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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약함을 통한 강함 (고전 1: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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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함을 통한 강함 (고전 1:18~25)


여러분은 생선을 좋아하십니까? 생선은 다 좋은데 한 가지 불편한 게 있습니다. 가시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 가시를 발라서 먹어야 합니다. 가시가 목에 걸리기라도 하는 날에는 큰일 납니다. 장미가 아름답지요. 그런데 장미에게도 불편한 것이 있으니 가시가 있다는 것입니다. 꽃은 아름다운데 가시는 날카로워요. 가끔 손가락에 상처를 입을 수도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기독교에도 이와 같이 거리끼는 것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거리낀다는 말은 사람들로 하여금 기독교를 믿기를 주저하게 만들거나 걸려 넘어지게 만들거나 심각한 의문을 갖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게 도대체 무엇이냐?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라고 말했습니다. 언뜻 이해가 안 될 수도 있습니다마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을 믿다보면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첫째는 기독교는 실패를 옹호하는 종교인가? 실패를 거의 정당화하는가? 찬송가 가사들을 살펴보면 그렇다고 생각될 때도 있습니다. ‘거친 세상에서 실패하거든 그 손 못자국 만져라’, ‘무거운 짐을 나 홀로 지고 견디다 못해 쓰러질 때’ 물론 세상에서 실패한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은 필요할 것입니다마는 가끔은 은근히 기독교가 실패를 옹호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적어도 우리는 성공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는 것을 주저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제일 원하고 제일 좋아하는 것이 성공이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뭔가 성공이라는 말이 부담스럽고 죄의식마저 듭니다. 하나님 앞에서 교만한 것이 아닐까, 사람들 앞에서 민망한 것이 아닐까.

두 번째 질문은 기독교는 약자의 종교인가 하는 것입니다. 약함을 덕목으로 여기고 은근히 약함을 장려하고 서로의 약점을 발견할 때에 반가워합니다. 찬송가 가사처럼 ‘내가 연약할수록 더욱 귀히 여기사 높은 보좌 위에서 낮은 나를 보시네’ 사람의 약점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다는 것까지는 알겠는데 그러다보니 약함을 거의 덕목으로 여기고 장려하고 반대로 사람의 강한 것 ․ 유능한 것 ․ 부유한 것 ․ 성공적인 것은 교만 내지는 죄스러운 것으로 생각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까 자칫하면 신앙이 우리를 이중적으로 만드는 면이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이중적. 실제로 우리가 원하는 것과 우리가 믿음으로 고백하는 것이 다를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원하는 것은 성공하는 것이고 강한 것이고 부유한 것이고 유능한 것이지만 성경은 낮아짐, 약함, 가난함을 강조하다보니까 정말로 무엇을 얻어야 되는지 무엇을 원해야 되는지 우리 자신이 헷갈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겉으로 고백하는 것과 속으로 바라는 것이 다를 수도 있는 이중적인 내가 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실패와 약함을 옹호하는 것이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최선을 다하지 못하게 만들고 우리 자신을 좀 더 푸쉬해서 더 나은 결과를 얻으려고 하기 보다는 적당히 주저앉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기독교’ 자가 들어가는 것은 세상의 것과 비교했을 때 일반적으로 수준이 낮고 덜 노력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한다는 명목으로 적당히 하는 그런 경향이 있지 않은가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학교가 일반 학교보다 수준이 낮다든가, 기독교 음악이 세상 음악보다도 수준이 낮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린 것들은 제 자신이 하는 질문들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하시면서 이런 질문을 해 보신 적이 없다면 아직 진지하게 생각하실 기회가 없었던 것이고 앞으로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드실 때가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예수님 믿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과거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철학자 니체 같은 사람은 그 아버지가 루터교 목사였지만 본인은 기독교를 거부하고 기독교를 싫어했습니다. 그는 기독교가 노예들의 종교라고 주장했습니다. 노예들의 종교. 노예들이 자신들의 약함과 가난함과 무력함과 낮음을 정당화하기 위해 만든 종교라고 주장했습니다. 니체의 말은 당연히 과격한 말이지만 그럼에도 그는 뭔가를 솔직하게 본 것입니다. 인간의 현상, 인간의 본능을 솔직하게 본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나는 강한 사람이 되어서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믿는 것이 나의 본능과 본능적인 욕구와 대치되는 것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것은 제대로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태여 니체를 들먹이지 않아도 성경 자체가 바로 그러한 문제를 그대로 지적하고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23절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다’ 사도바울이 그것을 인정하고 그대로 공론화했습니다. 이건 숨기는 것이 아니고 없는 것처럼 여기는 것이 아니고 초대교회 시대부터, 신약성경이 기록될 때부터 사도바울은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예수 믿기를 거부한 민족이 있다는 사실을 밝힌 것입니다. 바로 십가자가 유대인들에게는 거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와서 왕의 왕으로, 주의 주로, 칼로, 힘으로, 정치적인 능력으로 다스려주지 않고 힘없는 범죄자로 몰려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을 사람들이 높이고 그분을 믿고 그분처럼 살려고 하는 것에 대해서 유대인들이 반감을 표시하고 거부하고 싫어하고 그들이 원하는 것과 다른 것이라고 생각하고 예수님을 떠나간 것에 대해서 말한 것입니다. 

