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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나라와 용서 (사 55:6~7, 마 18: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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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나라와 용서 (사 55:6~7, 마 18:21~23)


이리스 머독의 심오한 소설 ‘친절한 자들과 착한 자들’(The Nice and the Good)이 있습니다. 소설의 내용에 보면 한 남자가 위기 상황에 몰립니다. 그 남자는 물이 허리까지 찬 동굴에 갇혀 있고 시간은 경각에 달합니다. 곧 만조가 되면 출구까지 물이 차서 출구도 없어질 것입니다. 정신이 유난히 맑게 된 그 순간 그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만일에 내가 여기서 나갈 수 있다면 이제 아무도 판단하지 않으리라. 자꾸만 얻고 또 얻으려 하지 않으리라. 모든 권력은 죄이고 모든 법은 덧없는 것이다. 사랑만이 정의다. 법이 아니라 용서와 화해다.” 위기와 죽음 앞에서 인간은 본능적으로 용서를 생각한답니다. 그래서 죽기 전에는 그 동안 마음에 맺혀 있던 사람들과 화해하고 용서하려고 하는 법이랍니다. 
  
오늘 성경에는 제자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나옵니다. 베드로는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라고 합니다. 랍비들의 전승에는 이웃의 범죄는 3회까지만 용서하고 그 이상은 금하라고 가르칩니다. 베드로는 아마 세 번까지 용서하라고 한 랍비의 가르침에 대하여 자신의 관대함을 자랑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숫자상의 기준을 초월한 끝없는 용서, 무제한적인 사랑을 가르친 말씀입니다. 용서하는 것과 참는 것은 숫자가 아니라 숫자를 초월해야 합니다. 흔히 “내가 몇 번 참았다”, “몇 번이나 용서했다”라고 하는데 이런 숫자는 참는 것도 용서한 것도 아닙니다. 참고 용서하려면 숫자를 헤아리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의 비유에는 일만 달란트 빚진 자가 있습니다. 1 달란트는 6,000 데나리온입니다. 당시에 유대에서 로마에 낸 세금이 연간 800달란트입니다. 그렇게 볼 때 일만 달란트가 얼마나 큰 돈인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일만 달란트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빚입니다. 반면에 한 데나리온은 하루의 품삯이므로 1백 데나리온은 쉽게 갚을 수 있는 돈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죄란 탕감을 받고 탕감하지 않은 죄를 말합니다. 
  
죄는 그 자체가 빚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에 대한 빚입니다. 마태는 빚이라고 합니다. 똑같은 내용의 말씀을 누가는 죄라고 합니다. 죄는 하나님께 대한 도덕적 빚입니다. 그렇게 보면 우리가 일생을 살면서 엄청난 빚을 하나님께 지고 사는 것입니다. 
  
제레미 테일러는 “기억하라, 너는 생전에는 전무, 생후에는 연약한 그릇, 일생을 통하여 죄인, 가장 득의한 때도 하나님과 양친과 땅과 모든 피조물에게 빚진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용서받은 자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용서해야 가는 나라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용서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가기 전에 이미 다 용서 받고 가니까 용서가 필요 없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용서를 다시 한 번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나라 백성으로 온전한 용서의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첫째,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결산합니다. 
  
23절에는 “그러므로 천국은 마치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라고 하였습니다. ‘결산하다’는 말은 헬라어로 ‘쉬나라이 로곤’입니다. 이 말은 ‘계산을 매듭짓다’, ‘거래를 청산하다’라는 의미입니다. 결산하는 것은 종말론적 심판의 자리를 상징합니다. 심판 때에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일생동안 자신들이 맡았던 일을 결산해야 합니다. 
  
