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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롯의 우상 (창 13: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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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의 우상 (창 13:8~13) 
 
 
❚우리, 싸우지 맙시다.

부모가 자녀를 낳아 기르면서 가장 가슴 아픈 때는 언제일까요? 여러 가지 경우가 있겠습니다만 자녀들끼리 다투고 싸우는 모습을 보는 것만큼 부모에게 가슴 아프고 힘들 때는 없을 것입니다. 자녀들이 우애 있게 잘 살아도 될까 말까 한데 형제들끼리 자매들끼리 다투고 사이가 나빠지는 것을 보면 부모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입니다. 언제나 부모는 자녀들이 사이좋게 지내기를 바라기에 형제끼리 자매끼리 서로 돕고 아끼며 우애 있게 살아가는 모습을 볼 때 부모는 정말 행복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도 형제자매끼리 사이좋게 지내세요. 요즘 친 형제자매가 서로 싸우는 일이 점점 많아집니다. 유산 문제로 혹은 감정 문제로 원수처럼 싸웁니다. 그러면 누가 제일 가슴 아프다고요? 부모님입니다. 혹 부모님이 돌아가셨다 하더라도 하늘나라에서 가슴 아파 하십니다. 그러니까 혹시 여러분 중에 형제자매 간에 마음 아픈 일, 속상하는 일 있다면 빨리 해결하시기 바랍니다. 이게 최고의 효도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십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의 심정, 부모의 마음을 가진 분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는 누구일까요? 바로 우리들이지요. 그렇다면 하나님이 가장 가슴 아프실 때는 언제겠습니까? 그렇지요. 자녀인 우리가 서로 마음 불편하고 다툴 때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들끼리 절대 싸우거나 마음 상하지 말고 친하게 잘 지내야 합니다. 옆 사람과 이렇게 이야기합시다. “우리 싸우지 맙시다. 우리 잘 지냅시다.” 말로만 그러지 말고 정말 교회 안에서 성도들끼리 잘 지내기 바랍니다. 그러면 성도들끼리, 형제들끼리, 혹은 가족들끼리 싸우면 어떻게 해야 해결될까요? 

누군가 반드시 한 사람이 먼저 찾아가 화해를 요청해야 합니다. “내가 잘못했다”든지 “미안하다”든지 아무튼 누군가는 먼저 찾아가야 합니다. 내가 먼저 찾아가지 않고 내가 먼저 화해를 청하지 않고 “저 놈이 왜 안 찾아오는 거야? 저 사람 왜 지가 먼저 미안하다고 안 그래?” 하면 절대 해결이 안 됩니다. 그런데 무조건 먼저 찾아간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반드시 내가 손해를 봐야 합니다. 내가 손해 볼 생각 하고 먼저 찾아가 용서도 구하고 화해도 요청해야지만 다툼이 해결되지 나는 조금도 손해 안 보고 지킬 것 다 지키려고 하면 절대 해결 안 됩니다. 먼저 손해 보겠다는 사람이 나타나면 문제는 저절로 해결되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여러분에게 하나 묻겠습니다. 

누가 먼저 찾아가고 누가 먼저 손해를 봐야 하겠습니까? 에를 들어 어른하고 아이가 싸웠어요, 누가 먼저 찾아가고 누가 먼저 손해 봐야 하겠습니까? 어른들은 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야 당연히 어린 것이 먼저 찾아와서 죄송하다고 빌어야지, 지가 먼저 손해 봐야지.” 아닙니다. 이러니까 해결이 안 되는 것입니다. 정답은 “성숙한 사람이 먼저 찾아가고 손해도 봐야 한다”입니다. 나이 따지지 말고 어른 아이 따지지 말고, 아니 오히려 어른이 먼저 찾아가서 미안하다고 하고 손해도 봐야 합니다. 왜요? 먼저 찾아가려면 자존심 상하지요. 손해 보려니 아깝고 속상하지요. 이거 아무나 못합니다. 그런데도 반드시 관계를 회복해야 하겠기에, 하나님이 자녀들 다투는 것 제일 속상해하시는 것 알기에, 힘들고 속상해도 먼저 찾아가고 내가 손해 봐야 한다면 그것은 반드시 성숙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른이 먼저 해야 합니다. 하나 더 묻지요. 교회 오래 다닌 사람하고 나온 지 얼마 안 되는 사람하고 싸우면 누가 먼저 찾아가서 미안하다고 하고 손해도 봐야 합니까? 당연히 교회 오래 다닌 사람입니다. 성숙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게 신앙의 원리고 하나님 믿는 사람들의 방식입니다. 명심하세요.

