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항상 감사 합시다 (고전 1:4~7)

  • 잡초 잡초
  • 263
  • 0

첨부 1


항상 감사 합시다 (고전 1:4~7)

  
헬라사람들 가운데 감사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비가 오는 날 비를 맞으면서 가다가 손을 들고 "오 신이여" 그러며 감사를 하더랍니다. 왜 감사하냐고 물어보니까 이 눈썹이 있어서 비가 이렇게 밑으로 흐른다는 것입니다. "또 감사합니다." 무엇이 감사하냐 하니 콧구멍이 밑으로 뚫린 것을 감사하다고 합니다. 이것이 위로 뚫렸으면 내가 어떻게 되었겠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도 감사할 일이 많은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 종류가 있겠지만 구원의 은혜에 감사해야 합니다

(엡 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프랑스 혁명을 일으키는데 큰 역할을 한 문인은 볼테르, 루소, 몽테스키외입니다. 그 중의 한 사람인 몽테스키외가 여행을 하다가 배를 타게 되었습니다. 뱃사공을 보니, 아직 뼈도 영글지 않았을 것 같은 어린 두 소년이었습니다. 

그런데 노를 젓는 모습이 아주 슬퍼 보였고, 두 소년이 아주 닮았습니다. 몽테스키외가 물었습니다. 
"너희들은 형제냐?" 
"예." 
"한창 공부할 나이에 왜 학교에 다니지 않고 사공 노릇을 하느냐?" 

형제의 이야기를 요약하면, 상인인 그들의 아버지가 아프리카 북쪽을 지나가다가 해적들에게 잡혀서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그런데 돈 4천 냥을 보내어 주면 아버지를 풀어주겠다는 편지를 주인으로부터 받았습니다. 형제에게는 엄두도 못 낼 큰돈이지만 형제는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낮에는 사공으로 밤에는 공장에서 일하며 돈을 모으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를 구할 수 있는 가능성이 보이지 않았지만 최선을 다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형이 몽테스키외와 이야기할 때는 동생이 눈물을 흘리고, 동생이 이야기할 때는 형이 막 울었습니다. 그 형제의 효성에 감동을 받은 몽테스키외는 집으로 가서 그 형제에게 4천 냥을 보내어 주었습니다. 형제는 그 돈을 아버지가 노예로 있는 집에 보내었습니다. 

그로부터 두 달 후에 아버지가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그 형제는 누가 그 돈을 보내어 주었는지를 몰랐습니다. 몽테스키외가 이름을 밝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몽테스키외가 세상을 떠나자 친구들이 그의 전집을 만들기 위해 그의 일기장을 보았습니다. 거기에 두 형제에게 4천 냥을 보내어 아버지를 구해 준 사건이 기록되어 있어서 그것이 알려졌습니다. 이미 돌아가신 분이지만 몽테스키외에게 아버지와 두 형제가 얼마나 감사를 했는지 모른다고 합니다.

우리는 자신을 희생하시어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영국 런던에 조지프라는 아이가 살고 있었습니다. 동네 아이들은 그를 놀려댔습니다. 사실 조지프는 잘생긴 아이였습니다. 그러나 그 어머니의 얼굴이 흉측하게 일그러져 그렇게 놀려댔던 것입니다. 

조지프는 동네 아이들에게 왕따 당하는 것이 싫어 집에 돌아와 어머니에게 울분을 터뜨렸습니다. “엄마! 왜 엄마는 얼굴이 그렇게 일그러진 거예요? 친구들이 너무 놀려대요.” 어머니는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가 결심한 듯 장롱 속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 보여주었습니다. 조지프는 “이게 누구예요?”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나의 젊은 시절 모습이란다”하고 대답했습니다. 그 사진 속에는 젊고 예쁜 어머니 모습이 있었습니다. 

깜짝 놀란 조지프는 “엄마! 아니 이렇게 예뻤던 엄마 얼굴이 왜 지금 이렇게 되신 거예요?”하고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조용히 대답했습니다. 

“네가 돌이 막 지났을 때 너를 집에 뉘어놓고 장 보러 마트에 갔단다. 장을 보고 집에 돌아오는데 집에 불이 났더구나. 불이 이미 많이 번졌지만 엄마는 너를 구하기 위해 불 속으로 뛰어들었단다. 엄마가 너를 두꺼운 옷으로 감싸고 그 불 속에서 빠져나왔기 때문에 네가 지금처럼 잘 생긴 엄마의 아들로 자라있잖니!”

조지프는 자기를 불 속에서 구하기 위해 지금처럼 얼굴이 일그러졌음을 깨닫고 어머니에게 감사의 눈물을 뜨겁게 흘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조지프는 그 후로 무한한 사랑과 희생의 증거인 엄마의 일그러진 상처를 동네사람들과 아이들에게 자랑하게 되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수 많은 상처를 당하시고 돌아가신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께 감사합시다.

