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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람을 더 얻고자 (고전 9: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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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더 얻고자 (고전 9:19~23)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 중에 사도 바울만큼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본 받아 살려고 최선을 다한 사람이 또 있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 누구보다도 예수님과 오래 시간을 함께 하였고 또 예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제자들, 특히 베드로나 요한 같은 분들 역시 예수님 닮기를 힘썼던 사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나 요한과는 달리 바울은 예수님 살아계셨을 때 예수님의 제자도 아니었고 예수님의 가르침과 삶을 따르던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예수께서 세상을 떠나가신 이후 제자들을 중심으로 예루살렘에 교회가 세워지기 시작했을 때 예수를 믿고 따르는 성도들을 무지막지하게 핍박하고 감옥에 가두며 교회를 무너뜨리는 일에 앞장을 섰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던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체포하러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 하늘에서 들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고 그 자리에 엎드려진 그날로부터 전혀 새로운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전에는 교회와 성도들을 향하여 핍박자요 폭행을 일삼는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복음을 위하여 자기의 가장 소중한 것을 포기하고 희생하기를 즐겨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변화된 바울은 그 누구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 복음을 소중히 여겼으며 그리스도의 삶을 본 받아 살기를 힘썼던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본 받아 살기를 힘썼던 바울은 ‘나를 본 받으라’했습니다.   그가 혹시 자기 주제도 모르는 교만한 사람은 아니었을까요?   바울의 의도는‘내가 그리스도를 본 받는 자 된 것처럼 여러분도 나를 본 받는 자들이 되라’(고전11:1)는 당부였습니다.   예수 닮기를 즐거워했던 사람 바울이 오늘 읽은 본문에서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바로 이 점에서 바울이 예수를 본 받아 살았던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을 만나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자기 희생의 교훈을 온몸으로 실천한 사람이었습니다.  복음 전하는 사명이 너무도 소중하여 한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라면 자신의 모든 것을 기꺼이 포기한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몇 가지 예를 봅시다.  그는 자유인이었지만 스스로 그리스도에게 붙들린 사람이 되어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복음 전하는 일이 아니면 매맞고 감옥에 갇힐 일이 없는 사람이 복음을 위하여 쇠사슬에 매인 종이 되었습니다.   이유는 그렇게 함으로 더 많은 사람을 얻기 위함이었습니다.

유대인의 혈통과 가문을 자신 있게 자랑할 수 있었던 바울은 복음을 모르는 유대인들을 만나면 자신이 유대인임을 자랑스럽게 나타냈습니다.  율법을 하나도 빠짐 없이 지키는 것이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라 믿고 그 율법 지키기에 열심인 유대인들에게 나도 율법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은 이후로 율법을 지키는 내 열심이 나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그 율법을 이루신 예수께서 나를 구원하셨음을 깨달았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이 아무 쓸모 없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통해 나를 비쳐볼 때 내가 죄인임을 발견하고 예수께 나옴으로 자유함을 얻었노라고 당당하게 증언함으로 지금 율법 아래 매여 있는 자기 동족들을 얻고자 했습니다.   

반대로, 율법을 모르는 사람들을 만나면 그것도 모르느냐고 무시하고 정죄하기 보다는 예수께서 주신 새로운 율법, 사랑의 법을 전함으로 율법을 모르는 사람들을 얻으려고 힘을 다했습니다.  예수께서 삶과 가르침으로 친히 보여주신 사랑의 법을 전함으로 그 법 아래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살아가는 길을 전하였습니다.  어느 상황 어떤 형편에서든지 바울은 자신을 적응시키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바울이 때에 따라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 하는 박쥐같은 기회주의자라는 말이 아닙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얻을 수 있다면 할 수 있는대로 나를 상대방에게 맞추려고 노력하였다는 말입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들에게는 약한 자와 같이 되어 약한 자들을 얻고자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을 보면, 고린도교회에 우상에게 바쳐진 제사 음식을 먹는 사람들 때문에 논란이 일어난 적이 있습니다.  그때 바울은 제사 음식 문제로 믿음이 연약한 사람이 실족하지 않도록 스스로 믿음 좋다는 사람들이 자기들의 자유를 포기하라고 권하였습니다.  제사 음식을 먹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혹시라도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이 나의 자유를 오해하거나 양심에 거리낌을 갖게 된다면 나는 기꺼이 나의 자유를 포기하고 먹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는 기준을 세워줍니다.  나의 유익을 위하여 연약한 사람들을 넘어지게 하지 않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나의 자유와 권리를 제한함으로 더 많은 사람을 구원하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모든 사람에게 나를 맞추는 자세이며, 이렇게 남을 위하여 나의 자유와 권리를 제한하는 것은 아무쪼록 이런 모든 방법을 다하여 그들 중에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기 위함이라고 하였습니다.    

