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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원초적 기쁨 (눅 10: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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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초적 기쁨 (눅 10:17~20)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는 지독한 병을 앓았던[노먼 키즌]이라는 사람이 자신이 어떻게 그 질병을 극복하고 건강한 삶을 되찾을 수 있었는지에 대해<질병의 분석>이라는 책에서 그 해답을 적었습니다. 그것은 바로<호탕하게 웃는 것>이었습니다. [노먼 키즌]은 평소에 모든 것을 너무 진지하고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버릇이 있었고 자신의 병이 이런 성격 때문에 깊어졌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호탕하게 웃기 시작했는데 자신도 모르게 병이 호전되더라는 것입니다. 웃음이 보약이라는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질병을 이겨내는 힘이 보약이지 무엇이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은 표정이 밝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잘 웃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웃음소리는 시원시원해야 합니다. 마음이 유쾌하면 혈액순환이 잘 되어 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마음이 불쾌하면 몸속에 독소가 생겨서 피를 탁하게 만들고 혈액순환을 원활하게 하지 못하기 때문에 건강을 심하게 해치게 된다고 합니다. 

미국의[벨버 케이츠]박사가 흥미 있는 실험을 했습니다. 인간이 호흡할 때 토해내는 숨을 모아보면 가라앉는 물질이 생기는데 이 침전물의 색깔이 감정에 따라 달라지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화가 나서 내뿜는 호흡의 침전물은 밤색, 슬픔과 고통의 때에는 회색, 후회하면서 괴로워할 때 내쉬는 한숨에는 분홍색, 기뻐하며 즐거워서 웃음으로 내쉬는 숨에는 청색의 침전물이 생겨나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각 침전물의 성분을 분석해봤더니 화가 났을 때에 생기는 밤색 침전물에는 무서운 독소가 들어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이 밤색 침전물을 쥐에게 주사했더니 수분 만에 죽어버리더랍니다. 

더 놀라운 것은 만일 한 사람이 한 시간 동안 계속해서 화를 낸다면 80명을 죽일 정도의 독소가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화를 내는 그 사람의 몸속은 무서운 독소로 가득 차 있으니 얼마나 자신의 몸에 무서운 해를 끼치는 겁니까? 또 무서운 독기를 품고 다른 사람에게 욕을 하면 욕을 먹는 상대방의 정신과 육체는 배 이상의 무서운 독을 먹는 것과 같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 싸움을 구경하는 제3자의 정신과 육체에 미치는 영향도 어마어마하게 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화를 내는 것은 본인뿐만 아니라 상대방을 물론이거니와 제3자의 건강까지도 막심하게 해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화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해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만이 가지는 기쁨의 비결이 있어야 합니다. 남이야 뭐라고 하든지 나만이 가지는 기쁨, 나만이 아는 기쁨을 만끽할 수 있어야합니다. 그 비결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건강하게 살수 있다고 합니다. 남이 욕을 해도 나 혼자만이 기뻐하는 비결이 있습니다. 그래서 빙긋이 웃고 맙니다. 그 앞에서는 대놓고 웃지는 못해도 돌아서서 씩 웃어버릴 줄 아는 사람, 이런 사람이 정말 건강한 사람이랍니다. 

그런데 결국 그것은 자기만이 누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도 건강하게 하는 것이라니 더욱 기뻐해야할 일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기뻐할 거리를 찾아야겠습니다. 무엇으로 기뻐할 것인가? 그 비결이 각자에게 있어야하겠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평소에 무엇으로 기뻐하며 사십니까? 한번쯤은 생각해 볼일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얻으려고 하는 기쁨의 조건들은 그 기본에 있어서 대동소이합니다. 
가장 먼저는 자기의 소유에서 기쁨을 찾으려고 합니다. 무언가를 많이 가지고 많이 알고 나면 기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정말 그렇습니까? 때로는 없어서 기쁠 때도 있고, 몰라서 기쁠 때가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소유가 곧 기쁨은 아닌 게 분명합니다. 

