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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것이 사랑입니다. (요 13: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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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사랑입니다. (요 13:1~11)


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3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4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5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 
6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 
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8 베드로가 이르되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9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옵소서 
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11 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하지 아니하다 하시니라 
  
설교: 

우리나라에서 어떤 기관에서 “세상에서 가장 좋은 단어가 뭐냐?”라고 설문 조사를 했답니다. 그런데 1등이 사랑이고 2등이 행복이고 3등이 믿음이라 했답니다. 그 외에도 4등은 희망 5등이 엄마랍니다. 
또 가장 기쁠 때 생각나는 단어는 뭐냐? 하고 조사했더니 
1등이 행복이고 2등이 감사고 3등이 사랑으로 선정되었답니다. 그리고 4등이 엄마 5등이 가족으로 선정 되었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와 달리 미국 사람들은 1등이 사랑Love 이고, 2등이 천국, Heaven, 3등이 가정,home, 4등이 엄마, mama라는 단어를 제일 좋아하는 단어로 뽑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정말 신기한 것은 사랑이란 단어는 한국이든 외국이든 다 포함되었다는 것입니다. 그처럼 사랑이라는 단어를 싫어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문제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뭘 뜻하는 것일까요? 사랑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뭐라고 대답을 할 것입니까? 사랑이라는 단어는 참으로 다양하게 쓰일 뿐 아니라 시간과 환경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말, 사랑은 들어봐야 어떤 사랑인지 구별이 됩니다.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 똑같은 사랑이라는 단어가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됩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사랑해’, 친구가 친구에게 ‘사랑해’, 연인이 애인에게 ‘사랑해’, 여러분이 저에게 ‘사랑해요’, 다 다릅니다. 
  
문제는 세상의 사랑은 조건과 상황이 있어야 하고 어느 정도 이해관계가 있어서 매어지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사랑을 하는 것은 자식이니까 사랑하는 것입니다. 친구간의 우정 사랑도 조건이 존재합니다. 여인끼리의 사랑은 더더군다나 조건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의 사랑은 시간이 흐르거나 상황이 바뀌면 변질 된다는 것입니다. 

뉴스에서 늘 듣고 살지 않습니까? 어떤 젊은 엄마는 어린 생명인 아들딸의 목을 졸라 죽이고 12층에서 투신자살한 비참한 일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사랑이 부모 사랑이라는데 그 사랑이 변질되니 이러한 처참한 일도 있었습니다. 친구 사랑도 그렇고 연인 사랑도 변질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조건적인 사랑이 아니며 한계점이 없는 사랑입니다. 조건이 없습니다. 그리고 믿을 수 있는 사랑입니다. 변하지 않는 영원한 사랑입니다. 
  
그 주님의 사랑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요? 오늘 봉독한 본문에 그 사랑이 어떤 사랑인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 기간 중에 마지막으로 십자가를 지기 얼마 전 제자들과 함께 어느 집 다락방에 모였습니다. 그때 그 제자들을 대하시는 주님의 모습은 참사랑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사랑은 어떤 사랑일까요? 

1. 사랑의 對象(대상)-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좀 유별난 데가 있습니다. 그중에 정말 유별난 것은 지독한 偏愛(편애)적 사랑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알기로 하나님은 이 세상 모든 사람을 사랑하신다고 보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의 주님을 보세요. 분명하게 밝히고 있는 사랑의 대상이 “자기 사람들”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것은 구약이나 신약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나 그 아들 성자 예수님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의 백성들을 사랑합니다. 
  
