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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를 보내소서 (사 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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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보내소서 (사 6:1~8)

 
오늘 우리 조국 대한민국은 매우 위태로운 상황에 직면한 것 같습니다.
뇌물 수수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던 전직 대통령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 결과 그렇지 않아도 정치,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이 사회가 완전히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한편 북한은 국제 사회가 그토록 반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2차 핵실험을 강행하였습니다. 또한 장거리 미사일 발사 실험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노골적으로 공갈과 협박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조국이 위기 상황에 처했으면 여야를 막론하고 뜻을 모아서 이 상황을 극복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가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특히 정치권은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자신들의 유익만을 구하느라고 날이면 날마다 상대를 비난하고 또 서로 적대시하고 있지 않습니까? 걱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 말씀은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라는 짤막한 시대 배경 소개와 함께 선지자 이사야가 거룩하신 하나님과 만나는 영광스러운 장면을 그리고 있습니다.
웃시야는 십육 세에 왕이 되어 오십이 년 간 유다를 통치한 왕입니다. 그는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자기 뜻대로 나라를 다스리기보다는 주로 선지자 스가랴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였습니다. 

그 때 유다는 정치, 경제적으로 큰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 교만해진 웃시야는 제단에서 분향하는 일을 자기가 직접 하려다가 벌을 받았습니다. 문둥병에 걸리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마침 국내 정세와 맞물려서 주변 나라들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았습니다. 앗수르가 신흥 강국으로 떠오르면서 그 지역에 긴장이 고조되었습니다. 그리고 웃시야가 죽자 국력이 급격히 떨어진 유다는 주변 강국들 틈바구니에서 국가적으로 심각한 위기 상황을 맞게 되었습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라는 말은 바로 이와 같은 절박한 시대 상황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토록 절박한 위기 상황에서 지도자들은 과연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아마도 정치 지도자들은 각기 나름대로 해법을 제시했을 것입니다. 누구는 미리부터 강대국들과 손을 잡고 위기를 극복하자고 했을 것입니다. 또 누구는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국방을 튼튼히 하자고 제안했을 것입니다. 이런저런 제안들이 왜 없었겠습니까? 그렇다면 종교 지도자들은 과연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그 위기 상황에서... 아마도 정치 지도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안타까웠던 것은 대부분의 정치 지도자들과 종교 지도자들이 그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길을 택한 인물이 있었습니다.
바로 선지자 이사야가 그 인물입니다. 그는 당면한 문제의 해결 방안을 얻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문제의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서 먼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이 어떤 것인지 알기 위해서 하나님의 성전으로 나아가 엎드렸습니다. 그는 역사의 현장에서 숨가쁘게 전개되는 모든 상황을 보고 이를 안타까워하며 매우 절박한 심정으로 하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

선지자 이사야가 성전에 엎드려 하나님의 뜻을 구하자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놀랍게도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뵙게 되었습니다. 그 영광의 신비를 체험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습니다. 모시고 선 스랍들이 찬미하는 소리와 화답하는 자의 소리로 말미암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성전에 연기가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이런 표현들은 하나님께서 영이시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다소 무리가 있는 표현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옷을 입으시고 보좌에 앉으시는 것 자체가 성립될 수 없지 않습니까? 우리가 성경이 일점일획도 틀림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해서 이런 표현들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것 같으면 오히려 영이신 하나님을 형상화하는 잘못을 범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일찍이 우리 주님도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비유로 그것을 설명하신 것처럼 선지자 이사야도 자신의 신비 체험을 소개하기에 턱없이 부족한 언어의 무력함을 절실히 느끼면서 다만 조심스럽게 그 모습을 소개하였던 것입니다.

