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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무엇을 위해 사는가? (창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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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위해 사는가? (창 12:1~9)


몇 년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만 세계 경영학계의 대부로 알려진 피터 드러커라는 교수가 있습니다. 그가 13살 때에 학교에서 수업을 받던 중에 평생 잊을 수 없는 감동적인 질문을 받게 됩니다. 필리 글러라고 하는 선생님이 13살인 철없는 아이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개별적으로 불러가며 모두에게 똑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너는 죽은 뒤에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바라느냐?’ 는 질문입니다. 13살 된 아이들이 대답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질문입니다. 죽는다는 말도 실감이 나지 않는데 죽은 후에 사람들로부터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바라느냐는 질문은 너무 어려운 질문이었습니다. 

아이들은 당황하여 대답을 못했습니다. 그러자 필리 글러 선생님은 껄껄 웃으면서 ‘대답을 못할 줄 알았다. 대답을 기대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분명히 기억해 두어라. 네가 50세가 되었을 때는 이 질문에 분명한 대답을 할 수 있어야 한다. 50이 넘어서도 이 질문에 대답을 하지 못한다면 인생을 실패할 수 있다.’ 라고 말했습니다. ‘내가 죽은 후에 사람들에게 내가 어떤 사람으로 기억될까?’라는 질문은 철없는 아이들이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 간직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60년이 지난 후에 동창회로 모였습니다. 나이가 70이 넘은 동창들이 모였는데 대부분의 동창들이 학창시절을 이야기하면서 필리 글러 선생님의 질문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 선생님의 질문을 생각하며 삶을 살아왔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 분이 가르쳐 준 지식은 다 잊어 버렸지만 ‘너는 죽은 후에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원하느냐’는 한 마디의 질문이 살아오는 동안 삶의 지표가 되었다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죽은 이후에 사람들에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원하십니까? 인생의 가치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브라함은 사람들로부터 ‘믿음의 조상’ 이라고 불려졌습니다. 아브라함의 생애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사건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삶을 대표하는 단어는 ‘믿음’이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8-10절을 한번 찾아 읽어보겠습니다. 

신약 365면입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여기에서 강조하고 있는 단어는 ‘믿음으로’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여행은 오늘 본문 1절에 있는 하나님의 명령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아브라함의 믿음은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는 ‘떠남’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영어 숙어 가운데 ‘from- to -’ 가 있습니다. 어디에서 떠나 어디에 이른다는 말을 할 때 자주 사용하는 숙어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임하셔서 명하시기를 ‘너는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고 명령하십니다. 

아브라함이 떠나야 하는 곳은 매우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가 도착해야 할 곳은 구체적이지 못합니다. 단지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네가 순종하면 내가 너의 이름을 창대케 하고 복의 근원이 되게 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히 믿고 따랐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믿을 수 없는 부분까지 믿고 순종함으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런 아브라함의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그를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렀습니다. 

사실은 모든 사람들의 삶은 떠남을 추구하는 삶입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자유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똑같이 자유를 추구하지만 자유를 추구하는 목적에 따라 어리석을 삶과 지혜로운 삶으로 구분이 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form -’ ‘무엇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을 행복이라고 말하며 살아갑니다. 가난한 사람은 가난으로부터의 자유를 노래합니다. 그는 가난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며 삽니다. 지긋지긋한 가난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그의 삶의 목표입니다. 먹고 싶은 것 먹지 않고, 입고 싶은 것 입지 않고 악착같이 모으며 살아갑니다. 가난으로부터 벗어나 부유한 삶의 자리에 이르는 것이 그의 꿈입니다. 그 곳에서 행복을 찾고자 합니다. 

어떤 사람은 질병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건강을 위해서는 어떤 것도 다 합니다. 남들이 혐오스러워 하는 음식도 마다하지 않고 먹습니다. 건강을 해치는 일이라면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멀리합니다. 건강을 위한 일이라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인내하며 견딥니다. 

