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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스라엘의 서너 가지 죄 (암 2: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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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서너 가지 죄 (암 2:6~16)


아모스 2:6-16
(6)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스라엘의 서너 가지 죄로 인하여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저희가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 신 한 켤레를 받고 궁핍한 자를 팔며 (7) 가난한 자의 머리에 있는 티끌을 탐내며 겸손한 자의 길을 굽게 하며 부자가 한 젊은 여인에게 다녀서 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며 (8) 모든 단 옆에서 전당 잡은 옷 위에 누우며 저희 신의 전에서 벌금으로 얻은 포도주를 마심이니라 (9) 내가 아모리 사람을 저희 앞에서 멸하였나니 그 키는 백향목 높이와 같고 강하기는 상수리나무 같으나 내가 그 위의 열매와 그 아래의 뿌리를 진멸하지 아니하였느냐 (10) 내가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이끌어 내어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인도하고 아모리 사람의 땅을 너희로 차지하게 하였고 (11) 또 너희 아들 중에서 선지자를, 너희 청년 중에서 나시르 사람을 일으켰나니 이스라엘 자손들아 과연 그렇지 아니하냐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2) 그러나 너희가 나시르 사람으로 포도주를 마시게 하며 또 선지자에게 명하여 예언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13) 곡식 단을 가득히 실은 수레가 흙을 누름같이 내가 너희 자리에 너희를 누르리니 (14) 빨리 달음박질하는 자도 도망할 수 없으며 강한 자도 자기 힘을 낼 수 없으며 용사도 피할 수 없으며 (15) 활을 가진 자도 설 수 없으며 발이 빠른 자도 피할 수 없으며 말 타는 자도 피할 수 없고 (16) 용사 중에 굳센 자는 그 날에 벌거벗고야 도망하리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우리는 지난 시간에 이스라엘 주변 일곱 나라의 죄악을 고발하며 그들에게 심판의 불을 던지시겠다는 하나님의 선포를 들었습니다. 다메섹, 가사, 두로, 에돔, 모압, 암몬, 유다 등 이 일곱 나라의 죄를 하나하나 고발할 때 누가 가장 신났을까요? 아마 이스라엘이었을 것입니다. 이 주변 나라들은 이스라엘을 괴롭게 했던 세력들입니다. 그들이 범했던 죄들은 그동안 이스라엘이 그들로부터 받았던 상처들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일곱 번째, 자기 민족이었지만 경쟁 상대인 유다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선언을 들었을 때 이들의 기쁨은 최고조에 달했을 것입니다. 남왕국 유다는 체제경쟁의 대상이었을 뿐만 아니라 여기에는 예루살렘과 그 성전이 있습니다. 자기가 정통이라고 자랑하는 유다가 못마땅했는데 그들이 하나님의 정죄를 당하자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인간이 그래요. 적들이나 원수보다 형제나 가까이 있는 사람의 성공과 실패에 민감한 것이 우리들입니다.

그러나 아모스의 예언은 실상 이스라엘을 목표로 한 것이었습니다. 아모스의 예언은 주변 나라로부터 시작하여 소용돌이치듯 그 중심인 이스라엘을 향하여 다가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도는 이스라엘을 꼼짝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목표에 이르자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죄를 본격적으로 고발하기 시작합니다. 다른 나라의 죄가 서너 가지라고 하였지만 하나님은 대표적인 한 가지 죄만 물으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 이르러서는 서너 가지, 곧 셋과 넷을 합한 일곱 가지의 죄를 정확히 지적합니다. 일곱이란 숫자는 완전하다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의 죄는 이미 심판에 합당할 만큼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는 데 빠르지만 실상 자기의 죄에는 둔감합니다. 다른 사람의 눈의 티끌에 재빨리 알아보지만 자기 눈에 있는 들보는 잘 보지 못합니다. 이스라엘이 그러했습니다.

하나님의 고발(6-8)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대해서 일곱 가지 죄악에 대해서 고발합니다. 그 죄악들은 실상 오늘날의 우리들에게도 해당하는 모습들입니다. 6절에서 8절 사이에 언급된 죄악들을 하나씩 묵상해보도록 합시다.