그 영광의 신비를 체험한 선지자 이사야는 뜻밖의 고백을 하게 되었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그의 고백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죄사함의 전제 조건이 되는 회개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독일의 루돌프 오토는 그의 책 '성스러움의 의미'에서 종교를 엄청나고도 매혹적인 신비라고 정의한 바 있습니다. 여기서 신비는 우리의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엄청나다고 하는 것은 그 앞에 서기만 하면 우리도 모르게 갖게 되는 두려움과 떨림을, 매혹적이라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끌리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라는 말에는 하나님과의 만남에 대한 선지자 이사야의 형언할 수 없는 충격과 감동이 담겨 있습니다.

그 후 엄청난 충격에서 가까스로 깨어난 그는 하나님 앞에 비춰진 자신의 모습을 똑바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는 자기 자신과 백성들의 죄를 깨닫게 되었고 바로 그 죄가 모든 문제의 근본 원인이라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진정한 의미의 회개는 바로 여기서 이루어집니다. 여기서 말하는 회개는 단지 알고 있었지만 미루고 있었던 것이나 잊어버리고 살았던 죄에 관한 문제가 아닙니다. 전혀 죄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들, 아니 분명히 옳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들이 바로 죄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의식의 확장을 의미합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자로서 자신이 그 동안 알지 못하면서 다만 입술로만 하나님에 관한 것들을 전하였다는 사실을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빛에 관한 논문을 쓴 소경이 눈을 뜨고 빛을 보았을 때 자신이 쓴 엉터리 글에 대해서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처럼 그는 이렇게 뉘우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와 그 말씀을 듣는 자 모두가 언어의 함정에 빠져서 하나님이라는 단어 속에 하나님을 가둔 채 다만 입술에서 입술로 그것을 옮겼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을 직접 체험하고 그 모든 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바로 그 순간 진정한 의미의 회개가 이루어졌습니다.

선지자 이사야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모든 문제의 원인은 바로 자신의 죄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진정으로 회개하였을 때 참으로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날아와서 그것을 그의 입술에 대며 뭐라고 말했습니까?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내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그의 죄가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는 놀랍게도 진정한 회개의 결과로서 사죄의 은총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과의 사이에 막혔던 장벽이 모두 허물어졌습니다.
사죄의 은총에 뒤따르는 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사귐이요 하나님과의 소통의 회복입니다. 다시 말해서 죄를 용서받은 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 때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지 않았습니까?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여기서 하나님께서 그를 특별히 지목해서 그의 귀에 대고 직접 이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니라 마치 지나가는 말처럼 중얼거리시는 것을 그가 들은 것처럼 되어 있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 하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방식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알려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천군 천사와 함께 오셔서 생생한 음성으로 우리에게 명령하신다면 그 말씀을 따르지 않을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의 삶속에서 나타나시는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포착 가능한 모습으로 나타나시지 않습니다. 그 옛날 선지자 이사야처럼 역사의 현장에서 안타까워하며 하나님을 향해서 처절하게 부르짖는 자, 그래서 하나님을 체험한 후 눈과 귀가 열린 자만이 삶의 현장에서 다양하게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바로 그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자유 시장 경제 논리에 밀려 벼랑 끝으로 내몰린 순박한 농민의 절규 속에서 "내가 누구를 보낼꼬?"라는 탄식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직장에서 쫓겨나 거리로 내몰린 가장의 자조 섞인 한숨 속에서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하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주내게 한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이나 하고 있습니까? 또 주님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서 해외에 수많은 선교사들을 파송하면서도 정작 제 발로 찾아온 새터민이나 조선족, 외국인 근로자나 국제 결혼한 동남아 여성들에게는 전혀 관심조차 보이지 않고 있는 교회들을 향해서 주님은 지금 말씀하십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옛날 선지자 이사야가 그랬던 것처럼 모든 문제를 거룩하신 주님 앞에 가지고 나아가 그 문제의 근본 원인이 바로 우리의 죄 때문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철저히, 또 진정으로 우리의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주님은 과연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실 것입니다. 그 때 비로소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 안타까운 주님의 음성을 듣고 지금 곧 바르게 응답하는 여러분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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