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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또 사랑으로 (고전 13: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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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사랑으로 (고전 13:1~13)


올 초 높은 뜻 숭의교회가 네 교회로 분립이 되었습니다. 많은 염려들이 있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교회분립은 매우 성공적입니다. 학교 강당을 빌려서 예배를 드리던 우리들에게 학교 강당에서 나가 달라는 공문을 받은 것은 치명적인 위기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는 그 위기 속에 침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위기 때문에 우리 교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기가막힌 길을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轉禍爲福이라는 말 그대로 화가 굴러서 복을 만들었습니다. 

우리 교회에 닥친 위기와 화가 복이 된 까닭을 여러분들은 아십니까? 여러분 그것은 믿음입니다. 사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치명적인 위기란 것은 원칙적으로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길이시기 때문입니다.(요 14:6) 치명적인 위기란 길이 없는 상황을 의미합니다. 아무리 어려워 보여도 헤쳐 나갈 길이 있는 상황은 위기가 아닙니다. 

우리 눈에는 길이 보이지 않았지만 우리는 길이 있을 것이라는 믿었습니다. 그 믿음으로 당황하지 않았습니다. 불안해하지 않았습니다. 말씀 속에 길이 있음을 믿고 주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말씀을 듣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대로 과감하다하리만큼 순종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길은 우리의 상식과 감각과는 전혀 상반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자기부인이었습니다. 높은 뜻 숭의교회를 해체하고 교회를 넷으로 분립한다는 것은 우리의 상식과 감각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죽고 망하라는 말씀과 같았습니다. 개인적인 이야기이지만 넷으로 분립되는 교회를 맡지 않고 네 분 목사에게 맡긴 것도 똑같은 이치였습니다. 이해하기 어렵고 순종하기 쉽지 않은 말씀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은 교회해체와 분립이라는 말씀에 순종해 주셨습니다. 쉽지 않은 순종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의 그와 같은 순종이 오늘 우리들에게 이와 같은 복을 가져다 준 것입니다. 