1900년대 초반에 샌프란시스코에 중국인 쌍둥이 형제가 살고 있었습니다. 형은 동생을 참으로 사랑했었습니다. 어느 날, 평소에도 행실이 좋지 못했던 동생이 도박장에서 도박을 하다가 싸움이 붙어서 상대방을 칼로 찔러 죽이고 말았습니다. 동생은 옷이 피투성이가 된 채 집으로 도망쳤습니다. 집에 오자마자, 어리둥절해 하는 형 앞에서 동생은 옷을 갈아입고 피묻은 옷을 벽장 속에 감추었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이 피는 다 뭐야?" "형, 내가 사람을 죽였어! 설명할 시간이 없어......이런, 재수가 없었어!!!"

그리고 동생은 집을 뛰쳐 나갔습니다. 동생이 도망간 후 형은 갑자기 벽장에서 동생의 피묻은 옷을 꺼내 입기 시작했습니다. 곧 경찰이 뒤쫓아 왔고, 집에 들이닥쳤습니다. 형은 아무 말 없이 경찰에 끌려갔습니다. 그는 곧 살인죄로 기소되고 ...마침내 사형이 집행되었습니다. 그 후 동생은 너무나 괴로워서 경찰을 찾아갔습니다. "제가 범인입니다. 저희 형이 아니었어요. 그런데 형이 뒤집어쓴 거라구요. 이런, 괴로워서 견딜수가 없잖아! 저도 벌을 받겠습니다. 사형을 시켜 달라구요." 

"....이런 일은 처음이군요... 하지만 당신의 살인죄에 대한 댓가는 합법적으로 이미 치루어 졌습니다. 집행이 끝난 지금 그 일을 되돌릴 방법은 없습니다. 우리도 당신을 더 이상 어떻게 할 수는 없습니다. 이미 당신의 죄에 대한 댓가는 형이 치루었으니까요. 당신은 법적으로 무죄입니다." 

형은 동생을 정말로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대신 죽을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를 이렇게 사랑한 한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은 우리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 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씻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우리를 사랑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의 모든 죄 값을 이미 지불하셨습니다. 그 사실을 믿기만 한다면 우리 역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무죄입니다. 


구원하시고 모든 일에 풍족하게 하심을 감사 합시다
  
'풍족하다'는 말은  그리스도에 대한 일들을 알고 말하는 일에 있어서 하나님이 풍성히 복 주신 것을 말합니다.

미국으로 유학 간 딸이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답니다. "엄마, 여기에는 한국 식당도 없어요. 나 멸치가 너무 너무 먹고 싶어요. 멸치 좀 보내 주세요"라고 하더랍니다. 엄마는 "알았다"라고 하고 시장에서 좋은 멸치를 사서 멸치 대가리와 똥을 발라내고 딸에게 보내 주었답니다. 그런데 소포를 받은 딸이 전화를 했습니다. "엄마, 어쩌자고 멸치 대가리와 똥만 보냈어요?" 그 분은 깜빡하고 기껏 발라놓은 멸치 몸통은 쓰레기 통에 버리고 미국에 있는 딸에게는 대신에 멸치 대가리와 똥만 보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일에 풍족한 은혜를 주십니다.
무어나 얻을 수 있는 힘을 달라고 하나님께 구했으나 나는 약한 몸으로 태어나 겸손히 복종하는 것으로 배웠노라. 큰일을 하기 위하여 건강을 구하였으나 도리어 몸에 병을 얻어 좋은 일을 할 수 있게 되었고  부를 얻어 행복하기를 간구하였으나 나는 가난한 자가 됨으로서 오히려 지혜를 배웠노라. 한 번 세도를 부려 만인의 찬사를 받기를 원했으나 세력없는 자가 되어 신을 의지하게 되었고 생을 즐기기 위해 온갖 좋은 것을 다 바랬건만 신은 내게 생명을 주사 온 갖 좋은 것을 다 즐길 수 있게 하였도다. 결국 내가 바라고 원하는 것은 하나도 받지 못하였으나 은연 중 나는 희망하는 모든 것을 얻었나니 나는 부족하되 내가 간구하지 않는 기도까지 다 응답되었으며  이제 나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풍족한 축복을 입었노라 

   
구원해 주시고 풍족한 은혜주시며 증거 주심에 감사합니다.