요즘 학생들 시험기간이지요? 학생들이 한 학기동안 공부한 것을 결산하는 기간입니다. 열심히 공부한 학생과 하지 않은 학생은 결산에 차이가 납니다. 성적에 차이가 날 수 밖에 없습니다. 시험이 즐거운 학생이 있습니다. 첫째는 공부 잘하는 학생입니다. 자신의 실력을 평가받고 결산하는 때가 즐거운 것입니다. 두 번째는 아예 공부를 포기한 학생입니다. 그 학생은 단지 학교를 일찍 마치니까 좋아합니다. 그러나 두 종류의 학생들의 결산의 결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사람들 가운데는 아예 영적 삶을 포기하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결산 때에 결과는 비관적입니다.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결산이란 단어는 달란트 비유인 마태복음 25:19에 나타납니다.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결산할 새”라고 합니다. 달란트 비유에서 주인은 종들에게 각각 5 달란트, 2 달란트 그리고 1 달란트를 줍니다. 왜 다 같은 종인데 달란트가 달랐습니까? 그것은 아무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내게 얼마를 주든지 그것은 내가 상관할 일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토기장이의 비유도 그렇습니다. “왜 나를 이렇게 빚었습니까?”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 것은 토기장이의 마음입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달란트가 많다고 좋은 것이 아닙니다. 만일 많이 받고 감당하지 못한다면 덜 받는 것 보다 좋지 못합니다. 오히려 많이 받고도 충성되지 못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사실은 달란트가 많은 자는 늘 피곤하고 바쁩니다. 때로는 달란트가 적은 것이 감사할 때가 있습니다. 
  
달란트는 받은데 관심을 가질 것이 아니라 남기는데 관심을 가질 것입니다. 달란트를 남기는 데 관심을 가지는 것이 바른 종의 자세입니다. 주인이 결산할 때 보세요. 5 달란트를 받아 5 달란트를 남긴 종에게는 칭찬합니다. 2 달란트를 받아 2 달란트를 남긴 종에게도 칭찬합니다. 두 종에게는 똑같이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1 달란트를 받고 남기지 못한 종은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저주합니다. 왜요? 적게 남긴 것 때문이 아니라 안 남긴 것 때문입니다. 1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많이 남길 필요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아예 남기지 못했습니다. 이 사람은 전혀 남길 마음이 없어 결산에 실패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이 결산에 실패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인은 인색하고, 심지 않은데서 거두기 때문에 숨겨 두었다는데 맞습니까? 알고 보면 이 사람의 심리는 그게 아닙니다. 다른 종들에게는 많이 주는데 왜 나는 적게 주느냐는 불평입니다. 감당하지는 못하면서 적게 받은 것에 불만을 품은 것입니다. 이 사람은 상대적 빈곤을 가지고 있습니다. 불평이 생기고, 불만족 때문입니다. 
  
토마스 왓슨은 ‘묵상’에서 “불만을 품은 사람은 자기가 하나님을 위해 하는 모든 일은 너무 많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이 자기를 위해 하시는 모든 일은 너무 적다고 생각한다”고 하였습니다. 불만을 품은 사람의 공통적 심리를 잘 표현했습니다. 
  
1 달란트를 절대로 작게 생각하지 마세요. 엄청나게 큰 것입니다. 내가 작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그 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자꾸 작아지는가?” 이런 말하지 마세요. 절대 아닙니다. 자신에 대하여 당당해야 합니다. 내가 가진 것이 하나님과의 일대 일의 관계에서 볼 때에 엄청나게 큰 것을 믿으세요. 우리 모두는 감당할 수 없는 은혜를 입고 있습니다. 너무나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목자이시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아기들을 보면 먹지도 못할 것을 가지고 욕심을 냅니다. 우선 큰 것을 잡습니다. 우선 많은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큰 것을 가지지만 다 먹지 못하고 다 쓰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이것이 유아기적인 생각입니다. 
  
