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아버지여 (눅 11:1~4)

  • 잡초 잡초
  • 222
  • 0

첨부 1


아버지여 (눅 11:1~4)


지난주에 이어 우리들의 ‘기도 회복’을 위하여 누가복음 11, 4 상반절 말씀 중심으로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네 번째 기도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눅 11, 4)입니다.

마태복음 산상수훈에서 마태가 전하는 동일한 주기도의 가르침에 의하면(마 6, 9-15)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赦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赦하여 주시옵고”하는 이 기도는, 여기서 끝이 나지 않습니다.

마태는, 주기도의 송영인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한 후에, 다시 주기도의 내용 중 일부인, 오늘 본문 누가복음 11, 4상반절과 관련된 말씀을 附加하여 재차 강조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은 이렇습니다.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 6, 14-15; 마태는 누가와 달리 죄용서의 문제에 특별하게 집중하고 있음을 봅니다). 

남산, 숭의여자대학에서 팀목회를 하면서 높은뜻숭의교회를 개척할 때, 개척 초기 1년 동안은 주일예배 이외에는 그 어떤 다른 목회활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주일예배 한 시간에만 집중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니, 교우들에게도 주일예배의 무게감이 아무래도 더 커지고 집중되지 않았겠습니까? 주일예배도 있고, 찬양예배도 있고, 수요기도회도 있고, 새벽기도회까지도 있다면, 아무래도 주일예배 한 시간에 집중되는 예배드림의 부담감이 적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별 부담감이(혹, 형식적인 예배를 드린다 해도) 오늘 예배 잘 못 드렸으면 내일 잘 드리면 되지 하는 마음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의 예배라곤 주일예배 딱 한 시간 밖에, 다른 어떤 선택의 여지도 없으니, 주일예배 시간에 와서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다면, 영적인 감각에 조금만 예민한 사람이라 해도, 여간 괴로운 일이 아니지요. 한 번은, 사무실에서 일을 보고 있는데, 교우 한 분이 상담을 하기 위해서 일부러 찾아오셨습니다. 찾아오신 용건은,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일예배시간마다 드리는 주기도의 기도가 되지 않아서, 너무 고통스러워서 찾아오셨다는 말씀이었습니다. 당시 숭의교회에서는 주일예배 시 공중기도를 드리기 이전에(우리교회에서 장로님들, 숭의교회에서는 예배오시는 교우면 누구나 기도했음, 어떤 분은 기도 순서 맡으시고는 일주일 직장 휴가까지 내서 준비하신 분도 있음),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로 먼저 다함께 기도드렸습니다. 주기도를 드린 후에, 곧 이어서 기도순서를 맡으신 분이 나오셔서 기도인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 분은 주일예배 드릴 때마다 드리는 주기도의 기도가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함께 주기도로 기도하는 시간이 되면, 소리 내어서 주기도를 하다가는, 어느 부분에 가면, 언제나 기도가 중단되는 사태가 벌어지고 만다는 것이었습니다. 한두 번도 아니고, 주일마다 그러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무슨 기도가 그렇게 안 되십니까?” 여쭸더니 “용서의 기도가 되지 않습니다”는 겁니다.

그 분 말씀이 이렇습니다. “목사님,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여기서라도 끝나고 만다면 중얼중얼하면서 은근슬쩍 넘어가기라도 하겠는데’···거기서 끝나지 않고,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는 마태복음 6, 14-15 말씀까지 주일마다 꼬박꼬박 기도하니, 도저히 양심에 받쳐서 용서하지도 않으면서 그 기도를 습관적으로 할 수 없더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목사님, 다른 사람은 다 용서할 수 있어도 그 사람만은 절대로 용서 못합니다. 그러니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는 겁니다. 기도가 막혀서 마음이 아프다는 것이, 무슨 싸인이겠습니까? 용서하라시는 하나님의 뜻 아니겠습니까?···. 주기도가 그 분에게만 막힐까요? 대충 넘어가십니까?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주기도는, 그저 입술로만 “주여, 주여”할 수 있는 기도가 아닙니다. 우리의 기도가 다 그렇습니다. 사람 앞에서 하는 기도라면, 사람 듣기 좋은 말만 해도 기도 잘한다는 말 듣지 않겠습니까? 바리새인과 같이 많은 말을 하기 위해, 오래 기도한다는 것 자랑하기 위해 중언부언 기도해도 기도 잘한다 하지 않겠습니까? 기도가 그저 도깨비 방망이식이라면, 누가 기도하지 않겠습니까? 金 나와라 뚝딱, 돈 나와라 뚝딱, 자동차 나와라 뚝딱, 병이 나아라 뚝딱, 이런 식으로만 기도해도 그것이 기도라면, 누가 기도 어려워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모두 다 기도하지 않겠습니까?