퀴리 부인은 어려서부터 철이 들 때까지 어머니의 사랑을 의심하고 자랐다고 합니다. 그 이유인즉, 단 한번도 어머니의 키스를 받아본 적 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만날 때마다, 볼 때마다, 학교에 갈 때와 학교에서 돌아올 때, 다른 엄마들이 자기 아이들에게 숱하게 키스 인사하는 것을 보며 의심하곤 하였습니다. '어머니가 딸인 나를 사랑한다면 어째서 나에게 단 한번도 키스해주시지 않을까? 진짜 엄마가 아니신 게 분명해.' 고민도 했고 슬퍼도 했습니다. 결국 자기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결론짓고, 다른 친구들을 부러워하며 자랐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그 어머니가 딸에게 키스해주지 않은 것은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어머니가 일생 동안 결핵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키스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어머니가 결핵으로 죽은 다음에야 그녀는 깨닫게 된 것입니다. 

어떤 전쟁터에서 적군의 탄환에 맞아 안타깝게도 귀와 눈이 멀고만 병사가 있었습니다. 그 병사는 다시 싸울 수 없게 되어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을 기쁘게 맞아들였으나 병사는 자기 어머니인줄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어떻게 하면 자기가 어머니라는 것을 알릴까 하고 궁리하다가 아들을 데리고 20년 전 갓난아기였던 때 쓰던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는 조그만 아기침대와 요람을 만져보게 하고 자기의 젖을 만져보게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아들은 직감적으로 "어머니"하고 큰 소리로 불렀습니다. 어머니는 두 팔로 아들을 끌어안고 기쁨에 넘치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후 이 눈먼 병사는 어머니의 사랑 속에서 편안히 지낼 수 있었습니다. 

두 사람이 등산을 갔다가 산 속에서 큰비를 만나 길을 잃고 갇혀버렸습니다. 한 사람은 겁이 나서 어쩔 줄 몰라했지만 한 사람은 조용히 기도하며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습니다. "당신은 이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을 찾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소?" 한 사람이 물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바람이 없다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요.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눈을 감고 기도하면 느낄 수가 있죠." 아직도 못 미더워하는 사람에게 이 말을 덧붙였습니다. "당신은 불안에 떨고 있지만 난 지금도 마음이 평안해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있다는 증거지요." 이 말을 마치고 두 사람은 함께 손을 잡고 기도했습니다.

엠마라고 하는 소녀와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이좋게 지내면서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소년이 그의 어머니에게 말했습니다. "엄마, 나는 엠마가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을 알았어요!""왜? 어떻게 알았니?" 궁금해진 어머니가 소년에게 물었습니다. "왜냐하면은요, 엠마는 꼭 기독교인처럼 행동하거든요" "기독교인처럼 행동하다니? 그게 무슨 뜻인지?" "옛날에 엠마는 자기만 알고 사소한 일에도 화를 내곤 했었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이기적이지도 않고 또 자기의 물건을 가져가도 화를 내는 법이 없거든요." 

면죄부를 판매하는 것이 과연 성경적으로 옳은 일인가 아니면 잘못된 일인가를 솔직히 톤론해 보자고, 그 당시 일반화된 관행에 따라 비텐베르크(Wittenberg) 성교회의 문에다가 1517년 10월 31일, 95개조의 토론 제목을 써 붙인 것이 계기가 되어 본의 아니게 거대한 종교개혁의 주인공으로 변신한 이후, 숱한 우여곡절을 겪어 오던 루터(Martin Luther)의 이야기 입니다. 

당시 신성로마제국(독일)의 황제 칼5세(Karl V, 1500-1558)는 교황의 압력을 받아 루터의 주장을 철회시킬 목적으로 보름스(Worms)에서 열리는 국회에 1521년 4월 16일까지 출두하라는 명령서를 발부했습니다. 그를 아끼는 사람마다 도망을 가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루터는 이를 단호하게 거절하고 보름스 국회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이렇게 하여 목적지에 가까이 갔을 때 루터의 응원세력인 프리드리히(Friedrich) 선제후의 고문으로서 이미 그곳에 가 있던 스팔라틴(Georg Spalatine)은 현지의 험악한 사정을 체험하고 급히 밀사를 보내어 피신해야 한다고 알려주었습니다. 

이때 루터는 "설사 보름스에 지붕 위의 기와만큼이나 많은 악마가 우글댄다고 할지라도 나는 가겠다. 나는 단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겠다. 무섭지도 않다. 하나님은 인간을 대담하게 할 수 있다."라고 외치면서 당당하게 적과 맞서서 싸움으로 드디어 종교개혁의 대업을 완수할 수 있었습니다.