주인이 결산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결산한 돈을 주인이 몽땅 가졌습니까? 성경을 자세히 보면 그게 아닙니다. 주인은 충성된 일꾼에게는 더하여 주십니다. 불충한 일꾼에게서는 빼앗습니다. 자세히 보면 주인이 빼앗는 것은 주인의 본래 목적이 아닙니다. 주인의 본래 목적은 주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는 “임금과 같으니”라고 합니다. ‘임금’은 통치권 하에 있는 자들에게 절대 권력을 행사하는 자입니다. 얼마든지 마음에 따라서 주기도 하고 빼앗기도 합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은 조선말에 궁중에 있던 분입니다. 그 분이 임금의 사랑을 받아서 임금이 서울 외곽에 많은 땅을 그저 주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측량한 것도 아니겠지만 손으로 가리키며 이 만큼을 가지라고 했답니다. 그 후에 그 분이 그 땅 때문에 부자가 되었습니다. 임금은 그냥 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임금이 그렇습니다. 더 주려고 하시는 분입니다. 복을 주려고 하시는 분입니다. 주고도 또 덤으로 주려고 결산하시는 임금이십니다. 
  
포도원 품꾼의 비유를 보세요. 포도원의 주인은 저녁 시간이 되어 품삯을 결산합니다. 주인은 일꾼들이 일한 시간에 비례하여 삯을 주는 것이 아니라 포도원의 품꾼이 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품삯을 줍니다. 포도원의 품꾼이 되었다는 자체가 일을 했다는 것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공평하심입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어떤 사람을 더 예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누가복음 12:44에는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기리라”라고 합니다. 그리고 48절에는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라고 합니다. 주인은 받은 자들에게서 결산합니다. 많이 받은 자에게 많이 요구합니다. 많이 받고 먼저 믿은 자에게는 이에 합당한 책임이 따릅니다. 
  
미국에 있을 때 보면 일손이 모자라고 품삯이 비싸므로 체리가 한참 날 때에 체리 농장에서는 체리를 누구든지 들어와서 실컷 따 먹게 합니다. 그리고 나갈 때에 사가는 만큼 일 파운드 당 얼마를 계산하고 사가게 합니다. 먹는 것은 자유지만 가지고 나가는 것은 결산해야 합니다. 그래서 많이 먹고 적게 사가지고 가는 것이 유리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들어갈 때 결산할 것입니다. 많이 가지고 적게 가진 것에 따라 유리하고 불리한 것도 없습니다. 단지 받은 것에 따라 충성스럽게 일한 자가 들어가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10에는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 합니다. 언젠가는 우리가 행한 대로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결산하실 것입니다. 결산 때를 위하여 지혜롭게 삽시다. 하나님의 뜻대로 선하게 일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용서해야 용서받습니다. 

 35절에는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의 용서는 선택 사항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에게 용서는 필수 사항입니다. 왜 그런지 압니까? 내가 용서받기 위하여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받을 필요가 없는 사람이라면 용서하지 않아도 되지만 우리 모두는 용서가 필요한 사람입니다. 
  
“불쌍히 여김과 같이”. “불쌍히 여김이” 라는 말이 나옵니다. 우리 모두는 용서 받았으며 용서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말입니다. 용서와 용서 받음은 어느 것이 먼저라기보다 함께 해야 합니다. 나아가서 이 말은 하나님 나라의 ‘관대하신 보상’(benigna talio)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마태복음 5:7에는 “긍휼히 여기는 자가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하는데 이 말과 같은 맥락을 가지고 있습니다. 
  
유대교에서는 상대방이 회개하지 않고 용서를 구하지도 않을 경우에는 반드시 용서할 의무는 없다고 합니다. 이 말은 상당히 율법적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무조건 용서 받았으니 용서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십니다. 여러분, 잘 생각해 보세요. 내가 용서받을 만합니까? 그 누구도 용서받을 자격이 있다고, 용서받을 권리가 있다고 할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용서 받은 것은 하나님의 자비로,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임을 믿습니다. 
  
간디는 “약한 자는 용서하지 못한다. 용서는 강한 자에게 부여된 특성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모두 강한 자가 되세요. 그리하여 용서하는 자가 되세요. 예수님이 가르치신 주기도문에는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라는 대복이 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이 기도를 떳떳하게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는 것은 나의 죄를 용서받는 조건이 아니라 결과입니다. 
  