복음에 대한 바울의 이런 자세를 우리 개인과 교회의 사명에 비추어 봅니다.우리가 사랑하는 가족과 이웃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믿지 않는 부모형제와 자녀와 배우자를 얻기 위하여 그들의 입장에 서보시기 바랍니다. 아직 성경을 잘 모르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도를 이해하지 못하는 가족들에게 친절하고 끈기 있게 복음을 전하시기 바랍니다.    한 두번 복음을 제시하고 반응이 없거나 반대를 하면 태도를 바꾸어 말다툼으로 가던가 ‘사단 운운’ 하면서 무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전도는 말로만이 아니라 내 안에 살아계시는 성령의 도우심을 따라 사는 나의 언행심사로 드러납니다. 정말 내 가족을 사랑하고 그 영혼을 불쌍히 여긴다면 그렇게 쉽게 포기하거나 무시할 수 없습니다.

직장에서 믿지 않는 동료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오래 참음으로 지내십니까?  예수 믿는 나를 멀리하고 수군거리는 동료도 있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내가 만난 그리스도, 내가 믿는 복음이 영혼을 살리는 보화라는 확신이 있으면 그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나눌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아직 시기적으로 이르고 멀리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 동료들을 위하여 기도하며 그리스도인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나를 통해 그들을 주 앞으로 인도하실 그날을 기대하며 말입니다.

학교에서 친구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나는 어떤 자세로 복음을 나누고 있습니까?  영국 학교에서 크리스챤을 찾기가 수풀에서 바늘 찾기처럼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주일 아침 교회에 간다면 이상한 눈으로 바라볼 정도입니다. 주일 아침 축구장으로 달려가는 어린이로부터 어른들로 도로가 붐비고 축구장마다 사람들로 가득하지만 교회는 텅텅 비어가고 있는 때 내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어떤 방식으로든 나누기 바랍니다.    넌 우리와 뭔가 다르다는 구별된 삶으로 말입니다.

 내 자신이 복음이 되어 전달되어야 합니다. 말과 글로만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달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나를 보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았다면 그것이 곧 전도입니다. ‘저 사람을 보면 우리와는 다른 점이 있다.   아내가 예수를 믿은 후로 변하였다. 남편이 전과는 판이하게 달라졌다’는 분명한 삶의 열매가 보일 때 복음은 말로만 아니라 우리의 행동으로 전달됩니다. 물론 이상하게 달라져 사람이 무섭다거나 지겹다고 회피하게 만드는 것은 지혜로운 방법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에게 나를 맞추려고 애쓰는 수고가 필요합니다. 

옛 말에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마음으로 일하려고 하다가 호랑이에게 잡혀먹은 사람이 있습니다. 복음을 전할 때 음지에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그들의 삶으로 들어가 살겠다고 큰 뜻을 품고 시작했는데 안타깝게도 본래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들 중의 한 사람이 되어버린 경우도 있습니다.  최근 한국 마약퇴치 운동본부에서 마약사범들에게 재활교육을 하던 목사가 중국과 서울 호텔에서 세 차례 히로뽕을 사용하다가 경찰에 붙들렸다는 신문 보도를 보았습니다.  호랑이 굴로 들어가 잡혀먹은 꼴입니다.복음 전하기 위하여 상대방의 형편에 나를 맞추라는 말은 나도 그들처럼 죄 짓는 자리, 망하는 자리에 함께 있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다가가고 그 삶을 이해하면서 복음이 그들을 치유하도록 소망의 길을 보여주라는 말입니다.    

사람을 구하려 나를 낮추는 이런 점에서 바울이 그리스도를 가장 많이 닮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저 높고 높은 영광 가운데 머물러만 계신 분이라면 과연 누가 그 분에게 다가갈 수 있을까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롬3:23)라 하였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범죄한 인간 사이에는 이처럼 건널 수 없는 장애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편에서는 아무리 노력을 하여도 하나님의 거룩함에 이르지 못하고 결국  멸망의 길로 갑니다.    그래서 하나님 편에서 사람에게 오시기로 하셨습니다.   

