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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응답받는 기도 (요일 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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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받는 기도 (요일 5:14)
 
 
지난 4월에 하나님과 교통(communion)할 수 있도록 교회에 주신 ‘은혜의 방편인 기도’에 관하여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오늘은 응답받는 기도가 되기 위한 기도자의 기본적인 태도와 관련하여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려는 동안 성도는 많은 필요들에 직면합니다. 취업문제, 결혼문제, 자녀문제, 재정문제, 영혼의 양식문제 등등 ……. 끊임없는 문제들 속에서 성도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필요들에 대해 담대히 요청할 수 있는 놀라운 특권을 받았습니다. 요청하지 않을지라도 형편을 아시지만 하나님께서는 굳이 기도하기를 명령하셨습니다. 당신님께서는 자녀들과 교통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목적이 하나님과의 교통이기 때문에 기도의 내용에는 필요에 대한 간청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숙고가 있고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찬양과 회개도 포함됩니다.

기도를 ‘하나님과의 교통’이라는 시각에서 보면,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는 명령이 잘 이해됩니다. 또한 “기도하기를 쉬는 죄”(삼상 12:23)라는 표현에 대해서도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중생의 순간부터 성도에게 있어서 하나님과의 교통은 잠시도 중단 되어서는 안 될 성질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거룩하신 하나님’과 교통하기 때문에 성경은 어떻게 기도해야 하며 어떻게 기도하면 안 되는지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약 4:2)라는 말씀을 통해서 기도 없이는 어떤 것도 하나님으로부터 얻기를 바라지 말 것을 분명히 선언합니다.

기도하는 일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입니다. 한국 교회는 기도에 대한 강조를 통해 성도는 마땅히 기도해야 하며 기도 없이는 좋을 것을 얻을 줄 생각 말아야 한다는 풍토가 잘 조성되어 있습니다. 세계가 놀랄 정도로 기도에 대한 열정이 뜨겁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의 성숙성이 미약한 것은 기도를 하되 ‘바르게 기도하는 일’에 대한 강조가 상대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요일 5:14)는 말씀 중에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을 강조한 반면에 “그의 뜻대로” 구해야 함에 대한 강조가 약했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라면 그분의 말씀을 입맛대로 골라서 편식하지 않을 것입니다. 염려하거나 욕심내는 대신 ‘기도하는 것’이 성도의 마땅한 태도라는 의식과 함께 ‘그분의 뜻대로’ 기도하려는 태도에 대해서도 의식할 것입니다. 무조건 열심히 기도하면 된다고 생각지는 안겠지요.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구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간구를 들어주신다”(표준새번역)는 말씀에는, 그분의 뜻대로 기도하지 않으면 듣지 않으신다는 뜻이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뜻대로 하는 기도는 2005년 주기도문 강해를 통해 배운바 있고 다음 주일에 좀 더 보충할 것입니다. 지금은 그분의 뜻대로 하지 않는 기도 몇 가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성경은 구하여도 받지 못하는 기도가 있다고 말씀합니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약 4:3). 

기도하고도 받지 못하는 까닭은 쾌락에 써버리려는 목적으로 악하게 구했기 때문이라는 뜻입니다. 성도의 인생목적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하는 것입니다(고전 10:31). 그렇게 살 수 있다는 것이 성도에게도 가장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기도도 예외가 될 수 없지요.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자기 행복을 위하여’ 사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인생목적조차도 “그의 뜻대로” 변화되지 않은 모습이지요.

“그의 뜻대로” 인생목적이 변화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아무리 열심히 기도할지라도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자기 쾌락을 위해서 구하게 됩니다.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 이룰 수 없는 욕망을 하나님의 힘을 빌어서 이루려하게 되고, 그 일을 위한 수단으로 기도를 이용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그냥 기도해서 욕망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으면 철야 농성을 하고 금식을 하면서 기어이 자기 욕망을 이루려고 하지요. 이것이 쾌락에 써버리려고 악하게 구하는 모습입니다. 다른 종교에서의 기도와 내용의 차이가 없게 됩니다. 성도의 기도는 자기 욕망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때로는 밤새 기도하며 금식하는 모습이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성경은 열정적으로 많이 기도할지라도 듣지 않으시는 기도가 있다고 말합니다.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사 1:15). 