기도는, 集中입니다. 나를 버리고 하나님께로만 집중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내 의지, 내 뜻, 내 욕심을 점점 더 내려놓고,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구하기 위해서 흘리는 땀방울이고, 희생의 눈물이고, 나를 꺾는 괴로움이고, 십자가 지는 고통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님의 기도와 같이,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盞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고는 기꺼이 십자가 지는 데까지 나아가는 것이, 기도입니다(마 26, 36-46; 눅 22, 39-46).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네 번째 기도는, 죄 용서의 기도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罪도(조건입니다, "as") 赦하여 주시옵고.” 네 번째 기도는 “용‧서‧공‧동‧체”를 이루라는 명령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기도하라고 하셨습니까? 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해주는 것이, 하나님께 지은 우리의 죄를 용서받는 조건이 된다는 것입니까? 한 가지 질문을 드려보겠습니다(각자 마음, 자그마한 소리로).

질문 드립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 하나님께 지은 우리의 죄를 용서받기 위한” 필요조건입니까? 필요조건이 아닙니까? 다시 말씀드리면, 혹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면 안 되는 보다 더 중요한 또 다른 절대적인 이유가 있다는 말씀일까요?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조건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다른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지 않으면 안 되는 진짜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는 말씀일까요? 전자입니까? 후자입니까?

예, 예수님의 네 번째 기도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해주지 않으면 안 되는 진짜 이유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엄밀하게 따지자면 우리의 용서가 하나님께 용서받기 위한 조건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흔히 쓰는 말로, 다른 사람이 내게 지은 죄를 용서해주지 않으면, 괘씸한 것이 되고 만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너, 그러면 괘씸하지”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너를 어떻게 용서해 주었는데, 너는 네 형제를 용서하지 못한단 말인가? 말도 안 되지···”(괘씸죄, 무섭다. 매장된다. 괘씸죄는 하나님께만 해당되는 것, 사람이 쓸 수 없음).

▶ 오늘 본문 누가복음 11, 4상 말씀을 유의해서 보면 ‘죄’를 가리키는 낱말이 두 가지 서로 다른 용어로 쓰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罪지은 모든 사람” 할 때의 ‘죄’는 ‘오페이론티’인데, ‘빚을 진 모든’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빚’은 ‘죄’라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 죄도 赦하여 주시옵고” 할 때의 ‘죄’는 ‘하마르티아’(hamartia)입니다. 이 두 단어는 같은 의미도 있지만, 의미가 사뭇 차이가 있습니다. 

빚을 졌다는 말은, 일정부분의 빚을 의미하지요. 우리가 살면서 빚지고 살 때가 있습니다. 빚이 있다고 해도, 대부분의 빚은 아무리 커봐야 어느 정도 산술 가능한 빚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용서 받은 ‘죄’를 가리키는 ‘하마르티아’(a`marti,a, hamartia)는, 어느 정도의 수준의 빚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계산 불가능한 빚, 곧 罪를 말합니다. 끊임없이 죄를 생산해내는, 죄의 근원, 죄의 뿌리, 영구적으로 죄를 생산해내는 罪의 生産工場, 罪의 生産基地를 말하는 단어가 ‘하마르티아’입니다.

최근에, 전 세계를 공포의 도가니에 빠뜨렸던 신종플루사건이 말하자면 일종의 ‘하마르티아’와 같은 성격입니다. 신종플루가 왜 무섭습니까? 적절한 치료약이 없다는 데 있습니다. 백신이 개발되어 있지도 않는 바이러스라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무한전염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마르티아’(hamartia)라는 ‘죄’가 바로 전 인류를 감염시키는 백신 없는 전염병과 같은 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하마르티아’는 사회제도와 체계적인 구조를 가지면서 지속적으로 온 세계, 온 인류에게, 죄를 전염시키는 전염병 같은 존재입니다. 이 ‘하마르티아’에 누가 감염되었다는 말입니까? 저와 여러분, 온 인류가, 그 어느 누구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모두 다 감염되어 있다는 겁니다. 얼마나 무서운 전염병입니까? 백신도 없는 바이러스입니까? 그 결과는 참혹한 죽음뿐이지요. 

그런데 이 ‘하마르티아’( hamartia)라는 전염병 같은 죄, 죽음의 바이러스를 종식시킨 백신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셨다는 겁니다. 그 백신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Albert Camus가 The Plague(페스트, 흑사병)이라는 소설 있잖습니까? 그 소설에 나오는 BUBONIC PLAGUE(腺 페스트)라는 전염병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용서 받은 ‘하마르티아’가 어떤 것인가의 실상을 보여주지요. 

