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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죄와 용서, 그리고 자유 (요 8: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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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용서, 그리고 자유 (요 8:1~11) 


  필리핀에 가면 온 필리핀 국민이 즐기는 한 가지 놀이문화가 있습니다. 바로 닭싸움하는 것을 보고 즐기는 것입니다. 많은 남자들이 하루 종일 닭싸움하는 집으로 몰립니다. 닭을 링 위에다 올려놓고 많은 사람이 그 싸움을 구경합니다. 닭 두 마리가 퍼덕거리면서 싸웁니다. 몇 번 이렇게 하다보면 닭발 뒤에다가 날카로운 칼날을 달아서 싸움을 시킵니다. 둘이 팍 차고 올라가면서 한 마리가 상대방의 심장을 치게 되면 그 칼날에 의해서 그만 피를 흘리면서 그 자리에 5초도 안되어서 쓰러집니다. 그러면 그 피 흘린 닭을 들고 닭 주인은 나가는 겁니다. 
  
그 때 관중들은 함성을 지르고 그 피를 보고 즐거워한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남의 죄를 정죄하며 기뻐하는 무리'들의 이야기요, 돌을 든 자들의 이야기입니다. 우리 민족도 돌 던지는 일에 익숙해 있는 민족입니다. 역대 대통령을 향해서 다 돌을 던졌습니다. ◀제목소개!▶
  
1. 본문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그 날도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많은 사람들을 가르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면서 한 떼의 사람들이 몰려와 둘러섰던 사람들을 헤집고 우르르 예수님 앞으로 나왔습니다. 
  
예수님이 바라보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앞장 서 있습니다. 로마의 통치 아래서도 종교적인 자유를 누리며 나름대로 안정된 삶을 유지해온 당시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에 대한 열심으로 일반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사람들이었고, 서기관들은 율법사라고 불렸는데, 껸萱?해석하고 그 세칙을 만들어서 일상생활에서 이렇게 저렇게 살라고 가르치는 지도자급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예수께 말했습니다.
  
4-5절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보니 한 여인이 죄수처럼 끌려나와 고개를 푹 숙인 채 웅크리고 서 있습니다. 그 여인은 바리새인들의 말대로 간음하다 끌려온 여인임이 틀림이 없습니다. 평소에 어떻게 해서라도 예수님을 골탕 먹일 구실을 찾고 별러 오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절호의 기회를 잡은 것입니다. 그들은 지금 예수님을 시험하려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돌로 쳐야 할 사람들이 있습니다. ▶몰렉 우상에게 자식을 제물로 바친 자(레20:2-5) ▶신접하거나 박수가 된 자(레20:27)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한 자(레24:15-16)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자(민15:32-36) ▶사람을 꾀어 하나님에게서 떠나게 한 자(신13:1-10) ▶우상 숭배자(신17:2-7) ▶부모에게 순종치 않는 패역한 자식(신21:18-21) ▶성범죄를 범한 자(신22:22-24)등입니다. 레20:10절 "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 곧 그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와 음부를 반드시 죽일지니라" 본문의 여인은 신22장에서 금한 부도덕한 부정을 저질렀기 때문에 돌에 맞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몇 천 년 내려오는 전승과 율법을 구체적으로 해석해 놓은 '미쉬나'법전에서도 간음한 여인은 인분 통에다 집어넣어 목에 수건을 매어서 표를 삼고, 양쪽에서 끈으로 끌어당기며 이리 저리 죽을 때까지 끌고 다니는 법이 있는가하면 온 동네 사람들이 동구 밖에 나가서 돌을 던져 죽이는 처형 방법이 있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어째든 간음도 무섭게 다룹니다. 그런데 본문은 간음하던 여인을 현장에서 붙잡아 와서 예수 앞에 끌고 온 것입니다. 아마도 옷은 거의 찢겼을 것이고, 머리채가 잡힌 채로 질질 끌려오지 않았겠나 상상해 봅니다. 
  
