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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놀라우신 하나님의 은혜 (딤전 1: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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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우신 하나님의 은혜 (딤전 1:12~17)


들어가는 말 

이번에 귀국한 후 오랜만에 형제자매들을 만나 보았습니다. 모두 춘천에 살고 계시는데, 하나님은 2남 4녀로 자란 우리 형제들에게서 다시 12명의 자녀들을 허락하셨습니다. 아들을 하나밖에 두지 못한 저를 빼고는 모두 왕성한 번식력이라고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오랜만에 외삼촌 오셨다고, 또 작은 아빠 왔다고 우르르 문을 열고 들어오는 형제자매 그리고 그들이 줄줄이 달고 들어오는 조카들을 보면서 압도당했습니다. 

하나님은 내 아들 웅섭이만 키워주신 것이 아니더군요. 모두들 몰라볼 정도로 부쩍 자라 있었는데, 벌써 군대 다녀온 큰 누이 아이들부터 고등학생 중학생 초등학생 돌 전의 아기까지 연령층이 다양한 조카들을 보았습니다. 아무튼 즐거운 시간을 보냈는데, 이 날의 단연코 주인공은 뒤늦게 결혼한 여동생이 또 뒤늦게 낳은 아들이었습니다. 

이제 곧 첫돌을 맞는다는데, 이 아이가 모든 가족들 앞에서 용한 재주를 선보였다. 두 손으로 땅을 집고 엉덩이를 쳐들더니만 무릎에 힘을 주고 일어서는 것이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온 가족이 박수를 치면서 환호성을 질렀는데, 녀석은 만장하신 가족들의 응원에 힘입어 거기서 더 나아가 두 걸음을 떼는 상당히 난이도 있는 동작까지 보여주었다. 

아버님은 기특한 그 녀석을 품에 안으시고 뺨에 뽀뽀를 해대셨습니다. 아버님은 모든 조카에게 만원씩 용돈을 주셨는데 어린 우현이 놈에게도 똑같은 몫이 돌아갔습니다. 만원은 군대 다녀온 다 큰 녀석들에게는 적은 액수이기도 하겠지만 그러나 벌벌기는 녀석에게는 과분한 액수이기도 할 것입니다. 


몸 말 

성경 요한복음 5장에 보면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일어났던 일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 연못 주변에는 많은 병자들이 모여 있었는데,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 같은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신체적인 핸디캡 때문에 세상에서 밀리고 경쟁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연못가로 모여든 이유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물이 동한 후에 제일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곳에 38년된 병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이는 거동할 수 없는 오랜 병을 앓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던 길에 그 병자를 보셨는데 단박에 그의 병이 오래되었음을 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병자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으십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예수님의 핵심을 찌르시는, 언제나 이런식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보고자 하느냐” “네가 보기를 원하느냐”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요5:7)

이 대답은 “네가 보기를 원하느냐”라고 말했을때, “주여 내가 보기를 원하나이다” 즉각적으로 대답한 소경 바디매오와 비교해 봤을 때, 이 대답은 낙제점수를 받을만한 대답입니다. 그의 대답 속에는 병 만큼이나 오랜 원망과 푸념이 녹아 있었습니다. 낫기를 원하는 자신의 노력과 아울러 경쟁에서 도태된 이들이 모인 베데스다 연못에 또 다른 경쟁이 있음을 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그러한 자들과의 경쟁에서조차 도태된 사람이라고 대답하고 있습니다. 원망과 체념 마음의 병이 깊이 뿌리박혀 있었습니다.

“물이 동할때에 나를 못에 넣어줄 사람이 없었다면 차라리 포기하고 그채로 살지 사람과 세상을 원망하며 더 못나게 살 까닭이 무엇이 있는가?”

우리들이 자존심 센 사람이라면, 얼마든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병자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세상과 사람이 원망스럽기는 해도 그 연못을 떠날 수 없었던 것은 혹시나... 하는 요행과 재수가 내게도 일어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병자가 잡고 있었던 것은 건강한 믿음이 아니라, 사람에 대한 신뢰, 세상에 대한 기대가 아니라, 이것은 아주 건강치 못한 믿음 재수와 요행에 근거한 믿음이었습니다.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저는 이 병자의 말을 듣고서 생각나는 집사님이 있었습니다. 군목시절에 만났던 문 아무개 집사님이십니다. 문 집사님은 간호장교 출신이셨습니다. 그 분은 대위로 일동병원에서 근무할때에 ROTC 출신의 남편을 만났습니다. 키가 185센티미터가 넘고 덩치도 좋고 잘생긴 분이었습니다. 남편을 만나 결혼을 하고 임신을 한 후에 간호장교로 근무했었던 자기 군생활을 접고 전역 지원서를 내고 제대를 하셨습니다. 

