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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재림 전의 두 징조 (살후 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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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림 전의 두 징조 (살후 2:1~17) 
 
 
데살로니가후서 1장이 교회를 위협하는 외적 고난과 관련되었다면, 2장은 교회를 위협하는 내적 요소인 거짓된 가르침과 관련됩니다. 발신자들은 거짓 교사들의 잘못된 가르침에 대항하여 재림 전에 반드시 있을 두 징조에 관한 가르침으로 신앙의 흔들림 없이 견고할 수 있도록 권면합니다.

당시 데살로니가 교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에 관하여” 잘못된 가르침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발신자들은 “영으로”든 “말로”든 사도의 권위를 빙자한 “편지로”든 “주의 날이 이르렀다”는 가르침에 의해 “쉬 동심하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아니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오늘날 교회도 이 요청을 마음 깊이 새겨야 할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 24:36)고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재림의 때와 관련하여 성도들을 미혹하는 무리들이 시대마다 있었고, 참된 가르침을 굳게 붙들지 않는 사람들은 미혹되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증인’의 설립자 찰스 러셀(Charles T. Russell)과 그의 추종자들은 1874년, 1914년, 1975년을 세상의 끝 날로 가르쳤습니다. 안식교 계통의 이단 ‘안상홍 증인회 하나님의 교회’는 1988년과 1999년에 지구의 종말이 있을 것으로 예언했었습니다. 1992년에는 다미 선교회가 시한부 종말론으로 교회와 사회를 어지럽혔습니다. 혹은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을 통해서, 혹은 피라미드의 암호 해독을 통해서, 혹은 성경을 영해할 능력을 받았다는 주장과 함께 서기 2,000년에 지구의 종말이 있을 것으로 언급했던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앞으로도 이런 종류의 거짓 가르침들은 반복해서 나타날 것입니다.

이런 현상들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확고합니다. 3a절을 직역하면 “누가 너희를 속이지 않게 하라. 아무런 방식을 통해서도 않게”가 됩니다. 지난 교회사를 보면 절대로 속아 넘어가고 싶지 않았겠지만 시한부 종말론에 속은 사람은 많았습니다. 그들 중에는 지적 수준이 높고 유능한 사람들도 많습니다. 이런 현상은 인간적으로 똑똑하다고 속지 않는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거짓 가르침에 속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참된 가르침을 굳게 붙드는 것뿐입니다. 성령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성경의 참된 가르침은 두 가지 일이 먼저 일어나야 재림이 있을 것을 확정합니다. “배도하는 일”과 멸망하게 되어 있는 “불법의 사람”이 나타나는 일입니다.

“배도하는 일”은 기독교의 참된 진리에서 떨어져 나가는 배교를 의미하는데, 4절을 참조하면 기독교에서 다른 종교로의 배교를 말하지 않습니다. 겉모습은 기독교적인 모습을 유지하지만 내용에 있어서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이 아닌 다른 존재를 하나님으로 섬기는 형태의 배교입니다. 이 말씀이 급작스런 배교 사태라는 ‘사건’의 발생을 의미하는지, 배교의 ‘상황’이 점점 확산된 결과를 의미하는지를 분별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어떤 것이든 예수님의 재림 전의 기독교는 전 세계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성경적 신앙에서 벗어난 모습일 것이 분명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한 바른 신앙고백으로부터 떠나 있을 것입니다.

4절을 보면 “불법의 사람”의 특징이 다니엘서에 예언된 왕과 비슷합니다(단 11:36). 그는 신이나 모든 종교적 숭배 대상을 대적하며 그들 위에 스스로를 높일 것입니다. 자칭 하나님이라 하며 하나님의 성전에 앉을 것입니다. 그래서 ‘적그리스도’로도 불립니다. 역사상 이와 비슷한 인물들이 있었습니다. 스스로를 제우스의 현신으로 여겼던 시리아 왕 안티오쿠스 4세(Antiochus Epiphanes, B.C. 175-165)는 성전 번제단 위에 제우스 제단을 세우고 돼지로 희생 제사를 드렸습니다. BC 63년에는 로마 장군 폼페이(Pompey)가 성전의 지성소를 짓밟았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여전히 다니엘의 예언이 성취된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습니다(마 24:15).