이런 여자를 많은 사람들 앞에 세워 놓고 예수님께 묻습니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어찌 생각하면 간단한 문제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상당히 골치 아픈 난제입니다. 그들의 법이 돌로 치라 했으면 돌로 치면 되는 일을 예수님께 데리고 온 것은 이 일로 인하여 예수님을 함정에 빠트리기 위한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가령 예수님께서 '이 여인을 모세의 율법대로 돌로 치라'하면 지금까지 예수님의 가르침이 한낱 허구가 되는 것이요, 또한 로마법에도 위배가 됩니다. 예수님은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당시 세리와도 친구로 지냈고, 창녀 막달라 마리아도 불쌍히 여겼습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의 친구로 오셨습니다. 첫 번째 부딪치는 문제가 예수님의 가르침이 위선이 될 수가 있습니다. 
  
또 하나는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지배 하에 있었는데 로마는 거의 모든 법을 이스라엘 법에 맡겨 스스로 법대로 처리하게 했습니다만 사형 집행만은 로마법에 준하도록 규제를 가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도 사형 집행은 빌라도에게 넘겨서 재판을 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그 여인을 돌로 쳐 죽이라'고 했으면 로마법에 위배됨으로 로마정부에 고발을 해서 예수님을 체포하려는 속셈이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돌로 치지 말라고 대답하면 어떤 반응이 나왔겠습니까? 예수님은 모세의 율법을 거역하는 자가 됩니다. 예수님은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획일점이라도 없어지지 아니하리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엄격한 율법주의자들이요, 서기관들은 그들 중에서도 지도자 격인 사람들입니다. 그런 그들이 율법 조문을 몰라서 물으러 온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예수님을 골탕 먹이고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서입니다. 이들의 질문에는 두 가지 함정이 있습니다. 하나는 '법적인 함정'이요, 또 하나는 '여론의 함정'입니다. 이래도 책잡고 저래도 책잡겠다는 뜻입니다. 죽이라 할 수도 없고, 죽이지 말라 할 수도 없는 묘한 함정입니다. 결국 이 문제는 이래도 걸리고 저래도 걸리는 함정입니다. 정말 어려운 시험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이와 유사한 시험을 여러 번 당했습니다. 한번 세금 문제를 가지고 와서 로마에 '세금을 바쳐야 하느냐 마느냐'를 묻기도 했습니다. 이때 로마에 세금을 바치라고 하면 비애국자라고 비난할 것이고, 바치지 말라하면 로마법을 어겼다고 올가미를 씌우려고 의도한 문제였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가이샤에 것은 가이샤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고 했습니다. 오늘도 어려운 함정에 빠진 예수님은 정말 지혜롭게 대처하셨습니다. 
  
6절 '하'반절에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성경은 무슨 글을 쓰셨다는 설명이 없습니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은 예수께서 그들의 죄를 하나씩 하나씩 써 내려갔을 것이라는 견해를 제시하기도 합니다. 어떤 학자는 주님이 십계명을 썼을 것이라고도 말했습니다. '밀튼'이란 사람은 '그 모습은 모세가 시내 산에서 율법을 받을 때 하나님께서 돌판 위에 직접 쓰신 글자들을 생각'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주님은 글을 쓰고 나서 7절에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십니다. 여기 '죄 없는 자'의 원어의 뜻은 '죄가 없다는 말만이 아니라 죄에 대한 욕망이 없는 자'란 의미입니다. 다시 말하면 '행동으로 나타난 죄만 죄가 아니라 마음으로 품었던 죄'까지 포함하고 있는 말입니다. 
  