무지함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신의 무지함에 대한 열등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를 씁니다. 돈을 주고라도 졸업장을 만들고 박사 학위도 돈을 주고 사려고 합니다. 학력을 위조하기도 합니다. 자신이 많이 배운 사람처럼 행동합니다. 그곳에서 행복을 찾고자 합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가난으로부터, 질병으로부터, 무지함 등으로부터 벗어나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잠시의 편리함과 자기 만족은 있을지 모르지만 진정한 행복은 없습니다. 부유함과 건강함과 유식함은 언제나 상대적이기에 더 많은 것을 얻은 사람과 얻고자 하는 욕망 앞에서 부족함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나의 부족한 부분이 채워짐으로 인한 행복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순간적일 뿐입니다. 이것이 ‘from -’ 즉 ‘무엇으로부터의 자유’가 가지고 있는 행복의 한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430년간 종 노릇하며 살았습니다. 그들은 고달픈 애굽의 노예 생활로부터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그들은 자유를 울부짖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지도자 모세를 통해 애굽으로부터, 바로의 억압으로부터 해방시키셨습니다. 그들은 애굽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를 만끽했습니다. 그들이 홍해를 건너 바로 왕의 군대의 억압으로부터 해방되었을 때 그들은 춤추고 노래하며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애굽으로부터의 자유의 노래는 곧 멈추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광야 생활의 어려움을 원망하고 불평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애굽으로부터의 해방 이후에 분명한 삶의 목적이 없었습니다. 애굽에서 나왔지만 무엇을 향한 해방이고 어디를 향한 해방인지 목적이 희미했습니다. 그들은 광야 생활에서 원망하고 불평하다가 결국 광야에서 죽음을 맞게 됩니다. 이것이 ‘from -’이 보여주는 자유와 행복의 한계입니다. 

진정한 행복은 ‘from -’에 있는 것이 아니라 ‘to -’에 있습니다. 무엇을 향한 자유인지가 분명한 사람에게 진정한 행복이 있습니다. 내가 가난으로부터 벗어나 무엇을 위해서 살고자 하는지, 내가 질병으로부터 벗어나 무엇을 위해서 살아가고자 하는지, 내가 무지함으로부터 벗어나 어떤 보람 있는 일을 하면서 살고자 하는지 분명한 목표와 목적이 있을 때 진정으로 행복한 삶을 살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해방되어 광야에서 40년간을 살아갈 때 어디를 향한 행진인지에 대한 분명한 목표와 목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갈렙과 여호수아 두 사람만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분명한 목적과 목표를 두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의 노예생활로부터의 해방되는 ‘from -’을 추구하는 삶이라면 갈렙과 여호수아는 ‘to -’ 를 추구하는 삶이었습니다. 

갈렙과 여호수아가 추구했던 자유와 행복은 단지 애굽의 노예생활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젖과 꿀이 흐르는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평과 원망을 하며 광야에서 다 죽었지만 갈렙과 여호수아는 자신들이 그렇게 꿈꾸던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됩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에서 눈여겨 보아야 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5절입니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아브라함이 고향인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도착했는데 그 여정이 결코 쉬운 여정이 아니었습니다. 어려운 여정이었습니다. 

그것을 우리에게 암시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마침내’라는 단어입니다. ‘마침내’라는 말은 어려운 과정을 다 극복하고 결국은 도착했다는 말입니다. 이 ‘마침내’ 라는 단어는 믿음 안에서 품은 꿈을 이루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to -’를 향한 삶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닙니다. 그 길은 어느 때는 힘들고 고되기도 합니다. ‘from -’을 향해 살아가는 사람들 보다 힘겹게 살고, 뒤처지는 듯한 느낌이 들 때도 있습니다. 인류 역사상 최초의 전구를 발명한 에디슨이 여러 차례의 실험을 통해 전구를 만드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최초의 전구가 얼마나 희미한지 촛불을 밝혀야 볼 수가 있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재미있습니까? 전구를 만들긴 했는데 촛불을 비춰야 볼 수 있었다니 말입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비웃었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첫 걸음이 되어 어두움을 밝히는 위대한 발명품인 전구가 되었습니다. 

