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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나라와 준비 (창 22:13~14, 마 2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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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나라와 준비 (창 22:13~14, 마 25:1~4)

  
윔블던 테니스 대회가 영국에서 한참 열리고 있습니다. 윔블던 대회는 US 호픈, 프렌치 오픈, 호주 오픈 대회와 더불어 세계 4대 메이저 대회입니다. 이 대회에서 우승한다는 것은 대단한 사실이고 이 네 대회를 다 우승하는 것을 ‘그랜드 슬램’이라고 합니다. US 오픈과 호주 오픈 대회의 코트는 하드코트이고, 프렌치 오픈 대회의 코트는 클레이코트입니다. 그런데 윔블던 대회의 코트는 잔디코트입니다. 윔블던 대회를 위하여 잔디코트는 일 년 내내 정성껏 관리되고 있습니다. 2주간의 경기를 위하여 나머지 50주간을 준비합니다. 잔디에 물을 주고, 잔디를 깎고, 키를 고르게 합니다. 
  
미국 캘리포니아 파사데나의 ‘로즈 퍼레이드’는 매년 1월 1일에 퍼레이드를 합니다. 일 년에 단 하루 퍼레이드를 하기 위하여 일 년 내 준비합니다. 로즈 퍼레이드 위원회가 있어 한 해 동안 그 일만 합니다. ‘양병십년 용병일일’(養兵十年 用兵一日)이란 말이 있습니다. 십년동안 병사를 훈련하고 준비시켜 단 하루 병사를 사용한다는 뜻입니다. 준비는 그 만큼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고 많은 시간을 드려야 합니다. 준비하는 시간은 결코 낭비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어떤 일의 결과는 준비에 비례합니다. 준비는 이기는 것과 지는 것의 차이를 말해줍니다. 준비가 중요한 것은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창세기 22장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리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마 성경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이미 마음에 아들을 드리려고 작정하였습니다.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아버지, 번제할 양은 어디 있습니까?”라고 합니다. 

이 때 아브라함은 창세기 22:8에서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고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모리아까지 가서 아들을 묶어 제단에 올려놓고 아들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이 때 하나님이 칼을 든 아브라함의 손을 잡으시고 막으셨습니다. 그리고 눈을 들어보니 수양의 뿔이 나무가지에 걸려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양으로 제사를 다렸습니다. 그리고 창세기 22:14에는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산은 준비된 산입니다.  하나님의 산은 준비된 자가 오르는 산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준비된 자의 것입니다. 준비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차지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준비하시는 분입니다. 천지창조 때 보세요. 인간을 위하여 모든 것을 준비한 후에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사람이 타락할 것을 미리 아시고 타락이전에 이미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실 것을 준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영원히 갈 곳인 하나님의 집을 미리 준비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2 하반절에서 3절에는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려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예비하시러 가셨고 다시 오셔서 우리가 그 곳에 가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비유 가운데는 혼인잔치의 비유가 있습니다. 혼인잔치를 준비하는 주인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누가복음 14:17에는 “잔치할 시각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이르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완벽하게 준비된 나라입니다. 성경은 이 나라는 고통도 없고, 죽음도 없고, 아픔도 없다고 합니다. 얼마나 잘 준비되어 있습니까? 
  
그리스에서는 한 주간의 요일은 주의 날, 첫째 날, 둘째 날, 셋째 날, 넷째 날, 준비하는 날, 안식일이라고 부릅니다. 안식일 전날을 준비한 날, 예비일이라고 부릅니다. 초대교회는 엿새를 준비하고 하루를 예배하는 날로 정했습니다. 모든 날이 하루를 위하여 준비하는 날입니다. 우리의 생이 그렇습니다. 평생을 준비하여 한번 죽는 것입니다. 잘 준비하는 사람에게는 하루가, 한 순간이 즐거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잘 준비하여 잘 들어가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하나님의 나라는 준비하는 자의 것입니다. 

4절에는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라고 합니다. 슬기로운 자는 필요한 모든 것을 준비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런 슬기로운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들어갑니다. 
  
마태복음 24장과 25장은 종말에 관한 장입니다. 24장은 종말에 관한 교훈을 담은 장입니다. 25장은 종말에 관한 비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열 처녀의 비유와, 달란트 비유와, 양과 염소의 비유입니다. 이 세 비유로 종말을 설명합니다. 열 처녀의 비유는 ‘준비하라’는 뜻이니다. 달란트 비유는 ‘충성하라’는 말입니다. 양과 염소의 비유는 ‘선택되라’는 권고입니다. 종말에 관한 비유에서 말씀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는 준비가 중요한 것을 가르칩니다. 
  
