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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막 5:2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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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막 5:25~34)


솔개에게 장수의 비결을 배우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나는 정광호씨의 ‘우화경영’에서 솔개가 장수하는 지혜를 배웠습니다. 우화이긴 하지만 그 속에 담긴 지혜가 귀해 그 지혜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솔개는 가장 장수하는 조류로 알려져 있다. 솔개는 최고 약 70세의 수명을 누릴 수 있는데 이렇게 장수하려면 약 40세가 되었을 때 매우 고통스럽고 중요한 결심을 해야만 한다. 솔개는 약 40세가 되면 발톱이 노화하여 사냥감을 그다지 효과적으로 잡아챌 수 없게 된다. 부리도 길게 자라고 구부러져 가슴에 닿을 정도가 되고, 깃털이 짙고 두껍게 자라 날개가 매우 무겁게 되어 하늘로 날아오르기가 나날이 힘들게 된다.

이즈음이 되면 솔개에게는 두 가지 선택이 있을 뿐이다. 그대로 죽을 날을 기다리든가 아니면 약 반년에 걸친 매우 고통스런 갱생 과정을 수행하는 것이다. 갱생의 길을 선택한 솔개는 먼저 산 정상부근으로 높이 날아올라 그곳에 둥지를 짓고 머물며 고통스런 수행을 시작한다. 먼저 부리로 바위를 쪼아 부리가 깨지고 빠지게 만든다. 그러면 서서히 새로운 부리가 돋아나는 것이다. 그런 후 새로 돋은 부리로 발톱을 하나하나 뽑아낸다. 그리고 새로 발톱이 돋아나면 이번에는 날개의 깃털을 하나하나 뽑아낸다. 이리하여 약 반년이 지나 새 깃털이 돋아난 솔개는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변하게 된다. 그리고 다시 힘차게 하늘로 날아올라 30년의 수명을 더 누리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솔개에게 자신을 갱생하는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런 지혜를 주셨다고 해서 모든 솔개가 그 지혜대로 사는 것은 아닙니다. 그 이유는 지혜를 따라 살기 위해서는 피눈물 나는 고통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부리가 깨어지고, 발톱과 깃털이 뽑히는 아픔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고통의 과정을 잘 거치게 되면 솔개는 다시 힘차게 하늘로 날아올라 30년의 수명을 더 누리게 됩니다. 

장수하기를 원하는 사람, 기업, 단체 그리고 교회는 솔개에게 배워야 합니다. 노화현상이 일어날 때 위기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깃털이 무거워져 더 이상 날 수 없다면 갱신의 아픔을 선택해야 합니다. 너무 비대해지고, 너무 노화되어 더 이상 날 수 없다면 갱신의 고통을 통해 새롭게 되어야 합니다. 커지는 것만 좋은 것이 아닙니다. 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아픔을 극복하고 새롭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은 한 여인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세상에는 우리가 감당하기 힘든 아픔들이 있습니다.
숨기고픈 아픔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사람의 고통이 얼마나 큰 지 겪어본 사람이 아니고는 모릅니다. 그것도 드러내 놓고 말할 수 없는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의 마음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병을 앓기 시작한지 자그마치 열두 해입니다. 어느 날 갑작스레 하혈을 하기 시작한 겁니다. 그 여인이 처녀였는지 아니면 이미 결혼한 사람인지는 알 수 없지만 처음 하혈을 하는 순간 엄청 놀랐을 것입니다. 이거 혹시 죽을병에 걸린 것은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들면서 가슴이 철렁합니다. 

그뿐 아니라 레위기 15장 19절에 보면 “어떤 여인이 유출을 하되 그의 몸에 그의 유출이 피이면 이레 동안 불결하니 그를 만지는 자마다 저녁까지 부정할 것이요”라고 했기에 혈루증을 앓고 있는 사람은 함부로 돌아다닐 수도 없습니다. 자칫 혈루증을 앓는 것이 알려지게 되면 다른 사람을 부정하게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돌로 맞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여인으로서 부끄러워서도 이를 다른 사람에게 알리기조차 쉽지 않은 그런 병입니다. 당장에 의사를 찾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고치지 못했습니다. 