실제로 유럽인구의 1/3을 죽게 했던 黑死病은 대단히 무서운 바이러스였습니다. 흑사병으로 죽은 사람의 송장은 시커멓게 변합니다. 페스트균이 일으키는 급성전염병입니다. 14세기 중엽, 1348년에서 1350년 사이에(불과 2년 만에) 3천만 명이 넘는, 유럽 인구의 1/3이 죽었습니다. 독일 함부르크는 주민 2/3가 죽었고, 영국은 인구의 절반이 죽었습니다. 어떤 집은 가족이 모두 죽기도 했고, 살아남은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그로 인해 사회경제와 봉건체제까지 붕괴되는 사회적인 대 변동을 일으켰습니다. 페스트가 그만큼 무서웠던 겁니다. 그렇게 무서운 페스트는, 유럽에서만, 그것도 14세기 중엽에만 영향력을 발휘했지만, ‘하마르티아’(a`marti,a, hamatia) 전 인류에게, 전 인류 역사에 영향력을 끼쳐, 죽음에 이르게 했던 ‘바이러스’입니다. 

하마르티아는 ‘흑사병’보다도 더 무서운 전염병입니다. 전인류를 감염시킬 뿐만 아니라, 감염된 모두를 다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우리가 다 ‘하마르티아’에 감염된 자들이라는 겁니다. 이것이 우리의 실존입니다. 하마르티아에 감염된 우리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백신으로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롬 5, 8). 새 생명 주신 것입니다. 그런 우리들이, 살면서, 일하면서, 예수 믿으면서, 형제와 조금 부딪혔다고, 상처받았다고, 빚 좀 졌다고, 용서하니 못하니 하면서 용서하지 않는 것은, 종말 심판의 때, 절대로 용서받지 못할 괘씸죄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백신으로 살려주신 것, 영생 주신 것,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신 것, 바로 이 복음이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의 죄를 용서해 주어야만 하는, 용서의 이유라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이런 말씀하신 것 아니겠습니까?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하루에 일곱 번이라는 의미)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그 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시지요. 아니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490번 만 용서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끝없이 용서하라···. 

이 말씀을 하시면서 드신 비유가, [용서할 줄 모르는 악한 종의 비유]입니다. 어떤 임금에게 ‘일만 달란트’ 빚진 백성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결산할 때가 되어, 임금이 그에게 빚을 갚으라 합니다. 그러나 갚을 것이 없었습니다. 성의라고 보이라고 합니다. 네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서라도 갚으라 합니다. 그 때, 이 종이 엎드려 절하며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합니다. 임금이 그를 불쌍히 여겨,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해 줍니다. 

▶ 그 일만 달란트라는 빚이 도대체 어느 정도 되는 빚일까요? 당시, 한 달란트는 노동자 한 사람의 15년 치 임금에 해당되는 돈입니다. 60세 평생을 산다고 했을 때, 평생 벌어도 ‘네 달란트’ 밖에 갚지 못합니다. 일만 달란트 를 다 갚으려면, 150,000년이 걸립니다. 몇 평생을 산다해도 갚지 못할 돈입니다. 그 종이 임금님께 탕감 받은 빚은, 도무지 갚을 수 없는 천문학적인 빚이었다는 이야깁니다. 얼마나 기뻤을까요? 이 비유로 보자면, 임금님은 긍휼과 자비가 한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이 종 보십시오. 나오다가, 자기에게 100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만납니다. 빚을 갚으라고 멱살을 잡고 위협합니다. 형편 되면 최선을 다해서 갚겠다 사정했지만, 당장 갚지 않는다고 옥에 가두고 맙니다. 이정도면, 탕감 받은 이 종도 굉장한 세도를 가진 사람인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임금님으로부터 일만 달란트나 되는 자금을 동원할 수 있었겠습니까?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 하루의 품삯입니다. 100데나리온은, 노동자 석 달 치 품삯정도이지요. 10,000달란트와 100데나리온은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100데나리온 갚지 않는다고, 멱살 잡고 위협하고는 옥에 가두어버린 겁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과 우리사이의 ‘죄’는 10,000달란트 부채관계이고, 우리 상호간의 ‘죄’는 100데나리온의 부채관계라는 말씀입니다.

결국, 일만 달란트 탕감 받았던 그 종은 다시 임금에게 붙잡혀 가서, 그 빚을 다 갚도록 옥에 갇혔다 합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兄弟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 18, 35).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해야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용서의 사람이 되십시다. 우리교회도 ‘용서의 공동체’가 되십시다. 용서가 참 기도이고, 참 신앙이고, 참 그리스도인 됨이고, 참 교회 됨입니다(다음 주일, 계속).

우리를 용서해주신 하나님, 백신이 개발되지 않은 신종 플루 때문에 온 세계가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유럽인구의 1/3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흑사병 같은 전염병 ‘하마르티아’ 죄에 감염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백신으로 살려주심 감사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도, 兄弟의 죄를 용서해 주는 용서의 사람 되게 하옵소서, 우리교회가 자비와 긍휼히 강같이 흐르는 ‘용서의 공동체’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비옵나이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