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겔 37:1~14)

  • 잡초 잡초
  • 240
  • 0

첨부 1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얼마 전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은 우리를 비통하게 합니다. 
우리 국민 모두는 지난 한 주간 동안을 참으로 비통한 마음으로 보내야 했습니다. 얼마 전 있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보는 일어나서도 안 되고 일어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나아가 한 사람의 고통과 슬픔이 모든 사람들에게 전염되는 고통이었습니다. 한 시인이 이 과정을 지켜보면서 뼈아픈 말을 던집니다.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일은 결국 희망이 없을 때 하는 것이라고 한다. 아무런 출구도 보이지 않을 때, 삶 자체가 죽음일 때 스스로 목숨을 던진다고 한다. 노 전 대통령이 희망이 없었다면 우리에게 또한 희망이 없었던 것이 아닌가. 노 대통령이 세상을 버릴 정도로 희망이 없었다면 과연 지금 우리에겐 어떤 희망이 있는 것인가.

그동안 우리 사회는 수없이 희망을 이야기해왔다. 아무리 어렵더라도 좌절하지 말고, 오뚝이처럼, 흙을 뚫고 나오는 봄날의 죽순처럼, 단단한 아스팔트의 틈새를 뚫고 피어나는 민들레처럼 희망으로 피어나자고 했다.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은 우리의 희망의 죽음이다. 우리는 지금 희망을 잃었다. 노 대통령을 잃은 것이 아니라 희망을 잃었다. “대통령도 살기 힘들면 죽는데 나 같은 것은 죽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까봐 두렵다.

우리는 많은 불안과 위협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우리 국민들은 이 시대를 함께 살았던 그분의 삶의 모든 여정을 소중히 여기면서도 또 다른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가진 채 그를 애도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같은 시기에 북한의 무모한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도 있었습니다. 북한의 무력시위와 위협이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의 문제와 함께 우리를 절망하게 합니다. 
이것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불어 닥친 경제의 위기가 여전히 우리를 아프게 합니다. 국민 모두가 아직 이 때문에 가슴앓이를 하고 있는 시국이기도 합니다. 거기에 더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은 상대에게 책임을 전가하곤 하는 우리의 현실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미움과 분노의 영을 부추기는 이 시대에 전쟁의 위협과 죽음의 영이 사람들을 휩쓸어 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더 암담한 반응을 하게 마련입니다. 자기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대할 때면, 상대방을 향해서 버럭 큰 소리부터 치고 조롱합니다. 때론 능멸하고 서슴없이 저주를 퍼붓기도 합니다. 사나워져 가고 감정을 스스로 조절할 능력도 상실해 버립니다. 결국 상황의 위기는 사람들의 내면도 파괴하고 황폐하게 하는 악순환을 계속합니다. 이런 사회상은 우리를 참으로 절망하게 합니다. 

점점 이 땅에서도 삶을 포기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늘고 있습니다. 하루 평균 36명, 연간 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자살로 죽어 가고 있습니다.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살려는 본성까지 포기하게 하는 것일까요? 정말 살아야할 이유가 없어질 만큼 우리의 상황이 절망적인가요?

에스겔 선지자도 비통한 현실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2600년 전 에스겔 선지자를 둘러 싼 절망스러운 상황은 오늘날 우리를 둘러싼 것보다 더한 것이었습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어떤 마음으로 이 시대를 보고 계신지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선지자를 한 골짜기로 이끌어가셨습니다. 그가 이끌려간 골짜기에는 마른 뼈와 해골들이 가득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에 이끌려 골짜기를 걸으면서 뼈들이 말라붙어 있는 것을 자세히 보았습니다. 

그 뼈 사이를 걸으면서 에스겔 선지자는 슬펐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 뼈들이 누구의 상태를 말씀하시는 것인지 알았기 때문입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하나님의 비통한 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에스겔아, 이 비통한 마음은 너의 마음이 아니라, 나 하나님의 마음이라. 너 하나의 슬픔이 아니라, 나 하나님의 슬픔이라.” 

에스겔 선지자는 그 순간 자기 민족을 되돌아보았습니다. 자기 민족의 현실이 너무 비참하고 절망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세계 최대의 제국 바벨론에 자기민족의 주권을 잃고 포로로 끌려 다니는 삶을 살고 있는 사실에 눈을 뜨게 됩니다. 나라를 잃은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잊고 자기 마음대로 행하며 서로를 핍박하고 억누르며 살아가는 이스라엘 민족을 봅니다. 성전은 파괴되고, 하나님의 거룩한 성 예루살렘은 엉망진창이 되었어도 부끄러워하거나 회복하려 하지도 않는 현실, 제사장과 귀족과 왕들마저도 적군에게 매 맞고 끌려 다니며 수치를 당하는 현실에 에스겔 선지자는 바라보았습니다. 자기 백성은 도저히 희망이 없는 것 같아보였습니다. 선지자인 자기의 눈에도 회복의 가능성은 ‘제로’인 것만 같았습니다. 