나를 대신하여 얼마든지 잘난 남편이 무운을 타고 승승장구할줄 알았는데, 세상이 그렇게 호락했느냐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태어난 딸이 초등학교 4학년이 되어가는데도 남편은 진급을 하지 못했다. 해마다 진급발표가 있을때면 잔뜩 기대하는 마음으로 지켜보게 되는데 그때마다 남편 집사님은 번번히 진급 심사에서 낙방을 하셨다. 그러다가 계급 정년에 밀려 남편이 제대하게 되었을때 집사님은 나를 붙잡고 한탄을 하셨다.

“목사님, 결혼 전에도 남편 계급이 대위였는데 10년이 지나도 여전히 남편이 대위예요. 목사님은 제 마음 모르실 거예요. 이놈의 군대에는 계급이 대위 밖에 없나... 하나님 정말 해도 너무하세요.”

가끔씩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분통을 터뜨리게 되는 것은 대단치 않아 보이는 세상에서 자신이 밀려났다고 생각될때입니다. 경쟁에서 밀리고 도태되었다고 생각될때 내가 저런 놈에게까지 밀리나하는 느껴지는 스스로에 대한 비참한 자괴감, 세상 잘난 것들에 대한 까닭없는 원망과 미움 이것은 정말 컨트롤되기 쉽지 않은 감정입니다.

경쟁은 태어나면서부터 시작됩니다. 아니 어머니 배속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야곱과 에서는 서로 먼저 나가려고 어머니 배속에서부터 다투었습니다. 형제자매라 할지라도 같은 뿌리에서 태어난 같은 아버지 어머니를 모시고 태어났지만, 어렸을 때는 계속 형제들끼리 경쟁입니다. 어렸을때 학교다닐때는 누가누가 공부 잘하나로 비교 당합니다. 

그러다가 장성해서 서로 시집장가 가게 되면 그 다음은 누가누가 더 잘사나로 비교당합니다. 학교에서도 경쟁이고 직장에서도 경쟁이고 군대에서도 경쟁이고 마음 편하자고 나간 교회에서도 경쟁이고 심지어는 경쟁에서 밀린 사람들이 모여든 베데스다 연못에서조차 경쟁이 있었습니다. 베데스다 연못에서의 경쟁은 너를 밟고 서지 않으면 안된다는, 너죽고 나살아야겠다는 생명을 건 살벌한 경쟁이었습니다. 경쟁에서 이기면 기분이 좋고 아슬아슬하게 밀리면 아쉽고, 완전히 밀려나면 참으로 아픕니다. 예수님은 그런 세월을 보낸 38년된 병자에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예! 주님, 그걸 말씀이라고 하십니까? 여부가 있겠습니까? 고쳐만 주신다면 제가 성한 몸으로 뭘해서라도 밥벌이를 해서 이 은혜 꼭 갚겠습니다요!”

병자는 이렇게 말하지 못합니다. 그는 살벌한 세상, 용납과 관용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세상에 지칠대로 지쳤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푸념했습니다. 예수님 앞에서조차 푸념을 늘어 놓았습니다.

“주여 물이 동할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요5:7) 

예수님은 그 병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요5:8-9)

예수님은 베데스다 연못의 질서를 해치지 않으셨습니다. 경쟁을 악하다 말씀하시지도 않으셨습니다. 38년 된 병자의 처지보다 훨씬 나았을 다른 병자들의 이기적 행동에 대해서 꾸짖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경쟁의 세상 속에서 경쟁을 넘어선 VIP 코스로 그에게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병자를 왜 고쳐 주셨을까? 이유가 뭘까?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초자연적인 기적을 베풀고도 남음이 있는 신적인 권능으로 충만한 사람임을 과시하고 싶어서? 