'이 여인은 간음을 행동으로 옮겼지만 너희들의 마음속에는 간음하고픈 마음이 없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또 다른 의미는 '죄 없는 자'란 '간음하지 않는 자'라는 말이 아니라 '무슨 죄든 죄가 없는 자가 돌로 치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이 세상에 의인은 한 사람도 없다고 말합니다. 모두 죄인임을 성경은 말합니다. 롬3:23절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지라'고 한 깊은 뜻은 '자신을 먼저 살피라'는 뜻도 있습니다. 돌을 던지기 전에 내 죄를 먼저 돌아보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대개 남의 허물은 많이 말하고 다니는 사람은 자기반성에 게으른 사람입니다. 자기반성을 많이 하고 나면 사실은 아무런 할 말이 없습니다. 누구도 정죄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성 프란시스의 제자가 어느 날 환상에서 하늘나라에 올라갔습니다. 그곳에 높은 보좌가 있어 '누구의 의자냐'고 물었더니 '성 프란시스의 자리'라고 했습니다. 제자는 이 소리를 듣고 슬그머니 질투가 났습니다. 
  
그는 꿈을 깨고 난 후에 자기의 스승에게 가서 '선생님은 자신을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당돌하게 물었습니다. 그러자 성 프란시스는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악한 사람이지'라고 대답을 합니다. 그러자 제자가 항의를 했습니다. '선생님의 대답은 위선이고 거짓입니다. 당신은 성자인데 악하다고 하시면 살인자나 거짓 증거 하는 자들은 어찌합니까?' ▶이때 성 프란시스는 웃으면서 아주 편안하게 대답하기를 '자네가 잘 몰라서 그런 말을 하는 걸세! 만약 내가 받은 은혜를 다른 사람들이 받았다면 그 사람들은 나보다 훨씬 더 좋은 사람이 되었을 걸세, 내가 얼마나 많은 은혜를 하나님께 받고 사는지 자네는 잘 모르네!' 여기에 성자 성 프란시스의 겸손을 볼 수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돌을 던지기 바로 직전 예수님의 말씀에 자신들을 돌아본 그들은 양심의 가책을 받아 한 사람씩 다 흩어지고 이제 남루하고 비참한 여인만이 홀로 울고 서 있습니다. 예수님은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그 여자가 '주여 없나이다!' 예수님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십니다. 


2. 본문에 등장하는 세 종류의 사람을 통하여 우리 자신을 한 번 살펴봅시다. 

①잡혀 온 여인(죄인)입니다. 
  
신22:22절 "남자가 유부녀와 통간함을 보거든 그 통간한 남자와 그 여자를 둘 다 죽여 이스라엘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 그런데 본문에 나오는 여인의 상대가 누구인지는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남자는 도망쳤는지 그냥 풀어주었는지 알 수가 없고 여인만 붙잡혀 왔습니다. 
  
죄는 결국 이렇게 드러나고 맙니다. 단 둘이 은밀한 가운데 지은 죄라고 할지라도 숨길 수 없으며 아무도 모르게 지은 죄까지도 다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요셉을 봅시다. 창39장에 보디발의 아내의 끈질긴 유혹을 어떻게 이기었는가? 요셉은 여인이 요염한 눈짓으로 동침하자고 속삭일 때, 9절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요셉은 무엇을 하든지 간에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을 비취어 보았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항상 내가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신전의식' 속에 살았습니다. 이런 신앙은 죄를 이기고 승리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의 법이 떠나가 버리면 본문의 여인처럼 죄를 범하기가 쉽습니다.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끌어드린 장미 빛 궁전의 쾌락이 숨겨진 영원한 즐거움이 될 수는 없었습니다. 선지자 나단에 의해 왕이 책망을 당했습니다. 
  
수7장에 보면 여리고 전투에서 탐욕의 눈에 어두운 아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갖지 말라고 한 전리품 중에 외투 한 벌과 은 금 덩어리를 자기 장막 은밀한 곳에 감추어 두었다가 그 죄가 드러나서 아골 골짜기에서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완전 범죄가 가능할지 모릅니다. 세상 떠날 때까지 죄가 숨겨질지 모릅니다. 그러나 불길 같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는 완전 범죄가 있을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드러나고 맙니다. 민32:23절 '여호와께 범죄함이니 너희 죄가 정녕 너희를 찾아낼 줄 알라'고 하셨습니다. 
  
