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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더러움이 없는 경건 (약 1: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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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러움이 없는 경건 (약 1:23~27) 


1882년 영국의 캠브리지 대학 구내에서 처음으로 '경건의 시간(Q.T)을 기억하라' 는 슬로건이 제창되었습니다. 이 운동을 시작한 사람은 후퍼(Hopper)와 손톤(Thornton)입니다. 후퍼는 1학년 때인 1882년 캠브리지에서 열린 무디(D. L. Moody) 전도집회에서 회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활이 공부와 강의, 각종경기, 자유토론으로 꽉 차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만 열정적인 활동만이 하루 일과의 전부였습니다. 학생들은 그들의 생활 중 영적 갑옷에 흠이 생겼음을 발견했으며, 조그만 틈일지라도 곧 메우지 않으면 파멸을 가져오고 말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해결책을 모색했고 곧 해결방안을 찾아냈습니다. 하루 중의 첫 시간 얼마를 성경 읽기와 기도로 하나님과 함께 보낼 계획을 세웠고, 그들은 이것을 '경건의 시간(Quiet Time)' 이라고 불렀습니다. 경건의 시간이 갈라진 틈을 메워 주었습니다. 경건의 시간은 밀려오는 활동적인 압력으로 빛을 잃어가던 삶에 재발견되어야 할 진리들을 소중히 간직하게 해주었습니다. 하나님을 더 가까이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함께 지속적으로 시간을 보내는 것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 제안은 불이 붙었고 괄목한 만한 영적 축복의 시간은 드디어 탁월한 운동 선수들이요, 부유하고 잘 교육받은 사람들의 무리인 캠브리지 7인을 선교사로 출범시키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야고보는 초대교회의 어떤 사도보다 경건을 강조했습니다. 본문에서 '헛된 경건'과 '참된 경건'을 구별하였습니다. 그는 참된 경건을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 으로 표현했습니다.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입술의 말이나 종교의식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회교도들처럼 회당에 들어가기 전에 고린내 나는 발을 깨끗이 씻는다고 이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경건은 생활 속에 깃들어 있어야 하며 삶으로 보여야 합니다. '경건' 은 헬라어로 '유세비아' 인데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태도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삼가 조심하는 태도입니다. 27절에서 야고보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라는 구절을 통해 이를 교훈하고 있습니다. 

종교개혁자 칼빈(J. Calvin)의 모토는 코람데오(Coram Deo)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즉 신전의식(神前意識)을 가진 경건의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웨슬리(J. Wesley)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경건 훈련을 위해 신성구락부(Holy Club)운동을 일으켰습니다. 우리는 삶 속에서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라는 신전의식으로 경건에 힘쓰고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사업합니까? 하나님 앞에서 공부합니까? 하나님 앞에서 일합니까? 하나님 앞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계십니까?  

경건을 위해 힘쓰는 사람을 보기가 어려운 시대입니다. 바울은 디모데후서 3장에서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는 징후가운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현상이 있다고 경고합니다. 바울에 의하면 이 시대야말로 말세의 특징이 분명하기에 우리는 두려움을 크게 느껴야 합니다. 그리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의 삶을 위해 힘써야 합니다. 더러움이 없는 경건에 이르려면,
        
첫째로 혀를 재갈 먹여야

앤드류 매튜스(Andrew Matthews)의 'Being happy' 라는 책에 보면 어떤 사람이 친구한테 하소연을 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나는 사는 게 지긋지긋해. 더 이상 가족들의 짐이 되고 싶지 않아. 행복해지는 비결은 없을까?" 그러자 친구가 대답합니다. "있지, 일단 말을 아껴. 입을 단속해야 돼. 또 스스로 헐뜯지 마라. 너 자신을 학대하는 말을 하지 마라.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말을 해라. 그렇게 되면 너 자신도 너를 좋아할 수 있고 너의 긍정적인 말을 들으면서 다른 사람도 너를 좋아할 것이다." 얼마 후 그 친구를 다시 만났더니 "아직도 불행해" 라고 말합니다. 이 말을 듣고 혼자 질문합니다. "저 친구는 언제까지 불행할까?" 그리고 대답합니다. "행복하다고 스스로 말할 때까지!" 

본문 26절입니다.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니라". 재갈은 기수가 자기가 타는 말의 입에 물리는 도구입니다. 영어로 bridle입니다. 말이 아파서 꼼짝 못하고 따라오도록 재갈을 물립니다. 그리고 기수는 말에게 재갈을 물려 가고 싶은 곳으로 말을 끌고 갑니다. 본문에서 '혀를 재갈 물린다' 는 'control his tongue' 입니다. 즉 입을 조정한다는 뜻입니다. 혀를 절제하고 조절하지 못하면 그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요. 껍데기일 뿐이라는 말입니다. 신앙인으로서 입을 다스리지 못하면 참된 신앙인이 아닙니다. 말로 신앙을 측정할 수는 없지만 참된 신앙은 입이 신앙에 의하여 조절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야고보는 서신 가운데 3장 한 장을 말조심에 할애하였습니다. 3장 2절에서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그리고 혀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하기를 "혀는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난다" 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야고보의 말조심의 교훈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경건을 위해 교회 안에서 더욱 말조심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원망하는 말, 남을 정죄하는 말, 비방하는 말, 어둡고 부정적인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말과 행위가 일치될 때에 비로소 참된 경건이 이루어지며 감동과 능력과 축복이 임하게 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환난 당한 자를 돌아보아야

어느 날 행색이 남루해 보이는 사람이 테레사(Madre Teresa) 수녀를 찾아와서 말합니다. "수녀님, 오래 전부터 아이가 여덟이나 있는 가족이 굶고 있습니다.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테레사 수녀는 먹을 것을 가지고 그가 일러준 집으로 갔습니다. 문을 두드리자 여인이 고개를 내밀었습니다. 집안으로 들어선 수녀는 여덟 명의 아이들이 지쳐 쓰러져 있는 것을 보고 먹을 것이 담긴 꾸러미를 내려놓으며 말했습니다. "아픈 아이들은 없는지요. 여기 먹을 것을 좀 가져왔어요." 그러자 여인은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는 아이들에게 음식을 나누어주기 전에 꾸러미를 들고 밖으로 나갑니다. 