그랬다면 38년된 병자가 아니라 권력을 가진 세상 왕 앞에서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38년된 이 병자를 고쳐 주셨을까? 우리는 그 답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놀라우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은혜입니다. 은혜는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죄인에게 부어지는 일방적인 호의입니다. 아무런 조건도 없고 단서도 붙지 않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설명될 수 없는 주님이 나를 만나주셨다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어떤 면에서 38년 된 베데스다 병자의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겉이 멀쩡하다고 속까지 멀쩡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육체적인 질병만이 병이 아닙니다. 영적 성장을 방해하는 보다 중한 병들, 치유되어야 할 내면의 상처들이 있습니다. 이런 병들을 끌어 안고 세상을 살아가다보면 어떤 때는 경쟁에서 밀리고 소외되어 “내 인생 이제 이대로 끝나는가...” 하는 생각마저 들기도 합니다. 

지금의 내 형편에서 보자면 이곳 베데스다 연못에서조차도 내가 따라갈 수 없는 사람들이 수두룩합니다. 그들 틈에서 한걸음 떼기도 전에 자꾸 엉덩방아를 찧으며 주저 않는 한심한 내 모습이 보입니다. 남들은 쉽게 쉽게 뛰어가는 그 길이 내게는 왜 그리 멀고 힘들게만 느껴지는지... 세상에 나왔을 때는 똑같이 맨 몸으로 나왔을찐대 어떤 열매는 최상품으로 분류되어 백화점으로 팔려가지만 왜 나는 썩어 문드러져 아무도 쳐다봐주지 않는 3등품 열매가 되었는지... 

그러나 우리가 그런 시간들을 견딜 수 있는 것은 베데스다의 38년된 병자를 고쳐주신 예수님이 나에게도 찾아오셔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 하고 물으시며 나도 고쳐주시겠지 하는 소망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은가? 예수님 만나서 온전히 고침 받고 멋진 인생 후반전을 기대해 보는 믿음 때문이 아니었는가? 험악한 세상 속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려주시는 결코 험악하지 않은 사랑 덩어리 은혜가 있었기 때문에 버틸 수 있지 않았는가? 

저는 오늘 이 한번의 예배가 여러분의 인생을 다르게 바꿀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오늘 예수님 만나고 그분의 은혜를 입기만 하면, 지금까지 여러분이 몇십년을 살아왔던지 여러분의 존재가 한 번에 뒤바뀌는 놀라운 은혜가 일어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오늘 이시간 여러분의 누군가의 마음에 그런 일들이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전에 어떤 목사님께 들은 말씀입니다. 그 분은 동네에서 초등학교 다음으로 큰 건물인 교회의 담임목사님이셨습니다. 그래서 마을 초등학교 운동회 날 지역 유지로 초청되어 가슴에 꽃을 달고서 교장 선생님 옆자리에 앉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운동회 날의 하이라이트는 400미터 이어달리기입니다. 나름 학교에서 내로라하는 준족들이 뽑혀 대표 선수로 출전했는데 목사님의 막내아들도 청팀의 마지막 주자로 뛰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총 소리가 울리고 총알같이 튀어 나가는 아이들을 보면서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체면 때문에 숨을 죽이고 앉아 있으려니 미칠 것 같았다고 했습니다. 이제 마지막 주자에게로 바통이 넘겨졌는데 보니 자신의 아들이 네 번째더라고 했습니다. 바통을 꼭 쥐고서 팔을 힘차게 내저으며 달리던 아들이 한 명의 선수를 제끼고 3등으로 올라서더랍니다. 

체면 불구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손수건이라도 흔들며 “잘한다! 병구야!! 달려라~달려~어!!” 하고 소리치고 싶었으나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손에 땀을 쥐며 지켜보는데 2등으로 달리던 아이가 그만 넘어지더랍니다. 그런데 그 순간 넘어진 아이를 보며 ‘어이쿠!’ 하는게 아니라 ‘할렐루야!’ 소리가 절로 나오더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다음 생각. ‘한 놈 더 넘어졌으면 좋겠다!’ 

여러분 이런 말씀을 들으면 누구와 여러분을 동일시하게 됩니까? 나는 목사님의 이러한 말씀을 들으며 도저히 내가 처한 상황으로는 일등할 수 없는 병구와 동일시하게 됩니다. 이건 성경을 볼때마다 한결같이 내가 눈높이를 두기를 원하는 죄인의 자리입니다. 

은혜가 필요한 죄인의 모습입니다. 나는 하나님 아버지의 우리를 향한 마음이 바로 이러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자기 백성들을 향한 절대적인 애착과 사랑을 가지고 계시는 아버지! 그 아버지께서 나를 절대적으로 보호해주시고 편들어 주시며 채워주신다고 나는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이 믿음 없었으면 나는 벌써 선교사로 일하다가 쓰러졌을 것입니다. 