처음에는 함께 아파하던 가족들조차 점차 외면하기 시작하는데 그것이 더 견디기 힘이 듭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의사를 찾아다니고 약을 구하기 위해서 많은 돈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다고 했습니다. 자기 때문에 집이 가난에 쪼들리게 됐습니다. 그런데도 병은 점점 더 심해가기만 합니다. 아마도 날마다 눈물로 지새웠을 것입니다. 

당시로서는 이런 불치병에 걸렸다는 것은 하나님께 형벌을 받은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기에 내가 무슨 죄가 많아서 이런 병에 다 걸렸는가 싶어서 더 견디기가 힘들었을 것입니다. 더 이상 가족들 얼굴조차 볼 낯이 없습니다. 안색도 아주 창백하고 몸도 바짝 말라가는데 사람 앞에 나서지 못하고 숨어 지내야 하는 그 삶이 오죽하겠습니까? 다 내가 못 나서 그렇지 싶기도 하고 나만 아니면 우리 가족들 다 행복하게 편안하게 잘 살 수 있었을 텐데 하는 마음에 가족들 보기 미안해서도 나오느니 한숨이요 눈물뿐이었을 것입니다. 

아니 남몰래 하나님 앞에 울부짖기도 많이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세요. 내게 있는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나에게도 은혜를 베풀어 주시어서 건강한 삶을 살 수 있게 해 주세요.” 그렇게 지낸 시간이 자그마치 열두 해입니다. 이젠 스스로 가족들의 눈에라도 뛸까 싶어 숨어 지냈을 것입니다. 너무도 외롭고 힘든 어둠의 나날들이 이어집니다. 그렇지만 누구 하나 저를 위로해주고 다독여주는 사람 하나 없습니다. 어쩌면 견디다 못해 집을 뛰쳐나와 마을을 떠나 문둥병자들처럼 골짜기에서 지냈을 지도 모릅니다. 

한데 이게 이 여인만의 문제일까요? 혈루증은 아닐지라도 오랜 병을 앓고 있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남에게 말하기 부끄러운 그런 병을 앓고 계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 병은 아니지만 내가 감당하기 힘든 어려운 일들로 인해서 아파하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몰아닥친 이런 저런 회오리에 휩쓸리게 될 때 그 아픔이라고 하는 것은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아니 어떤 때는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하던 것을 깨닫게 될 때도 있습니다. 

그 순간 내 마음이 아파서 견딜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너무 마음이 아파서 할 수만 있다면 통곡하며 울고 싶은 심정이 들 때가 있을 것입니다. 내 입장이 한심스러워서 그렇기도 하고 내게 몰려 닥친 어려움으로 인해서 한숨짓기도 하고 함께 지내던 사람들이 내 곁을 떠남으로 인해서 아파하기도 합니다. 아니 분명 좋은 일인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가슴은 후벼 파듯이 아플 때도 있습니다. 왜 그러고 있냐, 대책을 세워야 되는 것이 아니냐고 하지만 그렇다고 뚜렷한 대책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속으로 울고 또 웁니다. 분명 겉으로는 웃고 있습니다. 한데 마음으로는 울고 있습니다. 아니 통곡하고 있다고 할까요? 그걸 알기에 나 또한 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 아파하는 사람들을 보면서도 내가 그를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또 웁니다. 아니 어떤 때는 내가 손을 내밀면 더 움츠립니다. 한 걸음 다가가려면 한 걸음 물러섭니다. 그래서 다가갈 수도 없습니다. 나 때문에 상처 받은 사람들도 있음을 압니다. 