특목 고교의 입시 부정이 드러나 관련된 자들이 구속되고 얼굴도 못 들고 있던 모습을 TV에서 보았습니다. 거듭되는 부정부패는 언젠가는 드러나고야 맙니다. 
  
여러분 우리들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예수님 앞에 끌려나온 이 여인의 모습이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율법의 돌에 맞아 죽어야 할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그 율법을 완성하심으로 예수님을 믿는 자마다 그 율법에서 속량함을 받았다는 사실이 은혜 중의 은혜요, 복음 중에 복음입니다. 
  
7절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예수님은 간음하다 잡힌 여자를 재판하시기 전에 먼저 고소인들을 재판하셨습니다. 과연 그들은 남을 고소할 자격이 있는가? 우리는 너무나 자주 다른 사람들을 재판합니다. 과연 우리가 떳떳하게 남을 재판할 자격이 있을까요?   
  
예수님은 세상에 계실 때에 재판장 노릇을 사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우주의 왕이십니다. 인류의 재판장이십니다. 종말적으로 예수님은 만민을 심판하는 심판주가 되십니다. 고후5:10절을 보세요!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또 마25:31-33절에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예수님도 세상에 계신 동안은 재판장 역할을 거절하셨습니다. 눅12:14절에서 주님이 친히 말씀하시기를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재판장 역할을 사양하셨다면 우리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제아무리 의로운 사람이라도 남을 비판하고 판단할 자격이 원천적으로 없습니다. 옳고 그름을 따지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남을 비난하고, 정죄할 자격이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의도는 남을 보지말고 내 자신을 보라는 겁니다. 남의 결점이 보이면 눈을 돌려 나를 보십시오. 마7:3-5절에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고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자신만 고친다면 세상은 다 고쳐집니다. 나를 고치려고 하지 않고 남을 고치려고 하니까 문제가 복잡해집니다. 부부 싸움이 왜 일어납니까? 내 자신은 고치려고 하지 않고 배우자만 고치라고 하니까 싸우는 겁니다. 이웃끼리 왜 싸웁니까? 내 잘못은 인정하지 않고 다른 사람만 잘못했다고 하니까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가정이 잘 되는 것도, 대한민국이 잘 되는 것도 다 나 때문입니다. 나만 고치면 만사 해결입니다. /아멘입니까?/ 그런데 모두가 나서서 자신은 고치지 않고 남만 고치려고 하니까 온 나라가 엉망이 되는 겁니다.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사람에게 결정적인 잘못이 있습니다. '나는 완전하다'는 착각입니다. 예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남의 눈에 먼지가 들어 있다면, 내 눈에는 대들보가 들어 있다고 했습니다. 대들보가 내 눈에 들어 있다면, 세상이 제대로 보이겠습니까? 절대로 남의 모습을 볼 수 없습니다. 남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남을 비판할 자격이 있겠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예수님 앞에 왔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보세요. 그들은 신성한 재판을 남을 골탕 먹이는 수단으로 사용했습니다. 비록 죄인이지만 한 여인의 인권을 사정없이 짓밟았습니다. 겉으로는 종교인이지만, 영적으로 본다면 '간음하다 잡힌 여자'보다 조금도 나은 구석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들 눈에는  대들보가 들어 있습니다. 그런 눈으로 어떻게 사리를 옳게 분별할 수 있겠습니까? 남을 비판하지 마십시오. 비판하면 비판은 메아리쳐 돌아옵니다.  
  