첫째, 은을 받고 의인을 팔았습니다. 여기서 의인은 죄 없는 자를 가리킵니다. 이것은 재판상의 정의를 가리킵니다. 뇌물을 받고 죄 없는 자를 죄인으로 규정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비슷한 일이 벌어집니다. 힘 있고 부유한 사람들에게는 법의 기준이 관대하고, 힘없는 사람들에게는 법의 적용이 가혹합니다. 권력을 가진 자가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법을 이용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까지 나오기도 합니다. 흔히 법정 앞에는 정의의 신 디케 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이 신의 두 눈은 안대로 가리고 한 손에는 저울을 들고 있는 모습니다. 이는 사람을 보지 말고 공정한 재판을 하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우리나라의 대법원 대법정 출입문에 세워진 정의의 여신상은 눈을 뜨고 있습니다. 물론 제대로 보고 이성적으로 판단하라는 의미이겠지요. 그러나 우리들의 법 집행과 재판과정은 뜬 눈으로 정의를 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보며 재판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둘째, 신 한 켤레를 받고 궁핍한 자를 팔았습니다. 신 한 켤레는 매우 싼 값을 말합니다. 이처럼 헐값으로 궁핍한 자가 팔릴 정도로 인간의 가치가 땅에 떨어진 사회가 되었습니다. 반대로 가난한 자는 신 한 켤레 값에라도 자기를 팔아야 할 정도로 가난한 사회가 되어버렸습니다. 일전에 TV에서 한 허리가 굽은 할머니가 하루 종일 폐지를 모아서 파는 장면이 방영이 되었습니다. 그가 하루 종일 힘들게 모아서 판 폐지의 값은 2500원에 불과했습니다. 수고한 할머니에게 폐지상 주인이 요구르트를 건네니 굶주린 할머니가 얼마나 맛있게 먹던지...... 사람들에게는 정당한 노동의 대가가 주어져야 합니다. 현재 대한민국에는 비정규직이 6백만 명에 달합니다. 젊은 청년 비정규직의 평균 임금이 88만원이라고 하여 『88만원 세대』라는 책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신 한 켤레를 받고 궁핍한 자를 파는 것은 바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셋째, 가난한 자의 머리를 티끌 먼지 속에 발로 밟는 죄를 범했습니다. 개역 한글판에서는 7절을 “가난한 자의 머리에 있는 티끌을 탐내며”라 되었지만 번역이 잘못되었습니다. 그래서 개역 개정판에서는 “힘 없는 자의 머리를 티끌 먼지 속에 발로 밟고”로 고쳤습니다. 이는 빚을 갚지 않는 힘 없는 사람에게 행한 무자비함을 고발하는 말씀입니다. 힘 있는 자가 힘 없는 자에게 이처럼 무자비하게 구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넷째, 겸손한 자의 길을 굽게 하였습니다. 여기 겸손한 자 또한 번역이 잘못되었습니다. 연약한 자로 번역해야 합니다. 그래서 개역개정판에서는 “연약한 자의 길을 굽게 하며”로 고쳐 번역하고 있습니다. 굽게 한다는 것은 그들을 길에서 밀쳐버린다는 뜻입니다. 힘 있는 자들이 힘없는 자들의 권리를 빼앗고 함부로 대하는 모습입니다. 마치 힘 있는 자가 가는 길목에 힘없는 자들이 거추장스럽게 서 있는 모습을 보고 길에서 밀쳐 버리는 것과 같다할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연약한 자들의 길은 굽게 만들어 돌아가게 만들고 자기들만 편하게 하는 것입니다.

셋째와 넷째의 힘없고 연약한 자들이 당하는 수치의 모습들을 보았는데 여러분 고대 사회의 가난한 자들이 더 힘들겠습니까, 아니면 현대의 가난한 자들이 더 힘들겠습니까? 물론 가난하고 힘없다는 것은 고대나 현대나 모두 힘이 듭니다. 그러나 저는 현대인들의 가난이 더 힘들다는 데 동의하고 싶습니다. 고대인들은 물질적으로는 힘들었을지 모르지만 정신적으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말씀처럼 고대인들에게 하나님은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의 대변자였습니다. 

