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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도들의 이름 (사 6: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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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들의 이름 (사 6:1~13) 
 

1. 성도의 이름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여러분을 부르는 이름들은 생각보다 많습니다. 성도, 신자, 교인,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 크리스천, 기독교인, 기독도, 예수쟁이, …. 여러분은 이 중에서 어떤 이름이 제일 마음에 드십니까?

“예수쟁이”란 기독교인을 속되게 부르는 말입니다만, 저는 이 “예수쟁이”라는 말이 좋습니다. 우리말에서 “쟁이”란 일부 명사 뒤에 붙어 ‘그것이 나타내는 속성을 많이 가진 사람’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입니다. 예를 들어, ‘겁쟁이’라고 하면 겁이 많은 사람이라는 뜻이고, ‘고집쟁이’는 고집이 쎈 사람, ‘멋쟁이’는 멋을 잘 내는 사람이라는 뜻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쟁이”란 무엇입니까? 말 그대로 하면, ‘예수가 많은 사람’이지요. 그 속에 예수님으로 충만한 사람, 예수님을 많이 닮은 사람, 예수님이 그의 전부가 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좋은 이름입니까? 

이 “예수쟁이”와 비슷하지만, “예수장이”라고 하면 뜻이 조금 달라집니다. “장이”는 일부 명사 뒤에 붙어 ‘그것과 관련된 기술을 가진 사람’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입니다. 예를 들면, ‘간판장이’하면 간판 기술을 가진 사람, ‘양복장이’는 양복 기술을 가진 사람, ‘칠장이’는 칠을 잘 하는 기술을 가진 사람이라는 뜻이 됩니다. 

따라서 “예수장이”는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이 그의 주특기, 그리고 예수님과 관련된 것이 그의 기술로 여겨지는 사람이라는 뜻이죠. 그런데 여러분, 이 “장이”와 관련된 말이 “장인(匠人)”입니다. “장인”이란 한 분야의 전문가, 즉 전 생애를 그 기술 하나에 매달린 결과 그 분야의 최고가 된 사람을 뜻합니다. 그런 면에서 “예수장이”, 즉 “예수의 장인”이라고 불리는 것은 얼마나 명예스럽습니까? 예수에 관한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전문가라고 불리는 것은 정말 영광중의 영광이지요.

이 “예수쟁이”나 “예수장이”는 사도행전에 나오는 안디옥 교인들이 처음으로 들었던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과 연관됩니다(행11:26). 

‘그리스도인’이라는 헬라 말은 ‘크리스티아누스’(christianus)인데, ‘그리스도(Christ)’라는 단어에 “~ian”라는 접미사를 추가한 것으로 ‘그리스도에 속한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래서 “헤롯 당”이라는 말처럼 “그리스도 당”, 즉 ‘그리스도의 추종자들’이라는 뜻으로 쓰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은 안디옥의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에게 이 이름이 처음으로 붙여졌을 때는 이와는 조금 달랐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믿은 후, 모든 일에서, 사람들과의 모든 대화에서 “그리스도”라는 말이 입에 붙어 떠나지 아니해서 붙여진 ‘조롱조의 이름’이었습니다. 뭐든지 무조건 ‘그리스도, 그리스도’ 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이었습니다. ‘도대체 그 그리스도가 뭔데, 그리스도가 누군데 입에 달고 다니느냐?’ 즉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밖에 모르는 인간들’이라는 뜻으로 불신자들이 붙여준 ‘비아냥거리는 이름’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정말 좋은 이름 아닙니까? 늘 입에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달고 사는 사람, 범사에 그리스도를 인정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니까요!

아무튼 “예수쟁이”, “예수장이”, “그리스도인”, “그리스도 당”, “그리스도 밖에 모르는 인간들”…, 이런 이름들은 정말 좋은 이름들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근거로 여러분을 부르는 또 다른 이름들이 있습니다. 그 이름들은 어떤 이름일까요?

