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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를 위한 목숨 (마 10:3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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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를 위한 목숨 (마 10:34~39)


예수께서 갈릴리 여러 도시와 마을을 다니시며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파하실 때 예수를 믿고 그분을 가까이에서 따른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복음서들은 이 사람들을 예수의 제자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 제자들 가운데 특별히 ‘열 두 제자’ 혹은 그냥 ‘열 둘’이라고 불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마가복음 3.13-14에 따르면 예수께서는 자신이 원하시는 대로 이 열 두 명의 제자를 따로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6.13은 예수께서 친히 열 두 명의 제자들에게 사도라는 특별한 칭호를 부여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본문 조금 앞에 있는 마태복음 10.2도 이 열둘을 사도라고 칭하면서 그 이름을 차례로 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5절에는 예수께서는 자기 뜻에 따라 특별히 따로 택하여 세우신 이 12명의 사도들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천국 복음을 전파하라는 임무를 주시고 그들을 내보내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와 같이 예수께서 사도인 열두 명의 제자들에게 복음 전파의 임무를 부여하시고 내보내시면서 가르치신 말씀의 일부분입니다. 

예수께서 이 열두 명의 제자들을 “내보내셨다”는 사실이야말로 사도라는 그들의 칭호에 가장 걸맞는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미 익히 아는 바와 마찬가지로 이 ‘사도’라는 직분의 호칭 자체가 바로 ‘내보낸다,’ 혹은 ‘파견한다’ 라는 말에서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사도’(使徒)라는 말에서는 아랫사람을 ‘부린다’는 뜻을 가진 한자(使)가 사용되지만 이것은 뜻이 정확하게 옮겨진 용어는 아닙니다. 희랍말로 된 이 직분의 칭호는 ‘부림을 당하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원래 문자 그대로는 ‘파견된 사람’이란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가 먼저 분명히 인식해야 할 것은 사도의 직분은 그 존재 이유가 파견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거할 자리를 스스로 선택해서 거기에 머물러 있고자 하는 사람은 사도일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자유 의사에 따라 갈 곳을 선택해서 스스로 나아가는 사람도 역시 사도일 수 없습니다. 상전의 뜻에 따라 그가 부여한 임무를 띠고 그가 지시한 곳으로 파견되는 사람이 곧 사도입니다. 
오늘 본문인 마 10.34 이하에서 예수께서는 당신이 가져오시고 전파하셨으며 이제는 사도들도 예수께로부터 받아서 전파해야 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세상에 전해질 때 일어날 일과 이에 대해 제자들이 견지해야 할 바른 자세를 가르쳐 주십니다. 그런데 그 가르침은 사람들의 일반적인 기대와는 크게 어긋나는 당혹스러울 뿐만 아니라 충격적이기까지 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3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여기서 “생각하지 말라” 하시는 말씀은 제자들이 이미 마음 속으로 막연하게 품고 있는 어떤 기대를 수정하라고 하시는 경고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사역이 세상 즉 사람들 사이에 평화를 가져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예수께서는 그들의 이런 생각을 아셨던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제자들이 예수님을 유대인이 대망하던 메시야라고 믿고 따랐다면, 그들은 이사야 9.6에서 선지자가 메시야를 가리켜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하고 예언했으며, 또 이사야 11장에는 메시야의 통치가 완전한 평화의 나라를 이룰 것임을 예언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생각의 바탕에서라면 당연히 제자들은 이제 막 시작해야 할 자신들의 전도 사역이 곧 바로 평화로운 어떤 결과를 낳을 것이고 따라서 자신들의 사역도 순조로운 것, 많은 사람들에게 환영받는 것이 되리라고 기대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이러한 생각이 사실은 너무 단순한 생각이라는 것을 깨우치시고, 그들의 안이한 마음과 자세를 바로잡으셔야 할 필요를 느끼셨을 것입니다. 우선 사도가 된 제자들 자신들에게 있어서 복음은 평안한 삶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예수께서 그리스도로서 이 땅에 평화를 주기 위하여 오셨다고 생각하는 것에 익숙합니다. 천사들이 전한 그의 탄생 소식부터 이미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고 하는 소식이었기 때문입니다. 과연 복음은 평화의 소식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평화의 나라가 아니란 말입니까? 물론 그리스도의 복음은 분명히 평화의 소식이며, 하나님의 나라는 평화의 나라입니다. 하지만 제자들과 같이 우리가 오해하지 않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 나라에 대한 좋은 소식은 그 최종적 성취에 있어서 평화의 나라이며 평화의 소식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메시야의 왕국이 예수의 복음 전파를 통하여 시작은 되었으되 아직 완성을 향한 과정이 있다는 것이며 그 과정 즉 복음이 사람들에게 전파되고, 사람들에 의하여 받아들여지고, 사람들 사이에서 실현되는 과정에서, 그들이 기대하듯이 편안하고 순조롭게 즉시 무조건적인 평화 상태가 이루어지는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제자들 자신들에게서 먼저 확인될 수 밖에 없습니다. 
평화를 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고 하신 말씀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지만, 평화를 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을 주시겠다는 것인지 자못 궁금해집니다. 예수께 더욱 충격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검의 일차적인 기능은 물론 평화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싸움을 위한 도구이며 전쟁에서 상대를 죽이기 위한 무기입니다. 방어하기 위해서 혹은 싸움을 억제하기 위해서 검이 필요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검이 가지고 있는 뛰어난 살상 기능으로부터 이차적으로 파생된 기능에 불과합니다. 아무튼 세상에 평화를 주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전쟁을 위한 무기를 주기 위해 오셨다고 하는 말씀은 제자들과 오늘날 많은 신자들의 일반적 기대와는 완전히 다른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의 오늘 말씀은 그분 자신과 그분의 말씀이 사람들 사이에 근본적 대립 상태와 궁극적인 분열의 상태를 불러 일으키게 될 것을 일러주시는 가르침입니다. 