예수님의 용서를 십자가 위에서 이루셨습니다.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십자가 상의 용서는-현재형의 기도입니다. 예수님의 용서가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나를 위한 기도입니다. 지금도 우리 주님은 우리의 죄를 계속 용서하십니다. 용서는 최고의 사랑입니다. 용서만이 사랑을 완성할 수 있습니다. 
  
스데반의 용서도 죽기 직전에 나타났습니다. 그는 억울하게 돌에 맞아 죽을 때에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자신에게 알지 못하고 돌을 던져 죽게 하였던 그 사람들을 용서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스데반의 이 기도로 돌을 던진 자들이 회개하였을 것입니다. 이 기도로 그들을 구원받게 하였을 것입니다. 
  
하이네의 유언에는 “신은 나를 용서하실 것이다. 그것이 신의 일이니까”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용서하십니다. 그런데 용서의 조건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용서하는 자를 용서하십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는 먼저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못하겠으면 나도 다른 사람에게 잘못을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도 다른 사람에게 잘못을 범하지 않고 살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의 잘못을 용서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용서에 빚진 자입니다. 예수님의 그 용서에 빚지고 살아갑니다. 유대인의 유전에는 “하나님의 사하심을 받기 전에 사람끼리 용서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용서는 용서를 낳습니다. 
  
이사야 55:7에는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너그럽게 용서하신다고 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관용하시는 모습과 더불어 하나님은 용서하신 후에는 기억도 안 하신다는 뜻입니다. 
  
에스키모인들에게 처음 복음을 전한 모라비안 선교사가 원주민들의 언어로 용서를 어떻게 표현할까 고심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선교사가 그들의 삶에서 용서를 표현하는 말을 모아서 만들었습니다. 그 말은 ‘더 이상 생각조차 하지 않는 행위’라는 뜻입니다. 용서란 완전히 잊는 것입니다. 용서는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온 몸으로 하는 것입니다.  
 
 ‘깨달음’이란 사막의 교부들의 글을 모아 놓은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는 옛날 사막의 교부인 아가도의 말이 있습니다. “나는 어떤 사람에 대하여 불만을 품은 채 잠을 잔 청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으며 내게 불만을 품은 사람을 그냥 자도록 내버려둔 적 또한 한 번도 없다”. 마음으로 완전하게 용서한 자신의 모습을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어느 선생님이 “숫자 8을 반으로 나누면 얼마가 되지?”라고 물었습니다. 학생은 “가로로 말인가요? 세로로 말인가요?”라고 했습니다. 선생님은 다시 “그게 무슨 말이니?”라고 하자 학생은 “세로로 나누면 3이 되고 가로로 나누면 0이 되지요”라고 했답니다. 용서하려면 가로로 나누세요. 완전히 0으로 만드세요. 잊고 다시 기억도 마세요. 조금도 남기지 마세요. 이것이 온전한 용서입니다. 크리스천을 진실로 크리스천 되게 만드는 것은 완전함이 아닙니다. 용서입니다. 

결론 

미로슬라브 볼프라는 예일대학교 교수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기로 한 후 인간이 하나님에 대하여 그리고 서로에 대해서 저지를 수 있는 모든 죄악들을 예견하셨다. 하나님께서 창조 계획을 수행해 나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세상을 창조하기 전에 세상을 용서하기로 하는 것뿐이었다. 이상하게 여겨질지 모르겠지만 용서의 약속은 창조 전에 이미 주어진 것이다.” 볼프 교수는 창조보다 용서의 선행을 강조하였습니다. 

용서는 알고 보면 하나님의 창조입니다. 하나님은 용서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창조하신 용서에 익숙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가 용서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야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저 값없이 용서받았으니 우리에 대한 잘못을 용서합시다. 우리에 대한 잘못을 잊읍시다. 그들의 잘못을 0으로 만듭시다. 그리하여 용서가 인색한 이 세상에서 용서할 줄 아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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