중세 시대에 가난은 하나님의 뜻이거나 다양한 사회질서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는 나름대로 자부심이 있었고 또 물질 외의 다른 가치들이 소중했습니다. 이런 모습은 종교성이 강한 현대의 저개발국가에서도 나타납니다. 연례적으로 행복지수라는 것을 발표합니다. 그런데 몇 년 전에 방글라데시가 1위를 차지한 적이 있습니다. 방글라데시는 인구도 많고 홍수도 많은 가난한 나라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1위가 되었을까요? 거기에는 종교적이며 정신적인 가치가 반영되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신의 뜻과 신이 정하신 질서로서 자신의 가난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자본주의에 쪄들은 현대인들이 가지지 않은 다른 정신세계가 그들에게는 있었고 그것이 만족을 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달되고 물질 중심의 사회가 된 우리나라에서는 가난하다는 것, 힘없다는 것은 물질적 압박과 함께 정신적 압박을 가져다 줍니다. 가난한다는 것은 무능력하다, 실패자라는 의미가 더 강합니다. 오늘 언급된 이스라엘에서는 분명히 압제하는 자가 눈에 들어옵니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는 자기 스스로가 압제가가 되어 자기를 쪼아댑니다. “너는 무능력해. 너는 실패자야” 사실 이는 물질중심의 자본주의 체제가 우리들을 길들여 놓은 방식일 뿐입니다. 현대인들에게 흥부는 매력적인 캐릭터가 아닙니다. 무능의 대명사입니다. 오히려 악착같은 놀부가 더 인정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 놀부들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자리를 빼앗기고 힘없는 자가 될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래서 교회에서 상투적으로 전하는 “예수 믿는 것 외에는 어떤 재물이나 지위도 아무 소용 없습니다.” “지금보다 천국이 더 소중합니다. 당신은 오늘 밤 이 세상을 떠난다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이런 물음들이 매우 소중하다고 생각합니다. 물질 중심의 사회에서 그보다 더 깊고, 그보다 더 의미 있는 세계가 있음을 깨닫게 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런 구호들에 담긴 극단성이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교회가 자기들이 전하는 대로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전하는 대로 예수를 믿지 않습니다. 자기들이 전하는 대로 천국이 소중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땅에다 온갖 보물과 축복은 다 쌓아놓고는 입술로만 천국, 천국 합니다.
  
다섯째, 부자 곧 아버지와 아들이 한 젊은 여인에게 다녀서 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혔다고 아모스는 고발합니다. 이 여자가 창녀일 수도 아니면 가난한 여인일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단순한 성적 타락만을 고발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젊은 여인이 자기의 몸을 팔 수밖에 없는 현실과, 부유한 자들이 자신의 욕망을 마음껏 배설하는 죄악상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부유한 아버지와 아들은 돈이 있기에 무슨 일이든 하지 못할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한 여자와 나쁜 짓을 하게 된 것이지요. 요즘도 성을 이용해 쉽게 돈을 벌 수 있기에 젊은 여학생들이 쉽게 이런 곳으로 유혹을 받는다고 합니다. 대한민국의 성관련 사업에 종사하는 자가 무려 백만 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지금 매우 위험한 사회입니다.

여섯째, 모든 단 옆에서 전당 잡은 옷 위에 누운 죄입니다. 전당 잡은 옷은 해지기 전에 돌려주어야 합니다. 출애굽기 22장 26-27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네가 만일 이웃의 옷을 전당 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돌려 보내라 그 몸을 가릴 것이 이뿐이라 이는 그 살의 옷인즉 그가 무엇을 입고 자겠느냐 그가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들으리니 나는 자비한 자임이니라” 그런데 그들은 이런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전당잡은 옷을 돌려주지 않습니다. 더 뻔뻔한 것은 제단 옆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그 옷을 깔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경건한 예배를 드리는데 그 바닥에는 이웃의 눈물을 밟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러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 주님은 제단에 예물을 드리다가도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생각나거든 먼저 형제와 화해하고 그 다음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우리 사회의 모습이 그렇지는 않습니까? 금년초에 용산참사가 났습니다.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 여섯 명의 목숨을 앗아 갔습니다. 이제 몇 년 후면 그 위에 수십억을 호가하는 고급 아파트와 상가들이 설 것입니다. 그 호화로움의 대가는 무엇입니까? 가난한 이웃의 눈물과 한숨, 그리고 죽음을 깔고 세운 부와 사치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화려함보다 그 과정에서 희생된 힘없는 자들의 소리를 들으시는 분이십니다.