그래 내가 못나서 내가 잘못해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했고 모든 것을 엉망으로 만들었다고 하는 마음 때문에도 울 수밖에 없습니다. 차라리 너 나쁜 사람이라고 욕이라도 하고 돌팔매질이라도 한다면 그게 더 나을 것 같아요. 말없이 외면하고 돌아서 버리는 사람들을 볼 때 그리고 마음을 닫아 버린 사람을 볼 때 그래요 결국 요 나 때문에 그런 것이니 누구에게 하소연할 수도 없습니다. 아니 내가 무슨 말을 해도 그건 변명에 지나지 않고 더 추하게 보일 뿐입니다. 차라리 죽을 수만 있다면 죽는 것이 더 편할 것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런데 죽음조차도 나를 외면합니다. 그런 인생에 있어서 과연 해결책은 무엇일까요? 

해결책은 오직 예수님께 있습니다. 그건 다름 아닌 믿음으로 주님의 옷자락을 만지는 것입니다.
이 열두 해 혈루증을 앓던 여인에게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가 들려진 것은 마치 사막을 헤매던 사람의 눈에 띤 오아시스처럼이나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귀가 번쩍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예수님이 계신 곳을 찾아 나섰습니다. 하지만 가까이 갈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 너무도 많았기 때문입니다. 

누가 봐도 병색이 가득한데 혹시나 자신의 병을 눈치라도 채게 되면 돌에 맞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건 목숨을 걸어야 되는 일입니다. 어차피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라는 마음이었을까요? 한데 이상한 것은 예수님께 가까이 갈수록 자기 마음에 저분의 옷자락만 만져도 내가 나을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 여인이 오래 동안 예수님을 지켜보며 따라다녔을 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의 전하는 말씀을 들으며 예수님이 많은 병자들을 고치는 것을 보았을 지도 모릅니다. 아니 적어도 바로 전날 거라사 군대 귀신들린 자를 고치시는 주님의 모습을 보았거나 그 이야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그랬기에 자기도 고침을 받을 수 있다는 마음이 확신이 되어 그 마음에 다가온 것입니다. 문제는 이 많은 사람들을 뚫고 어떻게 예수님께 나아갈 수 있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 결단을 내립니다. 죽으면 죽으리라. 사람이 한 번 죽지 두 번 죽나 하는 마음으로 예수님께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댈 수 있었습니다. 

한데 그 순간 여인은 자기 몸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하혈이 멈춘 것입니다. 혈루 근원이 마른 것입니다. 자기가 나았다는 것이 순간적으로 느껴졌습니다. 할렐루야! 이렇게 쉬운 것을 이렇게 고칠 수 있는 것을 지금까지 왜 그리 망설이며 예수님께 다가서지 못했었는지 한 편으로는 후회도 되면서 그 마음에 그냥 펄쩍 뛰며 두 손을 불끈 쥐고 외 하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이 여인이 자기 집 골방에 있었는지 아니면 집을 나와 골짜기에서 생활했는지는 몰라도 어찌됐든 이 여인이 예수님께 올 수 있었다는 것은 누군가가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이 여인에게 해 주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가 가족인지 이웃인지는 몰라도 어쨌든 이 여인은 예수님에 대해서 들었고 그 예수님을 찾아왔던 것입니다. 처음에는 멀리서 지켜보았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눈에 자기의 병색이 가득한 모습을 감추기 위해서 애를 쓰면서 호기심 어린 눈길로 예수님을 멀리서 쳐다보며 그 전하는 말씀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던 중에 회당장 야이로가 와서 자기 딸이 병들어 죽게 되었으니 자기 집으로 오서서 살려달라고 하는 말을 듣고 예수님께서 내가 가서 고쳐주마 하고는 일어서서 가시는데 많은 사람이 서로 밀고 당기며 예수님을 에워싸고 길을 가는 것을 보는 순간 지금이야 말로 가까이 갈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던 것이고 그 믿음대로 나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이 여인의 믿음도 중요하지만 이 여인에게 예수님을 소개한 사람은 더 귀합니다. 