❚안목의 정욕

오늘 삼촌인 아브라함과 조카인 롯 사이에도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롯의 아버지 하란은 일찍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고아가 된 조카 롯을 삼촌인 아브라함이 거두어 마치 친아들처럼 데리고 다니다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 정착합니다. 그렇다면 롯에게 있어 아브라함은 삼촌이라기보다 친부모와 같은 존재입니다. 그런데 오늘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땅은 한계가 있는데 아브라함과 롯의 재산이 점점 불어나고 가축도 불어나서 그 땅이 너무 좁아진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다툼이 일어납니다. 아브라함의 가축을 치는 목자들과 롯의 가축을 치는 목자들 사이에 초장과 물을 가지고 서로 싸움이 일어난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목자들 사이의 다툼 같지만 실은 그 주인인 아브라함과 조카 롯 사이의 다툼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해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때 먼저 찾아간 사람이 누굽니까? 내가 양보할 테니, 내가 손해 볼 테니 다툼을 해결하자고 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아브라함이에요. 8절과 9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8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9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삼촌이 지금 뭐라는 것입니까? “어떻게 재산을 놓고, 땅을 놓고 부모자식 사이나 다름없는 삼촌과 조카가 계속 다투겠냐? 그러니까 갈라서자.” 여러분, 어떨 때는 갈라서는 것이 가장 좋은 해결방법일 때가 있습니다. 물론 가능한 한 함께 사는 것이 좋지요. 하지만 자녀가 크면 부모는 자식을 출가시켜 떠나보내야 하듯 때로는 잘 보내는 것, 잘 나누는 것도 좋은 방법일 때가 있습니다. 불편한데 억지로 봉합하려다가 더 일이 복잡해질 수도 있습니다. 단, 이런 경우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내가 손해 보고 나누면 아무 문제없습니다. 삼촌 아브라함이 먼저 조카 롯을 찾아가 뭐라고 했습니까? 

“갈 땅을 네가 먼저 선택해라. 네가 왼쪽으로 가겠다고 하면 나는 오른 쪽으로 가겠다.” 이 말은 네가 어떤 선택을 하든지 무조건 네 뜻을 존중해 주고 양보할 테니 마음대로 하라는 뜻 아닙니까? 자,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어린 것이 먼저 그래야지요. 조카 녀석이 먼저 “삼촌이 먼저 선택하세요. 삼촌은 제게 아버지처럼 잘 해주지 않으셨습니까?” 해야지요. 그런데 이 조카 녀석은 삼촌이 이렇게 말하니까 기다렸다는 듯이 “땡큐, 삼촌” 합니다. 이 친구, 뭐가 없어요? ‘싸가지’가 없어요. 그러면 믿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아브라함처럼 해야 합니다. 어른이, 성숙한 사람이 먼저 찾아가고 양보하고 손해 보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도 이렇게 하세요. 그래야 성숙한 신앙인입니다. 아브라함의 선택의 기준은 내 이익도, 어른 아이 따지는 위계질서도 아닌 사랑, 화평, 배려였던 것입니다. 우리도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아브라함과 같은 선택의 기준을 지녀야 합니다. 그래야 가정도 변하고 교회도 변하고 세상도 변합니다. 실생활에서 이런 선택을 못하면서 만날 말로만 사랑, 사랑 하고 용서, 용서 하니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뭐가 더 문제입니까? 싸가지는 원래 없었다고 치고 이 젊은 친구의 선택이 더 큰 문제였습니다.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봅니다. 그랬더니 그의 눈에 요단 저지대의 아주 비옥한 너른 들이 들어옵니다. 마치 여호와의 동산처럼, 애굽처럼 비옥한 땅입니다. 그래서 롯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그 곳을 택합니다. 어떤 분이 이런 말을 하더군요. 그리스도인은 눈 감고 기도하면서 선택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눈을 뜨고 자기 눈, 자기 안목에 따라 선택한다고요. 참 재미있는 말입니다만 지금 롯은 분명히 눈 감고 기도하는 가운데 택한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자기 눈에 들어온 곳, 자기 안목에 따라 선택하고 있습니다. 머리 좋고 약삭빠른 롯에게는 당연한 일이지요. 

