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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당신 안에 예수님이 계십니까? (롬 7: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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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안에 예수님이 계십니까? (롬 7:15~25)


가끔 자신의 어처구니없는 행동으로 기가 막힐 때가 있습니다. 언젠가 왼손가락을 차문 안쪽에 넣고 차문을 닫는 바람에 큰 상처를 입은 적이 있습니다. 응급실에 갔더니 백인 여의사가 “바보짓 할 때가 있다”며 자기 손가락을 펴보였습니다. 큰 흉터를 가리키며 그녀도 손을 문안에 넣고 차문을 닫았답니다.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겠다”(Why did I do that)며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이냐는 제스처로 자신의 머리를 쥐어박았습니다. 통증으로 얼굴을 찌푸리면서도 한참이나 웃었습니다.

러시안 룰렛게임이 있습니다. 회전식 연발권총의 약실에 실탄 한 알만 넣고 그 실탄의 위치를 알 수 없게 한 다음 게임에 임하는 자들이 순서를 짜서 머리에 총구를 겨누고 방아쇠를 당기는 게임입니다. 보통 6연발 권총을 사용하니 확률은 1:5로 굉장히 위험한 게임입니다. 극심한 공포감 때문에 어떤 이는 방아쇠를 당기기도 전에 바지에 오줌을 싸고 항복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왜 그런 게임을 합니까? 모험심 때문에요? 밥 먹고 할 일없는 사람들이나 하는 짓입니다. 인간은 이렇게 어리석습니다. 아마 그 게임을 하다가 죽거나 머리에 상처를 입고 장애자가 된 사람은 평생 되돌릴 수없는 후회를 할 것입니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했지?”(Why did I do that?). 이보다 더 어리석은 짓은 없습니다. 

터커 몽가머리(Dr. Tucker Montgomery)박사는 미국 테네시에 있는 테네시 의과대학병원 응급실에서 15년간 응급실 의사(Emergency Room Doctor at the University of Tennessee Hospital in Knoxville, Tennessee)로 근무를 했습니다. 15년 동안 E. R. Doctor로 임상조사를 했는데 응급실로 실려 오는 수많은 환자들 중에 이해할 수없는 바보행동(Simple Stupidity)으로 상처를 입고 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어떤 이는 얼굴과 치아에 큰 손상을 입고 응급실로 실려 왔는데 다친 이유를 듣고 소름이 끼쳤답니다. 술에 취한 채 차를 몰면서 폭죽(firecracker)에 불을 붙여 창문 밖으로 던진다는 것이 피우던 담배를 던지고 불이 붙은 폭죽은 담배인줄 알고 입술로 물었다가 터지는 바람에 다쳤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 짓을 했는지 자신도 이해가 안 되었을 것입니다. 

언젠가 저의 어머님이 먹다 남은 고등어조림이 아깝다고 마지막 한 점을 잡수셨다가 식중독에 걸리셔서 한 주간 이상 큰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왜 마지막 한 조각을 먹었을까? 후회하고 또 후회해도 이미 먹어버렸으니 소용이 없습니다. 그 외에도 스스로에게 후회될 일을 저지르고 자책하는 질문이 많습니다. 

왜 아내에게 화를 냈을까? 조금만 참을 걸!
왜 친구에게 욕을 퍼부었을까? 조금만 참을 걸!
왜 내가 그 돈을 받았을까? 조금만 욕심을 버렸으면 됐을 걸!
어떤 때는 그 길로 가지 않았으면 교통사고를 당하지 않았을 텐데 그 길로 가는 바람에 교통사고를 당했다며 후회합니다. “왜 그 길로 갔을까? 다른 길로 갔으면 괜찮았을 텐데!”

학교에 다닐 때 후회한 일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기독교 윤리학 시험을 보는데 준비를 열심히 했기 때문에 답안지를 작성하는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일찍 답안지를 작성하고 제출하려고 일어서는데 앞에 앉은 학생의 답안이 내 답안과 다른 것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갑자기 자신이 없어졌습니다. 학생이 커닝을 하면 안 되는 줄 알면서 더구나 윤리학 시험인데 감독선생의 눈을 피해 답안지를 고쳤습니다. 커닝을 하면 안 된다는 양심의 소리가 들렸지만 재빠르게 움직이는 내손을 저지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점검해보니 내가 먼저 쓴 답안이 맞는 답이었습니다. 커닝을 했다가 낭패를 당했습니다. 얼마나 후회스럽고 약이 오르는지 지금까지 잊혀지지 않습니다. 왜 이 일을 여러분에게 고백하는 줄 아십니까? 학생으로서 해서는 안 될 커닝을 했다는 죄책감 때문에 이 일이 후회스럽고 잊혀지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먼저 쓴 답안이 옳았고 커닝한 답안이 오답이었기 때문에 너무 억울해서 지금까지 잊혀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罪문제의 한계입니다. 