일곱째, 저희 신의 전에서 벌금으로 얻은 포도주를 마신 죄입니다. 포도주는 예배를 드리고 먹는 계약 식사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그 포도주는 어디서 온 것입니까? 가난한 자에 대한 벌금으로 빼앗은 것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마치 우리가 십일조를 드리는데 그 십일조가 노동자를 부당착취해서 번 돈이거나, 뇌물로 받은 돈의 일부를 바친 돈에 해당할 것입니다. 일전에 보니까 어떤 목사님이 뇌물죄로 구속되었습니다. 그가 받은 뇌물은 2억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된 것은 그가 목사인데도 불구하고 십일조를 5백만 원만 바쳤다는 것입니다. 정확한 십일조는 2천만 원입니다. 그런데 도대체 교회가 이런 부정한 돈을 정당한 십일조로 받을 수 있는 겁니까? 

이런 일들은 현대 교회에서도 발생하고 있습니다. 아모스는 이들이 믿는 신을 8절에서 “저희 신”이’라 말씀합니다. 저들이 예배하는 신은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단지 저희들의 욕망에 따라서 만들어낸 신일 뿐입니다. 말씀대로 믿는 것이 제대로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내 생각대로 내 욕망대로 하나님을 거기에 끼워 맞추지 마십시오. 

이상의 일곱 가지 죄의 공통적인 것은 무엇입니까? 가난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억압하는 부유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하나님의 태도는 분명합니다. 높아진 것은 낮추고 낮아진 것은 높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족관계로 생각해도 분명합니다. 부모에게 많은 자식이 있지만 부모가 가장 관심을 갖고 사랑하는 자식은 가장 힘없는 못난 자식입니다. 그런데 만약 그 가난한 자식이 부유한 자식에게서 부끄럼을 당하거나, 그 가난이 부유한 형이 빼앗은 것이거나, 부유한 자식이 모른 채 해서 그렇게 된 것이라면 부모는 당연히 가난한 동생은 감싸고 부유한 형은 책망할 것입니다. 이것이 부모의 정의이고 하나님의 정의입니다.

물론 부모가 모든 자식을 사랑하듯 하나님도 모든 인간들을 사랑합니다. 동일하게 하나님은 가진 자나 갖지 못한 자나, 힘없는 자나 힘 있는 자나 모두를 사랑하고 다 그분의 자녀입니다. 그러나 그들을 대하고 사랑하는 방식은 다릅니다. 힘 있고, 가진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사랑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들의 잘못을 회개하고 돌이키게 하는 것입니다. 그가 그런 부를 쌓은 동안 다른 사람에게 못할 짓을 많이 한 것을 회개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부자 삭개오는 자기가 불의로 토색한 것에 대해서 4배나 갚고 그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이웃에게 베품으로써 비로소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가난하고 힘없는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사랑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들의 아픔을 치유하고 그들의 손상된 권리를 다시 회복시켜 주는 것입니다. 병든 자를 고쳐주시고, 가난한 자를 높여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이처럼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원이 다릅니다.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의 회개가 다릅니다. 

하나님의 은혜(9-12)

하나님이 다른 나라의 죄에 대해서는 대충 물으시면서도 이스라엘을 향해서는 이처럼 꼬치꼬치 따지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이스라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간섭하지도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자기 자녀가 잘못되기를 원하는 부모는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했는지 9-11절에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10절입니다. “내가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이끌어 내어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인도하고” 하나님은 노예 살이 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켜 큰 민족을 만들기 위해 애굽에서 이끌어 내셨습니다. 