하지만 그가 간과한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애굽 땅이 나일 강 유역에 있어 너무도 비옥하고 좋은 땅이지만 그곳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 곳이 아니었습니다. 우상이 가득한 죄악의 땅이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노예로 신음하던 곳이기에 아무리 좋아도 떠나야 했던 것처럼, 지금 롯이 선택한 곳도 애굽 땅처럼 너무 비옥한 땅이지만 거기에는 소돔과 고모라라는 성읍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어떤 곳입니까? 우상과 죄악이 가득한 타락한 도시였습니다. 동성애가 판을 치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다 타락한 도시 말입니다. 

그래서 13절도 분명히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더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롯은 자기의 육신의 안목에 따라 비옥하고 좋은 땅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곳을 택한 것입니다. 오늘날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실수를 범합니다. 아니, 실수 정도가 아니라 우상입니다. 바로  안목의 우상입니다. 왜 이것이 우상이냐?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 안목을 더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 눈, 자기 판단 기준을 더 따르기 때문에 우상인 것입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롯처럼 자기 안목을 따라 선택합니까? 말로는 하나님 찾고 순종 찾지만 정작 현실에서 뭔가 선택을 해야 할 때 하나님은 저만치 뒤로 밀려나 있고 언제나 자기 보기에 좋은 것, 자기 눈에 더 이익이 될 것 같은 것을 선택하는 우상숭배 말입니다. 참 흔하면서도 너무나 심각한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의 경고

이렇게 롯은 잘못된 선택을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 인간적인 안목에 따른 결정이었습니다. 이런 결정은 당연히 그에 따른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잘못된 선택이기 때문에 당연히 결과도 좋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다른 결정이기에 하나님은 이럴 때 “그래? 나 없이 결정하겠다고? 나와 상관없이 선택하겠다고? 그럼 혼자 한 번 잘 해 봐라” 하시게 됩니다. 그러니 당연히 결과가 좋을 수 없지요. 참담한 결과, 비참한 결과가 따르게 마련입니다. 

잘 기억하십시오. 하지만 이런 경우 하나님은 무조건 징계하시기보다 경고를 보내실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 뜻과 다르다고,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다고 무조건 징계하고 벌을 주기기보다 그래도 알아들을 수 있게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경고에 민감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경고에 귀를 잘 기울이고 그 경고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너그러이 용서하십니다. 하지만 그 경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여전히 자기 뜻대로, 자기 고집대로 가게 되면 그 결과는 너무나 분명합니다. 심판과 고통뿐인 것입니다.

롯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오늘 본문 바로 뒤, 창세기 14장에 보면 죄악의 도시 소돔에 정착한 롯과 가족들은 곧바로 아주 큰 봉변을 당합니다. 시날 왕을 비롯한 네 왕이 소돔과 고모라에 쳐들어와 약탈하고 그곳에 살던 많은 사람들을 포로로 끌고 가는 사건이 일어나는데 이때 그만 롯과 가족들까지 끌려가게 된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아브라함은 언제나 그랬듯이 조카 롯을 구하기 위해 부하들을 거느리고 네 왕의 군대를 밤중에 기습해서 롯과 가족들을 겨우 구해냅니다. 정말 다행이지요. 하마터면 평생 모아온 그 귀중한 재산(사실 이것도 롯의 우상이지요)도 다 빼앗기고 온 가족이 노예로 끌려갈 뻔 했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이게 바로 하나님의 경고였습니다. “롯, 너 정신 차리라!”는 것입니다. “지금 네가 살고 있는 곳이 어떤 곳인지 아느냐?”는 것입니다. 

“그곳은 죄악의 땅, 타락한 도시 소돔 아니냐, 네가 육신의 안목을 따라 계속 그곳에 살고자 한다면 앞으로 이 정도가 아니라 더 무서운 일들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경고인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롯이 이 하나님의 경고를 받고 깨닫습니까? 얼른 다른 도시로 이사 갑니까? 아니죠. 구출을 받자마자 즉시 소돔으로 돌아와 눌러 앉습니다. “하마터면 평생 그렇게 악착같이 모은 재산 가지고 이 좋은 도시에서 그 좋은 삶을 누려보지도 못하고 죽을 뻔 했다”며 말입니다. 그러니까 경고를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면 그보다 더 무서운 결과가 일어나는 것이 당연하겠지요. 그 무서운 결과가 무엇입니까? 바로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입니다.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유황불을 내려 순식간에 두 도시를 멸망시키십니다. 하나님의 가차 없는 심판입니다. 물론 이 때도 롯은 천사의 경고를 받고 그 유황불에서 빠져나옵니다. 하지만 롯이 구원 받은 것은 과연 롯 자신 때문일까요? 소돔을 찾아온 두 천사를 집으로 모셔서 잘 대접하고 온 동네 남정네들이 다 찾아와 나그네와 동성애를 하겠다고 할 때 그들을 지켜주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결코 아닙니다. 성경은 그 유황불 심판에서 롯이 구원 받은 이유를 분명히 이렇게 설명합니다. 