그 유대인들이 유대인으로 오신 예수님, 또 유대인들이었던 열 두 제자, 유대인들로 구성되었던 초대교회, 유대인들로 구성되었던 예루살렘 교회, 유대인들로부터 시작했던 기독교 운동에 대해서 거리끼는 것으로 여기고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이렇게 가까이 오셨던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 않고 등을 돌리게 된 것은 비극적인 것이지만 그러나 이것은 역사적인 사건임과 동시에 어느 시대에든 어느 민족에게든 어느 사람에게든 나타날 수 있는 위험, 또 시험이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어떤 역사적인 과거에 일어난 역사적인 사건만을 기록한 것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 중에도 예수님의 십자가가 거리끼는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성경에 기록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구원받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어떤 방식으로 나타나느냐 하는 것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을 알지 못하면 십자가의 능력을 알 수 없고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방법을 알 수 없고 기독교는 이해할 수 없는, 내 마음에 들지 않는, 나와는 맞지 않는 이질적인 가르침으로 치부하고 등을 돌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러한 문제가 남들에게 있는 것처럼 말했지만 그가 말하고 있지 않은 것은 본인도 예수님 만나기 전에는 똑같이 생각했다는 사실입니다. 본인도 유태인, 바리새인으로서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기독교를 싫어했고 교회를 핍박했고 예수님을 핍박했던 사람입니다. 그가 기독교에 대해서 무관심했다면 별개의 문제겠지만 그는 예수님을 믿기 전까지는 교회를 싫어하고 기독교를 싫어하고 핍박할 정도로 거부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그의 생각이 변하고 예수님을 믿는 자가 되고 그것뿐만이 아니고 생명을 바쳐서 예수님을 전하는 사도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바울의 이러한 변화가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기적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하는데 기적이 사람에게 믿음을 주는 것이 아니고 깨달음이 믿음을 줍니다. 기적이 불신자를 신자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올바른 믿음의 깨달음이 불신자를 신자로 만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났을 때 예수님, 또 예수님의 십자가 그 진리와 그 숨겨진 능력이 무엇인가를 깨달았어요. 그것을 깨닫는 순간에 그 이전에 그가 갖고 있었던 거부감과 부정적인 생각이 사라지고 비로소 그것을 제대로 보게 된 것이고 깨닫게 된 것이고 이해하게 된 것이고 받아들이고 좋아하고 믿고 따르게 된 것입니다. 