마7:1-2절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말씀은 모든 사람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합니다. 죄 안 짓고 사는 사람은 이 땅에 아무도 없습니다. 만약 '나는 죄가 없다. 나는 죄인이 아니라'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자신의 양심을 스스로 속이는 죄인입니다. 막7:21-23절에 보면, 사람의 죄악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네덜란드의 한 시인이 꿈에 천국엘 갔습니다. 저 세상에 들어가니 한 천사가 맞으며 금빛 나는 책을 보여주었습니다. '그게 무슨 책입니까?' '그대의 삶을 기록한 책이지' 그래서 좀 더 가까이 다가가서 책의 첫 장을 열어 보았습니다. 거기에는 글이 잔뜩 적혀 있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입니까?' '그대가 행한 악한 행동들이지.' 천사가 다음 장을 넘기니 거기에는 아까보다 더 많은 글이 쓰여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대의 입에서 나온 악한 말들이다. 아까 본 행동보다 더 많지.' 시인은 두려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장을 들여다보니 더욱 더 촘촘하게 기록된 것이 보였습니다. '이것은 또 무엇입니까?' 시인은 간신히 물었습니다. '이것은 그대의 머릿속에 있는 악한 생각들이야, 엄청나구먼!' 시인은 떨리는 음성으로 다음 장도 넘겨야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천사가 다음 장을 넘기는데 그것은 마치 어두운 밤처럼 온통 검게 칠해져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대의 악한 마음일세. 검은 마음에서 악한 생각이 나오고 악한 생각에서 악한 행동들이 나오지.' 이런 일로 시인은 자신이 죄 덩어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남의 허물을 보기 전에 자신의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란다는 말이 있습니다. 자기 흉 열 가지 가진 사람이 남의 흉 한 가지를 본다는 말도 있습니다. 
  
▶드러난 죄만 보지말고 숨어있는 죄를 보아야 합니다. 죄는 드러난 것만이 죄가 아닙니다. 죄는 우리의 양심이 아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관대하십시오! 그리고 자신에게는 엄격해야 합니다. 그런데 실상은 정반대입니다. 자신에게는 관대하고 남에게는 엄격히 적용합니다. 자신의 잘못에 대하여는 너그럽게 이해하고 남의 잘못에 대하여는 냉혹하게 비판합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옛날에 유명한 랍비 '힐렐'도 '네가 그 사람의 환경이나 입장이 될 때까지는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끝까지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친히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다시는 가서 죄를 범치 말라'고 하셨습니다.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사랑하는 주님의 마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정죄하고 심판하기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라 사랑하고 용서하여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어떠한 죄인이라도 회개할 때 하나님은 용서하고 구원해 주십니다. 기독교는 사랑과 용서의 종교입니다. 주님의 용서를 받았기에 '진리 안에서 자유를 얻은 자'입니다. 

 
  ②돌을 든 사람들입니다. 
  
여인을 끌고 온 사람들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 의를 자랑하고 남의 허물만 찾는 사람들입니다. 나는 한 번도 간음한 적이 없는데 이 여인은 간음한 죄인이라고 정죄하고 나섭니다. 
  
눅18:11절에 바리새인은 이런 기도를 드립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내가 저 사람보다 선하다고 해서 의인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좀 낫다고 자기를 의인으로 여긴다면 이것은 착각도 큰 착각입니다. 저 사람은 주일을 열 번 범했는데 나는 한 번 밖에 범하지 않았으니 저 사람은 죄인이고 나는 착한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주일을 범한 죄는 다 같습니다. 
  
큰돌도 물에 가란 고, 작은 돌도 가란 습니다. 남보다 봉사 많이 한 것 때문에 적게 한 사람을 비판해서도 안 됩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책망했습니다. 
  
마23:23-27절에 보면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세 번씩이나 책망했습니다.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다고 책망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바리새인들처럼 남을 정죄하는 자리에 있지 않습니까? 손에 돌을 들고 다른 사람을 정죄하지 않습니까? 내 눈 속에 들보를 가지고 있으면서 다른 사람의 눈 속에 티를 빼라고 소리 지르지는 않습니까? 
  
▶인도의 시인 '타골'의 체험담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아침 종이 제 시간에 출근하지 않아 타골은 몹시 화가 났습니다. 그런데 종은 오후 2시에 나와서 자기의 일을 묵묵히 하는 것이었습니다. 타골은 화가 치밀어 종에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나가라! 너 같은 놈은 필요 없어!' 그때 종은 조용히 말을 합니다. '지난밤에 제 아들놈이 죽었습니다.'  
  