하나님의 나라 잔치는 누구나 다 초청됩니다. 요한복음 7:37에는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 와서 마시라”고 합니다. 누구나 다 초청받지만 모든 사람이 다 오는 것은 아닙니다. 준비된 자만 오는 것입니다. 오려는 의지가 있는 자만 오는 것입니다. 성경의 비유에도 잔치에 오라고 했지만 여러 가지 핑계로 혼인잔치에 오지 않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핑계와 불참은 지금도 반복되고 있습니다. 
  
당시의 결혼 풍습은 10대 중반에 결혼하였다고 합니다. 랍비의 문헌에는 결혼의 최소 연령은 남자가 13세, 여자가 12세였습니다. 신부가 신랑의 집으로 갈 때에는 10명의 들러리와 함께 갔습니다. 탈무드에는 장례행렬이나 결혼행렬은 반드시 10명의 들러리를 두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가르치는 10명의 처녀는 신부가 아니라 신부의 들러리입니다. 
  
비유에 나타난 문제는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신랑이 더디 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다섯 처녀가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신랑이 더디 온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당시의 신랑은 혼인의 주빈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더디 오던 빨리 오던 신랑의 마음입니다. 가장 큰 문제는 다섯 처녀가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혼인잔치는 준비된 자의 것입니다. 준비된 자가 혼인을 즐겁게 참여할 수 있습니다. 준비되지 못하면 혼인잔치까지 갔다가 잔치에는 참여하지 못합니다. 이건 정말 억울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혼인잔치입니다. 준비된 자에게만 축복입니다. 준비된 자가 차지합니다. 준비된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 혼인잔치입니다. 
  
저는 500쌍 이상 결혼주례를 해 주었습니다. 가끔은 결혼식에 부모님이 늦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때는 약간 시간을 늦춥니다. 그러나 한 번은 신랑 어머니가 나타나지 않아 할 수 없이 결혼식을 시작했습니다. 한참 결혼식이 진행되는 도중에 어머니가 들어오셨습니다. 또 몇 번은 반주자가 늦은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아니라 예식장에서 할 때인데 반주자가 오지 않았습니다. 기다릴 수가 없어서 예식장에 있는 분에게 맡기고 시작했는데 이 분이 두 손가락으로 치는지 도무지 음악이 안 되어 결혼식이 아주 우습게 된 적이 있습니다. 또 다른 경우는 신랑이 늦은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랑이 늦은 경우는 아예 시작도 못하고 예식시간을 연기하면서 기다렸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반주자는 대치할 수 있습니다. 부모님은 대치는 안 되지만 없어도 결혼식은 할 수 있습니다. 하객들은 말할 것도 없이 안 와도 결혼식을 합니다. 그러나 신랑이 없으면 결혼식을 아예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신부가 늦은 경우는 없었습니다. 신부화장하고 오느라 항상 일찍 옵니다. 
  
슬기로운 다섯 처녀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슬기가 무엇입니까? 슬기로운 다섯 처녀도 미련한 다섯 처녀와 함께 졸았지만 준비하고 졸았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슬기란 준비하는 것입니다. 준비하는 자세는 정말 슬기로운 자세입니다. 
  
노아를 보세요. 햇볕이 쨍쨍 내려쬐는 날에 비가 와서 세상을 덮을 것이라고 하며 방주를 만듭니다. 사람들의 원성과 조롱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방주를 준비합니다. 이것이 그의 슬기입니다. 다윗을 보세요. 골리앗과 싸우러 나갈 때에 물맷돌 다섯 개를 준비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물맷돌은 하나만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섯 개를 준비했습니다. 사람은 다섯 개를 준비하지만 하나님은 하나만 사용하십니다. 이것이 그의 슬기입니다. 

엘리야를 보세요. 갈멜산에서 바알을 섬기는 제사장들과 영적 싸움을 합니다. 제단을 쌓고 소를 잡아 제물을 올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도랑도 파고 물도 부었습니다. 모든 준비가 다 되었을 때에 하늘에서 불이 내려왔습니다. 완벽하게 준비하는 것이 그의 슬기입니다.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기적을 베푸실 때에 소년을 보세요. 그 아이는 도시락을 준비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왔습니다. 아무리 봐도 신통한 것은 어쩌면 그 많은 어른들 가운데 도시락을 사가지고 온 사람이 하나도 없었을까요? 이 소년의 슬기로 5천 명이 먹고 남았습니다. 

