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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상한 마음을 치유 (창 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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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한 마음을 치유 (창 4:1~9) 
 
 
아이를 키우는 분들은 누구나 아이들 때문에 마음 고생을 하게 됩니다. 갑자기 아이들이 말을 듣지 않는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아이들이 서너 살이 되면 어느날 “싫어!”하는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밥 먹자고 해도 “싫어!”, 이빨 닦자고 해도 “싫어!” 뭐든지 “싫어!”로 일관할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정말 아이들이 밉습니다. 이때를 심리학에서는 “미운 네 살”이라고 부릅니다.

다음으로 아이들이 유치원 입학할 즈음이 되면 어느날 아이들이 고집을 부리기 시작합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만 하려고 고집을 부립니다. 아무리 야단쳐도 막무가내입니다. 또 아무리 달래고 타일러도 막무가내입니다. 정말 아이들이 원수처럼 느껴집니다. 이때를 심리학에서는 또 “미운 일곱 살”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청소년기에 접어들면 사춘기를 지나면서 어느날 아이들은 전쟁을 치르자고 덤벼듭니다. 노골적으로 반항을 하고 심지어는 가출하겠다고 으름장을 놉니다. 이때를 심리학에서는 “질풍노도의 시기”라고 부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노골적으로 반항을 표시할 때가 있습니다. 기존의 권위에 반항하고, 기존의 질서에 반항하고, 또 때로는 이유 없이 반항할 때가 있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 숨어 있던 반항하는 마음이 어떤 기회에 분출되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반항하는 마음이 겉으로 분출되면 본인은 물론이고 주변 사람들이 더불어 지옥을 경험하게 됩니다. 가족들이나 동료들은 그 반항에 직접 피해를 입게 됩니다. 언어 폭력을 당하기도 하고, 재산상 피해를 입기도 하고, 심지어 육체적 폭행을 당하기도 합니다. 본인도 힘이 듭니다. 남들에게 보여주지 말았어야 할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수치심에 괴로워합니다. 그리고 남들에게 피해를 입혔기 때문에 미안한 마음에 괴로워합니다. 결국 공동체 전체가 크게 힘들어 집니다.

그래서 반항하는 마음은 하나의 병적인 현상입니다. 치유를 받아야 할 정서적 현상입니다.

반항하는 마음

본문 말씀은 인간의 깊은 속에 담겨있는 반항하는 마음의 전형적인 예를 보여줍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여 범죄한 후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에덴의 동쪽으로 쫓겨난 뒤 저들이 아들 둘을 낳았습니다. 가인과 아벨입니다. 가인은 농사를 지었고, 아벨은 양을 쳤습니다. 이 두 사람은 나름대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벨이 드리는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이 드리는 제사는 거절하셨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가인의 반응입니다. 우선 5절을 보면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라고 했습니다. 가인이 분노했다는 것입니다. 다음 8절을 보면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라고 했습니다. 동생 아벨을 시기하는 마음에 죽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9절에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했습니다. 가인이 하나님께 반항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반항하는 마음에 관한 매우 중요한 사실 몇 가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첫째, 반항하는 마음의 뿌리

본문 7절을 보면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고 했습니다. 가인이 마음 속 깊은 곳에 죄가 자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죄의 작용으로 반항하는 마음이 일어난 것입니다.

원래 인간에게는 반항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는 늘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리고 철저하게 그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결코 반항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해서 범죄하게 됐습니다. 저들에게 죄가 찾아왔습니다. 죄가 저들을 지배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들이 하나님을 피해 숨기 시작했고, 나아가 하나님께 반항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로써 저들에게 반항하는 마음이 그 심령 깊은 곳에 자리하게 되었습니다.

롬 3:23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아담의 후손이 모든 인간이 다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이 다 죄의 지배하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아담처럼 그 심령 깊은 곳에 반항하는 마음이 자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저와 여러분 저 깊은 속에도 반항하는 마음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 잠재되어있는 반항하는 마음이 언제 분출되어 폭발할지 모릅니다. 우리가 마음 깊은 곳에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폭탄과 같은 반항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폭발하지 않도록 잘 살펴야 하겠습니다.