만약 사도바울이 처음부터 기독교를 좋아하고 긍정적이었던 것보다는 처음에는 반대하고 싫어하고 거부했는데 도중에 그가 믿는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은 그만큼 사도바울의 증언을 신뢰할 수 있게 해주는 것입니다. 깡패였던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목사가 되었다든가 과학자였던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창조론을 가르치게 되었다든가 그러면 더 그 사람에게 신빙성이 있다고 보고 더 그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사도바울이 애초부터 기독교를 좋아하고 따른 것이 아니고 처음에는 극도로 싫어하고 스데반을 돌로 쳐서 죽이는 일에 동참할 정도로 기독교를 핍박하던 사람이었는데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변해서 생명을 바쳐 예수님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다는 그 사실이 그 자신의 회의와 의구심과 불신을 극복할만한 그만한 은혜와 진리를 체험했기 때문이라는 그런 확신을 갖게 만드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설교 초반부에 제가 제기한 질문에 대한 대답이 무엇이냐?

첫째로 기독교는 실패를 옹호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성공자이시고 예수님도 성공자이시고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믿음의 인물들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맡기신 일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았으면 그들은 성경책에 기록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개인의 삶에 있어서만 성공을 거둔 것이 아니고 그들의 가문과 민족과 인류 전체의 운명을 바꿀 정도로 그들의 삶에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고 놀라운 변화를 경험하고 그들의 믿음과 순종과 수고로 인해서 인류의 역사의 방향이 바뀔 정도로 큰 역사를 경험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삶이 성경에 기록돼있고 우리가 그들을 존경하고 그들을 닮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왜 부모들이 자기 자식들의 이름을 성경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이름으로 지으려고 합니까. 왜 다윗 ․ 룻 ․ 에스더 ․ 아브라함 ․ 사무엘 ․ 베드로 ․ 바울 ․ 디모데 ․ 마리아 이런 성경의 인물을 자식의 이름으로 지으려고 합니까. 존경하기 때문만이 아니고 그들처럼 되기를 원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자기 자식들이 그들처럼 성공적인 삶을 살기 바라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이런 인물들은 하나같이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할 수 없는 더 크고 위대한 일들을 경험하고 그것을 이룬 그런 경력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이 그런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이유는 깊은 실패의 경험을 한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건 성경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아브라함도 그렇고 모세도 그렇고 다윗도 그렇고 베드로도 바울도 깊은 실패의 골짜기를 지나가 본적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실패의 골짜기를 지나지는 않았지만 십자가의 죽음의 골짜기를 지나가셨어요. 

그래서 예수님도 한때는 실패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실패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사람들이 다 그렇게 생각하고 제자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실패를 통해서-예수님은 별개지만- 실패의 골짜기에서 그들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되고 자신의 한계를 경험하고 거기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들에게 그런 실패의 경험이 없었다면 그들은 잊혀진 존재가 되었을텐데 그들이 실패의 골짜기에서 인생을 포기하거나 낙심해서 딴 길로 가지 않고 거기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고 그 손길을 의지해서 다시 일어날 수 있었고 그래서 이전에 꿈꾸지 못했던 더 크고 위대한 일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게 놀라운 것입니다. 

모세 같은 인물은 팔십 세에 장인의 양이나 치는 실패자였는데 광야 서편에서 하나님을 만난 후 애굽으로 돌아왔어요. 권능의 지팡이를 든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애굽으로 돌아왔습니다. 맥아더 장군이 필리핀에서 후퇴할 때 ‘I''ll be back-내가 돌아오리라’라고 말했다고 하는데 모세가 애굽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권능의 지팡이를 손에 들고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서 돌아왔어요. 그것이 놀라운 일이에요.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 수 있었느냐 ? 하나님의 능력이지만 모세가 실패의 깊은 골짜기를 통과하지 못했다면 그에게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성경은 실패를 옹호하지 않고 변호하지 않고 정당화하지도 않고 장려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실패의 골짜기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웁니다. 

약함도 마찬가지에요. 성경은 너희가 약해라 라고 말하지 않고 약한 척 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성경이 말하는 것은 약함이 축복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약함을 부끄러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자신의 약함을 통해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울 수 있기 때문에. 강하고 유능해서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보다는 자신의 약함을 깨닫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우는 사람이 더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강하고 유능하기 때문에 하나님 없이 산다고 말하는 사람보다는 나는 약하기 때문에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더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것은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가 약함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숨기려하지 말고 믿음의 계기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약해보이지만 강합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의 비밀이라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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