또한 충족에서 기쁨을 얻으려고 하기도합니다. 정신적이건 육체적이건 욕구가 충족되었을 때에 거기에서 누리고자하는 즐거움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충족이야말로 허무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또 다른 충족거리를 찾아야하기 때문입니다. 끝없는 충족 욕을 채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성취감이라는 정신적인 현상에서 기쁨을 누리려고 합니다. 뭔가 목적했던 바를 이루어 내거나 목표했던 바를 달성했을 때에 느끼는 쾌감을 기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 또한 만족하지 못하는 순간적 기쁨일 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더 큰 기쁨을 얻기 위해서는 또 다른 성취감을 얻어야하고 그래서 끝없는 욕심을 부려야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기쁨의 근원이 문제입니다. 가져서 기쁘지만 없어서 슬픈 것이 아니고, 충족해서 즐겁지만 또 다른 충족에 집착해야하는 기쁨이 아니라, 또 더 나은 기쁨을 위하여 자꾸만 목적을 바꾸고 욕망을 불태워야하는 그런 외형적인 기쁨이 아니라 언제나 변함없이 기뻐할 수 있는 근본적인 즐거움, 내재된 기쁨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찾아야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다른 의미의 기쁨,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역사를 대신 행하게 하려고 사람들에게 권능을 주셨습니다. 병 고치는 능력, 귀신을 내쫓는 능력을 주어서 두 사람씩 짝지어 70명을 내 보내어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이 능력을 주셨고 이 사람들이 나가서 이 능력으로 복음을 전하면서 귀신을 보고“나가라!”했더니 귀신들이 다 나가주는 겁니다. 이것이 얼마나 신기합니까? 자기들도 깜짝 놀랐을 겁니다. 자기들을 통해서 복음이 전해지고 자기들을 통해서 능력이 나타나고 병자가 일어나고 귀신이 쫓겨나고 희한한 일들을 많이 경험하고 돌아와서 지금 예수님께 보고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행했던 그 성과를 놓고 서로 자랑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그것을 보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20절에 나오는데“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하십니다. 이 말은 귀신들을 제어하는 권세를 기뻐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주신 권세이기 때문에 당연히 기뻐해야할 일입니다. 다만 그것으로 인한 기쁨은 그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오해하지 말고 잘 이해를 해야 합니다. 귀신을 쫓아내는 일은 이 땅에서의 일입니다. 곧 이 땅에서의 삶이 끝나면 그 일도 중단 될 일이지만 하늘나라에 이름이 기록된 구원의 보증은 영원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외에는 그리 기뻐할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아주 신중한 의미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능력을 갈구하고 또 능력을 가진 대로 살아가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깊이 생각해보면 그 능력도, 권세도, 또 그 외에 어떤 다른 것들도 우리의 삶이 끝나면 함께 끝날 것들에 지나지 않습니다. 영원한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그렇다고 버리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무시하라는 말도 아닙니다. 다만 그것이 제일로 기뻐해야할 조건들이고 그것에 즐거움의 전부를 여길만한 가치는 두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 보다 더 근원적이고 근본적인 기쁨의 동기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곧 오늘 우리들에게도 하시는 말씀입니다. 깊이 명심해야할 것입니다.

[에릭 프롬]이 말하는 현대인의 가치평가 기준을 보면 왜 사람들이 이렇게 메마른 삶을 살아야하는지를 느끼게 됩니다. 그 첫째가 시장성에 의해 인간이 평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물건은 물론 이거니와 기술도 지식도 노력도 젊음도 정보도 다 돈으로 환산합니다. 언제부턴가 인간도 상품화되고 있는 것입니다. 목적은 역시 돈입니다. 우리나라 축구선수[박지성]선수와 함께<맨체스터 유나이티드>팀에서 축구를 하던 포르투갈 출신[호날두]선수가 스페인 리그<레알마드리드>팀으로 이적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적료가 얼마인지 아십니까? 9,400만 파운드,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1,650억 원입니다. 이것이[호날두]라고 하는 사람의 나이, 재능, 가능성 등을 고려한 시장성에 의해 평가된 가치입니다. 

현대는 스포츠 선수는 물론 연예인들도 마찬가지이고 일반 회사원들까지도 이렇게 평가 되고 있는 세상입니다. 궁극적인 목적은 돈입니다. 그를 자본으로 해서 얼마의 이익을 남기느냐는 것이 바로 시장성 혹은 상품화입니다. 하여간 인간마저도 이런 기준으로 평가받는 시대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또 하나는 적응성에 의해 인간의 가치가 평가됩니다. 얼마나 이 사회와 공동체 속에 적응되고 있느냐에 평가 기준을 두는 것입니다. 창조나 자율보다도 공동체가 원하는 목적에 자기가 가진 능력을 제대로 얼마나 빠르게 쓰고 있느냐에 그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아무리 남과 다른 재능을 가지고 있다 해도 공동체가 원하는 것이냐는 문제입니다. 회사가 원하는 재능, 단체가 원하는 기술이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잘못된 현대교육의 한 단면을 꼬집어보자면 언제나 질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양이 중요하다고 가르칩니다. 말하자면 목표를 양질(良質)에 두라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질량(質量)에 두라고 가르치는 게 문제입니다. 