마가복음 8장 35절에 보면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정말 이 말씀대로 되었습니다. 버리고 죽고 망하는 일이 인간으로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렇게 순종하였더니 말씀대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삶에서 사실로 입증되는 것이 너무너무 재미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믿는 맛입니다. 예수는 맛이 있습니다. 세상 그 어느 곳에서도 맛볼 수 없는 기가 막힌 맛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살다보면 어려운 일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앞이 캄캄하고 정말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는 것과 같은 상황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 눈에는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믿음 없는 사람들은 그와 같은 상황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그렇게 행동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길이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길이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길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 속에서 길을 찾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시면 이해가 되든 이해가 되지 않든 순종하는 것입니다. 말씀에 귀 기우리고 말씀에 순종하면 언제나 길이 열립니다. 기가 막힌 길이 열립니다. 여러분 그렇게 사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사셔서 믿음 없는 사람들이 절대로 갈 수 없는 기가 막힌 길을 가는 복을 다 받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한 주일에 한 교회 씩 순회하며 설교하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 제 역할과 위치가 너무 좋습니다. 정말 행복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한 교회에서 한 설교를 다음 교회에서 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저는 주일에 하는 설교를 한 교회에만 하고 싶지 않습니다. 높은 뜻 네 교회에 흩어져 있는 사랑하는 여러분들에게 모두 하고 싶습니다. 전에 한 곳에 모여 있을 때는 한 번만 하면 되었는데 이제는 넷으로 흩어졌기 때문에 네 번을 하여야만 합니다. 우리 교회만 생각하면 그렇게해도 됩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에는 보이지 않는 교인들이 또 있습니다. 인터넷을 통하여 우리 교회의 설교를 들으시는 수만의 교인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똑같은 설교를 네 번 씩 반복하여 하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오늘 설교는 지난 5월 첫 주 하늘 교회에서 한 사랑에 대한 설교입니다. 사람들 중에는 제가 하고 싶은 말을 설교를 빌미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설교한다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지만 설교하는 사람으로서의 제 양심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설교를 준비할 때마다 가지는 기본적인 자세는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고 싶어하실까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하여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을 생각하고 그 상황에 대하여 합당한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가 처한 상황은 매우 혼란스럽습니다. 전직 대통령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수 백 만 명의 국민들이 조문을 하고, 전직 대통령의 죽음을 놓고 국민들이 일치된 생각을 당연히 하지 못하고 어떤 사람을 이렇게 생각하고 어떤 사람은 저렇게 생각하면서 서로 충돌하고 분열하고 대립하는 상황입니다. 설상가상으로 북한마저 초강수를 두며 우리를 협박하고 조여 들어오고 있는 그런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을 방송과 신문과 인터넷을 통하여 보면서 저 나름대로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답을 찾아보려고 애를 쓰고 노력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사람들 중에는 김동호 목사는 이런 일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말하는가를 지켜보고 기다리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 저를 보고 비겁하다거나 생각이 없다고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저 나름대로의 생각은 있습니다. 말하라면 할 수 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저는 지금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생각이 자꾸 듭니다. 제가 좋아하는 말씀 중에 고린도전서 10장 23절이 있습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라는 말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가(可)와 부(否)에만 관심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대립하고 그것을 가리기 위하여 일전을 불사하는 태도와 자세입니다. 몰론 옳고 그름을 따져 밝히는 일은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만으로 덕을 세울 수 없고 사람과 세상에 유익을 끼칠 수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은 옳고 그름을 따져 밝힘이 옳지 않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것이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요즘 같이 혼란한 이 때에, 이 때에 맞는 하나님의 말씀을 찾고 구하는 저에게 하나님이 자꾸 생각나게 하시는 말씀은, 집중하게 하시는 말씀은 ‘사랑’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입니다. 그래서 지난 5월 3일 주일 하늘 교회에서 고린도전서 13장 오늘 본문을 가지고 사랑에 대한 설교를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높은 뜻 정의교회 설교를 준비하려고 할 때 하나님이 또 주시는 마음이 고린도전서 13장이고 사랑이기 때문에 하늘교회에서와 똑같은 본문을 정하고 제목을 ‘또 사랑으로’라고 정한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고린도전서 10장 23절의 말씀은 고린도 우상에게 제사를 하고 유통되는 고기를 먹는 것이 가하냐 부하냐는 놓고 치열한 논쟁과 싸움을 벌이던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바울을 통하여 하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그 두 입장 중 하나를 택한 후 치열하게 싸웠습니다. 그 옳고 그름을 따져 밝힘이 교회와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인 것처럼 생각하고 정말 목숨을 걸고 싸웠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 바로 고린도전서 10장 23절의 말씀입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나름대로 옳고 그름을 놓고 논쟁을 하고 있지만 보다 중요한 것이 있으셨습니다. 그것은 ‘사랑’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23절에 이어서 24절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이 말씀은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옳고 그름을 논하고 따지라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는 것이 곧 사랑하라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것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는 말씀은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사랑의 마음으로 말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말씀을 통하여 아무리 옳은 말과 옳은 행동을 하여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천사의 말을 해도 소용이 없고,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자기 몸을 불사를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 어느 나라 사람들 보다 정치적입니다. 두 세 사람만 모이면 정치 이야기입니다. 그냥 이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싸웁니다. 그리고 분열됩니다. 그리고 서로를 원수시하고 적대시합니다. 무슨 게임을 하듯, 운동경기를 하듯 몰두합니다. 그리고 그 게임에서 이기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이기기 위하여 상대방을 공격하고 짓밟습니다. 그러는 동안 서로 상처를 주고 받습니다. 가능한 한 치명적인 상처를 주어 상대방을 굴복시키려 하기 때문에 그 상처들이 너무 크고 심합니다. 결국 나라 전체가 그 상처 때문에 위기에 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옳은 말을 하여도 사랑이 없으면 소용없습니다. 사랑 없는 옳은 말이 사람을 죽입니다. 나라와 사회를 혼란케 합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차라리 말을 안 하는 것이 낫습니다. 아무리 옳은 말이라고 하여도 안 하는 것이 훨씬 더 도움이 됩니다. 우리 사회는 말이 너무 많아서 탈입니다. 말 잘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탈입니다. 손을 대어서 상처가 낫는 수도 있지만 어떤 때는 그냥 가만 내버려 두는 것이 더 좋을 때도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무슨 일만 생기면 기다릴 줄을 모릅니다. 좀 내버려 둘 줄을 모릅니다. 참고 기다려 줄줄을 모릅니다.

더 중요한 것은 말은 의(義)를 내세우지만 속은 다 자기의 이(利)를 계산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의를 주장합니다. 그것이 우리나라의 정치입니다. 다른 나라도 크게 다를 것이 없겠지만 우리나라가 유독 더 심한 것 같습니다. 경제는 선진국화 되어가는 것 같은데 그런 면에서 보면 정치는 아직도 후진입니다.

