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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말씀과 함께 (시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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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함께 (시 1:1~6)


최근에 미국을 바라보는 눈이 예전만 못하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한번은 친구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이러다 미국이 망하는 거 아닌가? 미국이 망하면 세계는 어떻게 되지?’ 그런 대화를 나눈 적도 있습니다. 경제문제나 세계정세에 어두운 우리 같은 사람들도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다면. 미국이 가진 영향력이 확실히 못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미국이라는 나라가 가진 독특함에 감탄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가진 사람들이 그렇지 못한 이들을 향해서 가지는 사회적인 책임의식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부자라고 하는 빌 게이츠는 이미 많은 재산을 미국과 세계 여러 나라를 위하여 기부한 사람으로 유명합니다. 최근에 그는 돈이 많은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을 위하여 더 많은 재산을 기부해야한다고 소위 있는 사람들의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책임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면이 미국이 다른 나라에 비하여 우위를 점하고 있는 부분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그의 이러한 약자에 대한 관심과 배려는 한 중동 산유국의 왕자가 이용하는 비행기가 그의 취향에 맞게 개조하는데 무려 5,000억원이 들었다는 소식과는 너무나도 분명한 대조를 이루는 것이지요. 

비록  우리들의 세대를 살았던 사람은 아니지만, 록펠러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가난하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 자라난 사람입니다. 록펠러는 진정으로 성공한 사람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행상을 하는 아버지 밑에서 자라났습니다. 얼마나 가난했는지 장래성이 없다는 이유로 사랑하는 여성에게서 버림받는 아픔을 경험하기도 하였습니다. 대학의 문턱에는 갈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참으로 놀라운 성공을 거두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석유로 큰돈을 벌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소중한 것은 자기가 거두어들인 부를 다른 사람을 위하여 사용할 줄 알았던 사람이라는 것이지요. 그는 자기는 대학을 나오지 못했지만, 사람들을 위하여 시카고 대학이라는 좋은 대학을 설립하였습니다. 더욱 놀라웠던 것은 그는 뉴욕에 사는 수많은 사람들이 공짜로 수돗물을 먹을 수 있도록 한 사람입니다. 뉴욕시에 있는 록펠러센타를 지나치다가 안내원이 해주는 설명을 듣고 제 귀를 의심하였습니다. 

어떻게 아무 것도 없이 인생을 시작한 사람이 이러한 놀라운 공헌을 이웃을 위하여 할 수가 있었던 것일까요? 그에게는 자신이 평생을 거쳐서 이루고자 하였던 소중한 삶의 목표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훌륭하고 바르게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희망은 ‘훌륭하고 바르게 사는 것’이라고 늘 말하였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아래서 세상을 바르게 살자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그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바탕에 깔린 몇 가지 자신의 삶의 원칙을 정하였습니다. * 주일은 한 번도 빠지지 않는다. * 술과 담배는 입에도 대지 않는다. * 유흥가에는 절대로 가지 않는다. * 식사 때는 감사의 기도를 빠뜨리지 않는다. * 성경은 매일같이 읽는다.  생각해보면 아주 단순한 삶의 원리입니다. 바로 이러한 삶에 대한 태도가 록펠러를 아주 특별한 존재로 만들었다는 것이지요. 

늘 맞이하는 주일이지만... 오늘 이 우리에게 뜻 깊고 새로운 것은 그동안 우리가 사용하던 성경을 바꾸고 처음으로 맞는 주일이기 때문입니다. 아마 제 개인적으로도 생각해 보면 이런 일은 처음이 아닌가 합니다. 글씨를 알게 되고 성경을 읽기 시작할 때부터 성경은 항상 그동안 우리가 사용하던 개역성경이었습니다. 지금은 제본도 세련되고 여러 가지 필요한 자료들도 첨부된 다양한 성경들이 나오고 있지만... 우리가 자랄 때에는 딱딱한 표지에다가 붉은색 칠을 잔뜩한 성경이었습니다. 왜 그렇게 붉은 책을 칠했는지... 멀리서도 성경책은 사람들의 눈에 잘 띠었습니다. 친구들은 교회에 오면서 성경책을 들고 다니는 것이 창피했는지... 늘 무슨 봉투 같은 것에 넣고 다니곤 하였습니다. 