이스라엘의 비극은 서로를 미워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왜 이렇게 절망적인 상황에 이르렀을까요? 왜 이렇게 마른 뼈처럼 죽음과 공허의 자리로 내몰렸을까요? 성경은 이스라엘의 문제점을 두 가지로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들이 땅 위에 피를 쏟았으며 그 우상들로 말미암아 자신들을 더럽혔으므로 내가 분노를 그들 위에 쏟아 그들을 그 행위대로 심판하여 각국에 흩으며 여러 나라에 헤쳤더니” (에스겔 36:18~19)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땅위에 피를 쏟았다고 에스겔 선지자에게 전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잔인한 보복과 사랑 없음이 이스라엘을 망쳐놓았다는 것입니다. 사랑과 긍휼 없이 서로에게 상처를 주며 핑계 삼고 탓하는 마음이 땅을 더럽히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서로를 물어뜯고 상처를 내 피 흘리고 죽기까지 괴롭히는 잔인한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시며 경책하십니다. 

마음속에 미워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것은 곧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 마음에 분노를 품고 있다면, 그것은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받는 증거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시대가 사나워지고 무자비해지며 잔인해지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축복이 아닙니다. 아무리 공의와 정의를 말한다 할지라도 미움과 분노와 잔인함은 결코 하나님의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비극은 우상숭배 때문입니다. 

본문이 기록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또 다른 죄는 우상숭배였습니다. 우상숭배란 하나님이 계셔야할 자리에 다른 것을 두는 일입니다. 나의 마음에 하나님보다 중요하게 다른 것을 붙들어 매는 것입니다. 때로 우상은 나의 생각이나 신념일 수도 있습니다. 알량하기 짝이 없는 나의 판단일 때도 있습니다. 혹은 의로움을 가장한 나의 욕심일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나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고자 하는 얄팍한 자기 사랑의 유혹입니다. 이 모든 마음이 우상숭배입니다. 

우리가 늘 말하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 하나님을 향한 예배란 그런 얄팍한 자기 사랑의 유혹에서 자유함을 얻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리로 나아간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곧 하나님을 향해 ‘처음 사랑’을 간직하고 끊임없이 새롭게 하는 예배입니다. 성경은 이 신앙의 행위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요한계시록 2:2~5)

하나님께서 에베소 교회에게 칭찬과 꾸중을 하십니다. 에베소 교회의 수고와 인내, 가르침과 헌신은 아름답고 잘한 일이라 칭찬하시지만 그들은 중요한 것을 잊고 있다고 꾸중하십니다. 그들은 처음 사랑을 잊었습니다. 수고와 인내, 가르치는 일과 헌신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을 향한 처음 사랑을 잃어버리는 것은 가장 중요한 것이 빠져있는 신앙입니다. 처음 사랑을 잃어버리면 우리의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과도 같습니다. 

처음 사랑이 없으면 종교인이 될 수는 있지만, 결코 신앙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처음 사랑 없이는 우리의 신앙에 형식만 남습니다. 본문이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앙상한 뼈뿐인, 생기 없고 절망적인 상태가 되고 말 것입니다. 예배에 ‘참석할’ 수는 있지만, 진심으로 기뻐하며 예배를 ‘드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기도를 하면서도 무수한 변명과 핑계로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지 못할 것입니다. 끊임없이 수고하고 땀 흘리면서도 자기의 영광을 위한 얄팍한 ‘자기의’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종교가 되면 예수님을 믿는 것이 부담스러워집니다. 신앙인으로서의 삶이 힘들다고 여겨져 무겁습니다. 처음 사랑이 없는 마음으로는 잘한 일은 부끄러운 자기자랑으로 남고, 못한 일은 그보다 더 깊은 수치로 남습니다. 이것은 다른 의미에서는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교만함일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부으신 처음 사랑을 되새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민감하게 반응하시고 우리도 하나님 앞에 겸손하고 정직하게 나아가던 때를 아직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소박하지만 전심을 다한 예배와 그 응답의 감동이 아직 가슴속에 남아 있습니다. 지금보다 열악했지만, 진심으로 헌신하며 하나님 한분만을 높이기 위해 묵묵히 교회를 섬겼던 일이 가슴 벅차게 우리 안에 되살아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메마른 상황 안에서도 다른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에스겔은 절망 가운데서 희망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에게 질문하십니다.
“네가 무얼 보느냐?” 
에스겔 선지자가 대답합니다. 
“마른 뼈를 봅니다. 모든 것이 절망입니다. 모든 상황이 답답합니다. 하나님, 왜 나에게 이 마른 뼈들을 보여주십니까? 왜 내 마음을 슬프게 하십니까? 왜 나를 비통하게 하십니까?”
그때 하나님께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이 마른 뼈들이 이스라엘 백성이다. 이들이 내가 사랑했던 약속의 백성들이다. 그런데 이제는 생명의 가능성도 없고, 썩을 대로 썩어버렸다. 이제는 말라비틀어진 뼈들처럼 아무렇게나 뒹굴어 널려져 있다.”