쉽게 이런 이야기입니다. 지금 우리 아이들이 학교에서 공부를 하는 목적이 단지 대학을 가기위해서 공부하는 현실입니다. 어떤 학생이 수능시험을 보고 자기가 본래 목표했던 기준에 못 미치게 나온 점수로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했습니다. 왜 이랬을 것 같습니까? 문제는 사회와 부모님의 교육에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인생을 질적으로 인도하지 않고 양적으로 인도했기 때문입니다. 

옛날 어른들은 가르칠 때“착한사람이 되라. 정직한 사람이 되라”는 인격에 바탕을 두는 양질의 교육을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유능한 사람이 되라. 능력이 제일이야! 그래야 살아남는다.”는 능력위주의 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걸 교육받은 아이들이 유능하지 못하다 생각되니까 죽어야지 하며 쉽게 죽습니다. 우리 어른들이 조심해야 됩니다.“유능한 사람이 되라.”까지만 해도 좋은데“못할 바엔 차라리 죽어라.”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유능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능력이 있어서 이 사회에 적용되는 그 가치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능력이 없다 생각되면 언제든지 자신을 쉽게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또 하나 현대인의 가치평가는 경쟁성으로 판단됩니다. 경쟁, 이게 무서운 것입니다. 지식에서 경쟁하고, 체육에서 경쟁하고, 자본에서 경쟁하고, 사업에서 경쟁하고, 정치에서 경쟁하고... 상대방을 죽여야 내가 산다는 정말 처절한 싸움정신입니다. 심각한 것은 이긴 사람은 가치가 높이 평가받고 진 사람은 어쩔 수 없이 가치가 하락되는 것입니다. 이런 경쟁 속에 시달리면서 궁극적 가치가 무엇이며 절대 가치가 무엇인지를 생각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하시는 귀신이 나갔다고 병자를 고쳤다고 자랑할 거 없다는 말씀의 의미를 잘 이해해야합니다. 정말 기뻐해야할 일은 성취도, 인기도, 능력도, 자기 과시도 아니요. 오로지 하나뿐인데 그것은 하늘나라에 이름이 기록되었다는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하늘나라 사업에 내가 협력을 했다는 사실이 나로 하여금 기쁘게 할 수 있다는 이야기이기도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오늘이라도 세상을 떠난다면 무엇을 내놓고 기뻐할 것입니까? 

세상에서 꽤나 능력 있고 재물도 있는 교인 한사람이 죽음을 맞이해서 목사님에게 그러더랍니다.“목사님, 제가 교회 봉사한 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괴롭습니다.”그러더니 자기 부인보고“여보, 통장에 얼마 있소?”,“3천만 원 있습니다.”,“그거 찾아다가 몽땅 갖다 드리라”고 하더랍니다. 그러면서 하는 이야기가“내가 세상 살면서 장학금이다 뭐다 해서 좋은 일 한다고 하면서 내 생색은 다 냈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하나님 사업을 한 일이 없습니다.”하면서 울더랍니다. 마지막 하나님 앞에 가려고 하니까 그것이 못내 걸린다는 겁니다. 여러분 이것입니다. 정말 하나님 나라에 그 이름이 기록되는 것, 하나님 나라 사업에 내가 하나라도 보탬이 되었다는 사실, 그것만을 기뻐해야 합니다. 

세상이 필요로 하는 것은 분명히 능력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이란 능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합니다. 능력이 필요하고 능력이 중요한 것이긴 합니다만 삶이 끝남과 동시에 함께 없어질 그것이 기쁨의 원천이 될 수는 없습니다. 영원한 구원의 증표인 하늘나라에 이름이 기록 된 것으로 기뻐하라는 주님 말씀의 의미가 여기에 있습니다. 능력보다 귀한 것은 은혜입니다. 은혜로 기뻐하고 은혜로 즐거워해야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고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쓰셨습니다. 나를 통해서 위대한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그 거룩한 역사에 내가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는 삶을 살게 됐다는 말입니다. 이 중요한 사실에 기뻐하라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도 얼마나 완벽하게 살려고 하십니까? 여러 가지 일은 잊어버리시기 바랍니다. 오직 초점을 분명히 하늘나라에 맞추고 그대로 주님께 맡기고 살아가십시오. 내 삶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그 근거가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히 하시기 바랍니다. 내 일의 참 가치를 어디에 두고 있는지를 분명히 할 것입니다.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 겁니까? 바닷물은 아무리 마셔도 갈증이 더 나게 마련입니다. 더 이상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마셔야 됩니다. 넓은 세상에서 인정받는 능력, 가치는 곧 끝나버릴 순간적인 것들입니다. 영원히 기뻐할 것들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오늘“너의 이름이 하늘나라에 기록된 것 그것으로 기뻐하라.”는 주님의 말씀은 영원한 가치, 정말 기뻐해야할 근원적인 즐거움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줍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이미 그 기쁨의 동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이 기쁨을 누릴 줄 아는 사람으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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