2. 또 다른 세 이름

1) 단독자 

대학 다닐 때, 교회 대학부 선배들이 덴마크 철학자인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 Soren Aabye, 1813~1855)’의 책을 읽으라고 해서 읽었습니다. <사랑의 역사>, <불안의 개념>, <공포와 전율>, <죽음에 이르는 병>, <이것이냐 저것이냐> 하는 책들은 제게는 굉장히 어려웠습니다. 그러던 중에 키에르케고르가 말한 문장 하나가 저를 사로잡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홀로 서는 단독자가 되라”는 것이었습니다. 단독자는 대중, 집단, 다수, 무리 등과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즉 성도의 삶은 대중들 속에서 ‘거저 그렇고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고, 또 ‘기독교적인 분위기에 묻혀 두루뭉술하게 사는 것’도 아니라, 하나님 앞에 홀로 서서 자신을 정직하게 돌아보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 앞에 홀로 선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 앞에 홀로 설 때는 자신이 살아왔던 삶의 자리를 떠나야 하고, 모든 소리를 차단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공간과 수많은 소리들로부터 떠나 홀로 있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요. 그러나 그렇게 할 때 비로소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또 하나님 앞에 홀로 서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그것이 동료들이나 친구들과 등지거나 혹은 떠나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는 누군가와 함께 하고 함께 움직이는 것이 편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저도 어디를 가든 누군가와 같이 가는 것이 좋지 혼자 가는 것은 싫고, 무엇을 하든 더불어 하는 것이 좋지 혼자 하는 것은 싫습니다. ‘혼자’라는 생각이 들면 왠지 불안하고 불편하기 때문이죠. 그리고 또 하나님 앞에 서는 일이 어려운 이유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주위의 시선을 지워 버리고, 환경과 관계의 끈들을 놓아 버리고, 자신을 정직하게 바라보아야 합니다. 자신의 내면, 과거와 현재와 미래, 자신의 행동과 살아온 모습 등을 마치 거울을 보듯 그것을 보기 때문에 거부감이 듭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이러한 단독자의 예를 아브라함과 욥에게서 찾았습니다. 특히 아브라함은 아버지와 형제들과 친척들로부터, 아니 아예 고향으로부터 떠나야 했습니다. 그 모든 것들로부터 떠나 홀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가장 먼저 요구하신 삶이고, 바로 그것이 “단독자”의 삶이었습니다. 예수님도 제자들과 무리를 떠나 홀로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사야도 마찬가지요! 

이사야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라는 무리 속에 있던 사람, 그것도 왕실의 인척이라는 중심부에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웃시야라고 하는 걸출한 왕이 통치하던 시대에 살았습니다. 웃시야 왕은 솔로몬에 버금가는 유능하고 뛰어난 왕이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음에도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습니다. 열심히 여호와를 구하였고, 여호와를 신뢰하는 믿음으로 정치했는데,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습니다. 

그 결과 웃시야 왕 개인적으로나, 國事에 있어서 모든 것이 형통하게 되었습니다. 나라가 富强하게 되고 平和롭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말년은 너무나 비참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가장 부정하게 여기던 병, 하나님의 가장 큰 저주로 여겨지던 나병(한센병)에 걸렸기 때문입니다. 그가 나병에 걸린 것은 전염이나 감염 등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징벌을 받아서였습니다. 그가 공개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예배를 더럽혔기 때문에 병에 걸렸고, 그 때문에 남은 생을 골방에 갇혀 지내다가 죽었습니다. 

그렇게 되자 백성들은 왕이나 지도자들을 신뢰하지 않게 되었고, 웃시야가 무너뜨려버린 신앙질서는 계속 파괴되고 있었고, 그러면서 백성들은 하나님과 말씀과 예배로부터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중에 북쪽에는 바벨론이라는 거대한 제국이 무섭게 커 가면서 이스라엘에게 큰 위협이 되었고, 어제의 원수였던 애굽은 오늘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은 이스라엘을 더욱 더 혼란 속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이렇게 이사야 시대는 모든 것이 뒤죽박죽 혼란스럽고 불안한 시대였고, 하나님과 말씀과 예배가 잊혀져가는 시기였습니다.

