주시면 평생 머슴이 되겠습니다. 시키는 일은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얼마나 굶주림이 무서웠으면 평생 머슴을 자청하고 마부로 들어갔겠습니까? 불쌍히 여긴 주인이, 그를 머슴으로 받아주어 그 집 마부가 됩니다. 

그 일대에서 땅을 가장 많이 소유하고, 금광사업으로 큰 부자가 된 유교를 신봉하던 ‘조덕삼’이라는 어른의 집입니다. 그 때(1904-1905년 무렵, 한국교회 초창기) Lewis B. Tate라는 미국 선교사가 그 지역을 순회하면서 전도했는데, 그 지역에 올 때마다, 조덕삼 씨의 집 馬房에 말을 맡기고 머물렀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테이트 선교사가 조덕삼 씨에게 복음을 전하였는데, 그가 예수 믿고, 그 집 사랑채에서 교회가 시작되었는데, 그 교회가 ‘금산교회’입니다. 

그 덕에 조덕삼 어른의 집에서 馬夫로 일하던 이자익도 예수를 믿게 되었고, 일자무식이었지만 주인 아들이 독방에서 한문학을 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어깨 너머로 공부해서 글도 깨우쳤습니다. 거기서부터 인생이 바뀌기 시작한 겁니다. 

교회가 부흥하자(200여명), 선교사님은 교회를 섬길 일꾼을 세우고는 다른 지역 선교에 힘쓰기로 했는데, 한 사람의 장로를 세우기로 하고 투표를 합니다. 그 투표는 당시 교회에서 가장 활발하게 일하던 집 주인 조덕삼과 그 집 馬夫 이자익을 두고 경선하게 되었습니다.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까요? 

반상의 제도가 엄격하던 구한말, 主人과 馬夫가 장로 선거에 경선 한다는 것조차도 있을 수 없는 일인데, 집 주인 조덕삼은 떨어지고 그 집 馬夫출신, 이자익이 장로로 당선 된 겁니다. 투표결과를 놓고 교인들도 너무 놀라며 충격 받고 모두 웅성거립니다. 그때, 조덕삼 어른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일갈합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저는 나이 많아서 교회봉사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자익은 젊습니다. 그를 장로로 뽑아 일하게 했으니 감사한 일입니다. 그는 지혜도 있습니다. 열심도 있습니다. 우리가 이자익을 장로로 받들어 교회를 부흥시킵시다.” 모두들 감격하지 않았겠습니까? 세쳇말로 창립멤버요, 조덕삼의 교회 아닙니까? 그 집 사랑채에서 시작된 교회인데···. 인품이 넉넉한 조덕삼 어른은, 바로 그 다음 해에 이자익에 뒤이어 장로가 됩니다. 

주일이 되면, 마부 이자익은 교회에서 설교하고 주인 조덕삼은 마룻바닥에 앉아서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러다 집에 돌아오면 조덕삼은 주인이고 이자익은 마부노릇했습니다. 후에 조덕삼 장로님은 이자익 장로님을 평양신학교에 유학 보내서 신학공부를 하게 한 후, 목사임직을 받자 자기 교회 담임목사로 청빙해서 받듭니다. 일제말엽 그 어려운 시기에 한국교회를 이끌어가는, 총회장을 3번씩이나 지내는 훌륭한 목사로 키워냈습니다(’24년 제13회, ’47년과 ’48년). 

대전신학대학교에 이자익 목사님 기념관 현판식 때, 조덕삼 장로님의 손자인 조세형 장로님(언론인, 국회의원, 주일대사 역임)과 이자익 목사님의 손자인 이규완 장로(고분자화학의 대가)이 함께 참석하였는데, 이규완 장로님이 인사말을 하시면서, 조세형 장로님 앞으로 다가가서는 허리를 90⁰로 굽혀서 절하면서 “우리 할아버지께서 主人을 잘 만났습니다. 만약에 우리 할아버지께서 주인을 잘 만나지 못하셨다면 오늘 우리들도 없고, 할아버지도 안 계셨을 것입니다”했다고 합니다. 시대와 문화의 벽을 뛰어넘는 격을 갖춘 그리스도인들입니다.

▶ 그런가 하면 그 비슷한 시기인, 1897년 무렵 곤당골교회(현, 롯데호텔 자리, 승동교회 전신)가 있었는데 그 교회는, 주로 양반들이 출석하는 교회였습니다. 그 교회에 白丁들이 예수 믿고 교회에 나오자, 양반교인들이 따로 나가서 양반들만 모이는 교회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연동교회에서도 1907년 5월부터 교회 안에, 양반교인들과 상민교인들 간의 신분갈등이 일어났습니다. 급기야는 1910년에 7월에 양반교인들 100여명이 따로 나가서, 양반교회 묘동교회를 세웠습니다. 

