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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말씀이 달음질하는 (살후 3: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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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이 달음질하는 (살후 3:1~18)
 
 
데살로니가후서 3장은 교회를 위협하는 요소 중에서 고난(1장)과 거짓 가르침(2장)에 이어서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무질서하게 살아가는 신자들에 관한 문제를 다룹니다.

마지막 권면 전에 발신자들은 먼저 “우리를 위하여 … 주의 말씀이 … 달음질하여 영광스럽게” 되도록 기도하라 했습니다(1). 믿음은 그리스도를 전하는 말씀을 들을 때에 생깁니다(롬 10:17). 주변의 누군가가 예수님을 믿게 되기 원한다면 먼저 그에게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분께서 어떤 일을 하셨는지를 전해주는 일이 꼭 필요합니다. 하지만 한 사람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그 사람의 노력이 아니라 “주의 말씀”입니다. 살아 있고 운동력 있는 주의 말씀이 인생의 목적도 바꿔놓고 정체성과 세계관도 바꾸어 놓습니다. 그래서 발신자들은 말씀 자체가 달음질하여 영광스럽게 되길 원했습니다.

바울 일행이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달음질했습니다. 성도들은 짧은 시간 내에 놀랍게 성숙해졌습니다. 고난 속에서도 풍성한 열매를 맺으며 인내하였고 거짓 가르침들 속에서도 전수된 참 가르침을 붙들었습니다. “너희 가운데서와 같이”는 이와 같은 말씀의 강력한 운동력이 계속 빠르게 확산되어 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발신자들은 주의 말씀이 달음질하려면 말씀 선포자의 노력과 수고만으로 어렵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기도의 뒷받침이 절실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에게 가장 먼저 이 일을 위해 기도하도록 명령합니다.

또한 “우리를 무리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건지옵소서 하라” 했는데, 그 이유는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 때문입니다(2). 주의 말씀은 모든 사람을 죄인이라 합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으면 영원한 지옥 고통을 받는다 합니다. 자기 행복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 합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 합니다. 주의 말씀이 믿음 없는 자에게는 복음이 아니라 몹시도 성가시고 짜증나며 귀에 거슬리는 소리입니다. 그래서 주의 말씀을 전할 때 무리하고 악한 자들에게 조롱과 멸시와 핍박을 당할 위험이 항상 있습니다. 이런 일에서 건짐 받도록 기도하라는 명령입니다.

부탁이나 권면이 아닌 ‘명령’이라는 사실이 수신자들의 심성에 매우 거슬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발신자들은 앞으로 5번을 더 명령할 것입니다(4, 6, 10, 12, 14). 어떤 이는 명령이기 때문에 더욱 순종적인 마음으로 받아들일 것이며 그 때에 말씀은 달음질할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이에게는 명령이므로 더욱 거부감을 일으키겠지요. 말씀이 선포될 때마다 이처럼 상반된 반응이 일어나는 이유는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몹시도 안타까운 일이지만 우리가 원하는 모두가 구원을 얻지는 않을 것입니다. 다만 누가 언제 어떤 반응을 일으킬 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모든 이들에게 말씀을 전하며 기도해야 하는 것이지요.

발신자들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명령 받은 것을 행할 줄 “주 안에서” 확신했습니다(4). 그냥 습관적으로 ‘믿쑵니다’한 것이 아닙니다. 이 확신은 주님의 미쁘심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택하셨고 말씀이 달음질하도록 역사하였습니다. 고난과 거짓 가르침 속에서도 견고하게 지켜주셨습니다. 택하신 자를 보호해 오신 신실하신 하나님을 생각할 때 아무리 악한 자가 신앙을 무너뜨리려 해도 철저히 보호될 것이며 명령한 것에 대해서 바르게 반응할 것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3). 이 확신 중에 주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이끄셔서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까지 이르게 하시기를 소망했습니다(5).

말씀이 달음질하여 영광스럽게 되려면 말씀에 대한 순종의 삶이 따라야 합니다. 말씀의 선포는 있으나 순종하는 삶이 없다면 말씀은 전혀 영광스럽게 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발신자들은 말씀 선포의 주제에 뒤이어 곧바로 순종의 문제를 다룹니다. 이는 데살로니가 교회의 특별한 문제와도 관련되어 있습니다. 말씀이 달음질하던 그 교회에 “규모 없이(무질서하게) 행하고” 전수받은 “유전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사람들이 생겨났기 때문입니다(6). 그들은 불신자가 아니라 믿는 “형제”였습니다. 바울은 그들로부터 “떠나라”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강하게 명령합니다. 출교시키라는 뜻이 아니라 친밀한 교제를 단절하라는 의미입니다.