그리고 광야 40년 동안 만나와 반석의 샘물로 먹이셨습니다. 10절 하반절과 9절입니다. “아모리 사람의 땅을 너희로 차지하게 하였고......내가 아모리 사람을 저희 앞에서 멸하였나니” 아모리 족속은 백향목처럼 크고 상수리 나무처럼 견고한 족속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강고한 적들을 쫓아내시고 이스라엘에게 그 땅을 주었습니다. 그랬을 뿐만 아니라 이들에게 부지런히 선지자와 나실인을 보냈습니다. 11절입니다. “또 너희 아들 중에서 선지자를, 너희 청년 중에서 나시르 사람을 일으켰나니 이스라엘 자손들아 과연 그렇지 아니하냐” 이스라엘이 바른 길을 가도록 인도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길에 버리워진 포도나무를 가져다, 돌과 거친 흙들을 제거하여 좋은 과수원을  만들고 그 곳에 심으셨습니다. 온갖 잡초를 제거하고 갖은 거름을 주며 정성껏 키웠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맺은 열매가 무엇이었습니까? 들포도 열매처럼 형편없는 것이었습니다. 이때의 농부의 심정을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의 마음이 그렇습니다. 사랑하고 정성을 기울인 만큼 그 열매가 나오지 않을 때에는 더 화나는 법입니다. 이스라엘은 애굽보다 더 가난한 자들을 착취하는 사회가 되었고 아모리 족속보다 더 우상을 섬기는 집단이 되었습니다.

우리 한국 사회와 한국교회가 이 하나님의 사랑 앞에서 더 경각심을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한국교회처럼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교회가 어디 있습니까? 세계에서 가장 빠른 부흥을 이루었습니다. 세계 10대 교회 중 절반이 넘게 한국교회가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많이 받은 만큼 많이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몇 년 전 새들백 교회의 릭 워렌 목사님이 1907년 평양 대부흥 100주년 기념집회 설교에서 했던 말은 저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국교회를 통해 세계를 축복하시기 원합니다. 그렇지만 한국교회가 받은 축복을 다른 사람에게 베풀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축복을 거둬 가실 것이다” 하나님은 많은 베푸신 만큼 그에 대한 기대도 큰 법입니다. 그 기대대로 살지 못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더 큰 화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알고 믿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그러나 큰 은혜를 받은 만큼 우리는 그것을 소중히 알고 행동을 해야 합니다. 이런 큰 은혜를 받고도 주님의 뜻에서 멀어진 삶을 산다면 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도 매우 클 것입니다. 차라리 받지 않고 몰랐다면 괜찮았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죄악 중 하나 더 들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12절입니다. “그러나 너희가 나시르 사람으로 포도주를 마시게 하며 또 선지자에게 명하여 예언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나님은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기 위해서 나실인과 선지자를 보냈습니다. 나실인은 구별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고 날 때부터 포도주를 먹지 않는 성별된 사람들입니다. 순결과 자기 부정의 삶을 삶으로써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삶을 이스라엘에 보여주도록 선택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런 나실 인에게 포도주를 먹였습니다. 강제로 먹였다기보다는 사회 분위기로 그렇게 몰아갔을 것입니다. 쓸데없는 짓 말고 너희도 우리처럼 즐기고 살아라 하는 식이었을 것 같습니다. 물질과 탐욕을 좇아 사는 시대에 자기들과는 달리 성결한 삶을 사는 저희들이 얼마나 걸리적거리겠습니까? 그래서 아예 구조적으로 나실 인을 타락시켜 버린 것입니다. 

저는 현대의 목회자들이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뜻을 드러내도록 성별된 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들 또한 이제 탐욕의 잔을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대형교회를 이루고, 좋은 차를 타고, 좋은 학위와 좋은 자리를 누려야 성공한 목회자처럼 만들어버렸습니다. 그렇지 못한 성직자는 실패한 존재로 만들어버린 것이지요. 물질 중심의 탐욕의 사회가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또 이들은 선지자들을 명하여 예언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선지자들은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비판과 지적이 아프니까 아예 차단시켜 버렸습니다. 교회나 사회 지도자들이 제일 못 견디는 것이 바로 비판입니다. 그렇지만 그 비판의 말이 정당하면 들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입니다. 지금은 쓰지만 결국이 잘되는 게 비판입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그 말을 듣는 것이 당장 힘들고 아프니까 아예 이 비판의 말을 봉쇄하려 합니다. 교회에서는 부정적인 사람들로 낙인찍고 심지어 쫓아내기도 합니다. 그러면 목회는 편하게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교회의 거룩성은 상실하기 시작합니다. 교회는 결국 탐욕과 자기 욕망을 채우는 도구로 전락하고 맙니다.