성경에는 “내 백성”이란 단어가 컴퓨터로 조사해 보니 199번이나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실 때를 생각해 보세요. 애굽 땅에 살던 그 수많은 사람들은 왜 그렇게 엄청난 고통을 격어야 합니까? 바로 왕 한사람만 두들겨 패시면 간단할 텐데 애굽 백성 전체가 무자비한 고난을 겪습니다. 특별히 장자재앙을 보세요. 왜 바로왕의 장자만 치면 되지 애굽 전역의 무고한 백성들의 장자를 다 치십니까? 무자비한 하나님이라 보이지 않습니까? 
가나안땅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땅을 점령해 나갈 때 왜 그 땅에 백성을 진멸해야 하지요? 여리고성 점령할 때 남녀노소 다 진멸합니다. 그들의 생명을 왜 그렇게 무자비하게 몰살시키시는 것일까요? 그들은 사람이 아닌가요? 그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백성이 아닌가요? 
그런데 왜 그렇게 하실까요? 왜 그들을 그토록 처참하게 죽이실까요? 
  
성경을 몇 군데 살펴보세요. 
출 3:10에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하셨습니다.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이라 하셨습니다. “내 백성”이란 말을 쓰신 것은 모두가 다 하나님 백성이라면 굳이 내 백성이라 하실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내 백성’이라는 말속에는 하나님 백성이 아닌 사람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또 출 8:1에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바로에게 가서 그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하셨습니다. 
삼상 9:17에 사무엘이 사울 왕을 세울 때도 하나님은 그에게 “보라 이는 내가 네게 말한 사람이니 이가 ‘내 백성’을 다스리리라 하시니라” 하셨습니다. 
  
신약성경에서도 있습니다. 마태 2:6에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 이다” 
내 백성이라 분명히 선포하십니다. 
“내 백성” “내 백성”이라는 단어가 수없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 세상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아닌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토록 처참하게 살육하시고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하나님의 백성입니까? 그것은 외모로 볼 수 없습니다. 
유대인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이스라엘의 유대인들만이 하나님의 백성이라 할 수 없습니다. 이방인 중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나님의 백성임을 믿어야 합니다. 그 분별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어 구원 받은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 받은 사람만이 주님의 백성이라 할 수 없습니다. 
  
사도행전 18장 9~10절에 보면 사도 바울에게 하나님이 환상 중에 말씀하십니다. “9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10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이들은 아직 믿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성에 내백성이 많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도를 쉬지 말고 계속하라는 것입니다. 
이를 비추어 보면 주께서 구원하시기로 작정한 사람들은 주님의 백성인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도 많을 것입니다. 이 수원성에도 아직 믿지 않는 주님의 백성이 많습니다. 그러기에 누가 주님의 백성인지 모르니 외모를 보지 말고 열심히 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놀라운 사실은 주님은 “자기 백성”을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창세로부터 택함 받은 주님의 백성, 그 사람이 바로 저와 여러분인 것을 믿고 감사하며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사람을 절대로 모른다고 버려두지 않습니다. 지독하리만큼 사랑하시고 유별나리만큼 편애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어찌 보면 때로 버림받은 것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분명 당신 백성인데도 마치 하나님이 살아계시지 않은 것 같이 보일만큼 아무런 도움의 손길이 없어 보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흔들리지 마세요. 
하나님이 연단하시고 훈련하시는 것이지 결코 보려두지 않습니다. 모세처럼 40년 동안 침묵하실 수도 있습니다. 요셉처럼 13년 동안 버려둔 것 같이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버린 것이 아닙니다. 훈련시켜 들어 쓰시려고 기다리셨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저와 여러분이 이미 주님의 백성으로 부름 받아 먼저 지극한 사랑을 받고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2. 사랑의 時限(시한)- 끝까지 사랑입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의 1절을 다시 보세요. 
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사랑하시되 어떻게 사랑하신다구요?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끝까지 사랑, 이것이 무엇일까요? 최선을 다한 사랑일까요? 극진한 사랑일까요? 마지막까지 다 주는 사랑일까요? 
끝까지 사랑이 어떤 사랑일까요? 우리가 쓰는 말로는 “한없는 사랑”, “끝이 없는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변치 않는 사랑이라 한 것입니다. 
사람의 사랑은 ‘상황과 조건’에 따라 변합니다. 아무리 뜨거운 남녀 간의 사랑도 시간이 흐르면 변합니다. 결혼 서약 때 사랑한다고 고백하지만 몇 날 며칠 못 되어 돌변하기도 합니다. 부모의 사랑도 그렇고, 친구의 우정의 사랑도 절대로 변치말자 하고는 변합니다. 
  