창세기 19장 29절입니다.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조카 롯은 이때도 자기의 의 때문이 아니라 삼촌 아브라함이 천사 붙잡고 소돔 성에 의인이 오십 명만 있으면, 아니 다섯 명만 깎아서 사십 오명만 있으면, 아니 점점 줄여서 삼십 명, 이십 명, 마지막엔 단 열 명만 있으면 멸망시키지 않으시겠냐고 사정, 사정했기 때문입니다. 소돔이 망하면 사랑하는 조카, 아무리 싸가지 없고 잔머리를 굴리는 녀석이라도 그래도 내 우일한 혈육, 내 조카 롯까지 죽게 생겼으니 자존심이고 뭐고 다 팽개치고 천사에게 사정, 사정 했던 그 아브라함의 마음을 생각하셔서 하나님이 롯을 구하신 것이라는 말입니다. 롯이 아무리 친절을 베풀고 천사들을 지켜주었다 한들 안목의 우상에 빠져 소돔에 머무른 죄를 덮을 만큼 큰 공로는 아닙니다. 다만 아브라함의 그 믿음과 고귀한 마음을 보셔서 롯을 구해주신 것뿐입니다. 오해하면 안 됩니다.

❚롯의 가족이 섬긴 우상

자, 그런데 이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하는 장면에서 또 하나의 우상이 발견됩니다. 바로 롯의 가족들이 섬겼던 우상입니다. 우선 사위들을 보세요. 롯이 천사의 경고를 듣고 황급히 소돔을 떠나려고 할 때 두 딸과 아내는 데리고 갔는데 딸들과 결혼할 예비사위 둘은 따라가지 않습니다. 창세기 19장 14절에 보면 두 예비사위는 예비 장인이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하실 터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곳에서 떠나라”고 말하는데 농담으로 여겼다고 합니다. 참 천박한 사람들입니다. 아무리 심각한 이야기를 해도 안 믿습니다. 이 “농담으로 여겼다”는 말은 비웃었다는 뜻입니다. “아니,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야. 아무래도 장인이 제정신이 아닌가봐. 

이 좋은 도시를 누가 멸망시킨다는 말이야? 지금 우리가 이 도시에서 얼마나 누리고 사는데, 얼마나 향락과 쾌락을 누리며 잘 사는데 여호와가 도대체 누구야? 뭐 하늘에서 날벼락이라도 내린단 말이야?” 그렇지요. 날벼락보다 더 무서운 유황불이 하늘에서 떨어지지요. 뭐 이런 천박하고 가벼운 인간들을 사위로 맞을 생각을 했단 말입니까? 장인을 안 믿을 뿐 아니라 하나님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이런 인간들을 말입니다. 사도행전 17장 11절에 “베뢰아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너그럽다’는 말이 개역성경에는 ‘신사적’이라고 나와 있었는데 원어에 보면 “좋은 혈통, 좋은 가문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천박한 사람이 아니라 귀한 혈통이 되어야 합니다. 