둘째, 반항하는 마음의 분출

5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가인이 드린 제물, 가인이 드린 제사가 거절당했다는 것입니다. 가인이 이 거절의 아픔 때문에 반항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사실 거절의 아픔은 생각하는 것보다도 큽니다. 자기가 심혈을 기울였고 마음을 다 쏟았는데 거절을 당했을 때 우선 마음에 큰 상처를 받게 됩니다. 그 마음의 상처가 잠재되어있던 반항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킵니다. “네가 나를 아프게 하면 나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다. 나도 너를 아프게 할 것이고, 아니 몇 배로 아프게 할 것이다!”라고 반항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살다보면 거절 당할 때가 있습니다. 이 때 조심해야 합니다. 거절의 아픔이 반항하는 마음을 불러 일으키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거절의 아픔을 잘 처리해야 합니다. 자칫 이것이 뇌관이 되어 반항하는 마음을 폭발시킬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 반항의 결과

본문 9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하나님께 정면으로 반항하고 나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6절을 보면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인이 반항하며 하나님께 등을 돌렸다는 것입니다. 반항의 결과 일어나서는 안될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사실 반항은 자기 자신 속에 갖가지 암적인 요소를 쌓게 됩니다. 생겨서는 안 될 것들이 생기게 됩니다. 대표적인 몇 가지를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우선 적개심입니다. 불쑥 반항을 하다보면 상대방이 적이 되고 그 적에 대한 분노와 증오심이 쌓이게 됩니다. 이 적개심이 사랑하지 못하게 막는 암적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다음은 고집불통입니다. 반항을 하다보면 융통성이 없어지고 자기주장만 하게 됩니다. 지금 저 북한처럼 남의 얘기에 귀를 막고 자기주장만 하다가 결국 고립을 자초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고집불통이 소통을 가로막는 암적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불평과 원망입니다. 반항을 하다보면 그 심령은 불평과 원망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마치 농사짓지 않는 밭들이 잡초들에게 점령당하듯이 반항하는 마음 밭은 불평과 원망이 장악하게 됩니다. 이 불평과 원망은 기쁨과 감사를 자라지 못하게 하는 암적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반항하는 마음은 치유하지 않으면 증상이 심각해 집니다. 우리 마음속을 황폐화시킵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그 풍성한 삶을 송두리째 빼앗아 갑니다. 그래서 반항하는 마음은 잘 치유해야 합니다.

반항하는 마음의 치유

반항하는 마음이 치유될 수 있는 길은 단 하나입니다. 바로 용서입니다.

첫째, 하나님의 용서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본문 10절을 보면 “이르시된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을 용서할 마음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가 회개하면 용서하시려고 준비하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이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하고 하나님께 반항하며 하나님과 원수되었을 때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세상에 보내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셨습니다. 우리 인간을 용서하시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셨던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용서가 반항하는 마음의 치료약이 되는 것입니다.

[전능자의 그늘]이라는 책을 읽고 큰 감동을 받은 일이 있습니다. 1956년 짐 엘리엇을 비롯한 5명의 젊은이들이 신학교를 마치고 남미의 에콰도르 정글로 선교를 떠났습니다. 조그만 비행기를 타고 해변에 내린 이들이 잔인하기로 소문난 아우카족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준비를 시작한 지 닷새째 되던 날입니다. 선교 본분에서 연락이 없자 혹시 하는 생각에 사람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해변가에서 무참하게 살해된 다섯 명의 시신이 발견된 것입니다. 한 가지 이상한 점은 그들의 주머니에는 권총이 있었는데 총을 뽑지 않고 그대로 죽었다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신변보호 할 수 있었는데 총을 뽑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저들이 아우카 족에게 처참하게 순교를 당했던 것입니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1년 후 간호사 훈련을 받은 짐 엘리엇의 아내 엘리자베스 엘리엇은 아이들을 데리고 아우카 족을 찾아 갑니다. 다행히 아우카 족은 여자는 죽이지 않는 부족이었습니다. 자기 남편을 죽인 아우카 족을 위해 5년 간 헌신적으로 봉사했습니다. 안식년이 되어 돌아간다고 하자 추장이 파티를 열었습니다.