한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난 주에는 대학 교수들의 시국선언들이 이어졌습니다. 벌써 수천 명이 넘었습니다. 지성인들이 현 정부의 국정기조를 문제 삼은 것입니다. 아프지만 현 정부는 이 소리를 듣고 돌이켜야 합니다. 자꾸 외면하고 억누르다가는 정말 하나님의 큰 심판을 받고 말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언론의 자유는 얼마나 소중한지 모릅니다. 언론의 자유는 비판의 자유이고 예언의 자유입니다. 건강한 소리가 막히지 않을 때 그 사회가 건강하게 되고 결국 이것이 발전을 가져다줍니다.

하나님의 심판(13-16)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은 준엄합니다. 13절입니다. “곡식 단을 가득히 실은 수레가 흙을 누름같이 내가 너희 자리에 너희를 누르리니” 하나님의 심판의 비유는 신랄하기만 합니다. 이 수레는 아마도 가난한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강제로 빼앗은 곡식들은 실은 수레일 것입니다. 아니면 전쟁을 피해 그동안 치부했던 곡식과 보석을 싣고 황급히 달아나는 수레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 수레가 진흙 수렁에 빠졌습니다. 그 위에 실은 곡식이 무거워 꿈쩍하지를 못합니다. 마치 그런 수레처럼 너희를 누를 것이라는 심판의 말씀입니다.

그 심판의 때에는 매우 빠른 달음질을 하는 자도 피할 수 없습니다. 강한 자도 힘 한번 못쓰며 당하고, 용사나 말 타는 자도 피할 수 없습니다. 용사는 그 모든 갑옷과 무기들을 버리고 달아날 것이지만 그도 결국 죽임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보통 전쟁이나 위기의 때에는 죽는 것은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입니다. 강하고 부유한 자들은 어떻게든 피해나가는 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이 힘 있는 자들 때문에 자초된 것이기에 결코 그 힘 있는 자들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 주님은 선포합니다.

저는 지금 우리의 모습이 하나님의 심판 일보직전처럼 위태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한반도 정세는 매우 심각합니다. 유엔 안보리는 거의 봉쇄 수준에 가까운 북한제재를 결의하였습니다. 이에 대해서 북한은 핵개발을 계속할 것이며 군사력으로 대응할 것이라고 성명을 발표하였습니다. 남한과 북한은 가장 사이가 좋지 않은 상태이며, 남한 쪽도 언제든 북한의 도발을 좌시하지 않겠다는 태도입니다. 우리는 지금 얼마나 긴장된 살얼음판을 걷고 있는지 모릅니다. 

물론 우리 국력이 북한보다 월등히 낫고, 뒤에는 강대국 미국이 있기에 만일 전쟁이 일어나면 우리가 승리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얻어진 승리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수많은 사람이 죽고 얻은 승리라면, 남북한 모두 상처뿐이고 서로를 원수 보듯이 미워하게 될 그런 승리라면, 또 그 승리가 우리에게 돌아올지 아니면 국제적인 어떤 세력이 그것을 차지하게 될지 모르는 승리라면, 전쟁만 있었지 분단은 여전히 계속될지도 모르는 불투명한 승리라면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만약에 전쟁이 난다면 그동안 우리가 쌓아 놓은 모든 발전과 노력들은 다 헛수고가 될 것입니다. 저는 이런 한반도 정세를 보면서 우리가 정신 바짝 차리지 않는다면 정말 우리 쌓아놓은 것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될 수 있다는 것이 거짓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우리가 쌓아놓은 부가 많기 때문에 마치 곡식 단을 실은 수레가 바닥을 더 무겁게 누르듯이 우리들이 당하는 고통은 더 클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더욱 하나님께 매어달려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한가하게 인생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이제는 우리에게서 잘못된 것이 무엇이지 돌이키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할 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심판과 저주가 아니라 구원과 축복입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렘29:11) 우리를 때리고 위협하는 이유는 우리가 잘되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조금이라는 돌리는 몸짓만 하여도 주님은 우리를 향하여 달려와서 우리를 그 품에 안아주실 것입니다. 지금은 회개의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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