예수님 이 후 AD 40년에 로마 황제 칼리굴라(Gaius Caligula)가 아폴로 신상을 자신의 상징으로 삼아 성전 안에 두려고 시도 했었습니다. AD 70년에는 로마 군대가 예루살렘을 함락시키면서 황제의 초상이 그려진 군기를 성전 뜰로 들여와 제사 드렸고, 그 직전에는 열심당에 의해 성전이 짓밟혔습니다. 초대교회 때는 기독교를 극심하게 핍박했던 로마의 황제를, 중세시대에는 부패한 교황들이나 마호멧을, 종교 개혁기에는 교황직 자체를, 그 후에는 나폴레옹이나 히틀러나 스탈린 같은 전제 군주들을 ‘적그리스도’로 간주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불법의 사람을 예표 하는 역할을 했지만, 재림 전에 등장할 바로 그 ‘불법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가장 확실한 것은 분문이 “불법의 사람”이 누구인지 정체를 밝히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성경이 침묵한 것에 대한 과도한 호기심은 미혹의 지름길입니다. 그런류의 호기심과 자신만만한 해석들이 오히려 성경의 권위만 떨어뜨렸습니다. 재림의 때를 모르는 것이 항상 깨어있는 자세를 가지는데 더 유익합니다. 정체가 모호하기 때문에 ‘불법의 사람’처럼 보이는 인물이 등장할 때마다 성도는 각성할 수 있습니다. 날짜는 불분명해도 역사적인 한 시점에서 반드시 예수님의 재림이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정체는 불분명해도 사단의 하수인 역할을 할 인간적 존재가 등장한 후에야 재림이 있을 것이라는 가르침을 숙지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과 함께 있을 때에 이 일에 관하여 이미 말했었던 것을 상기시키면서, ‘불법의 사람’이 지금은 “막는 것”에 의해 억제를 당하고 있지만 자기의 때가 오면 나타날 것을 알고 있지 않느냐고 말합니다. 불법의 비밀이 벌써 작동하고 있지만 “막는 자”가 물러날 때까지는 계속 억제되어 있을 것이라며 이미 주의 날이 이르렀다는 거짓된 가르침을 반박합니다(5-7). 이 구절은 첫 독자인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분명히 알 수 있는 내용들인 반면 우리에게는 감추어져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본문들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가 추측에 의존할 수밖에 없고 단정적으로 해석할 수 없다는 사실을 겸허하게 인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막는 것’과 ‘막는 자’가 무엇인지에 대해 다양한 추측들이 있습니다. 저로서는 불법의 사람을 막는다면 그 반대적 성향의 특성을 가진 것과 존재라야 할 것이며, 본문이 묵시적인 특성을 가졌으므로 일상적인 어떤 것과 존재로 보기 힘들다는 견해를 좀 더 타당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4:14)는 예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복음 전파의 사역과 그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측할 뿐입니다.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기 전에는 재림이 있지 않을 것은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이상에서 재림 전 교회의 모습은 상당히 우울하게 그려진 듯 보입니다. 교회는 대규모로 배교하고, 불법의 사람은 막강한 종교 조직의 권세를 배경으로 등극하여 공개적으로 교회를 공격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8-9절에서 분위기는 힘차게 반전됩니다. 불법한 자가 나타날 때 “주 예수께서 그 입의 기운으로 저를 죽이시고” “강림하여 나타나심으로” 멸하십니다. 또 불법한 자는 사단의 활동력으로 온갖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을 일으킬 것이지만, 그의 불의의 속임은 “멸망하는 자들에게”만으로 제한됩니다.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배교와 불법의 사람이 활동하는 중에도 철저히 보호된다는 의미입니다.

반면에 멸망하는 자들이 보호 받지 못하는 것은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9b)이라 했습니다. 그들은 자신을 구원할 진리를 고의적으로 받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하시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몸뚱이는 교회 안에 있어도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입니다(11-12). 재림 전의 배교 현상과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에 유혹되는 현상은 보이는 교회에 섞여 있는 참 하나님 백성과 무늬만 하나님 백성인 자들을 골라내시는 하나님의 작업인 셈이지요. 진리를 거부하고 불의를 좋아한 자는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흔히 하나님의 은혜를 오해하는 사람들은 애써 진리를 붙들지 않고, 심지어 불의를 좋아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선택하셨다면 강제로라도 돌이켜 주실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그래서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애써 자기를 부인하거나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이미 구원은 받아놨다는 아무 근거 없는 거짓 확신 속에서 평안한 마음으로 그런 삶을 즐깁니다. 불의를 좋아하는 마음 때문에 스스로 속고 있는 것이지요. 속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주신 것이 진리의 말씀인데, 그 말씀대로 살지 않는다면 스스로 보호받기를 거부한 셈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심판의 때에 진리보다 불의를 좋아한 것이 드러날 것이고 변명할 수 없을 것입니다.

13-14절에서 발신자들은 하나님께서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에 대한 믿음’ 가운데서 구원을 얻게 하시려고 처음부터 선택해 주신 것에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통해서’ 선택하신 그들을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도록 부르셨습니다. 천지가 뒤집힐지라도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부르신 자들은 단 한명도 구원에서 탈락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재림이 언제 발생하든, 불법의 사람이 어떻게 역사하든, 성도는 불안해하거나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다만 “굳게 서서” 바울 사도 일행이 “말로”나 “편지”로 가르쳐 주었던 “유전” 곧 이제는 성경으로 기록된 그 복음을 지키는 일만 필요할 뿐입니다.

따라서 발신자들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 그들의 마음을 위로하시고 모든 선한 일과 말에 굳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16-17). 성도들 자신으로서는 복음을 굳게 지키려고 애써야 하지만, 궁극적으로 그런 견고함은 하나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도를 향한 사랑으로 말미암아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요동치며 종잡을 수 없이 급변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진행됩니다. 항상 말씀을 견고히 붙들 수 있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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