바로 그런 때에 이사야는 혼자 성전으로 갔습니다. 가까이에서 그 모든 것을 지켜본 이사야는 더 이상 무리 속에 숨거나 왕이나 다른 사람을 의지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혼자 성전으로 가서 기도한 것입니다. “이 나라가 어떻게 되려고 이럴까?” “하나님, 그렇게 신앙 좋아보이던 왕이 어떻게 그렇게 심각하게 변했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람들이 어찌하여 이렇게 쉽게 주님으로부터 돌아서 버리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하나님, 제 주변에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 말씀대로 살려고 몸부림치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 시대와 이 백성들을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라며 홀로 하나님 앞에 서는 것, 이것이 단독자의 모습입니다. 

그렇게 기도하던 중에 그는 하늘의 보좌를 보았습니다. 영원 전부터 변함없이 그대로 계신 하나님, 불안하기 짝이 없고 권력과 열강이 浮沈을 거듭하는 시대였지만 그 모든 것을 지배하시는 진정한 왕, 천사들조차도 몸 둘 바를 몰라 얼굴을 가리고 발을 가리며 찬양해야 하는 그 거룩하신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이사야처럼 홀로 하나님 앞에 설 때 주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만난 이사야는 뭐라고 외칩니까?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5).” 하나님 앞에서 비로소 자신의 진짜 모습, 참 모습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보게 된 자신의 모습은 너무나 추하고 더러워 하나님 앞에 있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라고 절규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처음 만난 베드로도 같은 고백을 했습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5:8).” 바울 역시 이스라엘 최상류층으로 살아오다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 고백했습니다. “나는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딤전1:15).” 

지금까지는 사람들 속에서 섞여 사느라고 자신의 참 모습을 몰랐을 뿐입니다. 사람들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말하니까 정말 그런 줄 알았습니다. “자네는 좋은 대학 나오고, 학위도 받았고, 장가도 잘 갔고, 직업도 좋고, 돈도 많으니, 그 정도면 출세했지….”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정말 자신을 꽤 괜찮은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홀로 서서 자신을 바라보니, 그 동안 살아온 길, 공부하고 출세하기 위해서 밤잠을 설치며 달려온 길이 아무 것도 아니었고, 오히려 그 과정에서 더 많은 때와 오염으로 더럽혀진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 저는 정말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실 제가 한 것도 이룬 것도 없습니다. 그 모두 주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한 것처럼, 제 것인 것처럼 여겼으니 도리어 저는 죄인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러한 자기 발견이 신앙과 삶의 첫 관문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여러분은 이 관문을 지나셨습니까? 하나님 앞에 일대 일로 서 보셨습니까? 이런 경험이 없다면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서는 경험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소설가 박범신은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단독자’의 시간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깊어지지 않는다. 깊어지지 않으면 어른이 될 수 없고 ….” 2차 대전 때의 신학자이자 목회자인 본회퍼는 “홀로 있지 못하는 사람과는 함께 있는 삶을 조심하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단독자로 하나님 앞에 홀로 서지 않으면 여러분의 신앙과 영성과 인격은 깊어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홀로 서지 않는 사람은 성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조용하게 홀로 서서 하나님을 만나고 자신을 살피는 것을 여러분에게 가장 우선이고 가장 중요한 일로 여기시기 바랍니다. 

2) 개혁자

단독자는 홀로 하나님 앞에 서서 하나님을 만나고, 거기서 자신을 발견한 후, 다시 골방의 문을 열고 세상으로, 다른 사람에게로 나가야 합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홀로 기도하신 후 “보라, 때가 가까이 왔으니 … 일어나라 함께 가자”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마26:45,46). 기도실에서의 고독은 바깥의 ‘이웃’을 만나기 위한 준비이고, 기도실에서 하나님을 만난 자의 다음 일은 이웃에게로 나가는 것입니다. 