“주러 왔다”로 옮겨진 표현은 자칫 다음 구절과 관련하여 여러 개의 칼을 각 사람에게 하나씩 나누어주신다는 의미로 해석되지 않아야 합니다. ‘주다’라고 옮겨진 낱말은 주로 ‘던진다,’ ‘뿌린다,’ ‘때린다’ 등 급격한 동작을 나타내며 특히 무기와 관련하여서는 ‘던진다,’ ‘쏜다’ 등의 원거리 공격 행위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전용하여 ‘가져다 둔다’는 의미로도 사용되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사람에게 ‘준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말은 아닙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원래는 사람에게 칼을 주신다는 의미라기보다는 예수님께서 세상에 검을 ‘던지신다’ 혹은 ‘가져다 두신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음에 구절과 연결해서 생각할 때 지금 예수께서는 사람들 사이에 싸우도록 하기 위해서 그들에게 칼을 주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예수께서 가지고 온 하나님의 나라로 인하여 이 세상에 근본적 분열이 생겨났고 그 결과로 사람들 사이에 불화가 일어난다는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현재 단계에서 예수께서 세상에 가져오신 것은 평화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그 나라에 대적하는 세력간의 결정적 분열와 싸움을 가져왔음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 사람들 사이의 불화가 일어납니다. 

35절과 36절에서 예수께서는 이 대립과 분열이 어떤 사람들 사이에 일어나게 되는가를 말씀하시는데, 이 말씀은 우리를 다시 한 번 당혹스럽게 만듭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분열이 가장 가까운 관계에 있는 가족들 사이에서마저도 일어날 것이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그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불화하게 한다’는 표현보다는 ‘분열되게 한다’는 표현이 더 정확합니다. 불화한다는 표현은 다투는 행위를 은연 중에 연상시키는 경향이 있는데, 원래 여기에 사용된 말은 다투는 행위보다는 분열을 강조하는 말로서, ‘나눈다,’ ‘갈라 세운다’로 옮기는 것이 정확합니다. 즉 각 사람이 다툼의 칼을 들고 서로 싸우는 형국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던지신 분열의 검으로 둘로 갈라진 가족의 상태 그리고 이를 통하여 세상 전체 갈라진 상태를 대표적으로 보여주고자 하시는 말씀입니다. 

