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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마 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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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마 6:9)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는 기도의 내용도 중요하지만, 기도의 순서와 기도 내용의 비율도 중요한 통찰력을 제공해줍니다.

일반 종교에서 기도란 주로 소원성취의 수단입니다. 자기의 급한 사정을 해결하고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에 가장 큰 관심이 있지요. 하지만 기독교의 기도는 ‘하나님과의 교통’을 위해 교회에 주신 은혜의 방편입니다. 기도의 목적 자체가 다릅니다. 따라서 ‘기도자의 소원’을 최우선적인 관심에 두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는 우선순위에 있어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는 말씀과 일치합니다. 먼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리고 그 분 앞에서 우선적으로 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를 보면 나 자신의 급한 사정이나 소원을 첫자리에 두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를 첫자리에 놓는 것도 아닙니다. 기도의 첫자리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간구부터 시작하지요. 하나님에 관한 관심이 전반부 절반 정도의 비율을 차지하고 그 후에 ‘우리’를 위한 기도 내용들이 나열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를 위한 기도도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 받는 목적 내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일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는 방향으로 기도하게 합니다.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는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적이어서 자기중심적인 기도가 파고들 틈이 없습니다.

노아의 아들 셈의 후손인 셈족은 “이름”을 그 존재와 밀접하게 관련시켜 생각했습니다. 셈족인 아브라함도 엘 엘리온(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엘 샤다이(전능하신 하나님), 엘 올람(영생하시는 하나님), 야웨 이르에(준비하시는 혹은 보시는 여호와) 등의 이름을 부르면서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깨닫고 기념했습니다(창 14:18; 17:1; 21:33; 22:14). 자존자라는 의미의 하나님 이름인 ‘여호와’는 ‘나는 나일 것이다’(I am who I will be)로 번역할 수도 있는데, 나는 점차 나로 드러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성도는 그분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그분의 어떠하심을 점점 더 깨달아가면서 하나님을 기억해야 하겠지요.

히포의 어거스틴은 “하나님 당신님을 알려주시옵소서”라는 한 가지 기도제목으로 온 밤을 지새워 기도하곤 했다 합니다. 아씨시의 프란시스코도 그의 가장 성숙한 때에 “하나님 당신께서는 누구시오며, 나는 누구입니까”라는 기도제목으로 밤새워 기도했다고 합니다. 

기도를 시작하자마자 자기 사정만 줄줄 나열하는 자기중심적인 기도와 큰 차이가 느껴지지요. 어떤 기도가 하나님과의 교통을 이루며 하나님과의 관계성에 증진을 가져올까요? 우리의 기도는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의 순서에 가까운지 스스로 점검해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로 나아가고 있는 모습, 적어도 그런 기도를 드리려는 모습이어야 하겠지요.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묵상해 보십시오. 내 모든 형편을 아시는 하나님, 하고자 하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 독생자까지 아끼지 아니하신 사랑의 하나님. 또한 당신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 지금까지 보호하시고 인도하시고 공급하시며 양육하신 하나님을 잠잠히 생각해보십시오. 

그분의 은혜에 감격하지 않을 수 없고 그분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앞을 가로막고 있던 시급한 문제들은 그분 앞에서 한 없이 작아 보이고, 염려와 근심대신 감사함과 평온함 중에 기도하게 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충분히 생각함으로써 그분과의 친밀한 교제의 시간이 됩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라는 간구는 성도의 가장 간절한 열망이 그분의 이름을 위한 것임을 가르쳐줍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내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마 24:9)하셨는데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행 5:41) 핍박을 감내했습니다. 또한 주께서는 “내 이름을 … 전하기 위하여” 바울을 택하시면서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받을 것을 말씀하셨는데(행 9:15-16), 바울은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는 직분을 감당했습니다(롬 1:5). 성도는 그분의 이름이 모든 사람 중에 거룩히 여김을 받도록 하기 위하여 부름 받은 존재입니다.

