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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눅 10:3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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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눅 10:38~42)

 
스포츠 스타나 음악가나 유명인사 중에는 자기의 주 분야 외에 별도의 특기를 갖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윈스턴 처칠은 영국의 위대한 정치가였던 것뿐만이 아니고 미술가였고 또 문학가였습니다. 처칠은 노벨상을 수상했는데 평화상이 아니고 문학상이었습니다. 정말로 다재다능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의 경우에는 자기의 전문분야 외에 다른 분야의 특기를 뽐내려고 하면 남들이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어색해 하고 잘 받아주지 않습니다. 테너 카루소에게는 그림 그리는 재주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종종 제자들에게, 친구들에게 그림을 그려서 선물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후대 사람들에게는 카루소가 그런 면으로 기억되고 있지 않습니다. 성악가로만 기억되고 있을 뿐입니다. 
또 농구 스타 마이클 조단은 한때 농구를 그만두고 야구를 한 적이 있습니다. 아마 본인은 나는 농구도 잘하지만 야구도 잘한다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마는 대중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농구를 하지 않는 마이클 조단은 마이클 조단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는 다시 농구로 돌아온 적이 있습니다. 

저도 남과 비교할 바는 아니지만 이런 저런 재주가 있어요. 그림도 좀 그리고, 기타도 치고, 그래서 저희교회 6주년 기념음악회에서 일렉 기타 솔로를 연주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반응이 영 시원치 않았어요. 못한다는 반응이 아니고 의외다, 이상하다 이런 반응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눈치 챘습니다. 사람들은 나를 목사로 보고 목회자로서 기대를 걸지 그 이외의 것을 바라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한 가지만을 해주기를 바라지, 그 이외는 잉여일 뿐입니다. 큰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오히려 헷갈려 합니다. 
슈바이처 박사를 모르는 분이 없을 것입니다. 

슈바이처 박사는 우리는 어떤 인물로 기억합니까. 아프리카에 가서 일평생 의사로 인생을 바친 휴머니스트, 박애주의자로 기억합니다. 그러나 슈바이처 박사는 원래 의사였던 것뿐만이 아니라 신학자이고 오르간 연주자였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는 아프리카에 가기 전에 신약성경 연구에 있어서 권위자였고 그리고 세계적 수준의 오르간 연주자였습니다. 그러나 후대 사람들은 슈바이처를 그런 식으로 기억하고 있지 않아요. 후대 사람들에게는 그런 것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사람들 머릿속의 슈바이처는 아프리카에서 여생을 바친 박애주의자로 각인돼 있을 뿐입니다. 

이와 같은 사실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 사람들이 나에게 기대하는 것이 의외로 많지 않다는 사실이에요. 한 가지, 몇 가지만을 제대로 해주기를 바랄뿐이지 여러 가지를 다 잘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바라는 것은 돈을 많이 벌어오는 것, 가정에 충실한 것, 몇 가지만을 바라지, 남편이 공부도 잘하고 생기기도 잘생기고 노래도 잘 부르고 요리도 잘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아마 남편들이 아내에게 바라는 것도 이것저것 다 잘하기를 바라는 것보다도 마음에 쉼터가 되어줄 수 있는 아내가 되어줄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할 것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여러 가지를 다 잘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또 우리 자녀들도 여러 가지를 다 잘해주기를 바라는지 알 수 없습니다. 요즘은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들이 학원을 몇 곳을 다니느냐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다닙니다. 발레 ․ 피아노 ․ 바이올린 ․ 미술 ․ 서예 ․ 태권도 ․ 영어 ․ 수학 ․ 한문, 별의 별 학원을 다녀요. 물론 장차 이 아이들이 자기가 잘 하는 것을 찾아주기 위해서 그렇게 할 필요는 있겠지만 그게 아니고 모든 것을 다 잘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그건 욕심이고 불필요한 것이고 인생의 성공은 그렇게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한 우물을 파라는 격언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어느 우물을 파야 되는지를 발견할 때까지는 여기저기를 가봐야 되겠지만 일단 정하면 그 한 가지만 파도 본인도 넉넉하고 남들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취미생활도 필요하고 레저도 필요합니다마는 그러나 우리의 일생을 한 가지에 바치는 것, 그것이 복된 것이고 그것으로 족한 것입니다. 80:20 법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파레토의 법칙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그 법칙의 여러 버전이 있습니다. 그중의 한 버전은 사람이 자기 시간과 에너지의 80를 자기가 잘하는 일에 쏟아 부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20의 에너지와 정성을 잘 못하는 일에 쏟아 부어야 된다. 그래야 본인도 만족하고 남들도 좋아하고 좋은 결과를 거둘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을 보면 반대로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잘하는 것은 이미 잘하기 때문에 그것을 소홀히 하고 못하는 일에 80의 에너지와 시간을 쏟아 붓는데 그렇게 하면 결과도 별로 좋지 않고 본인도 괴롭고 남들도 괴롭다는 것입니다. 만약 제가 성악가로서 80의 에너지를 쏟아 붓는다고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이 얼마나 괴로우시겠습니까. 그렇지요. 