“단독자”라는 말을 만들었던 키에르케고르는 “일요일에서 월요일로”라는 말도 만들었습니다. 이 말은 교회의 복음 선포가 일요일 교회 공동체 안에서 끝나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교회에서 들은 복음은 월요일부터 시작되는 일상생활로, 일상생활에서의 실천으로 옮겨져야 함을 역설한 말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삶을 신앙의 선배들은 “개혁자로서의 삶”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하나님을 만나고, 그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던 이사야에게 들려진 하나님의 음성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8)” 

여러분, 이 말씀에는 유다 나라와 그 백성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관점이 들어 있습니다. 유다 나라는 내적으로 붕괴되어가고 있었으며, 주변 강대국들이 위협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백성들이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떠나 있는 것이며, 하나님의 권위와 말씀을 무시한 그들의 생활과 사회상은 부패와 혼란으로 치닫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유다 나라의 형편을 안타까이 보시면서, 이러한 상황을 바꿀 사람, 즉 개혁자를 찾고 계신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형편 또한 마찬가지 아닙니까? 이사야 시대를 향하여 안타까워하시던 하나님은 그때보다 더 안타까워하고 계실 것입니다. 우리 시대가 하나님의 의도와는 너무나 멀리, 그리고 많은 분야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입니다. 결코 정상이 아니지요.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하신 이 세상이 이렇게 스스로 망하여 가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십니다. 당신이 사랑하신 사람들이 이렇게 살아가는 모습을 그대로 방치해 두실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대로 버려 둘 수가 없어 사람을 찾고 계신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알아 그 뜻이 “하늘에서 이뤄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뤄지기를” 바라면서 그 뜻을 행하는 사람을 개혁자라고 부릅니다. 

올해는 종교개혁자 깔뱅 탄생 5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현재 한국교계와 신학교에서는 그의 신앙과 신학을 다시 이어가자는 논의가 한참 진행 중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독일 쾰른에 있는 어느 한인교회 목사님의 설교를 본 적이 있습니다. 

종교개혁의 진원지인 독일 개신교회는 현재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다고 합니다. 50년 전, 독일의 개신교인은 4천 3백만이었고 카톨릭 교인은 2천 5백만이었습니다. 개신교인의 수가 카톨릭의 거의 두 배였지요. 그러나 50년이 지난 현재 카톨릭 인구는 거의 변함이 없는 반면, 개신교인은 2천 6백만으로 반으로 줄었습니다. 지난 50년 동안 개신교인의 절반이 교회를 떠났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계산해 보면, 매년 35만 명이 교회를 떠났다는 말이며, 한 달에 약 2만 명, 하루에 6백 명이 교회를 떠났다는 말입니다. 물론 이러한 상황은 독일 교회의 상황이지 한국 교회의 상황은 아닙니다. 그러나 한국 교회라고 예외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위기의 이유를 개혁적인 정신과 삶의 상실에서 찾습니다. 즉 성도와 교회가 개혁자적인 신앙과 삶을 잊었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왔다는 것입니다. 루터는 성경과 다른 것, 성경을 왜곡시킨 것에 대해서 목숨을 걸고 싸웠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안에 있는 죄와 비진리에 대해 목숨을 걸고 싸우십니까? 여러분의 가정과 일터에 있는 비진리에 대해 목숨을 걸고 싸우십니까? 학자들은 우리 시대에 전도가 먹히지 않는 이유를 교회와 성도가 삶을 상실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성도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거룩한 삶을 살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 있게 전도하지 못하고, 또 그 삶을 상실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성도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시대에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개혁은 무엇일까요? 행함이 없는 신앙을 개혁하는 것입니다. 신앙과 삶의 일치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거룩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속화된 대중문화를 향해서, 지역사회와 국가를 향해서 그 잘못을 지적하고 고쳐나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이 세상을 변화시킬 개혁자를 찾고 계십니다. 이사야는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했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탄식을 들었을 때 그것을 자신의 일로 여겼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들었을 때, 다른 계획을 내세우거나, 다른 여지를 남겨 두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게 하는 개혁자로 살아갈 것을 결단한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들께서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탄식을 들으신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 시대와 이 땅의 개혁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자신과 가정과 교회와 이 땅을 하나님이 보시기에 바르게, 그리고 말씀의 반석 위에 올려놓을 사람은 바로 여러분 자신임을 잊지 마십시오. 먼저 여러분 자신을 철저하게 말씀 위에 올려놓고, 여러분의 가정을 말씀으로 채우며, 교회와 이 땅을 거룩하게 만들어가는 개혁자로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3) 동역자