수년 전에 미국 포틀랜드 교회의 장로님의 한 친구가 포틀랜드의 유명한 재벌인데, 예수님을 믿지 않았답니다. 장로님이 아무리 전도해도 믿지 않았답니다. 그런데 몸이 자꾸 아파 병원에 가서 진단하니 골수염이라는 결과가 나왔답니다. 온몸의 뼈가 썩어 들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썩어 들어가고 있는 양팔과 양다리를 잘라 보았자 몸통만으로도 조금밖에 살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의사 친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

이 사람아, 별 병 아니니 마음 편하게 살게. 그저 먹고 싶은 것이나 먹으면서 돈도 좀 쓰면서 살게나." 
그리고는 진통제를 주면서 매일 한 알씩만 먹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진통이 심해져 진통제 열 알을 먹어도 진통이 멎지 않았습니다. 

다시 병원에 갔습니다. 친구인 의사가 사실대로 말을 해 주었더니, "이 사람아, 1년만 더 살게 해 주게. 그러면 내 재산을 다 자네에게 주겠네. 1년만 더 살게 해 주면 내 재산을 자네에게 다 주겠네."라며 애걸했습니다. 며칠 후, 그 친구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답니다. 
재산을 다 주고 1년을 더 산들 무엇하겠습니까? 다시 금방 끝나고 마는데 말입니다. 그러나 오늘 죽는 사람에게는 1년도 소중한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은 다른 의미가 있기도 합니다.

미국의 한 때 유명한 설교자였고 목회자였던 아이언 사이드 박사는 죽음을 놓고 이런 예를 들었습니다. 그가 하루는 마을길을 지나가다가 항상 열려 있는 어떤 상점의 문이 닫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창문에는 커튼이 내려져 있었습니다. '이상하다 이 집에 무슨 일이 있나?' 하고 자세히 봤더니 창문 밖에다 다음과 같이 써 놓았더랍니다. '내부 수리 중' 그 후 여러 날 동안 그 가게 문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내부 수 리중' 이라는 팻말만 붙어 있었습니다. 

드디어 어느 날인가 가게 문이 활짝 열려서 들어가 봤더니 가게 안 이 얼마나 멋지게 장식이 되었는지 모든 것이 새로웠습니다. 들어가는 손님들마다 아주 기분 좋게 물건을 사서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 을 보고 아이언 사이드 박사는 깨달 았다고 합니다. 

'아, 예수 믿는 사람 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내부 수리중 인 것과 같구나.' 우리가 죽습니까? 그러면 문 딱 닫아 놓고 '내부 수리 중'이라는 팻말을 걸어 놓은 것입니 다. 주님이 재림하실 때 우리 몸이 주님의 몸과 같이 영화롭게 변화 되 는 부활의 날까지 내부 수리 중 팻말 을 걸어 놓은 것입니다
이러한 증거 가운데 살게 하심을 감사 합시다

어느 대학 도서관에 고서를 기증한 노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기증한 책은 보관 상태도 나쁘고 글자도 초서가 많아 어떤 것은 알아 볼 수조차 없어서 사서는 자못 화가 났습니다. “책을 기증하려면 좀 좋은 것을 기증하지. 꼭 걸레쪽 같이 아무 쓸모없는 것을 도서 기증이랍시고 할게 뭐야?” 하면서 불평하였습니다. 

마침 이 말을 들은 도서관장은 그 사서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그 노인에게 가서 사과를 하든가 못하겠거든 사표를 쓰시오. 당신 하나 때문에 우리 대학의 인상이 나빠지고 도서관의 장서를 확보하는 데에 지장이 있을 것이니 그런 해를 끼치는 사람을 어찌 학교 직원으로 둘 수 있겠소?”

이 말을 들은 사서는 크게 잘못을 빌고 영감님을 찾아가서 사과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영감님은 대단히 감동을 받으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아, 당신이나 당신네 도서관 관장은 참으로 훌륭합니다. 사실 진짜 좋은 책은 집에 두었는데 그것마저 기증하겠소. 감사하는지, 불평하는지 나는 당신네 대학의 태도를 주시하고 있었소. 당신들의 태도는 참으로 나의 마음을 흐뭇하게 합니다. 며칠 후에 내가 학교로 직접 찾아가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구원의 은총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가지 은혜를 더하여 주십니다. 그리고 믿는 자는 그 은혜로 말미암아 세상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되고 또한 그리스도의 향기를 품게 되어 하나님과 그의 아들의 나라를 세상에 확장하는 데에 일익을 담당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깨닫고 항상 감사 한다고 고백하며 우리도 항상 감사하는 성도가 되기를 교훈합니다.

감사는 항상 우리를 더 좋은 곳으로 인도하는 지름길이기 때문입니다.
맥추감사 주일을 맞으며 항상 감사하라는 말씀을 되새기며 가사에 동참하고 더 좋은 것으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영광 돌리며 사명 감당합시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