인류 역사상 최초의 자동차 실험이 실시되었을 때 1시간에 2마일을 갔다고 합니다. 1마일이 대략 1.6킬로미터니 1시간에 약 3.2킬로미터를 간 것입니다. 그 정도니 마차하고 가면 마차가 먼저 갔습니다. 마차를 모는 사람이 자동차를 운전하는 사람에게 차라리 내 마차에 타라고 하며 비웃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시작한 자동차가 놀라운 발전을 이루어 1시간에 100-200킬로미터를 가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to -’를 향한 믿음의 첫 걸음과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위한 헌신과 봉사의 첫 걸음은 힘들게 시작하고 미약하지만 그것은 매우 중요한 시작입니다. 자기를 중심한 ‘from -’을 향한 것이 아니라 ‘to -’ 를 향한 첫 걸음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으로부터의 자유’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을 위한 자유’ 입니다. 가난으로부터의 자유, 질병으로부터의 자유, 무지함으로부터의 자유, 실패함으로부터의 자유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결과를 가지고 믿음 안에서 교회를 위한 자유, 하나님 나라를 위한 자유, 예수님 말씀의 가치를 이루는 자유로 발전시켜 나가는 것은 더 중요합니다. 그곳에 진정한 행복과 자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트리나 폴러스가 쓴 ‘꽃들에게 희망을’ 이라는 책을 소개하면서 말씀을 마칠까 합니다. 세상에 태어난 호기심 많은 줄무늬 애벌레가 노란 애벌레를 만나 함께 여행을 합니다. 그들은 길을 가다가 애벌레들이 높은 곳을 향해 악착같이 오르는 애벌레 탑을 보게 됩니다. 일상 생활에 지친 줄무늬 애벌레는 ‘저 애벌레 탑 위에 뭐가 있는 것 같은데 나는 저곳에 올라갈 거야’ 라고 말하고는 애벌레 탑을 오릅니다. 줄무늬 애벌레는 애벌레 탑의 정상에 오르기 위해 다른 애벌레들을 짓밟고 올라갑니다. 처절한 싸움이었습니다. 

다른 애벌레들을 짓밟고 정상에 오르지만 그 정상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밑에 있는 애벌레들을 정상에 올라가면 무엇인가 행복한 새로운 세상이 펼쳐질 것으로 생각해 서로 짓밟으며 올라오는데 정작 정상에 올라와 보니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정상에 있는 애벌레는 아무것도 없지만 단지 정상에 있다는 것을 유지하기 위해 올라오는 다른 애벌레들을 올라오지 못하도록 짓밟는 일을 할뿐이었습니다. 

줄무늬 애벌레는 애벌레 탑의 정상에서 나비 한 마리를 만납니다. 그 나비는 친구였던 노란 애벌레였습니다. 노란 애벌레는 나비가 되기 위해 누에고치를 만들고 그 속에 들어가 나비가 될 때까지 인내하며 고통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노란 애벌레는 결국 나비가 되어 하늘을 훨훨 날게 되었습니다. 노란 에벌레는 애벌레 탑 정상에서 허탈해하는 줄무늬 애벌레와 극적으로 상봉하게 됩니다. 

두 애벌레는 무엇이 다를까요? 낮은 곳으로부터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만 하면 성공과 행복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from -’ 적인 성공 개념을 가지고 있는 줄무늬 애벌레와 하늘을 나는 나비를 향한 꿈, 즉 ‘to -’ 적인 성공 개념을 가지고 누에고치 속으로 들어간 노란 애벌레의 삶의 방식의 차이가 만들어낸 결과라고 봅니다. 

세상 사람들은 ‘from -’ 적인 생각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가난과 질병, 열등감과 실패로부터의 자유 속에서 행복을 찾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의 결국은 실망과 절망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from -’의 삶을 뛰어넘어 ‘to -’의 삶을 지향하는 사람들입니다. 가난과 질병, 열등감과 실패로부터 자유한 내용을 가지고 만족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를 향하고, 위해서 살아가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삶을 뒤쫓는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예수님 안에서 꿈꾸는 삶이 단지 ‘from -’ 적인 삶이 아니라 ‘to -’ 의 삶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귀중한 가치를 향해서 세워지는 축복된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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