어제 설교준비하다 잠시 KBS에 “3일”이라는 프로그램을 잠시 보니 울화통이 터졌습니다. 광주에 있는 <영아 일시 보호소>에 수많은 영아어린이가 맡겨져 있었습니다. 미혼모가 낳은 많은 어린이가 있었고 심지어는 기혼 가정에서 낳은 자녀인데도 생활이 어렵다고 맡겨져 다른 가정에 입양될 날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니 기가 막혔습니다. 사랑한다 해놓고 형편이 안 된다 버립니다. 이것이 사람의 사랑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 사랑은 절대로 안 바뀝니다. 변치 않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이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이름을 영원히 갖고 계시는 분입니다. 
  
요한 일서 4장7~8절을 보세요. 
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곧 사랑입니다. 
9~10절도 보세요.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하나님의 그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나셨습니다. 그러기에 그 사랑은 이길 자가 없는 것입니다. 
롬8:35에도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 어떤 것으로도 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아멘입니까? 
  
저는 하나님께 좀 죄송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좀 극성맞다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좀 더 표현하면 지독하다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원래 오늘 설교 제목을 “지독하고 극성스런 주님의 사랑”이라 할까 “아무도 못 말리는 사랑”이라 할까 고민했습니다. 그런데 혹시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천박하다 오해할 사람이 있지 않을까 하여 설교제목을 바꾸었습니다. 
  
그러나 정말 우리 주님의 사랑을 지독한 사랑입니다. 끝까지 가는 사랑입니다. 
유별나게 챙기는 사랑입니다. 아무도 못 말리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지금도 우리에게 있음을 느끼시기를 축원합니다. 
  
3. 사랑의 方法(방법)- 낮아져 섬기시는 사랑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주님이 손을 겉어 붙이고 대야에 물을 떠다 제자들의 발을 하나하나 씻깁니다. 이것은 주님이 제자들의 종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도 자식을 사랑하기에 자식에게 온갖 종노릇 다 하잖습니까? 종도 그런 종이 없습니다. 밥 줘, 물 줘 부터 시작해서 온갖 것을 다 해 달라 해도 합니다. 왜요? 사랑의 종입니다. 
  
우리 주님도 철저하게 낮아지셔서 종들이 해야 할 섬김을 당신이 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기에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누구시지요? 천지를 창조 하신 하나님입니다. 성자 하나님이신데 우리를 사랑하시어 구원하시려고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위에 오신 분입니다. 육신을 입고 오셨으나 주님은 곧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2:44~45에서 
44 예수께서 외쳐 이르시되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45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육신을 입고 오셔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십니다. 기가 막한 일입니다. 정말 놀랄 일입니다. 대통령이 내 발을 씻겨도 놀라운 일인데 천지를 창조하신 주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십니다. 왜죠? 겸손입니다. 
  
여러분! 섬김이 어떻게 실현될까요? 사랑으로 실현되는 것입니다. 
왜 진정한 사랑이 왜 어려울까요? 낮아짐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를 내려놓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give and take을 하려고 하면 그것은 조건적 계약이고 협상이지 사랑은 아닙니다. 사랑은 그냥 다 주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랑은 다 주신 것입니다. 생명도 주셨습니다. 
당신 것은 다 내려놓고 몽땅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하늘 보좌를 버리셨습니다.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것도 험한 베들레헴 구유에 누이셨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위대한 것입니다. 
  