기도할 때 손을 펼치는 것은 하나님께 가까이 가고자 하는 열망의 표현이었습니다. 많이 기도한다는 말은 ‘큰 소리로 오랫동안’ 기도한다는 뜻입니다. 손에 피가 가득하다는 말은 회개하지 않은 악행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말입니다. 열정을 담아 큰 소리로 오랫동안 기도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듣지 않으시는 까닭은 자신의 삶에서 악행을 씻어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시편에는 같은 내용을 좀 더 강하게 표현했습니다.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시 66:18). 삶의 행동에서뿐 아니라 마음속에조차 악한 생각을 품고 있으면 주께서 그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고 했습니다. 열정적인 태도와 큰 소리로 오랫동안 기도하는 모습이 대단한 기도의 사람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중심을 살피시는 분입니다. 삶의 현장에서 그리고 그의 마음에 죄악을 품고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전혀 그의 기도를 들으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뜻대로” 기도하기 위해서는 먼저 진실한 회개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비빔밥을 먹다가 고추장이 넥타이에 묻었어도 어두운 실내에 있다면 잘 발견되지 않습니다. 묻은 고추장을 다 닦아 냈다고 생각해도 밝은 불빛이 비취면 얼룩이 남아 있음을 알게 됩니다. 햇볕이 내리쬐는 바깥으로 나와 보면 더욱 선명하게 얼룩이 노출됩니다. 삶의 현장의 악행과 마음의 죄악도 다른 죄인들과 묻혀서 살 때는 잘 발견되지 않습니다. 죄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할 때 확연하게 깨닫습니다. 베드로는 기적적으로 물고기를 잡아주신 예수님 안에 있는 신성에 접촉하는 순간 갑자기 자신이 큰 죄인임을 깨달았습니다(눅 5:8). 거룩하신 하나님께 가까이 갈수록 죄는 더욱 선명해져서 회개 없이는 도저히 기도할 수 없게 됩니다.

셋째로 성경은 하나님께서 역겨워하시는 기도도 있다고 말합니다. 

"사람이 귀를 돌이키고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잠 28:9).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자의 기도는 역겹고 혐오스러운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말씀이 귓전을 때리고 지나가도록 멍하게 듣고 앉아 있는 것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먼저 관심을 가지고 귀를 기울여서 그 말씀의 의미를 잘 분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음으로 그 말씀에 비추어서 부끄러움 없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도록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의미하지요.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의 기도를 하나님께서는 혐오하십니다.

말씀을 자기 좋을 대로 곡해해서 받아들이는 사람,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지 아니하고 처세술이나 인생 교훈정도로 듣는 사람도, 듣고 깨닫긴 하였으되 순종해야할 왕의 명령이 아닌 성경 지식으로만 들은 사람도 실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은 것이지요. 사무엘은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했습니다(삼상 15:22-23a).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을 우상숭배와 동일하게 취급합니다. 우상숭배하면서 기도하니 가증스러운 일이지요.

넷째로 성경은 아무것도 받을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할 기도가 있다고 말합니다.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약 1:7-8). 

같은 의미의 말씀이 긍정적도 표현되었습니다.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렘 29:12-13). 두 마음을 품은 것은 전심으로 찾는 것과 대조되는데 기도하면서 응답되지 않기를 바라는 요상한 마음입니다. “주여 제게 순결을 주소서. 그러나 아직은 아닙니다”(어거스틴)라는 기도와 같은 마음이지요. 하나님을 사랑하지만 세상에 대한 미련을 포기치 못하는 마음입니다.

‘두 마음’은 들어주시기를 원해서 기도하는 동시에 주께서 과연 들어주실 수 있겠는가 의심하는 마음이기도 합니다. 이런 마음은 도무지 응답받기를 기대하지 말아야 할 마음입니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마 21:22). 이 믿음은 바라는 대로 응답될 것을 믿는 ‘주관적인 신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성취된다는 진리에 근거한 ‘객관적인 확신’입니다. 기도하는 바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지 않으면 아무리 ‘믿쑵니다’하고 기도할지라도 사실은 마음 깊이 안 믿어집니다. 반면 “그의 뜻대로” 기도한다면 담대하게 구할 수 있고 그것은 어떤 모양으로든 반드시 응답됩니다.

기도란 하나님이 원치 않으시는 것을 제발 좀 하시도록 설득하는 수단이 아닙니다. ‘주십시오, 못 주겠다’ 실랑이를 벌이다가 ‘네 고집에 졌다. 이제 주마’하는 식으로 기도를 생각하고 있다면, 그런 기도에서 하나님을 경외함을 찾아볼 수도 없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어떤 발전이 있을 것을 기대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감히 기도로 하나님을 변화시키려고 하지 않아야 합니다. 기도하면서 변해야 할 것은 기도자입니다. 말씀에 대한 반응으로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찾고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복종시켜야 합니다. 그러할 때 하나님과 교통하게 되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증진이 일어납니다.

말씀에 비추어 우리의 기도를 늘 반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드릴 수 있길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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