풀러라는 분이 말했습니다. “날씨 좋은 날에 궂은 날을 준비하라.” 
  
전쟁은 준비하는 것보다 더 큰 용기는 없습니다. 준비된 자는 이미 반을 싸운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준비하는 것은 절반은 이미 간 것입니다. 준비는 그 자체로도 가치가 있습니다. 준비는 과정이지만 과정 이상의 가치가 있습니다. 준비하는 것은 언제나 슬기로운 자의 몫입니다. 
  
다케무라 겐이치의 ‘단 1줄의 성공법칙’이란 책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준비하지 않는 자에게는 절대 기회가 오지 않지만 준비하고 있는 자에게는 시기가 문제일 뿐 기회는 찾아오기 마련이다”. 열 처녀의 비유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준비한  다섯 처녀도 졸았지만, 내 신랑이 아니었지만, 혼인잔치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왔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준비해야 하는 구체적 이유를 아십니까? 마태복음 24:36에는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라고 합니다. 42절에는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고 합니다. 44절에는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준비해야 하는 이유는 예수님이 오실 그 날과 그 때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설교자가 설교준비에 땀을 흘리지 않으면 성도가 설교 시간에 땀을 흘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저는 설교 준비할 때마다 땀을 많이 흘립니다. 강단이 올라서면 그냥 술술 나오는데 아니라 준비할 때마다 힘이 듭니다. 준비의 땀을 흘립시다. 그 날이 닥쳐서 조급함의 땀 흘리지 맙시다. 

둘째,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자가 미련한 자입니다. 

3절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기름도 없는 등은 전혀 쓸 데 없습니다. 그릇은 기름을 담기 위해 필요합니다. 기름이 없는 그릇은 무용지물입니다. 그릇은 사람의 마음이라고 합니다. 성령이 없는 인간성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기름은 성령을 상징합니다. 성령의 체험을 말합니다. 그래서 흔히 성령의 기름부으심이라고 합니다. 기름이 없으면 그릇도, 등도 다 필요가 없습니다. 등은 세상을 밝히는 풍성한 믿음입니다. 성도의 삶입니다. 등은 기름이 있어야 기능을 제대로 합니다. 신앙의 형식이 성령의 체험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지식은 풍성한데 감동이 없는 신앙입니다. 머리로는 알지만 가슴이 싸늘하게 식어 있는 신앙입니다. 율법적 신앙이 기름이 없이 등만 있는 모습이니다. 성경에는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 자”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모양만 있고 능력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화려한 교회당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교회 안에 내용과 감격이 없으면 교회당 건물이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 흔히 우리나라 말에 속빈 강정이란 말과 같습니다. 
  
그릇과 기름과 등, 이 셋 중에 어느 것이 가장 중요할까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에 따라 슬기와 미련함으로 나누어집니다. 미련한 사람은 등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슬기로운 자는 기름을 절대로 잊지 않을 것입니다. 
  
성경은 “깨어 있으라”고 합니다. 깨어 있지 못하겠거든 준비하고 졸아야 합니다. 준비하지 않고 조는 것과 준비하고 조는 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가장 좋은 것은 준비하지 않고 안  조는 것이지만 인간의 육신이 약하기에 준비하고 조는 것이 좋습니다. 졸리는 것은 생리현상이기 때문입니다. 준비하는 것은 가치 있는 마음의 자세입니다. 
  
미련한 다섯 처녀는 미련이 철철 넘칩니다. 어떻게 등만 가지고 기름도 준비하지 않고 잠이 옵니까? 그 자체가 이미 정신이 틀린 것입니다. 신부 같았으면 아무리 늦어도 신랑이 오지 않는데 잠이 오겠습니까? 절대 못 잡니다. 그런데 들러리니까 잠이 오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든 내 일처럼 해야지 남의 일처럼 하면 이렇게 잠이 오는 법입니다. 
  
저도 외국에 가서는 렌트카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차는 빌려줍니다. 요즘은 네비게이션도 빌려주고 다른 기계들도 빌려줍니다. 그런데 기름은 안 빌려줍니다. 기름은 항상 자기가 넣어야 합니다. 기름은 넣어주는 법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름은 사용하는 사람이 채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가끔 길에서 혹은 고속도로에서 차에 기름이 떨어져서 기름통을 들고 허둥지둥하는 것을 보면 차가 고장 난 것 보다 훨씬 더 미련해 보입디다. 기름은 미리 채워야 합니다. 
  