종은 아들의 죽음이라는 슬픔과 주인의 분노를 다 짊어지고 하루의 책임을 다 완수했다는 것입니다. 남을 섣불리 비난하지 맙시다. 남을 섣불리 정죄하지도 마십니다. 바리세인들은 자기들이 의인인줄로 지금 착각하고 예수를 몰아세우고 있습니다. 착각은 자유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지옥의 불쏘시개임을 알아야 합니다. 

 
  ③용서하신 예수님입니다. 
  
주님은 그 여인에게 '네가 누구냐?'고 묻지 않으셨고, '왜 그런 죄를 지었느냐?'고 책망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께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으니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돌에 맞아죽을 죄를 짓고 사람들에게 끌려와 죽을 줄만 알고 있는 그 여인에게 주님은 두 가지 은총을 베푸셨습니다. 
  
하나는 '과거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11).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정죄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무죄 선고를 내린다'는 말이 아닙니다. 여자에게 '죄를 묻지 않겠다'는 뜻도 아닙니다. 다만 재판을 뒤로 미루고 '회개의 기회를 주신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우리에게 기회가 있습니다. 출세할 기회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돈 벌고, 유명해지고, 성공하는 기회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죄에서 떠나 하나님께로 돌이킬 기회가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품으로 돌이키는 회개에는 크게 두 단계가 있습니다. 

⑴하나님께 자신의 죄를 시인해야 합니다. 어떤 죄인이란 말입니까? 윤리적인 죄인이기 이전에 종교적인 죄인들이요, 사람에게 죄인이기 이전에 하나님께 죄인들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은 죄인이요, 둘째는 하나님을 섬기지 않은 죄인이요, 셋째는 하나님 뜻대로 살지 않은 죄인입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은 죄인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윤리적인 죄는 인정하면서도 신앙적인 죄는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불효(不孝), 불충(不忠)은 들먹이면서도 하나님을 향한 불신(不信)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살인, 간음, 절도, 사기, 폭행, 명예 훼손 죄는 인정하면서도 하나님을 향한 신성모독(神聖冒瀆), 양심불량(良心不良) 죄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죄인임을 인정하세요.  그것이 죄악에서 구원받는 출발점입니다.   
  
⑵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하나님께 용서받으면 그것으로 모든 죄는 끝입니다. 모든 죄는 하나님을 향한 것이요, 그러므로 하나님이 용서하신다면 그 죄는 해결됩니다. 요1서1:9절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그러면 우리가 지은 죄 값은 갚지 않아도 된다는 말입니까? 결코 그런 뜻은 아닙니다. 내가 갚지 않는다는 뜻이요 누군가는 꼭 갚아야만 됩니다. 그러면 누가 내 죄 값을 갚습니까? 바로 예수님이 갚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죽이는 대신, 대신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으셨습니다. 자기 아들을 못 박는 대신 모든 사람들을 다 용서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회개는 또 이렇게 해야 합니다. 첫째는 머리로 해야 합니다. 지적으로, '아 내가 죄를 지었구나.'라고 깨달아야 합니다. 둘째는 정적으로 해야 합니다. 가슴으로 해야 합니다. 죄지은 것에 대하여 애통하며 부끄럽게 생각해야 합니다. 셋째로는 의지적으로, 손발로 해야 합니다. 이제 죄를 용감하게 끊고 '내가 다시는 이런 일을 행치 않으리라'는 결심을 해야 하고 그대로 실행해야 합니다. /아멘!/