오래된 우리말로 되어 있어서 구성진 면도 없지는 않았지만 그 내용을 읽고 이해하기가 쉽지 않아서 성경은 항상 가까이 있으면서도 읽지 않는 책... 교회에 다녀오면 책상 한 구석에 잘 보관해 놓았다가는 다음 주일이면 다시 먼지를 털고는 예배당에 갈 때에 가지고 가는 책이었습니다. 새해가 되면 결심하는 것 중의 하나가 오늘부터 성경은 매일같이 읽어야지... 하지만, 마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족보이야기에서부터 걸리는 것이지요. ‘성경은 역시 너무 어렵고 지루해...’ 이렇게 생각하고는 덮어버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다가 성경에 대하여 새로운 눈을 뜰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제가 신학대학에 들어갔던 1977년의 일인데... 마침 공동번역성서라는 전혀 새로운 성경이 출간되었습니다. 가톨릭과 개신교의 신학자들이 함께 손을 붙잡고 번역을 하였다고 해서 공동번역 성서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을 하느님이라고 하였다든지, 여호와를 야훼라고 번역했다든지... 우리에게는 좀 낯선 부분이 없지는 않았지만... 어려운 말로 된 성경을 대하다가 접하게 된 성경은 성경에 대한 생각을 다르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공동번역 성경은 가톨릭교회에서만 사용을 하게 되었고 개신교회에서는 외면을 당하였고, 개신교는 다시 개역성경으로 돌아갔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아쉬운 대목입니다. 성도들이 자기들에게 이해하기 쉽고 익숙한 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수 있다면 그것이 우리들의 믿음을 얼마나 풍성하게 할 수 있었을까요? 

최근에 나오는 여러 가지 통계에 의하면 개신교는 성장이 멈추었고, 많은 사람들에게서 신뢰를 받지 못하고 있지만, 가톨릭은 그 반대의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약 20년 전만 하더라도 가톨릭교인수는 개신교인들에 비하면 약 1/3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러던 것이 지난 2006년에 행한 인구조사를 보면 이미 절반을 훨씬 넘어섰습니다. 가톨릭교인은 많이 늘어났지만, 개신교인수는 약 14만 명이 감소한 결과입니다. 이러한 추세로 나가다보면 다음 번 인구조사 때에는 개신교인수와 가톨릭교인의 수가 역전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현상이 배후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제가 생각하기에는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새로운 번역의 성경을 과감히 교회에서 사용하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 사이의 차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종교 개혁자인 마틴 루터가 교회에 끼친 또 다른 공헌 중의 하나는 그가 성경말씀을 사람들이 쉽게 읽을 수 있는 말씀으로 번역을 했다는 것에 있습니다. 당시에는 성경은 보통 사람들은 읽을 수가 없는 라틴어로만 되어 있었습니다. 단지 성당에 가서 신부들이 하는 강론을 듣는 것이 당시 성도들이 할 수 있는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루터가 바로 성경을 쉬운 말로 번역을 하여서 모든 사람들이 말씀을 향해서 가까이 다가 설 수 있는 기회를 열어 놓은 것이지요. 그는 종교개혁운동을 하는 한편으로 부지런히 성경을 독일 말로 번역을 하였고... 그가 번역한 성경이 아직도 읽혀지기도 하고 많은 주석가들에게 인용되고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루터에게 있어서 진정한 종교개혁인 바로 이것이 아닌가? 오직 신부들이나 지식인들만이 읽을 수 있는 성경 말씀을 모든 사람들이 읽도록 한 것이야말로 개혁 중의 개혁인 것입니다. 

오늘 교회에 오면서... 예전에 읽던 성경이 아니라 새로운 성경을 가지고 나오신 여러분들의 느낌은 어떤 것인가요? 마치 학교에 다닐 때에 새 책을 받은 느낌은 없으셨는지요? 그 때는 참 기분이 좋았습니다. 이제 새 학년 새 학기가 시작되는 구나... 정말 열심히 해야지... 알지 못하는 것으로 가득한 책을 펼쳐보면서 이런 결심을 하고는 했던 시절이 우리에게는 있었습니다. 이제 좀 더 쉽고 익숙한 우리말로 된 성경을 가지고 신앙의 여정을 새롭게 출발하게 되었다는 것!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소중한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조금 더 우리에게 자신을 여시는 것이고... 또한 우리들이 좀 더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서게 되었다는 것... 이것이 바로 새로운 말씀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목적과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지 들고 다니던... 읽던 성경이 달라졌다는 것을 넘어 서서 진정 하나님께 좀 더 가까이 다가가는... 새롭게 읽어지고 깨달아지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들 모두의 삶이 새로워지는 소중한 출발점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말씀과 함께 살아가는 삶의 여정...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1편의 말씀은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이야기하여 주고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이렇게 말씀을 시작하는 데... 그 사람은 우리가 2절에서 읽는 것처럼 ‘오로지 주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밤낮으로 율법을 묵상하는 사람이다...’ 이렇게 풀이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율법이라는 것이 좁게는 십계명 같은 하나님의 계명으로도 읽을 수가 있겠지만, 우리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 전반을 가리키는 것으로 우리는 읽을 수가 있습니다. 결국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말씀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가장 소중한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 주신 것... 우리는 그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구세주이신 나사렛 예수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고 계신지... 그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비록 유한한 시간 속에 많은 제약을 받으며 살고 있지만... 나는 하나님께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우리가 그것을 알게 된 것도 바로 말씀을 통해서입니다. 그런가하면...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살게 된 데에는 나를 보내신 하나님의 소중한 뜻과 목적이 있다는 것도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생각해 본다면...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서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과 더불어 세상을 산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행복한 일인지... 그것을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하지만, 오늘의 말씀은 우리가 이렇게 말씀과 함께 살아가는 일이 행복하기는 해도 쉽지가 않은 것이라는 것도 이야기 해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현실적으로도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말씀 속에 담긴 진리를 깨닫기도 힘들고... 설혹 그것을 알았다고 하더라도 현실적인 생활 가운데서 그것을 몸으로 실천하는 것은 더욱 어렵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며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면에서 오늘 시편의 말씀은 우리가 말씀과 함께 살아가는 일에 있어서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제시하고 있기도 합니다. 간단히 말한다면... 말씀과 함께 살아가는 일은 저절로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적어도 우리가 좀 더 하나님의 말씀에 다가서고 그 말씀이 나를 인도하는 대로 살아가기를 원한다면... 우리가 먼저 버려야 할 것들이 있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1절의 말씀을 보면...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며...’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행복한 사람은 물론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사는 사람인데... 그가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버려야 할 것들... 멀리하고 포기해야 할 것들.... 이러한 것들이 몇 가지가 있음을 성경은 먼저 말한다는 것이지요. 바로 그것이 악인의 꾀를 따른다든지... 죄인의 길에 선다든지,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는다든지 하는 일들입니다. 