여러분의 세 번째 이름은 “동역자”입니다. 물론 오늘 본문에는 이 동역자라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반면에 신약성경에는 9번 나옵니다. 헬라어로 동역자의 의미는 ‘함께 일하는 자’, ‘돕는 자’, 또는 ‘조수’ 입니다. 즉 “동역자”란 하나님 나라와 교회와 주님의 일을 위해 같은 마음으로 함께 일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과 주님의 뜻을 이루려는 그 뜻에 있어서 하나가 되고, 그리고 그 일을 함께 하는 사람이 동역자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마지막으로 들려주신 말씀이 “거룩한 씨”, “이 땅의 그루터기”가 남아있을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왕으로부터 시작하여 남녀노소가 다 주님과 말씀과 예배를 떠난 것 같던 그 시대에 그래도 남은 사람이 있다는 것, 즉 이사야가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말씀이었습니다. 

홀로 외롭고 힘든 싸움을 하던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7천 명의 동지들을 주셨습니다. 평생을 복음을 위하여 겪어보지 않은 고생과 고난이 없었던 바울에게는 많은 동역자들이 있었습니다. 로마서 16장에서 바울은 자신의 동역자들을 소개하고 있지요. 특히 바울은 자신이 가장 힘들었던 시기에 만난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를 “자신들의 목숨까지 아끼지 않은 동역자”라고 불렀습니다(롬16:4).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동역자를 갖는 것이, 내 곁에 동역자 혹 동지라고 부를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힘이 되고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동반자가 필요합니다. 큰일을 하려면 더 말 할 것도 없습니다. 혼자서는 안 됩니다. 

서로의 강점을 인정해 주고, 서로의 약점을 가려주고 보완해 가면서 그 일을 이루어 나가는 것이 동역자입니다. 그렇지만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하나님 앞에 홀로 서는 것과, 이 세상에서, 교회에서, 사역의 현장에서 혼자라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혼자인 것이 좋지만, 세상에서 혼자인 것은 불행입니다. 어느 누구도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스펄전 목사님의 교회에 나이 많은 할머니 한 분이 계셨습니다. 이 할머니는 주일 교회에 올 때마다 새로 등록한 새가족의 명단을 꼭 가져갔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불러가며 그들의 신앙을 위하여, 믿음이 깊어지도록, 그리고 삶의 시험을 이기도록 기도했습니다. 이 할머니가 이렇게 하는 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렇게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기도로 새가족을 섬기던 할머니가 세상을 떠났을 때, 장례식을 인도하던 스펄전 목사님은 “그는 나의 가장 훌륭한 동역자였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누군가의 동역자가 되어야 합니다. 특히 주 안에서, 주님의 일을 함에 있어서는 더욱 더 그러 합니다. 내가 다른 사람의 동역자가 되어야 하고 또 다른 사람이 나의 동역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물으십니다. 
‘너는 누구의 동역자인가? 너의 동역자는 누구인가? 
너에게는 너의 속 깊은 것까지 알아줄 동지가 있는가? 
브리스가와 아굴라처럼 너를 위하여 목숨까지 내놓을 동역자가 있는가? 

너 또한 그럴 준비가 되어 있는가? 
너는 목사와 선교사와 다른 여러 사역자들과 동역하고 있는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목회의 동역자가 되고, 선교의 동역자가 되고, 무엇보다 이 세상을 개혁해 나가는 일에 헌신한 개혁적인 삶을 사는 이들의 동역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3. 단독자, 개혁자, 동역자!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경과 신앙의 선배들이 여러분에게 붙여준 이름들을 잘 들으셨습니까? 자, 복습해 봅시다.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예, 단독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혼자가 되십시오, 골방으로 들어가십시오, 하나님 앞에 홀로 서십시오! 

두 번째로 세상을 향해서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예, 개혁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것을 목숨을 걸고서라도 고쳐나가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로 성도들을 향해서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예, 동역자입니다. 마음으로 영으로 삶으로 하나 되어서 주님의 뜻이 이 땅에 이뤄지게 하는 데 동역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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