성경이 말하는 소위 은사와 달란트의 개념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사 속에 우리의 사명이 있습니다.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사명을 발견하는 길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사를 알면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참 지혜로우신 것입니다. 우리가 잘 할 수 있는 일을 우리의 사명으로 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우리가 할 때 그것이 즐겁고 기쁘고 내가 만족스럽고 결과가 흡족하고 남들에게도 복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왜 우리는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사명을 감당하려면 힘들고 어렵고 부득이 억지로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어요.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에요. 만일 하나님이 내게 선교사의 사명을 주셨다면 하나님은 나를 어렸을 때부터 외국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하고 외국의 문물에 대해서 호기심을 가지고 외국어에 관심이 있고 집을 떠나 다른 데에 가서 살아도 재미있고 적응할 수 있는 속성을 주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달란트 속에 내게 주신 사명이 담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혜로우십니다. 

우리에게 맡기신 일을 우리가 하는 것이 우리에게 복이 되고 기쁨이 되고 그리고 하나님에게 영광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 받은 바울은 로마시민권을 가진 사람이고 그 당시에 글로벌한 코스모폴리탄한 그런 세계관을 가진 사람이고 언어에 능통한 사람이요 다른 문명의 사람들과 잘 어울릴 수 있는 사람이요 이런 사람을 하나님께서 선택해서 이방인의 사도가 되는 사명을 주셨기 때문에 바울에게는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는 길이 자기와 잘 어울리고 잘 할 수 있고 그 일을 위해서 그가 훈련받고 지금까지 모든 경험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최근 조수미 씨의 인터뷰 기사를 보니까 뭐라고 말했느냐면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사명은 음악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죽을 때까지 노래를 할 것입니다.’라고 했는데 그것이 옳은 깨달음입니다. 아마 본인은 다른 소원도 있을 것입니다. 남들처럼 평범하게 결혼하고 자식을 갖고자 하는 소원도 있을 것이지만 그럼에도 자기가 노래할 수 있는 재능이 있는 것은 이게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사명이라고 깨닫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 한 일을 위하여 다른 것을 희생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는 이 이야기를 들으시고 ‘아, 그건 조수미 정도 돼야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이렇게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이 다섯 달란트를 받았든 두 달란트를 받았든 그 양의 차이가 있는 것뿐이지 적용되는 원리는 마찬가지입니다. 한 가지 일에 충성하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우리에게 바라는 것도 그렇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시는 것 같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몰라서 그런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채권자와 채무자의 관계로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빚쟁이로 봅니다. 늘 뭔가를 달라, 뭐 해라,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빚쟁이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Father-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 Bother-귀찮게 하는 분으로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Bother하는 분, 귀찮게 하는 분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건 하나님을 오해하는 것이고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왜곡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의도를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를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진흙에서 빚어진 존재라는 사실을 아시고 우리의 허점을 아시고 약함을 아시고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아시고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는 사실을 아십니다. 하나님이 그 사실을 모르시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은 우리를 만드셨고 우리의 연약함을 알고 계십니다. 시편 103편 14절에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시는도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염두에 두시고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기대하십니다. 