바울 일행은 데살로니가 성도들과 함께 있을 때 무질서하게 행하지 않았습니다(7). 아무에게든지 양식을 거저 얻어먹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수고하고 고생하며 일했습니다(8). 말씀을 전하는 직분을 가진 그들에게는 생활비를 받을 권리가 있었지만, 모범을 보여서 본받게 하려는 목적 때문에 그리하였습니다(9). 그리고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도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고 명령했었습니다(10). 이러한 사실들로 추측해보면 데살로니가 교회는 스스로 일하기보다 다른 형제들의 덕을 보면서 살아가려는 얌체 같은 게으름뱅이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이런 현상에 대해서 어떤 주석가들은 그들이 육체노동을 경시하는 헬라 사상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라 주장 합니다. 그리고 대다수의 주석가들은 재림이 임박했다는 잘못된 생각 때문에 일하기를 포기한 것으로 해석합니다. 아마도 그들을 인터뷰할 기회가 있었다면 더 다양한 이유들을 들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잠언에 “게으른 자는 길에 사자가 있다 거리에 사자가 있다하느니라”(잠 26:13)는 말씀이 있습니다. ‘의무를 회피하려는 것이 아니라 현실이 그렇다’고 자기 행동을 정당화하려는 핑계지요. 게으른 자는 언제나 핑계와 변명이 많습니다만, 일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지요.

남의 땀으로 쉽게 살고 싶기 때문에 그들은 말씀대로 살지 않습니다. 아무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령해도 두렵고 떨림은 없고, 그냥 평소에 늘 듣는 소리로 듣고 치웁니다. 말씀을 분별하려는 노력도 그 뜻을 묵상함도 없습니다. 자기 합리화나 타인에게 선행을 강요하기 위해서 필요할 때만 말씀을 이용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에 이처럼 “규모 없이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만 만드는 자들”이 있었습니다(11). 묘하게도 일할 때는 등신 같던 자들이 일을 만드는 데는 귀신같습니다. ‘일만 만든다’는 말은 문자적으로는 ‘남의 일에 참견한다’는 뜻입니다. 오지랖이 오만 평이라 오만 가지 일을 다 참견하고 다니는 것이죠.

발신자들은 데살로니가전서에서 “규모 없는 자들을 권계”하라고 했었습니다(살전 5:14). 하지만 데살로니가 교회 지도자들의 권위로서는 도무지 해결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발신자들은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종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합니다(12). 그리고 오랫동안 그런 놈팡이들을 품고 견뎌온 성도들에게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치 말라”(13)고 위로합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교제의 단절을 명합니다.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치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저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14).

교회는 말씀에 충실함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잘 들어내어야 할 공동체입니다. 성도의 순종하는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달음질하고 이를 통해서 말씀이 영광스럽게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말씀에 순종함 없는 게으름뱅이를 그대로 용납한다면 한 형제를 뻔뻔한 진드기가 되도록 방치하는 셈이 됩니다. 교회가 하나님 백성답지 못한 사람을 계속 양성해 내는 이상한 공동체가 되지요. 그러므로 그런 자는 지목해서 왕따 시켜 부끄럽게 해야 합니다. 이는 그가 부담스럽고 싫어서가 아니라 이것이 낙심치 않고 계속 선을 행할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원수와 같이 생각지 말고 형제 같이 권하라”(15)는 설명이 따라 나옵니다.

재림에 대한 잘못된 소망은 이 땅의 삶에 대한 잘못된 태도를 가지게 합니다. 이 땅의 삶이란 하나도 의미가 없는 것처럼 오직 내세만이 의미 있는 것처럼 오해 합니다. 공부하는 일도 돈을 버는 일도 하찮게 여기면서 하루 속히 주님 오시기만 바라고 사는 것을 좋은 신앙으로 착각합니다. 신앙생활을 핑계로 가정 일과 직장 일을 소홀히 합니다. 그에게는 일하기 싫은 힘겨운 현실을 도피하기 위한 최적의 장소가 교회 공동체인 셈이지요. 상식적인 생각만으로도 충분히 잘못되었음을 알 수 있는 이 태도가 종종 훌륭한 신앙처럼 오해되는 것은 게으름을 합리화하는 자기기만에 빠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들을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신 것이 단지 죽은 이후에 천당에 가게 하시기 위함이 아닙니다. 이 땅의 삶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준비 기간이 아니지요. 성도는 거듭나는 순간에 이미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 하나님의 백성이니까요. 천국이 완성되기까지는 이 세상 나라와 공존하기 때문에 아픔과 눈물도 있지만 ‘지금 여기’의 삶은 가급적 빨리 끝나면 좋을 지루한 여행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도는 각자 부름 받은 위치에서 구별된 삶을 통해 이 땅에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독특한 은혜의 나라가 있음과 그분의 거룩한 백성이 있음을 드러내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지켜 순종해야할 말씀들을 주셨습니다.

‘은혜로 산다’면서 말씀 순종하기에 게으른 것은 참 이상한 논리입니다. 스스로를 속이는 핑계지요. 현대의 성도들은 자칫 부지런한 게으름뱅이가 되기 쉽습니다. 현대의 삶이 하나님 앞에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은 하지 않고 엉뚱한 일에만 바쁘도록 만드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아침부터 저녁까지 정신없이 바쁘게 살지라도 하나님께서 말씀의 달음질을 통해 성도의 삶에 나타내기 원하시는 영광에 무관심하다면 그는 규모 없는 자입니다. 무질서한 삶을 사는 게으름뱅이이지요. 그렇다면 본문에서 계속 반복되는 ‘명령’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주의 말씀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영광스런 힘이 있습니다. 하지만 나의 게으름조차 변화시키지 못하는 형편없는 말씀이라는 평가를 받게 할 수도 있습니다. 한 말씀을 귀히 여기고 순종하므로 계속해서 말씀이 달음질하는 삶이되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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