에스겔 선지자는 이런 현실을 목격하면서 망연자실합니다. 그는 아마 넋이 빠진 것 같습니다. 정말 이 마른 뼈들이 이스라엘일 수 있는 것인지, 하나님께서 정녕 이 백성에게 희망을 두시는 것인지 괴롭습니다. 선택하시고 부르신 자기 백성이 정녕 절망으로 끝나야 하는 것인지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향해서 질문하십니다.
“너는 이 뼈들이 능히 살아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에스겔은 하나님의 질문에 대하여 절망의 골짜기 한 가운데서 믿음의 고백을 합니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그는 보이는 현실이 너무나 답답했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절망합니다. 질문을 받는 순간 에스겔 선지자는 ‘하나님, 나도 모릅니다. 나도 답답합니다.’라고 말하고 싶었을 지도 모릅니다. 이 뼈들이 어떻게 살 수 있겠습니까? 마른 뼈에게서 무슨 가망성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아마도 에스겔은 참담한 심정으로 자기의 민족을 부끄러워하며 말할 수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에스겔은 그 순간 선지자의 눈으로 골짜기를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그의 눈앞에 펼쳐진 절망의 구렁텅이가 어쩌면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공간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일말의 희망이 담긴 말로 대답합니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에스겔은 눈앞의 절망에 굴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일의 가능성은 끝이 없음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주님이 아시지 않습니까? 나는 절망하고 있지만, 주님은 하실 수 있지 않으십니까? 우리는 감히 그런 회복을 꿈꾸거나 원하지도 못하고 주님의 처분만 바라고 있지만, 주님은 이 마른 뼈들로도 당장 무엇이라도 하실 수 있지 않습니까?’

에스겔은 이런 선지자의 마음으로 하나님께 자기 민족을 신원하고 있었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마음을 먼저 깨닫고, 하나님의 말씀을 맡아 선포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런 점에서 에스겔은 절망의 상황 가운데서 희망을 선포할 수 있는 사람이며, 죄악과 나태함 가운데서 회개와 일깨움을 말하는 사람입니다. 에스겔이 절망의 골짜기에서 선포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말씀을 주십니다.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에스겔 37:4)

에스겔은 선지자의 목소리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죽은 자와 같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서, 마른 뼈같이 가능성이 없는 절망의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라고 하십니다. 포로 생활 속에서, 사랑 없고 패역한 죄악 속에서 허덕이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 전하라고 하십니다. 마른 뼈에 살이 붙게 하고, 뼈에 힘줄이 붙게 하고, 가죽과 피부가 붙게 해서 일어나게 하라는 것입니다. 

절망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새롭게 됩니다. 

여러분, 모든 상황이 절망과 미움과 분노일 때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에스겔은 담대하게 이 뼈들을 향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그 순간, 뼈들이 움직이더니 서로 맞물리기 시작합니다. 제자리를 찾아 붙은 뼈들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붙고 피부가 다시 돋아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다시 에스겔에게 말씀하십니다. ‘그 누워있는 사람들을 향해서 생기를 불어넣어라.’

마치 하나님께서 아담을 흙으로 빚으시고 생기를 불어넣어주셨던 것처럼, 말씀을 맡은 선지자 에스겔에게 마른 뼈였던 육체에 생기를 불어넣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선포합니다.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

사방에서 생기들이 불어와 아직 죽어있는 육체에 들어갔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일어나 서서 큰 군대같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헌신할 군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여, 희망을 선포합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현실은 마른 뼈들이 가득한 골짜기와 같아 보입니다. 이 시대는 정녕 소망이 없고, 절망과 낙담으로 가득 찬 시대라고 여겨집니다. 욕심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자기 생명을 끊어버릴 정도로 낙심하는 것이 다반사인 세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선지자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절망의 골짜기에서도 하나님의 회복을 기대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절망의 시대에 생명과 회복과 구원의 영이심을 선포하시기를 소망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들인 우리를 통해서 선포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영입니다. 
하나님은 자유하게 하는 영입니다. 
하나님은 치유하는 영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이 시대를 붙들고 있는 죽음과 미움의 영을 생명과 사랑의 영으로 회복시켜 주옵소서. 먼저 우리가 주님의 생명의 영으로 충만하게 하시고, 절망의 시대에 하나님의 사람들로 세상을 회복시키는 선지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김지철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