또 하나는 '앞으로 새롭게 살라'고 하셨습니다(11).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할/ 죽을죄를 짓고 죽을 줄만 알았는데 주님을 만남으로 인해 용서받고 새롭고 살 희망이 생긴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돌에 맞아 죽을 사람들, 영원히 멸망을 받아야 할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다 용서해 주시고 새 희망을 주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셀 수 없는 수많은 죄, 내가 아는 죄 모르는 죄 모두다 용서받은 사람들입니다. 내 공로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의로워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바르게살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교회 다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이 주님이 우리를 용서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철저하게 주님의 은혜로 사는 나, 주님의 은혜 속에 있는 나, 은혜를 거두어 가시면 아무것도 아닌 나를 발견해야합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은혜입니다. 더 큰 은혜를 받는 비결입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의 수치와 가책을 이기지 못해 완전히 좌절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을 넘어뜨리는 것이 아니라 일으켜 세우는 것이었고, 그 여인을 실망에 빠뜨리는 것이 아니라 변화 받을 수 있도록 그를 격려해 주었습니다. 그 여인의 과거의 죄보다 용서를 통해서 미래의 새로운 삶을 살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용서는 새로운 순종의 기회요, 자유의 기회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 용서에서 몇 가지 진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⑴우리 모두 예수님께로 끌려 와야 합니다. 세상은 지금도 여리고 길에 강도 만난 사건이 계속됩니다. 또 사람들을 죽이려는 악한 음모가 있습니다. 정죄가 있고, 심판이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죽음에 끌려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교회는 사람을 살리는 곳입니다. 여기는 살리는 곳이요, 세상은 죽이는 곳입니다. 
우리는 살려고 교회에 있습니다.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예수께로 끌러가야 합니다. 
  
오늘날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죄악으로 끌려가고 돈에 끌려가고, 명예에 끌려가고, 사람의 유혹에 끌려가고  결국 죽음으로 끌려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의 강한 손길에 이 자리에 끌려왔습니다. 본문의 간음한 여인이 주님 앞에 끌려와서 다시 살아났듯이 오늘 이 자리가 죄에서, 사망에서, 실패에서, 질병에서, 마음에서, 다시 살아나는 자리인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⑵이 여인은 자유를 얻었습니다.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할 자가 없느냐?' '주여! 없나이다' 여러분 우리가 주 앞에 올 때, 우리를 정죄하지 않도록 주께서 십자가에 피를 흘려주셨습니다. 
  
사53:5절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할/ 머리에 가시관을 쓰신 것은 우리가 머리로 지은 죄 때문이요, 손과 발에 대 못을 박은 것은 우리의 손과 발로 지은 죄 때문이요, 그 옆구리에 창을 찔려 피 흘리심은 우리 마음으로 지은 죄를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홀로 담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자마다 정죄함이 없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 모두는 '주여! 나를 정죄할 자가 없나이다' 고백해야 합니다. '나는 근심 걱정케 할 것이 없나이다. 나는 정죄하던 것이 없나이다. 나를 괴롭히던 모든 것들이 없나이다.' 이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되아야 합니다.  
  
주안에서 능치 못하심이 없습니다. 계21장에는 주안에서 죽음이 없고, 고통도 없고, 슬픔도 없고, 저주가 없고, 밤이 없고, 요동하는 바다가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 모두 예수 이름으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⑶우리 모두 용서받은 죄인임을 발견합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느니' 이 말씀이 복음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용서받지 못한 죄인들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용서받은 죄인들이 모인 감격스런 공동체요, 용서받은 죄인들의 축제입니다. 
  
우리는 한 주간 삶 속에서 많은 죄를 지은 인간입니다. 삶의 현장에서 죄를 짓지 않는 자가 어디 있습니까? 일터에서, 삶의 현장에서, 죄 지은 자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정죄하지 않고 용서해 주셨습니다. 
  
간음한 여인을 용서해 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 다 그녀를 정죄하고, 심판의 돌을 던지려고 했습니다. 오직 예수님만 용서의 손을 내미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홀로 지셨습니다. 
  
갈3:13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또 롬8:1-2절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이 여인의 죄를 눈감아 준다는 뜻이 아닙니다. 즉, 이 여인의 죄를 예수께서 친히 담당하셨다는 선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은 죄인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용서해야합니다. 우리는 주안에서 용서받은 자신을 발견해야 합니다. 
  
여러분 삶의 새로운 출발은 자신을 용서하는 대서 시작됩니다. 예수님이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하신 것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노니 너도 너 자신을 정죄하지 말고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나 자신을 용서한 자는 이웃을 용서할 수가 있습니다. 
  