엘리자베스는 그 파티 석상에서 비로소 입을 열었습니다. 자기가 6년 전 그들이 죽인 그 선교사의 아내라는 사실을 말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사람으로 그들을 용서했고, 그 하나님의 용서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 여기에 와서 지난 5년간 봉사했다는 사실을 말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아우카족이 그제서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게 됩니다. 그 이후 약 10여년 후 선교사의 가슴에 창을 꽂았던 ‘키모’라는 사람이 아우카 족 최초의 목사가 됐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이 아우카 족 키모 목사에게 선교사의 두 아이가 세례를 받게 됩니다. 그것도 아버지가 순교당한 그 팜 비치 강가에서 말입니다.

훗날 아우카 족 추장이 빌리그래함 집회에서 간증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들은 그분들에게서 복음을 받았고 하나님을 믿게 됐습니다. 그분들의 희생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아직도 그렇게 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분들의 죽음으로 우리들은 빛을 보게 됐습니다. 우리도 오래 살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주님처럼 그분들처럼 살기 원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용서가 치료약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한 사람들은 달라집니다. 아우카 족은 엘리자베스 엘리엇 선교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용서를 깊이 체험하게 됐습니다. 하나님께 반항하던 마음, 선교사들에게 반항하여 박해하던 마음이 사라졌습니다. 예수를 영접하게 됐고 하나님의 용서를 전하는 사람들이 됐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외면하며 살던 사람들입니다. 때로는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반항하며 살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앞에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저 십자가 사랑으로 우리를 용서하셨습니다. 누구든지 그 마음을 열고 하나님 앞에 나아오면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용서를 깊이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달라집니다. 우리 안에 반항하는 마음이 소멸되기 시작합니다. 반항하는 마음이 변하여 순종하는 마음, 감사하는 마음, 찬양하는 마음이 됩니다.

둘째, 용서하며 사는 것입니다.

마 18:21-35을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한 비유가 기록되어있습니다. 종이 주인에게 무려 만 달란트의 빚을 졌습니다. 만달란트는 천문학적인 액수입니다. 한 달란트가 6000 데나리온 이고 한 데나리온은 하루 품삯입니다. 요즘 화폐가치로 환산해 보면 하루 품삯을 10만원으로 치면 약 6억 정도가 됩니다. 이렇게 볼 때 만 달란트는 약 6조가 되는 어마어마한 액수입니다. 주인이 종의 간절한 청을 받아들여서 탕감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6조를 아무런 조건 없이 탕감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종에게 다른 동료가 100데나리온의 빚을 졌습니다. 오늘의 화폐가치로 따져보면 1000만원 정도가 됩니다. 그런데 이 종은 자기 동료가 진 이 빚을 탕감해 주지 않고 빚을 갚지 않는다고 감옥에 가두었다는 것입니다. 6조의 빚을 탕감 받아 놓고도 자기는 1000만원의 빚을 악착같이 받고자 동료를 옥에 가둬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마무리 하시면서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도저히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용서를 받아놓고 다른 사람의 작은 허물 하나 용서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용서가 허사가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용서가 그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반항하는 마음이 다시 일어나게 됩니다. 누군가 나를 힘들게 하고, 누군가 나를 거절하게 되면 또 다시 반항하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이 때 그를 용서해야 합니다. 그래야 반항하는 마음을 치료할 수 있습니다.

셋째, 용서를 빌며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우리 때문에 상처받고 힘들어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가해자의 입장에서 피해자인 그 사람들에게 찾아가서 용서를 빌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쉽지 않습니다.

부부싸움을 하면 나라마다 양태가 다르답니다. 프랑스 남자들은 부부싸움하고 나면 애인을 찾아간답니다. 그리고 미국 남자들은 변호사를 찾아간답니다. 그러면 한국남자들은 어떻게 할까요? 친구를 찾아가서 한 잔 할까요? 어떻게 해야 될까요? 아내에게 가야합니다. 그리고 자기의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빌어야 합니다. 

마 5:25에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우리가 용서를 구해서 용서를 받지 못하면 하나님의 용서가 헛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히고 고통을 가하게 되면 우선 그 사람의 아픈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십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아픈 마음을 하나님께서 치유하십니다. 이 때 우리가 용서를 구하지 않는다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용서가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 안에 반항하는 마음이 다시 고개를 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속 깊은 곳에 반항하는 마음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 마음이 치유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용서 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놀라운 용서의 사랑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들을 용서해야 합니다. 나아가 우리가 잘못한 사람들에게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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