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라 (고전 1:22~24)

  • 잡초 잡초
  • 469
  • 0

첨부 1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라 (고전 1:22~24)
 

이 시간 저는 복음의 핵심인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씀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주님으로 믿고 따르는 예수 그리스도처럼 오랫동안 많은 사람의 숭배와 사랑을 받아 온 분은 달리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같은 대우를 받으신 것이 아닙니다. 복음서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당시 유대 사회에서 예수님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으로 엇갈렸습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 종교적으로 멸시받던 세리들이나 죄인들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 곧 메시야로 생각했으나, 바리새인들이나 사두개인들과 같이 유대 사회의 지배 계층에 속한 자들은 예수님을 민족의 안위를 위태롭게 하고 신성 모독죄를 범하는 인물로 간주했습니다. 그리하여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은 로마 총독 빌라도를 이용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아시는 대로, 십자가형은 당시 로마 세계에서 가장 처참하고 수치스러운 형벌이었습니다. 그래서 로마 당국은 도망 노예나 반역자들에게만 십자가형을 내렸습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가장 참혹하고 수치스러운 십자가형을 당하신 예수님을 메시야라고 주장하는 것은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구나 십자가에 대한 유대인들의 혐오는 율법에 근거를 둔 것입니다. 율법 책인 신명기 21장 23절에 이르기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신 21:23)고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은 그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라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이것은 초대교회 당시에 율법을 신봉했던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배척했던 가장 큰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신성 모독죄를 범하고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임당한 사람을 메시야로 믿으라고 하다니, 율법을 신성시하는 유대인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22절에 언급한 대로,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는 민족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고난 받으시던 그 날, 골고다 언덕에 몰려온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그리로 지나가는 자들이 하나 같이 예수님에 대하여 요구한 것은 표적을 보여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찌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고 했습니다. 이는 저들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기적적인 방법으로 십자가에서 내려오신다면 그것을 메시야의 표시로 받아들이겠다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내려오셨더라면 그에 대한 모든 논란은 종지부를 찍고 사람들은 일제히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참으로 효과적인 방법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내려오기는커녕 무기력하게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셨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그러면 그렇지, 나사렛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은 것을 보면 그가 메시야가 아닌 것이 분명해’ 라고 말했습니다. 

그런가하면, 지혜를 숭상하는 헬라인들에게는 십자가에 달린 사람을 메시야라고 주장하는 것이 너무나 미련해 보였습니다. 자기 목숨 하나 구해 내지 못한 사람을 어떻게 만민의 구세주로 인정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 같은 헬라인들은 나사렛 예수를 구세주로 전하는 복음이 어리석게 보였습니다. 이와 같이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라는 개념은 유대인들에게나 헬라인들에게나 너무나 납득이 가지 않는 생소한 것이었습니다. 방금 살펴본 대로, 메시야에 대한 유대인과 헬라인의 생각은 누가 들어도 타당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사람들의 보기에 모순적이고 불합리하게 보이는 방법을 통해서 나사렛 예수가 메시야이신 것을 드러내셨습니다. 상식적으로 십자가는 수치와 배척과 죽음의 표식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같은 십자가를 인류 구원을 위한 방편으로 삼으셨습니다. 유대인이건 헬라인이건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에 대하여 상상도 못했으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혐오하고 배척하고 부끄럽게 여기는 십자가를 통해서 구원의 길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혐오와 저주와 배척과 분열과 죽음의 상징이었던 십자가가 사랑과 축복과 용납과 화해와 생명의 상징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요구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왜 유대인들이 믿는데 거리낌이 되지 않는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보내시지 않으신 걸까요? 왜 헬라인들도 납득할 만한 지혜로운 방법을 사용하지 않으신 것일까요? 하필이면, 누가 보아도 장애물이 되고 미련하게 보이는 방법, 곧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하신 것일까요? 바로, 여기에 하나님의 심오하신 경륜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믿는데 장애가 되는 그 혐오스러운 십자가를 통해서, 또한 헬라인들의 눈에 미련하게 보이는 방법을 통해서, 인간들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저주와 어리석음의 극치로 보일지 몰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십자가를 구원을 이루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가 되십니다. 구원 받은 성도들에게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처럼 더 큰 표적과 지혜는 있을 수 없습니다. 

첫 번째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청산하셨습니다. 