잘아시다시피 7년전, 내가 인디언 선교사로 파송된다고 하였을 때 여러분 황당하셨죠? 여러분 뿐 아니라 제 친구들도 황당해 했고 나도 황당했었습니다. 그때 나를 아는 친구들이 이렇게 말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드디어 인디언 선교를 포기하시는구나!”

“선교사 지망생이 한 명만 더 있었어도 하나님께서 너를 부르지 않으셨을거다!”

“네가 인디언 선교지에서 어떻게 일하나 우리가 두고 볼 거다!”

그들은 내가 유난히 도시를 좋아하고 사람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빈정대는 친구들의 말에 화내지 못하고 같이 따라 웃었던 것은 아마도 한국인 선교사 가운데 내가 영원히 꼴찌일 수 밖에 없을 거라는 아픈 긍정이었습니다. 친구들의 말은 사실이었습니다. 

나는 선교지에서 무수한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무식하기도 했고 머리가 나빠서 그랬기도 했습니다. 정말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을 겪으면서 내가 결론내린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나를 여전히 믿어주고 계시며 당신의 은혜로 나를 덮으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인정해 주시는데 누가 나를 대적하겠는가?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신데 누가 정죄하리요.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게 될찌라도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아멘!” 

내가 우리 교단의 '연회'(Annual Conference)에 참석하여 제일 많이 기다리는 순서가 있습니다. 그것은 교단의 대표이신 감독(Bishop)님께서 회의의 마지막 순간에 연회 총무 목사님과 주고 받는 일문 일답입니다. 이 순서는 통상 연회 마지막 날 목사 안수식 후에 거의 파장 분위기에서 이루어지는 순서입니다. 회의장 밖에서는 목사 안수 받은 이들과 그를 축하하러 온 가족과 교우들로 왁자지껄합니다. 

그래서 회의장 안에서는 별로 앉아 있는 이들이 없습니다. 이제 별로 중요한 회무가 남지 않았기 때문에 회의장 안에 앉은 이들은 이 순서가 빨리 끝나기를 바랍니다. 2박 3일의 모든 회무를 마치신 감독님께서 총무 목사님을 단으로 불러 한 100가지도 넘는 질문들을 합니다. 회원들 가운데 별세한 이가 있느냐? 은퇴한 이가 있느냐? 준회원에 허입한 이가 있는가? 수련 목사에 진급중인 이가 있는가? 정회원 목사에 허입한 이가 있느냐? 하는 등등의 질문을 묻습니다. 그러면 총무 목사님께서는 해당되는 회원들의 이름을 일일이 호명하며 대답을 합니다. 그 가운데는 이런 질문도 있습니다.

“해외 선교사로 파송된 이가 있습니까?” 

그러면 총무 목사님께서는 “예 있습니다!” 하고 대답한다. 그러면 다시 감독님께서 “해외 선교사로 파송된 이가 누굽니까?” 하고 다시 묻는다. 그러면 다시 총무 목사님께서 연회 회원으로서 해외 선교사로 파송된 목사들의 이름을 호명한다. 

“김말자, 최개똥, 박말종, 정꼴찌, 이상혁입니다.”

나는 그 시간에 내 이름이 불려지는 것이 그렇게 감격스러울 수가 없습니다. 눈물이 핑 돕니다. 내가 무흠한 종이냐구? 천만에... 내가 흠이 많은 종이라는 것, 털면 먼지가 나는 정도가 아니라 굵은 모래알이 뚝뚝 떨어지는 종이라는 것 나도 알고 친구들도 알고 세상도 압니다. 흠이 있는 종에게는 당신의 일을 맡길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모른척 해주시고 눈감아 주시고 덮어주시니까 나는 또 일년이라는 시간을 연장 받아 부끄럽지만 일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감사하고 고마울 따름입니다. 감독님과 총무 목사님의 입을 통해서 내 이름을 꼭 듣고 돌아가야 마음이 편안할 것 같아서 그 시간이 그렇게 기다려질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무흠하다 선교지에서 일년 더 일하거라. 일해도 좋다... 하시는 하나님의 결재가 있었다고 믿었기에 누가 뭐래도 나는 하나님의 심장이며, 하나님 나라의 대사이며 호피 마을에 전해진 선교 편지이며 인디언 선교의 감리교의 대안이라고 믿었고 그렇게 행동했습니다.