물론 여인도 그 예수님을 전해준 사람도 전혀 누구인지 이름이 밝혀져 있지는 않습니다. 가족이었을 수도 있고 하지만 저를 보며 아파하던 이웃일 수도 있습니다. 마음으로는 돕고 싶지만 방법이 없습니다. 도울 수 있는 힘도 없습니다. 그럴 때 그냥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무능함을 아파하던 사람들의 입장에서도 예수님의 이야기는 가뭄 끝에 단비와 같은 소식이었을 것입니다. 그래 자기 일처럼 기뻐하며 이 여인에게 예수님을 전해주었을 것입니다. 

그 이름이 누구인지 그 여인과 어떤 관계인지 우리는 전혀 알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하나님은 아십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복음을 전하는 사람의 발길이 아름답다고 했는데 어찌 이 좌절 속에 살던 여인에게 새 희망을 안겨준 사람의 발길이 귀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기에 우리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어떤 위로나 격려보다 더 큰 위로와 격려는 바로 예수님을 소개하는 것입니다. 결국 모든 문제 해결의 열쇄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못하실 일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이 해결하지 못할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들 역시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다 왕 같은 제사장들이라고 했으니 하나님 앞에 나아가 죄 사함을 구하고 하나님이 우리들을 복 주시기를 위하여 간구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 영혼이 잘 됨 같이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오직 주님께만 모든 문제 해결의 열쇄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힘들어 하고 아파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주님을 소개하십시오. 그 사람과 함께 주님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그리고 주님께 아뢰게 되면 믿음으로 주님의 옷자락을 만지게 되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이 될 것입니다. 섭섭한 마음도 하나님께서 위로해 주실 것입니다. 힘들고 지친 마음에 하나님의 위로와 함께 새 힘이 주어질 것입니다. 얽히고설켰던 문제가 풀려질 것입니다. 그 어떤 죽을병에서도 놓임을 받을 것입니다. 등지고 외면했던 사람도 다시 손을 맞잡게 될 것입니다. 눈물이 변하여 기쁨이 될 것입니다. 그 주님께 나아가십시오. 그 주님의 옷자락을 만지십시오. 이 시간 우리 모두 함께 주님 앞에 엎드려 주님의 옷자락을 만지는 귀한 시간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주님 말씀하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는 순간 여인을 고치는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것을 예수님도 아셨습니다. 그래서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라고 대답합니다. 아니 이 많은 사람들이 에워싸 함께 가는 길이 이리 밀치고 저리 밀치고 하였는데 누가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인은 예수님이 자기를 찾으시는 줄 알았습니다. 아니 이미 자기에게 이루어진 일을 알기에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쭙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 지어다” 예수님이 딸이라 부르십니다. 그러면서 선포하시기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 지어다”라고 말씀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미 낫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무얼 새삼스럽게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 지어다고 하시는 것일까요? 그건 다시 재발하지 않고 건강하게 지내라고 하시는 축복의 말씀입니다. 이제 이후로 다시는 건강을 잃지 말고 항상 건강하게 지내라고 하는 주님의 은혜의 선포야 말로 이 여인이 병에서 나은 것 이상의 귀한 선물입니다. 지금까지는 병으로 고생했지만 이제부터는 다시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의 출발이 네 믿음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구원을 받으리라고 했던 그 믿음이 건강도 회복하고 항상 건강하게 살 수 있는 복도 함께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항상 건강하게 살라는 예수님의 축복의 선포가 이어졌습니다. 그것도 공개적으로 그 수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주신 축복의 선포입니다. 