가족간의 관계는 모든 인간 관계 가운데 가장 기본적인 것으로서, 그 자체로 완벽하지는 않다손 치더라도 인간들 사이에 발견할 수 있는 것 가운데 가장 진실하고 가장 깊은 사랑으로 강하게 결속되어 있기 마련인 그런 관계입니다. 따라서 그 어떤 인간관계보다 친밀하고 서로 가장 잘 이해하고 용납하고 감싸주며 평화로운 관계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가족들간의 관계마저 분열을 겪게 되리라는 말씀은 예수께서 오신 목적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평화를 주시기 위함이겠거니 하고 막연하게 생각하였을 제자들의 선입견에 충격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 충격은 오늘날 많은 신자들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특히 오늘날은 그렇지 않아도 가족의 가치가 강조되어야 할 필요가 시대인데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은 이런 시대적 필요와는 전혀 딴판의 말씀이므로 더 당황스럽습니다. 가족의 분열이 가정내의 문제일 리가 없습니다. 부모와 자식들이 분열되고 서로 원수가 될 수밖에 없다면 여타 다른 모든 인간관계가 어떻게 될지는 더 말할 필요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이와 같은 인간 세상의 분열이 생기는가? 

이 분열은 인간세상에서 일상적으로 늘 발생하고 사라지는 피상적 수준의 분열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이 땅에 도래한 하나님의 나라로 인해서 생기는 궁극적 분열입니다. 그가 세상에 검을 던지시겠다, 세상에 검을 두시겠다 한 것은 그 자신이 곧 근본적 분열의 검이 되신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 본문 바로 앞에 있는 10.24절 이하에서 예수를 믿고 따르는 것이 곧 세상 사람들 사이에서 미움과 대적을 불러일으키게 되리라는 말씀에 이미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를 시인하느냐 아니냐 하는 것은 단지 한 종교사상 유파에 소속되었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32-33절에서 예수께서는 예수를 시인하느냐 시인하지 아니하느냐 하는 것이 세상의 주인이시며, 모든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에게 속하게 되느냐 그에게서 배제되느냐 하는 구분의 기준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로 인하여 세상은 하나님 앞에 다시는 서로 섞이고 혼동될 수 없는 결정적인 분리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인 37절에는 이것이 다른 방식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다” 
이 말씀에서 결국 그리스도가 사람들 사이에 던지는 칼은 그리스도와 자기 가족 사이에서 양자 택일의 문제가 됩니다. 누구를 더 사랑하느냐? 부모냐 혹은 그리스도냐? 자식이냐 혹은 그리스도냐? 여기서 사랑한다는 말을 감정적 친밀도를 나타내는 것으로 본다면 제자들에게나 혹은 오늘날 신자들에게나 예수를 더 사랑한다는 말은 어쩌면 불가능한 이야기로 들릴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아들, 딸을 볼 때는 세상의 그 누구보다 더 사랑스럽다는 느낌이 마음에 샘솟는 것을 억제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사랑한다는 것을 감정적 친밀로 몰고 가서 예수님께 대한 사랑을 심지어 연인을 사랑하는 격렬한 연애 감정으로 표현한 신비가들도 있습니다. 물론 예수를 사랑한다는 것도 어떤 감정적인 면을 포함하겠지만, 그것이 자식에 대한 애착이나 연인에 대한 황홀한 감정과 같은 것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예수를 더 사랑한다고 할 때 그 의미는 사람이 예수를 주님으로 모시고 그에게 충성(loyalty)과 헌신(commitment)을 바치는 것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충성과 헌신이란 심지어는 만약 그리스도와 가족의 요구가 근본적으로 충돌하여 양립할 수 없는 경우라면 최종적으로 가족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선택해야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께 대한 전적인 충성과 헌신이야말로 예수께서 요구하시는 제자직의 아주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극단적인 선택의 요구는 세상의 일반적 도덕 관념에 비추어 본다면 인간 사회의 가장 기초적인 질서를 파괴하는 비윤리적 요구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예수께서 복음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의 가족을 버리라고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며, 가족의 요구와 가정의 행복을 등한시해도 된다고 가르치시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핏줄을 나눈 한 가족 안에서까지도 발생할 수 있는 그 근본적 분열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가져오신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인 사람들의 삶은 그분 통치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여전히 인간이 스스로 지배하는 삶, 인간이 육체의 욕망을 추구하는 삶, 인간이 자기의 영광을 추구하는 삶, 단적으로 말해서 하나님 없이 사는 삶으로부터 본질적으로 분리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족 안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며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가지고 오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하나님과 상관 없이 살면서라도 그저 가족 혹은 가까운 사람들끼리 즐겁고 안락한 삶을 살면 그만이라는 가족제일주의적 가치관과는 양립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받아들이느냐 거부하느냐 하는 것은 지금 이곳에서는 사람이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자신의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느냐 아니면 여전히 이탈된 반역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느냐 하는 문제이며, 장차는 영존하시는 하나님만이 주시는 영원한 삶을 누리느냐 혹은 불순종으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에 처해지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비극적인 일이지만 한 가족 안에서도 그러한 분열은 일어납니다. 