그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내 멍에를 지고 내게 배우라 내 짐은 가볍고 내 멍에는 쉬우니라’고 말씀하셨어요. 내 짐이 무겁다고 하지 않았어요. 내 멍에가 어렵다고 하지 않았어요. ‘내 멍에는 쉬우니라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런데 만일 주님이 지워주신 멍에가 어렵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주님이 아닌 남이 지워준 멍에를 지고 있든가 주님을 불신하고 있든가 아니면 개인의 욕심에 붙들려있기 때문이지 주님이 지워주신 멍에 때문에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제가 교회를 개척하면서 스트레스가 축적돼서 건강상의 문제를 갖게 된 일이 있습니다. 구체적인 것은 말씀드릴 수 없지만 교회를 개척하고 한 3, 4년쯤 돼서 건강상의 문제를 갖게 됐습니다. 그래서 한번은 하나님께 기도하다가 이런 불평을 했습니다. ‘제가 하나님을 섬기다가 이런 질병까지 앓게 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이 미안하다고 말씀하실 줄 생각했는데 세미한 음성으로 하나님이 대답하시기를 ‘그건 내가 너에게 준 게 아니다. 그건 네 욕심 때문에 생긴 것이다. 내가 언제 너보고 큰 교회를 만들라고 했냐. 내가 언제 너보고 숫자를 키우라고 했냐. 네가 스스로 그것을 원하고 네가 스스로 스트레스를 받고 네가 스스로 병을 앓게 된 게 아니냐.’ 저는 그 음성을 듣고 주님 말씀이 옳다는 것을 알았어요. 결국 제가 받았던 스트레스의 대부분은 주님이 주신 게 아니고 제가 스스로 가진 것입니다. 제 스스로의 욕심 때문에 스트레스가 생긴 것이지 주님이 그것을 저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번민의 대부분은 주님이 주신 것이 아니고 우리 스스로의 욕심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그걸 알아야 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마르다가 바로 그런 인물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자매인데 아마 마르다가 언니인 것 같습니다. 마르다가 나이도 많고 리더십도 있고 또 주도적이고 욕심도 많은 것 같아요. 반대로 마리아는 나이도 어리고 몸이 좀 약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 집에 오셨을 때 마르다는 식사 준비하느라고 분주한데 마리아는 그냥 예수님의 발아래 앉아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마르다가 아닌 마리아가 더 좋은 편을 선택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사람이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는 것은 주님이 그렇게 만드시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스스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이 주시지 않은 많은 염려와 근심으로 스스로 괴로워합니다.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마르다는 재주도 많고 야심도 많고 그래서 예수님이 찾아오셨을 때 예수님을 위해서 많은 일을 하려고 했는데 결과적으로 본인도 기쁘지 못하고 동생도 기쁘지 못하고 예수님도 별로 기뻐하지 않았어요. 

그럼 누구를 위해서 종이 울리는 것입니까. 마르다가 예수님을 위해서 이렇게 열심히 하면서 본인도 기뻐하지 않고 동생과도 싸우고 예수님에게 원망하고 도대체 누구를 위해서 종이 울리는 것입니까. 그런데 그게 우리의 얘기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나는 주님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주님 왜 나를 돌아보지 않습니까. 주님이 거기에 이렇게 대답하실 것입니다. ‘내가 언제 너보고 그거 하라고 했느냐. 내가 언제 너보고 많은 일을 하라고 했느냐. 네가 스스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냐.’ 

마리아는 자기가 주님을 위해서 뭔가를 하겠다고 한 게 아니고 주님 발아래 앉아서 주님 말씀을 들은 것뿐입니다. 주님 발아래 앉았다는 말은 주님에 대한 경외 ․ 겸손 ․ 예배 ․ 배움을 뜻합니다. 배울 수 있는 사람이 겸손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서 먼저 배우고 주님을 사랑하고 예배하고 그리고 거기에서 봉사가 나오고 섬김이 있고 헌금을 하든 이런 모든 것이 있을 수 있는 것이지 그런 것 없이 내가 주님을 위해서 뭘 하겠다고 하는 것은 주님도 그것을 요구하지 않았어요. 정말로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소수의 적은 것입니다. 몇 가지 중요한 것을 주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 이외의 모든 번잡스러운 것은 우리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많은 일을 한다고 주님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내가 그렇게 많은 일을 하면 주님이 기뻐하시겠지.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몇 가지, 한두 가지, 여기에서 우리도 기뻐하고 주님도 기뻐하고 남들도 기뻐하고 우리가 형통할 수 있고 함께 형통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길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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