어쩌면 그 순간 많은 사람이 박수를 치며 축하를 해 주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러한 치유의 역사를 아주 관심 깊게 지켜보는 눈길이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회당장 야이로입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따라 자기 딸이 방금 죽었다는 말을 듣고도 야이로가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이야기와 더불어 방금 눈앞에서 벌어진 이 놀라운 일을 지켜보았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이런 하나님의 역사의 산 증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의 인생을 어떻게 바꾸어주셨고 하나님이 어떻게 나를 위로해주셨으며 하나님이 어떻게 나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는지 우리는 사람들 앞에 증거하고 보여주는 산 증거자로서의 삶을 우리가 살아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그것이 힘든 것이 아니라 그렇게 증거자가 될 때 내 마음은 더 기쁘고 힘이 넘치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내가 고침을 받고 내가 해결을 받고 내가 어려움에서 벗어나고 그 어떤 문제이든지 그 해결의 출발은 내 믿음이라는 사실입니다. 주님이 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 그래서 주님의 옷자락을 만지는 믿음이야 말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궁극적인 열쇄입니다. 물론 문제를 해결하는 힘이 내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능력은 오직 주 예수님께만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 나아가도록 이끌어 주는 역할도 귀하고 주님의 능력도 귀하지만 내가 믿음으로 주님의 옷자락을 만지지 못한다면 거기에 아무런 역사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옷자락을 만지는 믿음은 과연 어떤 믿음입니까? 그것은 옷자락만 만져도 나음을 얻으리라는 믿음입니다. 결국 나음의 믿음입니다. 그리고 옷자락을 만지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내 문제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내 입으로 내 문제를 시인하는 것입니다. 내게는 이런 문제가 있습니다. 그 문제를 나는 해결할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주님께 맡기오니 주님이 해결해 주십시오 하고 주님 앞에 간구함으로 그 옷자락을 만지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우리를 구원할 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건강하게 살 수 있는 비결 다시 말해서 항상 평안하고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 수 있는 비결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이 믿음이 필요하고 이러한 믿음으로 내가 살 수 있도록 내게 믿음을 더하여 주옵소서 또한 간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음으로만 마음으로만 간절한 것이 아니라 그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오십시오. 결코 멀리서는 옷자락을 만질 수 없습니다. 주님 바로 앞으로 나아와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향해 손을 내미십시오. 그래 옷자락을 만지심으로 오늘 우리를 힘들게 하고 슬프게 하고 아프게 하는 모든 일로부터 벗어나 내 믿음으로 구원을 얻고 자유함을 얻고 건강을 회복케 되는 우리와 교회와 가정과 일터가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신체는 고통을 감당할 능력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어떤 통증에 대하여 우리의 뇌는 전달된 통증 자체를 수정할 수 있는 능력도 있습니다.
흔한 예로 아무런 효과도 없는 가짜 약을 주었는데도 마치 진짜 진통제를 준 것처럼 통증이 사라져 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뇌는 전달된 통증에 대하여 상당히 효과적으로 수정할 수 있는 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고통은 우리를 힘들게만 하는 느낌은 아닙니다.
그 안에는 우리 몸을 위한 유익이 담겨져 있습니다.
고통은 우리 신체에게 적절한 불쾌감을 조성하여 우리 신체가 위험한 상태에 더 이상 머물지 못하도록 움직이게 하는 경고자의 역할을 합니다.
또한, 고통은 우리의 내면세계를 반영하는 창문의 역할을 합니다.
우리 신체가 느끼는 고통은 우리의 내면의 외로움, 두려움, 분노감 등의 감정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고통의 시기에 우리는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게 됩니다.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신체가 결국 손상되듯이, 고통이 없는 삶은 무너지게 됩니다.
고통이라는 장애물이 있을 때에 우리는 고통의 언덕을 넘어, 보다 더 큰 가치를 위해 자신의 삶을 도약해 갈 수 있습니다.
결국 고통은 우리로 하여금 보다 큰 에너지를 발휘하게 하고, 새로운 일에 몰두하게 하는 자극제가 되기도 합니다.

이건 단국대학교병원 가정의학과의 박일환 교수의 말입니다. 하지만 더 좋은 것은 그런 고통에서 벗어나 다시 건강하고 평안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누가 그럼 건강과 평안과 기쁨을 누리며 살 수 있습니까? 누가 그 모든 어려움과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평안할 수 있습니까? 바로 믿음으로 주님의 옷자락을 만지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바로 저와 여러분이 되심으로 웃음 속에 감추어졌던 아픔의 눈물이 기쁨의 눈물로 바뀌는 귀한 역사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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