세상을 살면서 마음으로는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그른지를 압니다. 그러나 실제로 행동할 때는 육신의 힘이 작용해서 마음에 원하는 옳은 것을 행하지 않고 육신의 욕심에 이끌려 옳지 못한 것을 행하는 인간의 나약함 때문에 우리는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문제로 제일 많이 고민했던 사람이 사도 바울입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롬 7:19)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했지?”(What did I do that?)라는 물음이 내면으로부터 솟아오르는 것을 사도 바울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롬 7:15)

바울의 이 탄식에서 몇 가지 배울 점이 있습니다.

첫째로 바울은 죄를 지었을 때 남의 탓으로 돌리지 아니했습니다. 모든 죄의 원인을 자신에게 돌렸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든 잘못의 원인을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서 찾으려 합니다. 자녀들이 잘못된 행동을 할 때 부부간에 다툽니다. 남편은 아내가 아이들을 잘못 길렀기 때문에 아이들이 잘못되었다는 겁니다. 아내는 오히려 “그것이 왜 내 탓이냐? 아버지가 잘못 가르쳤기 때문이다”고 싸웁니다. 자기 탓으로 여기지 않으려는 본능이 부모에게 있습니다.

합동통신이 몇 해 전에 실은 기사입니다. 미국 훌로리다(Florida)에 사는 어느 변호사가 달러렌터카(Dollar Rent-A-Car)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영국의 아이리쉬 사람(Irishman)인 진 맥그래스(Sean McGrath)를 대신해서였습니다. 맥그래스는 렌트카 회사에서 미국 차를 빌려 여행을 하였습니다. 어느 날 술에 취한 채 음주운전을 하다가 충돌사고를 내어 옆자리에 타고 있던 애인이 죽었습니다. 변호사는 렌터카 회사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했습니다.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본래 아이리쉬 사람은 술을 많이 마시는 종족인데 렌터카 회사가 그런 아이리쉬 사람에게 차를 렌트해 주었기 때문에 음주운전 사고와 함께 애인이 죽었으니 회사는 책임을 지고 보상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처구니없는 소송이지만 주 대법원까지 가는 긴 재판을 해야 했습니다. 만일 렌터카 회사가 아이리쉬 사람이라고 차를 렌트해주지 않았으면 인종차별이라며 더 큰 소송을 냈을 것입니다.

얼마 전에는 서울의 어느 음식점에서 큰 다툼이 있었습니다. 한 가족이 와서 음식을 시켜 먹고 있었습니다. 테이블마다 손님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두 아이들이 마구 뛰어 다니며 장난을 치니 얼굴을 찌푸렸습니다. 부모가 살짝 제지를 하면 좋을 듯했기 때문입니다. 장난감 총을 쏘며 넘어지는 시늉을 하던 놀이가 조금 위험하다 싶었는데 결국 일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넘어지던 시늉을 하던 아이가 뒤로 넘어지면서 테이블 모서리에 머리를 찧는 바람에 의식을 잃고 쓰러졌습니다. 

아이의 엄마는 갑자기 주인을 향해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테이블 모서리에 붙여 놓은 안전장치가 더 부드러웠으면 아이가 다치지 않았을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아이들의 위험한 장난을 절제시키지 않은 것은 아랑곳 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아이들을 진정시켰으면 다른 손님들도 유쾌하게 식사를 할 수 있었고, 아이도 다치지 않았을 텐데 엄마는 이 평범한 상식을 모른 채 남의 탓만 했습니다.

부부간에 도둑질을 하다가 경찰에 잡혔습니다. 남편은 아내 때문에 도둑질을 했다는 것이고 아내는 남편이 같이 가야한다해서 도둑질을 했다는 것입니다. 듣고 있던 경찰이 도둑맞은 집이 도둑맞을 짓을 했다고 하지 않으니 다행이라 했답니다. 

죄는 나의 탓입니다. 누구의 탓도 아닙니다. 외적 환경이 어떻든지 간에 내가 결단하고 행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처럼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합니다”고 고백하며 나의 탓으로 돌려야 합니다.