눈높이 교육이라는 말을 하지요. 어른이 어린아이들과 대화를 하려면 어린이 수준으로 내려와야 대화가 통합니다. 어린아이더러 아무리 네 수준을 나만큼 높이라 강요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어른이 자기를 낮추고 아이에게 다가가면 쉽게 해결이 됩니다. 키가 큰 어른이 자세도 낮추어야 하고 언어도 수준을 내려야 합니다. 많이 배워 유식함을 뽐내는 어리석은 어른이 아니라면 아이 앞에서 자기를 낮추는 법부터 배워야 합니다. 어린이의 눈 높이로 내려와 아이들과 놀아줘야지 아래로 내려다 보며 말하면 절대로 어린이의 친구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눈높이를 함께 하시려고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예수께서 우리와 친구가 되어주시려고 우리의 수준으로 낮아져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으로 오신 그것만으로도 낮추심인데 가장 가난하고 힘 없는 가정으로 오셨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리에 살던 사람들과 친구가 되어주셨습니다. 죄인 취급을 받던 세리들과 한 자리에서 먹고 마시며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셨고 세상이 미워하고 멸시하는 그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불러주셨습니다.   저 높은 영광의 자리에서 가련한 사람들을 내려다 보며 죄인을 심판하고 벌주는 분으로 머물러 계시지 않고 자기를 비워 우리처럼 되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바로 이런 일에 동참하였습니다. 바울이 예수를 만나기 전, 복음을 알기 전에 그는 율법이라는 저 높은 자리에 앉아 죄인들을 정죄하는 일이 자기의 일이라는 확신 속에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자기와 같은 바리새인들은 일반 백성들과는 달리 특별히 구별된 사람들이라 사람들과 적당한 거리를 두고 고상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특히 율법을 제대로 지킬 줄 모르는 사람들을 정죄하고 그들과는 말도 섞지 않고 한 자리에 앉아 식사도 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러던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완전히 변하여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이후부터 전에 죄인이라고 무시하고 멀리하던 사람들을 찾아갔고 그들의 삶을 이해하면서 자기가 만난 그리스도와 자기가 깨달은 복음을 나누며 살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신 사랑의 법으로 그들에게 다가가 그리스도께서 친히 보이셨던 사랑을 나누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들을 볼 때 나도 역시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연약한 사람인가 깊이 느끼며 약한 자들의 연약함을 대신 지고 함께 세워가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짐을 지러 오신 분이셨고 우리 대신 십자가를 지고 죽음의 자리로 가신 것처럼, 바울도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그들의 약함을 이해하고 함께 짊어지며 함께 든든히 서가는 사람으로 변하였습니다.   

이것이 복음이 나에게 주는 은혜요 기쁨입니다. 나는 있는데 너는 왜 없느냐고 꾸짖고 무시하는 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보내신 형제를 내 의로움으로 판단하는 잘못입니다. 그보다는 나에게 있는 이 귀한 선물을 당신도 함께 누리며 살기를 원한다고 진정으로 아끼고 염려하는 마음으로 나누는 것이 복음 전하는 사람의 올바른 자세입니다. 그래서 전도자는 높은 자리에서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낮은 자리로 내려와 복음의 수종자로 섬겨야 합니다.    

 간혹 선교사나 전도자들이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을 대할 때 무조건 가르치려들고 고자세로 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가엾다는 듯이 깔보고 함부로 말을 내리 깔고 인격을 모독하는 투로 대할 때 그리스도의 복음은 빛을 가리우고 맙니다. 복음은 저 멀리, 저 높이 앉아서 저 멀리, 저 낮은 곳에서 방황하는 죄인들을 정죄하고 책망하며 무시하고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낮은 자리로 내려오신 그리스도의 구원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교회가 바로 이 복음 전하는 사명을 맡았습니다. 예배 드리고, 성경공부반에서 만나는 것만 복음  전하는 일이 아닙니다.  차를 마시고 비빔밥을 먹으면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고, 함께 축구를 하고 골프를 하면서 함께 산책을 하면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보이는 것입니다. 이 모든 활동의 근본 목표는 그것들을 통한 영혼구원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저 높은 구름 위에 살면서 세상과 손을 끊고 사는 신선놀음을 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속세를 떠나 산속으로 들어가 홀로 도를 닦고 신비로운 경지에 이르라고 우리를 세상에 남겨두신 것이 아닙니다. 낮아지고 또 낮아져 가장 연약한 사람의 입장까지 이해할 수 있고 그들의 삶을 어루만질 수 있는 자리로 내려가라고 우리를 남겨두셨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한 사람을 주님께 인도하였다면 그 사람의 낮아짐은 하나님께 칭찬을 받을 거룩한 성도의 삶입니다. 교회는 아무쪼록 더 많은 사람들을 얻기 위하여 복음을 나누는 기관이고 복음을 위해 나를 나누는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존재 목적입니다. 복음을 나누는 이 사명 외에 다른 그 어떤 것도 우선될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참여하는 성찬식은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을 기념하는 거룩한 예식입니다. 우리처럼 되신 것으로 그치지 않고 우리를 위하여 대신 죽으심으로 우리를 향한 사랑을 확실하게 보이셨습니다. 내가 죽고 너희가 살게 되었으니 내 죽음을 기념할 때마다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그 사랑을 너희가 서로 나누라고 하십니다. 이 떡과 잔을 먹고 마시는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예수님의 삶을 배워 사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새로운 법 아래 서로가 동등한 사람으로 살고 있습니다.     

주께서 주신 이 떡과 잔 앞에서 우리는 누구도 높고 낮음이 없습니다. 우리 가운데 더 의롭고 더러움이 없습니다. 누구나 주 앞에서 동일한 하나님의 자녀이고 구원의 은혜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온 것처럼 너희도 가족과 이웃에게로 가라 하십니다.  내가 나를 너희에게 준 것처럼 너희도 너 자신을 나누라고 하십니다. 복음은 꼭꼭 숨겨두고 움켜쥐고 있어야 하는 보물이 아니라 펼쳐 나누어야 하는 보물입니다. 이 귀하고 복된 사명을 기쁨으로 실천하는 성도들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아무쪼록 한 사람이라도 더 얻기 위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감사와 즐거움으로 하는 따뜻한 사랑의 교회이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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