1933년부터 1945년까지 3선의 대통령으로 지금까지 많은 미국인들이 존경하는 분이 있습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39세때 소아마비에 걸린 장애인입니다. 그분은 미국이 가장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당했을때 대통령에 당선되어 불황을 극복하는 전무후무한 업적을 남기셨습니다. 그 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비평가의 말은 중요하지 않다. 강한 사람이 어떻게 비틀거리고 누군가의 행동이 어땠어야 더 좋았을 뻔 했다고 지적하는 사람도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찬사는 오직 경기장에 서 있는 사람의 몫이다. 먼지와 땀과 피로 범벅이 된 얼굴의 주인공, 용맹무쌍하게 분투하는 사람, 열정이 무엇이고 헌신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 가치 있는 대의를 위해 온 몸을 불사르는 사람, 잘하면 위대한 성취의 승리를 맛볼 수 있고 최악의 경우 실패하더라도 대담하게 행동하는 사람의 몫이다. 따라서 승리의 환희도 모르고 패배의 쓰라림도 모르는 냉담하고 소극적인 사람들은 결코 그와 함께 한자리에 설 수 없으리라.”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담대할 수 있었다.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이 다음에 하나님 앞에 서는 날 그 분과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볼 그날에 그 분과 나 사이에 무슨 대화가 오고갈까? 나는 정말 세상에서 잘못한 것 많고 죄도 많이 짓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분명히 하나님 앞에서 얼굴을 들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 내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해 주실 것입니다.

“이 선교사! 네가 흠이 많은 종이라는 것? 실수와 실패가 많았던 종이라는 것? 내가 알지... 그것이 명백한 네 잘못이었을 때 나는 너를 벌주고 싶었다. 너 언젠가 나에게 이렇게 말했지? ‘주님 이제부터 저 따라오지 마세요. 저 따라오시면 시험드십니다. 저 주님이 오시면 실족하실 곳에 약속 있어 나갑니다. 그저 이번 한번만 모른척 해주시고 눈감아 주십시오...’ 내가 너와의 인연을 끊고 이쯤에서 피차 쿨하게 헤어지자 할까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때마다 내 아들 예수가 보이더라. 그가 너를 대신해 내게 빌더라. 이 목사를 한번만 용서해 주시면 안되겠냐고... 한번만 더 믿어보시면 안되겠냐고... 너 임마! 선교사로 고작 7년 사역하면서 힘들때마다 십자가 바라보았다고 하였느냐? 나도 너로 인해 힘들 때마다 십자가 바라보았어. 너만 짓무른 눈으로 십자가 본 것 아니야. 나도 그랬어...” 

이것이 바로 우리가 믿는 은혜가 아니겠는가? 

목사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교회 안에 신앙생활 100점으로 하는 성도들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만 대단해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저 위치에서 한 칸만 올라서도 100점짜리 신앙인들과 별 반 다를 바 없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저 분이 어찌 오늘 교회에 다 나와 앉으셨을까 하게 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 분의 모습은 용을 쓰면서 무릎에 힘을 주고 일어난 제 조카 우현이의 노력처럼 눈물겹게 보입니다. 두 걸음만 걷고 엉덩방아를 찧게 되더라도 박수를 받을 만한 노력입니다. “한 걸음만 네 힘으로 걸어보거라. 그럼 나머지 아흔아홉 걸음은 내가 업고 걸어가주마.” 하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약속으로 삽니다. 

“저 인간이 어찌 교회를 다 나왔을꼬?”

“저 인간이 기도를 다하네?”

이것은 사람의 판단입니다. 내 힘으로 한 걸음이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아흔아홉 걸음 걸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베데스다 연못에서 하나님은 지극히 작은 자와도 함께 하시는 분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연못을 향해 걸어가고자 했던 그의 노력을 가상히 여겨주셨습니다. 한방에 해결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생 최고의 기쁨을 선물해 주셨습니다. 무릎에 힘을 주고 10초 버틴 아기에게도 군대 다녀온 다 큰 녀석들과 똑같은 만원의 세뱃돈을 주는 것이 인간 아버지일찐대 우리 하나님은 일러 무엇 하겠습니까!

“그래? 그렇다면 나도 기도하면 되는 거야?”

“그래? 그럼 내게도 아직 소망이 있는 거야?”