신명기 21장에 보면, “22)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23)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당일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죽을 죄를 지은 사람을 죽이는 것만으로도 이미 죄값을 치른 것인데, 여기에다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달아매는 것은 처형된 자를 한층 더 불명예스럽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나무에 달린 것은 처형당한 자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그 사람이 죄의 대가를 철두철미하게 치렀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 원칙은 예수님께도 적용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고난 받으신 것은 그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받으신 저주는 그 자신의 죄 값으로 인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를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죄가 없으시므로 십자가에 못 박혀 하나님의 저주를 받으실 하등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십자가의 형벌과 하나님의 저주는 곧 저와 여러분이 당해야 할 것을 대신 담당하신 것이라고 해야 맞습니다. 이처럼 무죄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죄 값을 치러주는 것을 일컬어 대속이라고 합니다.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자손은 소나 양이나 염소를 제물로 삼아서 속죄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 때 제물로 바쳐진 짐승들은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희생된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을 말하자면, 짐승의 피가 사람의 죄를 없이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구약시대에 짐승의 피로써 드렸던 속죄 제사는 신약시대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드려주실 영원한 속죄 제사에 대한 상징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구약시대의 제사는 메시야를 보내주실 것에 대한 언약의 징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연, 하나님께서는 때가 되자 언약하신 대로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통해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사람의 모양으로 보내셨고, 드디어 십자가 위에서 대속의 죽음을 당케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이 완전무결함에 대하여 히브리서 9장에 이 같이 말씀합니다. 

“11)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12)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13)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14)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인간들이 당하는 모든 불행은 죄가 그 원인입니다. 성경에 보면, 죄의 결과로 사망이 이 세상에 들어왔다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먹고 살기 위해 이마에 땀 흘려 수고하게 된 것도 타락의 결과로 주어진 일종의 형벌입니다. 인간의 불행은 죽음과 수고로운 삶에 국한된 것이 아니며, 인간 내면에도 심대한 악영향을 끼쳤습니다. 그 결과, 사람들의 마음이 병들었기 때문에 선한 생각을 하지 못하고 악한 생각만 합니다. 

창세기 6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하고 그 마음에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언제나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시고 근심하셨다고 증언합니다(5-6). 그렇습니다. 현대인들의 생각도 노아 시대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언제나 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21)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22)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23)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막 7:)고 하셨습니다. 

인간들이 서로 미워하고 배반하며 속이고 죽이는 것은 다른 데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이 죄에 감염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죄에 물든 마음으로는 선하고 바른 생각을 할 수 없으며, 생각이 바르지 못하면 바른 행동이 나올 수 없습니다. 우리가 바른 삶을 살려면 먼저 우리 마음이 죄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야 하고 선한 감동에 의해 다스려져야 합니다. 

그러면 죄로 병든 마음을 무슨 수로 고칠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우리 심령에 뿌려서 정결하게 해 주셔야 합니다. 

♪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 밖에 없네 다시 성케 하기도 예수의 피 밖에 없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은 우리의 죄를 청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속량하셨으므로,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죄 사함을 받습니다. 아무리 흉악한 죄인이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그 죄가 주홍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게 씻겨 주시며,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만들어 주십니다(사 1:18). 하나님의 용서는 완전하시므로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겨주십니다(시 103:12). 

이에 대하여 로마서 8장에 이르기를 “1)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셨기에 그를 믿는 우리가 죄 사함을 받았음을 믿으시면 “아멘! 하십시다. 그렇다면 이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더 이상 우리 믿음을 방해하는 장애물이나 미련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지혜가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우리가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었습니다. 

앞에서 말씀한 바와 같이, 인간들의 모든 불행은 그 원인이 죄입니다. 죄가 무서운 이유는, 우리에게 죽음과 저주를 가져다줄 뿐 아니라, 하나님과 원수가 되게 하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온 우주만물과 인생의 창조주이신 하나님, 우리의 호흡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과 원수가 되다니, 이처럼 비극적인 일은 달리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생명의 근원이신데,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으니 생명이 고갈되고 결국 죽음에게 삼킬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 곧 믿지 않는 자연인들을 가리켜 ‘죄와 허물로 죽었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영적으로 죽은 상태라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죽은 사람은 영이신 하나님께 대하여 캄캄절벽입니다.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라도 영이 죽은 사람은 하나님에 대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합니다. 그 이유에 대하여, 고린도전서 2장 13절에 이르기를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의 도우심을 받지 못하므로 영적인 세계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불화한 사람은 그 심령이 마귀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경외하지 아니하고 우상을 숭배합니다. 우상 숭배는 곧 마귀를 숭배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 이유인즉, 우상 숭배의 배후에는 마귀가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을 보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해서는 관심이 없지만, 귀신을 섬기는 일에는 얼마나 관심이 큰지 모릅니다. 

이 같은 현상은, 저들이 마귀의 영향력 아래서 살아간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렇습니다. 영적으로 볼 때, 우리는 하나님의 편이든가, 마귀의 편이든가, 둘 중 하나입니다.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아니한 중립 지대는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과 화목한 사이인지, 불화한 사이인지, 둘 중 하나입니다. 하나님과 불화한 사람은 그 생각하는 것이나 말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과 원수 된 방향으로 행합니다. 