당시 연동교회에는 지체 높은 양반 출신 고관들도 있었는가 하면, 상민출신, 칠천역(七賤役)에 속하는 교인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일학교에서 양반교인들이 자기 자녀들을 󰡔상놈의 새끼들(연동교회 90년사에 기록된 표현)󰡕과 함께 공부시키는 것은 불가하다는 여론을 형성했고, 특히 교회의 지도자인 장로 선택에 있어서, 양반이 아닌 常民을 세운다는 것을 수치스러운 일로 생각하는 여론이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연동교회 장로 고찬익 장로님과 이명혁 장로님은 과거에 허랑방탕한 생활을 하던 노름꾼 출신이라고 합니다. 그 중 고찬익 장로님이 전도한 임공진(林公鎭)이라는 분이 있었는데 칠천역 중 하나인 갖바치 출신(광대출신)이었다고 합니다(七賤役 : 포로, 죄인, 빈민, 광대, 무당, 갖바치, 백정). 임공진이라는 분이 장로가 되자, 양반교인들이 도저히 함께 할 수 없다며, 따로 나가서 양반들의 교회 ‘妙洞敎會’를 세웠다는 겁니다(연동교회 90년사는 이 사건을, 비극적인 사건이라 자평). 

▶ 아시는 대로, 우리나라의 신분제도는 삼국시대부터 내려왔는데, 조선시대에 와서 양반, 상민, 천민이라는 신분제도가 고착화되었습니다. 천민 가운데서도 가장 멸시를 받는 계층이 백정입니다. 다른 천민들은 직업만 버리면 상인이 될 수도 있었지만, 백정은 백정신분을 벗을 길이 없었습니다. 초상 때, 상복도 입지 못했습니다. 부녀자들은 비녀도 꽂지 못했습니다. 비단옷, 두루마기도 못 입습니다. ‘패랭이’라는 좁은 갓만 쓸 수 있었습니다(상민과 식별이 용이하게). 말 타고 장가도 못 갑니다. 이름에는 인仁․예禮․의義와 같은 훌륭한 뜻을 가진 글자를 써서 이름을 지을 수가 없었습니다(참 모질기도 했지요). 

백정은 상민에게 깍듯이 경어를 써야 했습니다. 백정은 상민촌을 지날 때, 보통 걸음으로 걸을 수가 없었습니다. 허리를 구부정하게 구부린 채 달음질치듯이 빠른 걸음으로 지나가야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당시 교회에서, 아이들이 서양유희를 처음 배울 때, 꼭 백정걸음걸이 같다고 해서 배우지도, 가르치지도 못하게 했습니다. 불과 100여 년 전 우리나라, 한국교회 안에 있던, 복음적이지 못한 세속문화의 실체들입니다.

그러면, 기독교 복음이 처음 전파되던, 2000년 전은 어떠했을까요? 그 때도 역시, 100여 년 전 우리나라의 신분제도와는 또 비교할 수 없는, 일면 더 가혹했던 로마의 ‘노예제도’가 당연시 되던 때입니다. 

로마제국시대(헬라문화) 속에서, 기독교의 복음이 전파되었던 겁니다. 특별히 사도 바울은, 당시 로마제국의 문화요 사회제도였던 󰡔노예제도󰡕라는 시대적인 배경과 사회적인 구조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스도인 됨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재해석해주었다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시대의 문화인 노예제도를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사도 바울이 말하는 복음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 여러분 바로 이 점을 주목하시기를 바랍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사회구조(제도) 속에서 가장 낮은 자의 자리(가장 낮은 계층)에서, 가장 낮은 계층 사람들의 눈으로 보지 않으면, 이해할 수도 없고, 깨달을 수도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기독교는 1C 당시, 로마제국이라는 지정학적인 틀 속에서 형성이 되었고, 로마제국의 문화와 제도, 경제, 사회 속에서 복음이 무엇인지 해석이 되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당시 로마의 노예제도는, 로마제국의 政治와 經濟와 文化를 말해주는 가장 중요한 시대특징입니다. 

노예제도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로마제국을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당시 로마인구의 30-50%가 노예들이었습니다. 대다수의 노예들은, 전쟁 포로나 강포한 힘에 의해 납치된 사람들입니다. 빚 때문에, 종종 로마시민이 노예가 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극소수에 불과했습니다. 대다수의 노예들은 붙잡혀 온 外國人들입니다.

노예들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재산 목록 중 하나였습니다. 노예들은 자기 ‘몸’에 대한 자유가 전혀 없는 사람들입니다. 주인 이외에는 그 누구도, 심지어 자기 자신까지도 자기 몸을 제어할 수 없는 존재들이었습니다. 노예에서 유일하게 벗어나는 길은 도망에서 성공하는 길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로마법은 노예들이 도망치는 것은 범죄로 여겼기 때문에 도망치다 잡히면 사형을 당하거나, 운이 좋으면 烙印이 찍히고서 또 다시 노예로 사는 길이었습니다. 도망치다 잡힌 노예들은, 구리 목줄을 매고 다녀야 했습니다. 