“그래? 하나님께서 아직 날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거야?”

그렇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혹시 스스로 하나님의 은혜에서 거두어졌다고 생각하며 아무런 감격없이 오늘 끌려나오듯 예배에 참석하신 분들이 있습니까? 주님의 존전에 나오고서도 아무런 기대없이 자신에 대한 마지막 끈까지 놓아버리려고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까? 설명할 수 없는 고통과 절망 속에서 내 인생 이제 끝났어... 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십니까? 아닙니다. 우리 생각에는 할 수 없어도 하나님으로서는 하실 수 있는 은혜가 아직 여러분과 저에게서 거두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기에 소경 바디메오가 눈을 뜰 수 있었고, 38년된 병자가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기에 삭개오가 구원 받을 수 있었고 창녀였던 여인이, 남편을 다섯이나 두고 살았던 여인이 구원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기에 교활한 야곱이 하나님과 겨루워 이겼다는 어마어마한 이름 이스라엘로 살 수 있었고 이방 여인의 치마폭에 휘감겼던 직무 태만자 삼손이 사사로 이십년을 다스릴 수 있었습니다. 이새의 말째아들 꼬마 목동 다윗이 이스라엘의 별이 될 수 있었고 왕의 불륜으로 인해 소생한 아들 솔로몬이 지혜의 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기에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한 베드로가 교회의 기초가 될 수 있었고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죽이던 핍박자 바울이 최고의 선교사가 될 수 있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그리스도 귀한 아들의 핏 값으로 대신 얻은 사랑스런 자녀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한 걸음 뗀 우리의 노력을 귀하게 보시고 백 걸음 달려와 연못에 몸을 던진 사람들의 경지로 위로해 주시고 축복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보이는 여호와 경외 이전에 먼저 있었던 것은 독생자를 내어주신 하나님의 가없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만이 우리를 살게 합니다. 만일에 이것 아니라고 한다면 그건 탕자의 형이다!

맺 는 말 

오래전에 런던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일어났던 일을 소개하면서 말씀을 마치고자 합니다. 그날 웸블리 스타디움에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변화를 축하하기 위한 7만명의 관중들로 가득찼습니다. 스타디움에 도열한 스피커의 굉음으로 ‘건즈 앤 로우지지’ 같은 록그룹들이 장장 12시간동안 군중들의 귀를 때렸습니다. 이미 술과 마약에 취한 팬들은 흥분의 절정에 있었습니다. 

군중들은 끊임없이 ‘앵콜’을 외쳐댔고 록그룹들은 끊임없이 폭발할 것 같은 사운드로 화답했습니다. 이날의 축하공연을 담당했던 제작진은 마지막으로 흑인 여자가수 제시 노만을 배정했습니다. 드디어 노만이 노래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물결치는 아프리카 전통의상인 ‘다시키’를 입은 여인 노만이 무대위를 걸어나갑니다. 원형 조명 하나만 노만을 따릅니다. 악단도 없고 아기도 없습니다. 

제시 노만 뿐입니다. 누군가 ‘건즈 앤 로우지지’의 노래를 더 듣자고 외칩니다. 다른 사람들의 외침이 뒤를 잇습니다. 제시 노만은 이날의 공연 가운데 가장 초라하고 느려터진 음악을 부르기 시작합니다. 무대가 볼품없어 집니다. 그런데 그날밤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나같은 죄인 살리신 배경 음악 들릴 듯 말듯 연주된다.) 

쉰 목소리로 외쳐대던 7만명의 팬들이 노만이 부르는 은혜의 아리아 앞에서 잠잠해지기 시작합니다. 노래가 2절로 이어지자 팬들은 돌연 침묵속에 빠져듭니다. 3절에 이르자 군중은 완전히 소프라노 가수 노만의 손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노래가 4절에 이르자 수만명의 팬들이 오래전에 들었던 거의 잊혀진 가사를 기억 속에서 더듬으며 따라부르기 시작합니다. 

제시 노만은 후에 그날 밤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무슨 권능이 임했는지 모르겠다고 고백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세상은 은혜에 목말라 있습니다. 은혜가 어느 순간 우리에게 임할 때 그 은혜 앞에서 세상은 침묵에 잠기게 됩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은혜 고마워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이제껏 내가 산것도 주님의 은혜라. 또 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 주시리.

거기서 우리 영원히 주님의 은혜로 해처럼 밝게 살면서 주 찬양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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