이제 38-39절에서 주님께서는 보다 분명하게 제자 됨의 확고한 자세를 촉구하시면서 동시에 주님이 주시는 상급을 약속하십니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주님은 제자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뒤를 따르라고 요구하십니다. 십자가는 사형틀입니다. 십자가형은 사형 가운데에도 가장 고통스러운 방식일 뿐만 아니라, 인간에게 보장되어야 할 최소한의 가치마저 완전히 박탈해버리는 사형입니다. 십자가형은 한 마디로 인간성을 완전히 무시하는 사형방법입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사형이 이미 확정되어서 벗어날 길이 없다는 것이고 지금 그 사형이 실제로 집행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십자가를 진 제자는 사실상 죽은 것입니다. 

마가복음 8.34에서 예수께서는 십자가를 지는 것을 가리켜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가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십자가형에 처해져서 죽는 사람처럼 그 자신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리스도와 상관없이 스스로 추구하던 모든 인간적 욕심을 포기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그의 목숨까지도 그 자신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것이 되어야 하고 그리스도를 위해서 바쳐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이기적 욕망의 성취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위해 살고 또 죽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에게 주님은 그가 오히려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그러나 여전히 자신이 살아서 하나님과 상관없이 자기 자신이 지배하는 삶을 살고 자기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사는 사람은 지금 살아있는 것 같아도 영원히 목숨을 잃어버릴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질 수 있다는 것과 그럼으로써 자기 목숨을 그리스도를 위해 바칠 수 있다는 것은 단지 개인적 범위의 결단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가져오신 검에 의해서 자신이 세상과는 근본적으로 분열된 영역, 하나님의 나라에 속해있다는 것을 항상 분명하게 깨닫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없는 세상은 하나님의 은혜와 의의 통치를 거부하고 멸시하는 불순종 가운에 멸망할 것이며, 하나님의 나라는 그분의 권능과 은혜 아래에서 영원할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자신을 둘러싼 세상의 회유와 위협에 타협하거나 굴복하지 아니하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당당히 맞설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은 순교자 기념 주일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자기 목숨까지 바친 순교자들과 그리스도를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는 신자들에 의해서 세워지고 지켜지고 확장되어 왔습니다. 2-3세기에 카르타고에서 활동한 교부 테르툴리아누스는 “순교자의 피가 교회의 씨앗이다”라고 말했다 합니다. 한국교회도 많은 순교자들의 희생이 있어서 그 위에 오늘날과 같이 굳건하게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3대 김영주 목사님이 순교자의 반열에 오르셨습니다. 목사님은 6.25 당시에 홀로 교회를 지키시다가 북한공산군에게 납북되신 후 순교하신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순교는 과거의 역사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날도 여전히 우리를 향하여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요구하십니다. 주님 자신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고 그 목숨을 바치신 분입니다. 십자가를 지신 주님께서 우리에게도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 주를 위해 자기를 포기하고 자기 목숨을 바친다는 것은 사실상 우리 자신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혹 대의를 세우기 위해서나 자기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대담하게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이 아무리 영웅적 용기를 가진 행동으로 보여도 그것은 주님이 말씀하시는 순교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순교는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께 자신을 완전히 바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허락하심으로 은혜 가운데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억지로 순교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친 사람이 되며 순교자와 같은 고귀하고 용기있는 신앙을 가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보시고 인정하시며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생명을 그분의 영원한 나라에서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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