사람들은 KO 승을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원사이드 게임을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실 정말 권투를 좋아하고 운동경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승부를 가리기 어려운 박빙의 승부를 더 좋아합니다. 판정승 더 좋습니다. 판정승은 내편에도 점수를 주지만 상대편이 잘한 것에도 점수를 주는 것입니다. 내게도 옳음이 있고 상대방에게도 옳음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최종적으로 이기기는 하지만 상대방에게 치욕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좌절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정치는 KO 승을 노리는 사람들의 위험한 놀이처럼 보입니다. 상대방의 약점만 보이면 정말 이리처럼 덤벼듭니다. 목줄을 죄려고 합니다. 죽이려고 합니다. 그러다가 정말 죽입니다. 죽어가던 사람이 또 상대방의 어떤 약점을 발견하게 되면 자기를 죽이려고 하던 사람과 똑같이 행동합니다. 받은 상처가 있기 때문에 더 잔인합니다. 복수심리가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복수는 복수를 낳고, 상처는 상처를 낳습니다.

우리 민족과 우리나라는 무엇보다도 사랑을 훈련해야 합니다. 연습해야만 합니다. 공부해야만 합니다.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사랑함으로 참는 것을 우리는 좀 연습해야 합니다.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참 무례합니다. 아무리 상대방이 잘못하였다고 하여도 상대방의 인격을 무시하면 안 됩니다. 싸움을 할 때는 하여야 합니다. 가부를 따져야 할 때는 따져야 하고 옳고 그름을 밝힐 때는 그것을 밝혀야만 합니다. 그러나 싸움의 중요한 룰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례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인격을 건드리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만일 무례하여 상대방의 인격을 무시하고 건드렸다면 그것은 반칙입니다. 아무리 옳은 말과 주장을 한다고 하여도 그것은 반칙패입니다. 우리는 그런 면에서 반칙왕들입니다. 그래서 우리 사회에는 근사하고 아름다운 승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저도 예외가 아닙니다.

사랑은 온유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과격함의 힘만을 압니다. 우리는 온유함을 바보스러움과 무능함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과격함의 힘보다 비교도 되지 않게 강한 것이 온유함의 힘입니다. 우리는 국민도 그렇고 나라도 그렇고 무조건 밀어부치려고만 합니다. 힘으로 밀어붙이는 것은 유치한 것입니다. 저급한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그런 면에서 점점 더 후퇴하고 있는 것 같아 보입니다. 

사랑은 은사입니다. 은사는 하나님이 그냥 주실 수도 있지만 우리가 구하여 받을 수도 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성령의 은사가 넘쳤던 교회입니다. 교인들이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다가 다 각기 하나님의 은사들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서로 다른 은사를 가지고 어느 은사가 더 큰 은사인가를 비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경쟁하고 다투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 바울을 통하여 하나님이 주신 답은 모든 은사는 다 동등하다는 것입니다. 어느 은사는 크고 어느 은사는 작은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외가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은사 중에 제일 큰 은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랑의 은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에 대하여 말씀을 하시기 전 12장 마지막 절에서 ‘더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이 가장 큰 은사이고 그 은사를 사모하고 구하여 받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랑이 없으면 정말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리 옳은 말을 하여도 소용없습니다. 천사의 말을 하여도 소용없습니다. 아무리 옳은 일과 행동을 한다고 하여도 소용없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을 다 내어 구제한다고 하여도 소용없고, 심지어 우리 몸을 불살라 내어준다고 하여도 소용없습니다.

사랑하는 마음과 진심이 있어야 옳은 말도 소용 있고, 옳은 행동도 소용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름 옳은 소리를 내고, 옳은 행동들을 한다고 하고 있지만 세상이 나아지고 좋아지지 않고 오히려 더 혼란스럽고 나빠지는 까닭은 사랑할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때에 우리 믿는 사람들이 이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하여야 할 일은 사랑을 배우는 일입니다. 사랑의 은사를 받는 것입니다. 사람과 세상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을 사랑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참을 수 없을 때 참고, 아무리 옳지 않고 잘못한 사람이라고 하여도 그 인격을 존중하여 예를 갖출 줄 알고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고 남의 유익을 구하는 것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것을 유행시키는 것입니다. 사랑이 우리 사회의 문화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성프랜시스의 기도를 생각합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라는 기도입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 불의가 있는 곳에 진리를 /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 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을 /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은사를 받음으로 이 시대에 평화의 도구로 주님께 쓰임받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김동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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