이 땅에는 자기 이름을 위하여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가족을 위해 사는 사람, 가문을 위해 사는 사람, 조국을 위해 사는 사람도 많습니다. 혹은 한평생 여자 친구를 위해 살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아무런 목적도 없이 되는대로 살아가는 것보다 낫다고 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성도는 무엇보다 그분의 이름을 위해서 살도록 부름 받은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성도는 본인이 원치 않을지라도 이미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하는 자로 인식되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지 못할 일이라면 기꺼이 자기를 부인하고 포기해야 합니다. 반면 그분의 이름을 위하는 일이라면 기꺼이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하겠지요.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는 예의상 덧붙이는 기도용 멘트가 아닙니다. 기도자의 진정한 소원이 되어야 하겠지요. 그렇다면 이 기도는 기도자의 책임 있는 삶을 요청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 받으시게 하려는 삶이 따르지 않는다면 마음에도 없는 기도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기도자는 첫째로 자신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컫는 일이 없도록 해야 마땅하며, 자기의 말과 행동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도 없도록 힘써야 하겠지요. 복음에서 떠난 율법적인 삶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롬 2:24) 사태를 만들어서도 안 될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벧전 2:11-12) 했습니다. 

성도가 이 땅에서 ‘거룩한 나그네’로 살지 않으면, 불신자들은 성도를 거룩한 척 말만하는 ‘거북한 나그네’로 여길 것입니다. 성도들이 믿는 하나님과 그분의 교회에 대해서도 모독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여김 받으시도록 기도하는 성도라면 거룩하신 하나님의 백성답게 이 땅에서 거룩한 나그네로 살고자 전심전력해야 마땅합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려면 성도의 삶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남용하거나 하나님의 이름을 도용해서도 안 됩니다(행 19:13-16). 교회사를 보면 매우 잔혹한 일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해졌습니다. 

대표적으로 중세시대 십자군 운동과 마녀사냥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탐욕은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해서라도 자기의 소원을 이루려합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분명하게 밝히지도 않고 정당하게 추정할 수도 없는 문제들에 대한 자기중심적인 생각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 권위를 도용하는 범법입니다.

예수께서는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매우 열정적이고 매우 부지런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그들을 “불법을 행하는 자들”로 정죄하셨습니다(마 7:22-23). 

주의 이름으로 행했다는 자기의 주관적인 확신은 중요치 않습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하나님의 뜻과 객관적으로 일치해야만 불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성경의 최종권위를 존중하고 그 범위 내에서 행해야만 정당하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한 것임을 가르쳐줍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려면 성도가 그분과의 친밀성을 유지하면서도 경외심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다정한 아빠요 절친한 친구처럼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그래서 기도자는 어떤 고민과 아픔과 슬픔도 그분과 나눌 수 있습니다. 

이미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시므로 아무것도 감출 필요 없이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지요. 하지만 친밀한 관계를 막대할 수 있는 관계처럼 오해해서는 곤란합니다. 친구 같다고 해서 아버지 이름을 함부로 부르거나 망령되이 사용하는 자식이라면 문제가 많지요. 아버지의 자기를 향한 사랑을 무기삼아 교만방자해지는 일은 참으로 마땅치 않은 일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다는 것은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너무나 대하기 어렵고 부담되는 분으로 생각하는 그들에게는 친밀하신 하나님에 대한 가르침이 중요했지요. 오늘날도 성도는 자녀로서 하나님의 친밀히 하여주심에 대해 감사하며 그 특권을 마음껏 누릴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시대가 지나면서 이제 친밀한 하나님은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습니다. 이 시대 기독교는 오히려 하나님은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딤전 6:16)는 거룩한 분이시라는 말씀에 더 충격을 받을 것 같습니다. 기도에 있어서 하나님과의 친밀함과 경외심은 어느 것 하나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될 요소들이지요.

인간이 타락하여 전적으로 부패했을 때 거룩하신 하나님과는 도무지 친밀히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를 통해 타락한 인간의 죄를 사하심으로 하나님의 존전에 담대히 나아가 친근히 할 수 있는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지요. 이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는 사람은 겸손으로 반응해야 합니다. 그분의 사랑을 무기 삼아 그분을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됩니다. 경외심을 잃고 방자해지는 순간 친밀히 하여주심에 대한 은혜와 감사도 곧 사라지게 됩니다.

‘거룩’이라는 단어는 ‘도덕적’인 의미도 있지만 ‘구별됨’의 의미가 강하게 내포되어 있습니다. 친밀한 중에도 분명한 ‘구별됨’이 유지되어야 지속적으로 교통할 수 있고 관계성의 증진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기도할 때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많이 생각하시고 친밀하한 중에도 경외심을 잃지 않는 기도와 삶이되시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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