4, 5세기 한 노예의 목줄에 다음과 같은 말이 새겨져 있습니다. “저는 부주교 펠릭스(Felix)의 노예입니다. 저를 잡아서 도망가지 못하게 하세요.” 이것은 당시 기독교인들 중에도, 노예를 가혹하게 부렸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특히 남자 노예들은, 법적으로 아버지를 가지거나 또는 아버지가 될 수도 없습니다. 생물학적인 혈족관계는 있지만, 법적인 부모자식관계는 없다는 이야기지요. 다시 말하면, 신체적으로는 엄연한 남자지만, 사회제도로 보면 거세당한 남자나 다름없었고, 주인에게 물건 취급받는 재산목록 중 하나에 불과한 존재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에베소’ 도시는, 거대한 노예매매시장이 있던 도시입니다. 노예시장의 노예들은 사람이 아니라 노동력에 따른 상품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도 바울이 로마서(그의 서신서)에서 사용한 ‘몸’(헬, 소마타 sw,mata)이라는 단어는, 노예시장에서 노예를 사고 팔 때 매매문서에서 ‘노예’를 지칭하는 말이었다는 점입니다(롬 12, 1 너희 몸을 거룩한 산 제물). 

즉,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말하는 ‘몸’이라는 말을 쓸 때, 몸이라는 말의 뜻은, 우리가 우리 마음대로 주인노릇할 수 없는 존재인 󰡔나󰡕를 가리키는 말이라는 겁니다. 나라는 존재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나 아닌 주인이 따로 계시다는 말이지요. 그 주인이 누구입니까? 둘입니다. 

(1) ‘죄’(hamrtia)라는 주인입니다. 

(2)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값 주고 사셔서 내 인생의 새로운 주인 되신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겁니다. 우리는 두 주인 중 하나를 주인 삼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죄가 우리의 주인노릇 하지 못하게 하라는 겁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핵심입니다. 죄(hamartia)가 우리 몸의 主人인가?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몸의 主人인가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더 이상 罪의 奴隸가 아니라고 선언합니다. 도리어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종) 된 나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받았다”고 선언하지 않습니까?(롬 1, 1) 자기 ‘몸’을 100% 다스리고 주장하는 새 主人이 ‘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는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가 되었으니, 자기 몸(인생)의 소유권, 주장권이 자기에게 있지 아니하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면서,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고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로, 자기 몸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신다고 고백했던 것입니다(갈 2, 20). 

▶ 오늘 본문은 로마제국주의 시대, 노예제도가 성행하던 시대의 한 복판에서, 예수 믿었던 노예를 부리고 있던 주인 ‘빌레몬’이라는 자에게, 사도 바울이 보낸 편지입니다. 사도 바울은 노예를 사고팔던 노예시장 성행하던 ‘에베소’의 한 감옥에서 이 편지를 골로새라는 도시에 사는 빌레몬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빌레몬에게 그가 부리던 노예 ‘오네시모’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빌레몬의 노예, 오네시모가 주인의 집에서 재산을 훔쳐서 도망쳤습니다. 당시 로마법으로 보면, 오네시모는 죽어 마땅한 물건입니다. 빌레몬은 도망친 ‘오네시모’ 때문에 마음이 많이 상했을 것이 분명합니다(당시 제도로 보면 ‘오네시모’는 죽어 마땅한 도망친 물건, 재산에 불과했던 겁니다).

그런데, 그 도망친 오네시모가 에베소 감옥에 갇혀 있는 사도 바울을 만나 예수를 믿게 됩니다. 그리고는 사도 바울에게 없어서는 안 될 동역자가 되었고, 심복(心腹) 마음에 있는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가 된 겁니다. 사도 바울이, 옥중에서 만난 빌레몬의 노예 ‘오네시모’를 본래 主人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면서, 그를 더 이상 노예로 여기지 말고 ‘사랑받는 형제’로 여기라고 간곡하게 부탁합니다. 그 내용이, 빌레몬서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당시 로마의 노예제도 하에서, 예수 믿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말하는 편지이고, 그리스도인 됨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말해주는 대단히 중요한 편지라는 얘기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당시 로마제국시대의 사회제도 속에서 제일 낮은 계층인 노예제도 속에서 이해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예수 믿으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奴隸로 생각해 본 적이 있으십니까? 저와 여러분은 누구의 노예이십니까? 죄(hamartia)의 노예이십니까? 나를 값주고 사신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이십니까? 만일,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라면 나에게 있어 그 의미는 무엇입니까?(다음 주에 계속···).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우리 인생의 주인이 아직도 내 자아입니다. 아니, 죄가 우리의 주인입니다. 하마르티아에게 노예노릇합니다.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주께서 우리의 주인 되어 주옵소서. 그리하여, 주의 복음말씀에 順命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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