이에 대하여 로마서 8장에 이르기를 “5)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7)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8)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일을 즐겨 행하는 자들 위에는 하나님의 진노가 임합니다. 그 결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사 48:22) 하신 대로, 그 심령에 평강이 없으므로 늘 불안하고 두려운 가운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신문에 보니, 이번에 타계한 마이클 잭슨은 오랫동안 불면증에 시달려 왔다고 하며, 그의 사망 원인으로서 수면제의 일종인 프로포폴을 복용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지금 저는 다른 사람의 사생활을 평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토록 화려한 성공을 한 그가 단잠을 자지 못할 정도로 평강을 누리지 못했다는 사실을 안타깝게 생각할 뿐입니다. 그의 노래 가운데 “힐 더 월드”라는 곡이 있습니다. 번역하면 “세상을 치료해요”입니다. 이 노래는 곡조 뿐 아니라 가사도 매우 감동적입니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요,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요.

세상을 치유해서 더 좋은 곳을 만들어요.

당신과 나 그리고 온 인류를 위해서.“

“Make a better world Make a better world

Heal the world make it a better place

For you and for me and the entire human race."

이 노래는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서로 사랑을 나누자고 제안합니다. 서로 사랑을 나눔으로써 세상을 더 좋게 만들 수 있다고 말합니다. 맞습니다. 모든 사람이 서로 사랑으로 대하기만 한다면, 이 세상은 오늘이라도 낙원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을 보면 사람들이 사랑을 나누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이 세상은 점점 더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점점 나빠져 갈 뿐입니다.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지 않는 이유가 어디 있을까요? 그것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불화한 상태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불화한 사람은 이웃과도 불화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는 더 좋은 세상을 만들려면, 하나님과 화해하는 사람들이 많아져야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과의 불화를 청산하고 화해한 사람이라야 진정으로 사람들과도 화평하게 지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불화한 사람이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먼저, 알아둘 점은, 우리 인간의 방법으로는 하나님과의 화해를 이룰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그 길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로마서 5장 9절 이하에 이 같이 말씀합니다. “9)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11)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사랑하는 성도님들, 사람들 간에 화해도 중요하지만, 그 보다 더 근원적인 것은 하나님과 화해하는 것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할 때 이루어집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고난당하심으로 우리가 하나님과의 불화를 청산하고 화해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화목 제물로 받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는 것입니다(롬 5:1).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심판이 시행되었던 장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골고다 언덕 위에서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것은 그 분의 죄 때문이 아니라 전적으로 멸망 받을 우리들을 대속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셨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 하신 대로, 목숨을 버리셨으며, 무덤에 장사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맹렬하게 퍼부어지는 하나님의 진노를 당하시면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절규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을 건성으로 알고 넘길 것이 아니라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한두 번 생각하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자주 되새겨 보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고난에 대하여 깊이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심판과 진노의 장소였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그를 믿는 우리에게는 용서와 화해의 장소가 됨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 사함 받고 하나님과의 화목을 이룰 때 비로소 죄로 인한 저주에서 벗어나서 진정한 영적 자유와 평강을 누리면서 살게 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인간관계의 어려움을 호소합니다. 사랑이 있어야 할 곳에 미움이 도사리고 있고, 화평해야 할 곳에 불화가 상존합니다. 화합해야 할 곳에 반목이 있고, 동정을 나누어야 할 곳에 냉소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된 원인을 나름대로 진단합니다. 많은 사람이 돈의 부족이 그 원인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진단이 잘못된 것입니다. 오히려 돈이 불행의 원인이라고 말하는 편이 옳을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서로에게 원인을 전가하기를 좋아합니다. 이렇게 된 것은 자기가 아닌 아무개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한 문제 해결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먼저 자기의 허물과 죄를 솔직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거기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 회개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죄를 담당하시고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과 진노를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께 우리의 마음을 숨김없이 토로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우리 심령으로 들어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심판을 받으셨기에, 이제 주님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용서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진노를 당하셨기에, 이제 십자가는 화해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용서와 화해를 확인하기 위해서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로 나아가야 합니다. 

마음속에 고통이 있습니까? 주님의 십자가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마음으로 용서가 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까? 십자가 앞에 나아가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주님께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자기를 못 박아 죽이는 자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던 예수님께서 용서하는 마음을 우리에게 부어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가 받은 모든 은혜는 하나부터 열까지 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진 것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물질을 의지하고 인간의 지혜와 수단 방법을 따라서 살아가지만, 성도님들께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지하여 날마다 영적 승리를 누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