테레사는 이웃집으로 가는 여인의 뒷모습을 보았습니다. 돌아올 때까지 아이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여러 날 굶어 지쳐있었지만 아이들의 눈은 빛나고 있었습니다. 막내인 듯한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을 때에 여인이 빈손으로 들어왔습니다. "어디를 다녀옵니까?" 데레사가 묻자 여인은 말합니다. "굶주리는 이웃이 또 있습니다." 그 말에 감동한 데레사는 잠시 할 말을 잃었습니다. "당신은 아이들이 배고픈 와중에도 이웃을 알고 있었군요" 얼마 후 테레사 수녀는 다시 한번 놀랐습니다. 기독교도인 이 여인이 먹을 것을 나눠준 이웃은 바로 원수처럼 여기는 이슬람교도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본문 27절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여기 '고아와 과부' 는 당시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통칭하는 표현입니다. 또한 '돌아본다'는 것은 둘러본다는 말이 아니라 도움을 준다는 뜻입니다. 어려움을 당한 이웃에게 실제적인 도움을 주는 것이 참된 경건입니다. 주릴 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를 때 물을 주고, 벗었을 때 입히고, 병들었을 때 돌보는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경건은 언어나 철학의 문제가 아니라 실천과 행동의 문제입니다.  

참된 경건은 환난 당한 자를 돌아보는 사랑에서 비로소 성취됩니다. 웨슬리는 수입에 관계없이 평생 월 28파운드만 쓰고 나머지는 모두 이웃을 돕는데 썼습니다. 죽을 때는 은수저 한 벌을 유산으로 남겼을 뿐입니다. 그는 더러움이 없는 참된 경건을 실천한 의로운 인물이었습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의 손길을 펼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경건의 놀라운 진보를 인하여 즐거워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셋째로 세속에 물들지 말아야

여름철이 되면 얼음공장에 주문이 많이 들어옵니다. 공장은 시끌벅적합니다. 기계 돌아가는 소리, 톱으로 얼음 덩어리를 자르는 소리, 인부들의 소리로 왁자지껄합니다. 공장 바닥은 톱밥이 잔뜩 쌓여 있습니다. 한번은 공장에서 일하던 남자가 시간을 보려는데 시계가 없는 것입니다. 어딘가에 풀어놓은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 시계는 결혼 예물시계였습니다. 아무리 찾아도 찾을 재간이 없자 포기했습니다. 그러나 식당에 가서 식사를 하면서도 마음이 무겁습니다. 아내에게 무엇이라 변명해야 할지 생각이 편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식사 후 작업장으로 돌아왔는데 공장에서 일을 하는 아이가 시계를 찾아 들고 서 있는 것입니다. 그는 깜짝 놀라며 말합니다. "나는 잃어버린 시계를 찾느라 애를 써도 찾지 못했는데, 어떻게 찾았느냐?" 아이가 대답합니다. 식사시간이 되자 모두 식당으로 가니 시끌벅적하던 작업장이 조용해졌습니다. 아이는 공장을 지키기 위해 앉았는데 어디선가 재깍재깍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소리가 나는 곳으로 가서 톱밥을 헤쳐 보니 시계가 들어있더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분주합니다. 세상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세상일에 찌들려 있습니다. 예배를 드리러 와서도 마음이 산란해서 집중하지 못합니다. 말씀도 건성으로 들으니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다. 경건의 능력이 사라진 것입니다.

본문 27절 하반부 말씀입니다.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여기서 말하는 세속(世俗)은 세상(世上)과 다릅니다. 세상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사 십자가를 진 사람들의 삶의 터전입니다. 그러나 세속은 사람들이 저지르는 여러가지 모양의 죄악을 의미합니다. 의나 성결과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야고보는 누구든지 자신을 지킬 줄 모르면 세속에 물들게 될 것이고 경건생활은 파탄을 가져오게 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물고기가 살아있을 때는 짠 바다를 헤엄쳐도 전혀 소금기에 절지 않습니다. 그러나 죽은 생선은 쉽게 염분을 받아들여 짜디짠 자반이 되어 상에 오릅니다. 살아있는 사람은 세속에 물들지 않도록 능히 자기를 지킬 수 있습니다. 아무쪼록 성도들은 세속에 오염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세속에 자기를 빼앗기지 않는 자라야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지키는 일은 절제의 모습입니다. 참된 경건에 이르려면 절제의 미덕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훌륭한 재능과 위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더라도 절제가 없다면 위태롭습니다. 

무릇 경건한 자들은 세속의 풍조를 따라 살지 않습니다. 육신의 소욕을 좇아 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표준에 자신을 맞추며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마땅히 더러움이 없는 경건에 이르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참된 경건에 이르기 위해 야고보의 교훈을 따라야만 합니다. 부디 혀를 재갈 먹이십시오. 환난 당한 자를 돌아보십시오. 그리고 세속에 물들지 않도록 자신을 지키심으로 경건한 사람들이 받는 부요한 축복을 얻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광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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