생각해보면 이러한 요소들은 우리의 주변에서 얼마든지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에, 조용히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지혜를 기다리기보다는 그저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충고를 받아들이고 거기에 귀를 기울일 때가 참 많지 않습니까? 그런가하면 우리들은 나 자신이 죄악을 일삼는 일을 주도하고 나서지는 못한다고 하여도 그런 주변에서 서성거리다가 누눈가가 자기를 그곳으로 좀 인도하여 주기를 바라는 때도 참 많습니다. 때로 우리는 거룩하시고 존귀하신 하나님께 대한 신비감을 잃어버리고 마치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할 때도 참 많습니다. 

오늘 시편은 우리들에게 적어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그 말씀이 나에게 비추어주는 빛을 따라서.. 그 말씀이 내게 주는 통찰력과 인도하심을 힘입어 살기를 바란다면... 먼저 우리들에게 거기에 합당한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예수가 말씀하셨던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이런 면에서 읽을 수가 있습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뿌려지는 씨는 같은 것인데... 그 씨를 받아들이는 밭의 상태가 어떠한가... 여기에 따라서 결과가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길가라든지 돌밭이라든지... 가시덤불과 같은 마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아직은 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 보다는 다른 일에 더 많은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뿌려졌지만... 열매는 없었습니다. 삶의 변화는 일어나지 못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져서 열매를 맺었는데...’(마태13:8) 오로지 좋은 땅 만이 열매를 맺을 수가 있었습니다. 여기서 좋은 당이란 다름 아닌 준비된 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른 세상에 대한 관심사와 사람들 사이의 관계들을 뒤로 하고... 오로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는 말씀에 자기를 집중하여 들으려 하는 사람들... 그들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자기들이 할 수 없는 삶의 놀라운 변화를 경험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오늘은 우리들 모두에게 참으로 중요한 날이라고 생각합니다. 새롭게 번역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작하는 신앙의 여정이 말씀을 대하는 우리들의 자세와 마음가짐도 새롭게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다른 어떤 세상의 소리나 인간의 충고나 즐거운 자리보다도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내게 들려주시는 음성을 들으려 하는 마음으로 새롭게 믿음의 여정을 시작하는 시간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에게 이렇듯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이 참으로 중요한 것은 그 말씀이 우리들 가운데에 들어 올 때에 삶이 놀랍게 변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이 세상의 눈앞에 좋은 것만을 따라다니기에 급급한 삶의 결말... 그것을 오늘의 말씀은 ‘바람에 흩날리는 쭉정이’(v.4)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나름대로 열심히 인생을 살아가는데... 결국 우리의 삶의 결말이라는 것이 바람에 흩어져 버리면 아무도 찾는 사람이 없는 쭉정이 같은 것이라면... 삶은 얼마나 비참하고 허무한 것입니까? 

이에 비해서 말씀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을 가리켜서 시인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바람에 날아가 버리는 쭉정이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우리는 여기서 보게 됩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가지는 느낌은 어떤 것입니까? 주변에는 항상 메마르지 않는 물길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 나무는 본능적으로 물이 흐르는 곳을 향하여 뿌리가 뻗어 있습니다. 있고... 그러니 아무리 가물어서 항상 생명력을 유지할 수가 있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말씀이 가진 신비함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물론 가까이 하기에 쉽지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 말씀을 향하여 마음을 열고 다가설 때에... 우리는 그 말씀을 통해서 다른 어떤 곳에서도 얻을 수 없는 신비한 생명력을 경험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말하자면 우리를 향하여 흐르는 구원의 샘물입니다. 우리는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만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일단 이러한 은혜를 경험하기만하면 다른 것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은혜의 강물은 세상이 아무리 변하여도 결코 마르는 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의 특징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함 같으니 하는 일마다 잘 될 것이다...’(v.3) 이것이 바로 말씀과 함께 인생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내리시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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