성경에도 그랬습니다만 기름은 빌릴 수가 없습니다. 기름은 성령이라고 했습니다. 성령은 절대로 빌릴 수가 없습니다. 성령은 돈으로 살 수도 없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시몬이라는 사람이 사마리아에서 베드로가 안수할 때에 성령을 받는 것을 보고 돈으로 성령을 사려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그에게 너의 은과 함께 망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때 시몬은 자신이 망하지 않게 기도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바울은 에베소의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았느냐?”고 묻습니다. 그들은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했다”고 합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고 묻습니다. 그 때 제자들은 “요한의 세례”라고 합니다. 아직도 이들은 형식만 가지고 흉내를 내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성령도 모르고 일하려고 하였습니다. 아무리 성령을 아는 척해도 미련한 자에 불과합니다. 성령의 기름이 없으면 미련한 자입니다. 
  
해외여행을 가보면 간혹 치약을 빌려 달라, 약을 빌려 달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속옷은 빌려 달라고 안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졸라대도 빌려줄 게 있고 빌려줄 수 없는 게 있습니다. 성령의 기름은 빌려줄 수도 없고, 살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누구나 다 하나님께로부터 선물로 받을 수 있습니다. 성령을 선물로 받아 기름이 모자라지 않는 삶을 사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존 맥스웰은 “현명한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의 차이는 그가 이미 알고 있는 것에 대한 반응에 달려 있다. 전자는 그가 들은 것을 실천하고, 후자는 알지만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다”고 합니다. 등에는 기름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누가 모릅니까? 다 알지만 기름을 채우지 않는 것, 행동에 옮기지 않는 것이 미련함입니다. 
  
그리스 철학자들은 지혜의 삶이란 곧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말합니다. 지혜의 삶이란 하나님의 나라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의 기름으로 준비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기름을 채우면 끝납니다. 
  
옛날 어느 궁중에 어리석은 광대가 있었습니다. 임금님을 즐겁게 하고 재롱을 부리는 것이 그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항상 조금 모자란 말을 하니 하루는 임금이 지팡이를 하나 주면서 “너보다 더 미련한 사람이 있으면 줘라”고 하였습니다. 어릿광대는 그 지팡이를 줄만큰 어리석은 사람을 만나지 못하여 항상 그 지팡이를 가지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임금이 죽을 때가 가까워 광대를 불렀습니다. 임금은 광대에게 “나는 간다”고 하였습니다. “페하, 어디로 가십니까?”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다”. “폐하가 가시면 장수들과 신하들이 같이 가야 하는데 어디로 가는지 모르면 어떡합니까? 폐하, 이 지팡이나 가지세요. 나보다 더 미련한 사람은 처음 봤네” 하면서 그 지팡이를 주더랍니다. 여러분은 슬기로운 자입니까? 미련한 자입니까? 

여러분의 등에 기름은 있습니까? 우리의 전통과 역사를 자랑합니다. 교회에 오랫동안 출석하고 안 빠졌습니다. 그러나 삶의 윤활유가 메말라 있고, 열정이 식었고, 감격을 상실했고, 기쁨이 없다면 기름이 없는 등입니다. 이제 다시 우리의 등에 성령의 기름을 채워야 합니다. 그래야 슬기로운 사람이며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결론 

영화 감독인 우디 앨런은 “제가 사람들의 가슴속에 영원히 살아있는 게 꿈이냐고 묻길래 저는 제 아파트에 살고 싶다고 대답했습니다. 진짜로 저는 그러고 싶습니다. 어느 날 나는 죽을 것이고 죽은 후에 수백만의 사람들이 날마다 하루 종일 저를 칭송한다고 해도 그건 저와는 아무 상관이 없으니까요”라고 했습니다. 그는 좋은 영화를 만들고, 멋진 말을 많이 남겼습니다. 그의 등은 괜찮은데 기름이 떨어진 것입니다. 아파트에 살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잃으면 모든 것을 잃습니다. 
  
매튜 헨리는 “우리의 마지막 날을 준비하는 것이 매일의 일이 되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매일 매일이 우리의 예비일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기름이 있어야 갑니다. 여러분의 차에 하나님의 나라까지 가기에 충분한 기름을 채웠습니까? 우리교회는 모두 멋진 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 그 등에 기름을 채웁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준비된 교회, 성도들로 신랑이신 주님을 맞이하는 여러분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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