다름 아니라 베뢰아 사람들처럼 하나님 말씀을 간절히 받아들이고 말씀 그대로 믿는 사람이 영적으로 좋은 혈통입니다. 그런데 이 예비사위들은 하나님의 경고를 비웃습니다. 분명 이 사윗감들은 하나님은 안 믿고 사람은 좀 가볍고 천박한지 몰라도 아주 좋은 직장 다니거나 아주 좋은 집안 자식이었을 것입니다. 영적인 혈통은 안 보고 세상 혈통과 조건만 본 것이지요. 사윗감 보는 안목이 이 정도밖에 안 돼요? 사위나 며느리 맞는 것 보면 그 사람의 신앙이나 가치관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사윗감 보는 눈만 봐도 역시 롯은 여전히 안목의 우상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니, 사위를 장인이 정하나? 딸네미들이 저들 좋다고 고른 거지.” 이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래도 결과는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가 그러니 딸들도 그럴 수밖에요. 딸들 역시 신랑감 고르는 눈이 육신의 안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나중에 롯의 두 딸은 소돔과 고모라가 망한 뒤 어떻게든 대를 이어보겠다고 아버지에게 술을 먹여 취하게 하고 아버지와 동침하여 자녀를 낳습니다. 성경에 참 별 이야기가 다 나오네요. 그런데 이렇게까지 대를 이어보겠다고 별 짓을 다해 낳은 자손들이 모압이고 암몬입니다. 두고두고 이스라엘의 원수로 지내다가 나중에는 망해서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된 이방민족 말입니다. 대를 잇는 것 물론 중요하지요. 하지만 그것을 위해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윤리조차 망각하고 부끄러운 짓을 일삼은 이 두 딸을 보면서 우리는 아버지 롯의 영향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아버지의 그 딸입니다. 아버지가 육신의 안목이라는 우상을 좇아 산 것처럼 두 딸 또한 육신의 안목을 따라 행동한 것입니다.

롯의 아내는 또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아시지요? 피난 가던 이 아내가 어떻게 합니까?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 기둥이 되지요. 왜 뒤를 돌아보았을까요? 소돔 고모라가 어떻게 유황불에 타나 불구경하려고요? 아니지요. 하나님은 불구경한다고 소금 기둥 만드는 분은 아닙니다. 틀림없이 두고 온 집과 재산, 그동안 누리며 살던 그 모든 것에 대한 미련이 남아 돌아보았을 것입니다. 급하게 피난 나오느라 패물 하나 변변히 못 챙긴 것이 너무 안타까워 돌아봤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미련이 무섭단 말입니다. 롯의 아내는 남편을 닮아 또 하나의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것이 바로 미련의 우상입니다. 

세상 것에 대한 미련 말입니다. 주님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눅 9:62)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하나님의 길을 가면서 세상일에 대한 미련이 남아 뒤돌아보는 자는 결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뜻입니다. 왜? 그 미련 때문에 하나님의 뜻에, 하나님의 일에 온전히 투신(投身)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미련을 우상이라고 보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아니, 내가 지금 이 길을 가고 있잖아요? 분명히 하나님이 가라는 길로 가고 있는데 뭐가 문제입니까? 그깟 뒤 한 번 돌아봤다고 소금 기둥 만들어버리고 하나님 나라에 못 들어가게 하십니까?” 이렇게 항의할지 모르지요. 그런데 그게 아닙니다. 

발은 이 길을 가고 있으면서 눈은 뒤를 돌아보고 있어요. 몸은 여기 있는데 마음은 딴 데 있어요. 몸은 교회에서 예배하고 있는데 마음은 세상에 가있어요. 그러면 몸은 여기 있으되 여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세상에 가있고, 회사에 가있고, 골프장 저 푸른 초장에 가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보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아무리 내 앞에 서있으면 뭐하냐? 눈은 세상에 가 있는데. 아무리 예배당에 나와 앉아있으면 뭐하냐? 이미 마음은 딴 데 가 있는데.” 이것이 바로 미련의 우상입니다. 하나도 우상 같지 않은데 실은 아주 무서운 우상입니다.

보세요. 남편은 하나님보다 자기 눈, 자기 안목을 더 믿는 안목의 우상에 빠져있고, 딸들도 세상의 조건과 세상적인 가치관에 눈이 멀어 있고, 아내는 쟁기를 잡고도 눈은 뒤돌아보며 세상에 미련을 갖는 미련의 우상에 빠져 있고, 이 가족은 다 눈이 문제였습니다. 눈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눈이 중요합니다. 우리 눈이 어디를 보고 있느냐에 따라 우리는 우상숭배자가 될 수도 있고, 하나님이 주시는 비전을 바라보는 비전이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눈 하나 때문에 말입니다. 아무쪼록 여러분의 눈을 잘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그 눈을 세상의 정욕을 바라보는 안목으로 만들지 마시고, 미련에 빠져 뒤돌아보는 눈으로 만들지 마시고, 오직 하나님이 가리키시는 저 높은 곳을 바라보는 비전의 눈으로 만들어 하나님의 크신 뜻을 펼쳐나가는 비전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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