둘째로 사도 바울은 죄를 인정한후 회개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죄를 인정한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누구나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며 변명합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죄를 보지 못하는 색맹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죄를 언제나 인정했습니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롬 7:20) 

자신이 결코 의인이 될 수 없는 것은 자신 속에 선을 행하는 하나님의 법과 악을 행하는 죄의 법이 함께 들어 있는데 언제나 죄의 법이 육신을 조종하기 때문이라고 고백했습니다.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따라 선을 행하기를 원하나 육신이 죄의 법에 지배당하며 악을 행하고 있다고 탄식합니다.

법정에 가면 모두가 ‘죄가 없다’(not guilty)고 주장합니다. 특히 정치인들이 수뢰혐의로 재판에 회부될 때 처음에 죄를 인정하는 사람은 드뭅니다. “단 한 차례도 만난 적도 없고 단 돈 1원도 받은 적이 없다. 법정에서 나의 무고함을 밝히겠다”고 큰 소리를 칩니다. 그런데 몇 번 조사를 받고 나면 “나는 몰랐다. 할 말이 없다. 유감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정치에서 물러나겠다”고 고개를 숙입니다. 그럴 때마다 “아마 자기가 받은 돈을 쉽게 들추어 내지 못할 것이다. 절대 비밀이었으니 누구도 찾아내지 못할 것이다”는 완전범죄의 자신감 때문에 큰 소리를 치는 것처럼 보여지니 어찌 하겠습니까?

그런데 누구를 비난할 입장이 못 되는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우리 중에 누가 하나님의 법 앞에서 무흠하겠습니까?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이 세상에 의인은 없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

사도 바울처럼 죄를 인정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빠삐용이라는 영화에서 잊혀지지 않는 장면이 있습니다. 무기징역을 언도받고 너무 억울함을 호소하던 빠삐용이 꿈을 꿉니다. 하얀 백사장을 거니는데 앞에 재판관들이 앉아 있습니다. 빠삐용은 소리를 지릅니다. “억울합니다. 나는 그 뚜쟁이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나에게 죄를 뒤집어씌운 그놈이 죄인입니다. 나는 죄가 없습니다.” 그때 가운데 앉은 재판관이 벌떡 일어나서 소리칩니다. “너는 세월을 낭비한 죄가 크도다” 그때 빠삐용은 뒤로 돌아서면서 “그렇군요. 세월을 낭비한 죄가 크군요.” 두런거리며 자신의 형량을 받아드립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면 회개할 수 있습니다. 그때부터 회개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문제는 내가 죄의 법에 지배를 받기 때문에 온전한 회개가 되지 않는다는데 있습니다.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롬 7:23) 

죄인 줄 아는데 그 죄의 줄을 완전히 끊어낼 수가 없습니다. 죄의 법이 나를 사로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몸부림치며 울부짖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인사불성으로 술을 마신 녀석이 술을 더 요구하자 웨이터가 나가라고 소리쳤습니다. “야, 내가 이집밖에 술 마실 곳이 없는 줄 아냐?” 큰 소리치고 나갔습니다. 잠시 후 옆문으로 들어와 술을 요구합니다. 웨이터가 또 소리치며 내쫓습니다. “야, 내가 이집밖에….” 이렇게 몇 번을 반복하더니 뭔가 이상하다는 듯이 눈을 껌벅이며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두런거립니다.“어케 내가 가는 술집마다 니가 일하고 있냐? 이상하네.” 술에 사로 집힌 자는 술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듯이 죄의 법에 묶인 자는 죄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죄인줄 알면서도 죄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벗어날 힘이 없습니다(You are powerless to do). 바울이 여기서 위대한 발견을 합니다. 구세주(Savior)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죄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는 아무것도 할수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나를 죄에서 해방시킬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만이 나의 구세주(Savior)가 된다는 진리를 깨달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보혈의 피만이 우리의 죄를 대속할수 있으며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구원하여 영생에 이르게 합니다. 

따라서, 마지막으로 바울은 죄의 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구세주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모셔 들여야 한다고 외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우리를 죄에서 해방할 수 있는 길은 예수 밖에는 없다는 진리를 발견한 바울은 평생을 예수주의로 삽니다. 죄와 사망의 법에서 건져내어 영생을 주실 분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기에 살아도 예수위해 살고 죽어도 예수위해 죽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내 안에 모셔야 모든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자유의 인생, 기쁨의 인생, 행복의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맨날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거야?”(Why did I do that?)하며 죄에 얽매인 삶을 사시겠습니까?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를 내안에 모시고 죄와 사망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어 날아갈듯 한 기쁜 인생을 사시겠습니까? 선택은 여러분에게 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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