주님이 사람이 없어서 갈릴리 촌놈들을 제자로 삼았겠습니까? 
주님이 능력이 부족하여 베들레헴 촌에 탄생 하셨겠습니까? 얼마든지 고관대작의 집에 태어 날수도 있고 얼마든지 똑똑하고 유능한 사람들을 제자로 삼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낮고 천한 우리를 구하시려 모든 것을 내려놓고 가장 낮은 곳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섬긴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소망이 있습니다. 여기에 주님 사랑의 위대함이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은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마음으로 하는 것이라 하는데 마음만 가지고도 아닙니다. 사랑은 낮아져 섬김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참 사랑은 처절히 낮아질 때 가능한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주님은 늘 우리와 함께 해 주시는 것입니다. 
사랑은 함께 해주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참 사랑은 홀로 하는 게 아니라 함께 하는 것입니다. 기쁜 일이 있으면 함께 웃어 주고, 괴롭고 힘들어 하면 같이 아파해 주고, 또 슬픈 일이 있으면 함께 울 수 있는 마음, 이것이 사랑입니다. 힘들어 하면 두 손 잡아 주고, 등을 두드려 줄 수 있는 그런 마음, 그 사랑이 바로 우리 주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의 이름이 임마누엘입니다. 
  
어느 선교단체를 섬기는 선교사님이 고백을 했습니다. 선교단체에서 공동체 생활을 하는데 가장 힘든 것은 자아를 부스는 것이라 했습니다. 
공동체로 함께 먹고 함께 살아가려는데 정말 어려운 것은 자신도 모르게 자아가 살아서 불쑥 불쑥 뛰어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동체 지체를 섬기기 어려워지더라는 것입니다. 공로의식, 우월의식, 그리고 밑바닥에서 샘솟듯이 나오는 이기적 욕심이 자기를 흔들어 사랑을 깨트린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어떻겠습니까? 하늘 보좌를 버리셨습니다. 천한 갈릴리 촌놈들, 어부, 세리, 보통 사람들이 가르쳐도, 가르쳐도 알아듣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되 낮아지셔서 그들의 발을 씻기십니다. 주인이 종을 씻기시는 정도가 아닙니다. 창조주가 미물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 사랑이 오늘 우리에게 있었기에 우리가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이 사랑이 있었기에 우리가 주님의 몸 된 교회 일꾼이 된 것입니다. 
  
4. 사랑의 깊이- 배신할 제자까지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길 때 그 장소에는 12명의 모든 제자가 다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마지막 시간을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주님이 왜 이 땅에 오셨는지도 모르고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 대다수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을 심하게 책망치 않고 계속 가르치십니다. 
지금은 모르더라도 나중은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정말 소망이 없는 자들에게 소망을 가지고 섬기시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중에는 가롯 유다도 들어 있었습니다. 그는 사단에 붙들려 있는 자였습니다. 사단은 예수를 죽이려고 가롯 유다에게 예수님을 팔 생각을 넣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그것을 알면서도 그의 발도 씻기셨습니다. 
기가 막힙니다. 사단에 붙들려 주님을 대적하는 사람도 끝까지 사랑합니다. 그러면서 원수도 사랑하라 하십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사랑은 당신이 친히 행하신 사랑입니다. 만약에 주님이 당신이 원수를 사랑하지 못하고 우리에게 사랑했다면 그 사랑은 무력했을 것입니다. 
마5:43~44절입니다. 
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주님은 십자가에 달리시면서 조차도 그 원수를 사랑했습니다. 어떻게요? 알지 못하여 그렇다며 그들을 용서하셨습니다. 그래서 손 양원 목사님도 자기 아들 둘을 죽인 공산당원을 회개시켜 아들을 삼았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 사랑에 조건을 달 때가 많습니다. 
“여기 까진 한다. 그런데 이것도 도저히 못하겠다.” 합니다. 그러나 그것조차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사랑을 받은 자요, 그 사랑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618장의 찬양을 부르십시다. 
나 주님을 사랑합니다. 참 사랑의 주를 경배해 
한맘으로 찬양하오니 우리들의 기도를 들으소서 아멘? 
  
말씀을 맺습니다. 
주님의 사랑 그 사랑이 여러분에게 있습니다. 그 사람이 십자가 속에 담겨 있습니다. 그 위대한 사랑이 우리를 구원하셨고 그 사랑이 우리에게 하늘의 영생을 누리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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