용서란 '지우다, 떨쳐 버리다, 멀리 보내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용서는 누구의 잘못을 '내 기억 속에서 지워버리는 것입니다. 내 기억 속에서 떨쳐버리는 것입니다. 흐르는 시간 속에 멀리 보내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용서입니다. 주님께서도 우리 죄를 기억지도 않으신다고 하셨습니다. ▶왜 우리가 이웃을 용서해 주어야 하는가? 
  
▶우리도 죄와 허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여인에게 돌을 던지려던 자들이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자 다 죄가 있기 때문에 물러갔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세상에 완전한 사람 한사람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다 죄와 허물이 다 있습니다. 남을 정죄하고 돌을 던질 자격은 완전해야합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완전한자가 없기 때문에 정죄하거나 돌을 던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마7장에서는 '비판의 돌을 던지지 말고 자신의 허물을 찾아 고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용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허물과 죄를 주님은 남김없이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 여인을 주님이 용서하셨기 때문에 아무도 그에게 돌을 던지지 못했습니다. 주님이 용서하셨는데 누가 정죄하고 돌을 던질 수 있습니까? 우리 모두 용서받은 의인이기에 용서하는 사람들이 다 되어야 합니다. 
 

  ⑷하나님의 용서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어떤 종류의 죄도 용서하십니다. 사1:18절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여기 '주홍 같은 죄'와 '진홍 같은 죄'는 '사형에 해당되는 죄'를 의미하며 '세상 끝날 무서운 심판에 해당되는 죄'를 의미합니다. 이런 죄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우상과 잡신 섬긴 죄 영광 가로채고 막은 죄, 불순종의 죄, 사람 앞에서 지은 죄 강도 절도 간음 시기 미움 비방 원수맺음 등 어떤 종류의 죄도 용서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죄를 용서하시기 전에 조건을 제시하셨습니다. 그 조건은 죄인이 하나님께 돌아와서 회개하는 것입니다. 사1:18절에 보면,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고 말씀하셨습니다. '변론'이란 말은 논쟁하자는 뜻이 아니고 '하나님께 용서를 빌고 화해를 하라'는 말씀입니다. 
 
 ㈏모든 죄를 도말하여 용서하십니다. 시51:1절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또 9절에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도말하소서" 2절에는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라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도말'이란 말은 '칠하여 지워 없애거나 위에 덧발라서 가린다'는 말이요, '완전히 덮어버린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어떤 죄를 지었을지라도 하나님께 용서를 빌면 완전히 없애주시고  페인팅 하여 주십니다. 
  
㈐하나님께 돌아오기만 하면 용서하십니다. 사55:6-7절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 돌아 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이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여기 '널리'란 말은 '철저히'란 말로 하나님께 죄인이 돌아오면 철저히 용서하여 주십니다. 눅15장에 용서받은 탕자를 아시지요. 그가 회개하고 돌이킬 때에 모든 것을 용서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무제한 적인 용서입니다. 마18:21절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까?'라고 질문하였을 때 예수님은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일곱 번씩 일흔 번은 490번이 아니라 무제한을 의미하는 상징적인 수로서 무제한적으로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⑸이제 우리가 어떻게 다시 죄를 범하지 않고 살아갈 수가 있겠습니까?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만 온전하시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도, 어떤 교회도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해야 힘을 얻고 힘이 있어야 죄와 유혹과 시험을 이길 수 있기 때문이다. 

㈐교회를 가까이 해야 합니다. 교회는 신앙과 영혼의 교통 센터입니다. 어떤 이유로든 교회를 멀리하고 예배를 소홀히 하면 안 됩니다. 교회를 가까이 하면 할수록 내가 의롭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늘 감사해야 합니다. 내가 받은 용서와 사랑에 대해 늘 감사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출발한 존재입니다. 죄에서 사함 받고 자유함을 얻은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안에서 이제부터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빌1:6절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빌4:13절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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